조조 팔호기와 오자양장, 원소 하북사정주, 유비 오호상장, 손권 강표십이호신 조조(曹操)에게는 "팔호기(八虎騎)"와 "오자양장(五子良將)"이 있고 원소(袁紹)에게는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가 있으며 유비(劉備)에게는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다. 그렇다면 손권(孫權)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원래 손권에게도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이 있다. 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또는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혹은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은 오에서 활약(活躍)이 뛰어났던 열두 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진수(陳遂)가 지은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에서 비롯한 말로 촉한(蜀漢)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조위(曹魏)의 오자양장(五子良將)과 같..
삼국지 인물사전 - 반장(潘璋) 반장(潘璋, ? ~ 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將帥)로 자는 문규(文珪)이며 연주(兗州) 동군(東郡) 발간현(發干縣) 사람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양선현의 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가 손권을 따랐다. 손권은 그를 기이하게 여겨 아꼈고 그에게 병사를 모집(募集)하도록 하여 백여 명을 얻게 되자 부장으로 삼았다. 산월의 적을 토벌(討伐)하여 공로를 세웠으므로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됐다. 이후에 오군의 큰 저자에서 침입자(侵入者)를 죽이자 이로부터 도적은 단절(斷切)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이름이 났으며 예장군 서안현의 장으로 승진했다. 유표(劉表)가 형주에 있을 때 백성들은 여러 차례 그들의 침략을 당했다. 반장(潘璋)이 일을 맡은 이후부터 침략자들은 ..
삼국지 인물사전 - 서성(徐盛) 서성(徐盛)은 중국 후한 말 ~ 동오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문향(文響)이며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거현(莒縣) 사람이다. 생애 전란(戰亂)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는데 손권(孫權)에게 등용되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된 후 병사 5백을 받고 시상장(柴桑長)으로서 황역(黃射)이 이끄는 수천 군사의 공격(攻擊)을 물리쳤다. 손권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교위(校尉), 무호령(蕪湖令)으로 임명했다. 또 임성 남쪽의 산월을 친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213년 1월 조조(曹操)가 유수구(濡須口)에 쳐들어왔을 때 폭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군을 향해 돌격하여 손권(孫權)의 칭찬을 받았으며 221년 7월 유비(劉備)가 형주를 공격해 왔을 때 육의(陸議)의 지휘를 받으며..
삼국지 인물사전 - 능통(淩統) 능통(淩統, 189년 ~ 237년)은 후한 말, 중국 삼국시대 동오의 장군(將軍)이다. 자는 공적(公績)이다. 능조(淩操)의 아들이며 양주 오군 여항현 사람이다. 일생 아버지 능조(淩操)는 오나라의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2대에 걸쳐 섬겼다. 그런데 203년 능조가 황조(黃祖)를 공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삼국지"에서는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밝히지 않았으나, 위요의 "오서"에는 능조를 죽게 한 것이 감녕(甘寧)이라 했다). 당시 능통(淩統)은 15세였으나 주변 사람들이 능통을 칭찬했고 능조가 국사(國事)를 위해 죽었으므로 손권은 능통을 별부사마에 제수하고 파적도위를 겸임하여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리게 했다. 손권(孫權)이 보둔과 마둔을 공격할 때 따라갔는데..
삼국지 인물사전 - 동습(董襲) 동습(董襲,? ~ 215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원대(元代)이며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사람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원술의 허락을 받고 강동(江東)으로 진격하여 회계에 이르렀을 때 고천정(高遷亭)에서 손책을 맞이했고 손책의 눈에 들어 문하적조(門下賊曹)가 되었다. 손책이 산음(山陰)의 오래된 도둑 황룡라(黃龍羅)와 주발(周勃)을 쳤고 동습(董襲)은 손수 황룡라와 주발을 베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병사 수천 명을 받았다. 동습은 오나라의 장수로 손책과 손권(孫權)을 섬겼으며 황조를 토벌하는 선봉(先鋒)에 섰다. 동습은 회계군 여요현 사람이다. 키는 8척이며 완력(腕力)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다. 동습(董襲)은 지조와 절개가 강개하고 굳세..
삼국지 인물사전 - 주태(周泰) 주태(周泰, ? ~ 229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유평(幼平)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하채현(下蔡縣) 사람이다. 손권(孫權)이 나중에 주태의 공을 치하하며 한 말에 따르면 출신이 한미(寒微)했다. 생애 처음에 장흠(蔣欽)과 함께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다. 손책이 회계태수 왕랑을 무찌르고 회계군을 점유(占有)하면서 별부사마가 되어 병사를 받았다. 손권(孫權)과 주태가 처음 조우했는데 손권이 주태(周泰)의 풍채를 마음에 들어하여 형에게 주태를 달라고 요청(要請)했다. 손책이 육현(六縣)의 반란을 토벌하러 간 차에 주태는 손권과 함께 천 명이 되지 않는 병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을 지키다가 방어 태세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월 수천 명의 갑작..
삼국지 인물사전 - 장흠(蔣欽) 장흠(蔣欽,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공혁(公奕)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수춘현(壽春縣) 사람이다. 생애 흥평(興平) 원년(194년),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에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고 흥평 2년(195년),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할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병사를 받았고 손책의 측근이였던 주태(周泰)와 함께 손책을 따라 단양, 오, 회계 3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예장 공격에도 참가했다. 갈양위(葛陽尉)가 된 뒤로 세 현의 장을 역임(歷任)하여 도둑을 잡았고 서부도위로 승진(昇進)했다. 동야에서 여합(呂合)과 진랑(秦狼) 등이 손씨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토..
삼국지 인물사전 - 육손(陸遜) 육손(陸遜, 183년 ~ 245년 2월)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나라(吳)의 정치가로 자는 백언(伯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이다. 촉한과 위나라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擊退)하여 오나라를 지켜냈으며 여몽(呂蒙)을 도와 관우(關羽)를 사로잡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원한을 갚고자 침공(侵攻)한 유비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로 병법에 능통했고 기계(奇計)를 잘 썼다. 처음에는 유생으로 알려졌지만 웅재(雄才)와 대략(大略)을 품었었다. 편장군(偏將軍), 우도독(右都督)이 되어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육구(陸口)에 둔병하였으며 형주(荊州)를 함락시켜 관우(關羽)를 죽게 한 것은 그의 지모(智謀)에서 나온 것이다. 뒤..
삼국지 인물사전 - 노숙(魯肅)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자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양주(楊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사람이다. 생애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祖母)와 함께 살았다. 집안이 부유(富裕)하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救恤)하고 인재들과 교제(交際)를 쌓아 고을의 환심(歡心)을 샀다. 주유(周瑜)가 거소장(居巢長; 거소현의 현장)일 때 노숙(魯肅)에게 군량을 요청하였고 노숙은 각각 3천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주유에게 아주 내어 주어 이로써 주유와 친교(親交)를 쌓았다. 원술(袁術)이 불러서 동성장(東城長; 동성현의 현장)으로 삼았으나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주유(周瑜) 주유(周瑜, 175년 ~ 210년)는 중국 후한 말(後漢末)의 무장(武將)이며 양주(楊州)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이다. 종조부(從祖父) 주경(周景),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부친 주이(周異) 낙양현령(洛陽 縣令)을 지냈다. 주유(周瑜)는 건장하며 빼어난 자태(姿態)가 있었다. 처음 손견(孫堅)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董託)을 토벌하매 집을 서(舒)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주유는 동년배로 둘의 우의(友誼)는 깊어서 주유가 길가 남쪽의 큰 집을 옮겨다 손책(孫策)에게 주고, 당위에 올라가 손책의 모친에게 절 하였다. 서로 있고 없는 바를 같이 융통(融通)하였다. 생애 청년기 초평 원년(190년)..
삼국지 인물사전 - 손권(孫權) 오태조 대황제 손권(吳太祖 大皇帝 孫權, 182년 음력 5월 18일 ~ 252년 음력 4월 16일)은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나라의 초대 황제로 자는 중모(仲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견(孫堅)의 차남으로 손책(孫策)의 동생이며. 200년에 형 손책이 급사(急死)하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江東)을 다스렸다. 수성(守成)의 명수로 평가되고 있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손견(孫堅)은 갓 태어난 그의 풍모(風貌)를 보고 고귀(高貴)한 위치에 오를 상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초평 3년(192년)에 아버지 손견(孫堅)이 전사하고 원술(袁術)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유비(劉備) 유비(劉備)의 생애 유비(劉備, 161년 음력 6월 7일 ~ 223년 음력 4월 24일)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재위: 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이다. 자는 현덕(玄德)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위가 한나라의 대통(大統, 임금의 계통)을 계승한 정통 국가라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皇帝)로 존칭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불렀다. 진서 열전(晉書列傳)에서 유비의 묘호(廟號)를 열조라고 칭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니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추증(追贈)한 묘호이다. 유주 황건적 평정 이후 그 세력이 한창 상승할 때에는 유예주(劉豫州), 유좌장군(劉左將軍), 의성정후(宜城亭侯)라고도 불렸다. 유비는 어릴 때 돗자리를..
모사 제갈량, 세객 제갈근이 “삼국지연의”에서 미치는 영향과 특수 관계 제가 어려서부터 제일 좋아한 책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고 또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삼국지연의”입니다. 아마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거의 오백 번 이상은 읽은 것 같습니다. 너무 뒤지고 만지다 보니 책은 그만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래서 찢어진 부분을 밥풀로 붙였는데 참 가관(可觀)이었습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는 저의 인생행로(人生行路)에 도움이 되는 양서(良書)라 생각되어 여기서 모사 제갈량과 세객 제갈근이 “삼국지연의”에서 미치는 영향과 특수 관계(特殊關係)에 대해 알아봅니다. 제갈 근(諸葛瑾, 174년 ~ 241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의 정치가로 자는 자유(子瑜)이며 서주 낭야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