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팔호기와 오자양장, 원소 하북사정주, 유비 오호상장, 손권 강표십이호신 조조(曹操)에게는 "팔호기(八虎騎)"와 "오자양장(五子良將)"이 있고 원소(袁紹)에게는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가 있으며 유비(劉備)에게는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다. 그렇다면 손권(孫權)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원래 손권에게도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이 있다. 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또는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혹은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은 오에서 활약(活躍)이 뛰어났던 열두 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진수(陳遂)가 지은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에서 비롯한 말로 촉한(蜀漢)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조위(曹魏)의 오자양장(五子良將)과 같..
삼국지 인물사전 - 동습(董襲) 동습(董襲,? ~ 215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원대(元代)이며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사람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원술의 허락을 받고 강동(江東)으로 진격하여 회계에 이르렀을 때 고천정(高遷亭)에서 손책을 맞이했고 손책의 눈에 들어 문하적조(門下賊曹)가 되었다. 손책이 산음(山陰)의 오래된 도둑 황룡라(黃龍羅)와 주발(周勃)을 쳤고 동습(董襲)은 손수 황룡라와 주발을 베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병사 수천 명을 받았다. 동습은 오나라의 장수로 손책과 손권(孫權)을 섬겼으며 황조를 토벌하는 선봉(先鋒)에 섰다. 동습은 회계군 여요현 사람이다. 키는 8척이며 완력(腕力)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다. 동습(董襲)은 지조와 절개가 강개하고 굳세..
삼국지 인물사전 - 진무(陳武) 진무(陳武, ? ~ 215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자열(子烈)이며 양주 여강군(廬江郡) 송자현(松滋縣) 사람이다. 진수(陳脩)와 진표(陳表)의 아버지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수춘에 있을 시절에 손책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양주 여강군 서현에 살다가 아버지를 장사(葬事)하고 흥평 원년(194년)에 비로소 원술(袁術)을 섬겼으며 또 흥평 원년에 원술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을 동쪽으로 건너 양주자사 유요 등 원술을 따르지 않는 세력(勢力)들을 쳤고 이후 다시 수춘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이때는 194년으로 추측(推測)된다. 손책을 찾아가 스스로 그 가신(家臣)이 되었는데 당시 18세였으며 신장(身長)이 7척 7촌에 달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양쯔강..
삼국지 인물사전 - 황개(黃蓋) 황개(黃蓋)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공복(公覆)이며 영릉군 천릉현 사람이다. 생애 처음에는 영릉군의 군리로 있었다. 이후 자신을 초빙(招聘)하려는 지방관에게 찾아가려고 했으나 난을 일으킨 도적패들에게 막혀서 못가고 있었다. 그 난을 일으킨 무리를 손견(孫堅)이 격파하자 그 때 손견을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이후 손견이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이를 따라갔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따랐다. 당시 산월이 복종하지 않고 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현이 있었으므로 황개(黃蓋)는 그 곳의 수장이 되었다. 석성현에 현리 둘을 임명했는데 부정부패가 심하였으므로 둘을 주살(誅殺)했고 춘곡현장, 심양현령으로 전임되었다. 모두 아홉 현을 지켰는데 가는 곳마다..
삼국지 인물사전 - 하후돈(夏侯惇) 하후돈(夏侯惇, ? ~ 220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원양(元讓)이다. 조조(曹操)의 거병에 참여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 도중 한쪽 눈에 화살이 박히자 그 화살을 뽑아 눈알을 삼켰다는 일화(逸話)로 유명하다. 초한지((楚漢志))에 등장하는 유방(劉邦)의 부하 하후영(夏侯嬰)의 후손이다. 생애 패국(沛國) 초현(譙縣)에서 태어났으며 전한 명장 하후영의 후예로, 조조(曹操)의 신하 하후연의 동고조(同高祖) 팔촌 형이며 조조에게는 이종사촌 동생이 된다. 그러나 일설(一說)에는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의 친조카, 즉 조조의 친가 사촌 형제라는 설도 있다. 조숭의 집안은 본래 하후씨로 환관인 조등의 양자가 되었다. 등용 14살 ..
삼국지 인물사전 - 허저(許褚) 허저(許褚)는 후한 ~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중강(仲康)이며 예주 초국(譙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호치(虎癡)란 별명이 있다. 우월한 완력(腕力)과 우직한 성품으로 조조의 신임(信任)을 받아 그 경호(警護)를 맡았으며 용맹을 떨쳤다. 생애 괴력의 사내 : 후한 말 수천 명으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도적을 방비(防備)했다. 여남군(汝南郡) 갈피(葛陂)의 도적 1만여 명이 쳐들어오니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극한(極限)에 다다를 때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화살이 떨어졌어도 돌을 던지며 저항(抵抗)하니 도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식량마저 동나자 일단 강화(强化)하고 소를 주는 대신 먹을 것을 받기로 했다. 도적(盜賊)이 와서 소를 몰고 가려 했는데 자꾸 도망치는..
삼국지 인물사전 - 손책(孫策) 오 장사환왕 손책(吳 長沙桓王 孫策, 175년 ~ 200년 4월)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이자 오(吳)나라의 추존왕으로 198년 조조에 의해 오후에 봉(封)해졌다. 자는 백부(伯符)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견(孫堅)의 장남이자 오 대제 손권(孫權)의 형이다. 손견 사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도 강동의 호걸들을 불러모아 강동(江東)을 정벌하여 오나라의 기반을 닦아 소패왕이라 불렸으며 198년 조조와 원술(袁術)과의 교전 중 조조를 도와 그의 천거로 토역장군(討逆將軍)의 칭호와 함께 오후(吳侯)의 작위를 받았다. 나중에 손권이 동오의 황제가 되자 장사환왕(長沙桓王)에 추존하였다. 생애 초반 "삼국지" 손파로토역전에 따르면 손견(孫堅)이 처음 의병..
삼국지 인물사전 - 서황(徐晃) 서황(徐晃, ? ~ 227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자(字)는 공명(公明)이며 하동군(河東郡) 양현(楊縣) 사람이다. 서개(徐蓋)의 아버지이며 서패(徐覇)의 조부이다. 생애 처음 이각(李傕)의 부하 양봉(楊奉)을 섬기며 공적을 세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 서황은 양봉에게 헌제(獻帝)를 데리고 낙양(洛陽)으로 돌아갈 것을 진언(進言)하였고 양봉은 서황의 생각에 따라 헌제(獻帝)를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서황은 이 일로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지게 된다. 양봉에게 조조(曹操)에게 귀순할 것을 진언했고 양봉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조조가 허로 천도하자 실망하여 조조와 대립(對立)했다가 본진인 양(梁)의 진영이 함락당해 원술(袁術)에게로 망명했다. ..
삼국지 인물사전 - 우금(于禁) 우금(于禁, ? ~ 221년)은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문칙(文則)이며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거평현(鉅平縣) 사람이다. 위나라 오장군(五將軍)의 한 명이다. 생애 처음에는 포신(鮑信)을 섬겼다. 포신이 전사하자 장군 왕랑(王朗)의 휘하에 있다가 조조(曹操)에게 우금이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된다고 추천(推薦)하여 조조의 부하가 된다. 이후 조조를 수행하여 여포(呂布), 장초(張超)를 공격하여 연주 탈환에 공을 세웠고 황건 잔당인 황소(黃巢), 유벽(劉辟)을 격파했고 진국을 침공한 원술의 교유를 포함한 4명의 장수를 붙잡아 참수하였다. 건안(建安) 2년(197년), 장수(張繡)가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후돈(夏侯惇)(夏侯惇)이 거느린 ..
삼국지 인물사전 - 악진(樂進) 악진(樂進, ? ~ 218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문겸(文謙)이며, 양평(陽平) 위국(衛國) 사람이다. 생애 조조(曺操)를 섬겼다. 담력(膽力)으로써 조조를 따라 장하리(帳下吏)가 되었다. 출신 군으로 보내져 천여 명을 모병(募兵)하여 돌아온 후 군가사마, 함진도위가 되었다. 조조가 여포(呂布), 장초(張超), 교유(橋蕤), 장수, 수고(眭固), 유비(劉備) 등을 공격할 때 항상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므로 광창정후(廣昌亭侯)로 봉해지고 토구교위(討寇校尉)에 임명되었다. 조조가 여포(呂布), 장초(張超), 교유(橋蕤), 장수, 휴고(眭固), 유비(劉備) 등을 공격할 때 항상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므로 광창정후(廣昌亭侯)로 봉해지고 토구교위(討寇校..
삼국지 인물사전 - 장료(張遼) 장료(張遼, 169년? 170년? 171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로 자는 문원(文遠)이며 병주(幷州)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縣) 사람이다. 생애 장료의 선조(先祖)는 전한의 섭일(聶壹)로 섭일이 흉노(匈奴)를 해치려 했던 일 때문에 원수(怨讎)를 피하여 성씨를 고쳤다. 젊어서 군리가 되었으며 병주자사 정원(丁原)이 종사로 삼아 군을 이끌고 수도로 가게 했다. 대장군 하진(何進)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병사 천 명을 모았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에는 하진이 십상시에게 암살(暗殺)당하고 정국이 혼미한 틈을 타 동탁(董卓)이 조정과 중앙군을 장악한 상태여서 장료도 동탁(董卓)에게 속했다. 동탁이 패망한 후 여포(呂布)를 좇..
삼국지 인물사전 - 여포 (呂布) 여포(呂布)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봉선(奉先)이며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사람이다. ‘마중적토 인중여포(馬中赤兎 人中呂布)’라는 말로 표상되듯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천하의 명성(名聲)을 얻었다. 동탁(董卓)의 부하였으나 왕윤(王允)과 공모하고 동탁을 죽여 왕윤 정권의 군사적 중추(中樞)에 있었으며 이각(李傕) · 곽사(郭汜) · 장제(張濟) · 번조(樊稠)와 싸워 져 왕윤 정권을 몰락(沒落)시켰다. 이후 각지를 떠돌다 서주(徐州)를 근거지로 조조(曹操)와 맞섰으나 패망(敗亡)하고 처형되었다. 여포의 생애 힘이 세고 궁마술(弓馬術)에 능숙하여 전한 무제 때의 명장(名將)인 이광(李廣)에 비유되며 비장(飛將)이라 일컬어졌다. 병주자사(幷州刺史..
삼국지 인물사전 - 주유(周瑜) 주유(周瑜, 175년 ~ 210년)는 중국 후한 말(後漢末)의 무장(武將)이며 양주(楊州)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이다. 종조부(從祖父) 주경(周景),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부친 주이(周異) 낙양현령(洛陽 縣令)을 지냈다. 주유(周瑜)는 건장하며 빼어난 자태(姿態)가 있었다. 처음 손견(孫堅)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董託)을 토벌하매 집을 서(舒)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주유는 동년배로 둘의 우의(友誼)는 깊어서 주유가 길가 남쪽의 큰 집을 옮겨다 손책(孫策)에게 주고, 당위에 올라가 손책의 모친에게 절 하였다. 서로 있고 없는 바를 같이 융통(融通)하였다. 생애 청년기 초평 원년(190년)..
삼국지 인물사전 - 조조(曹操)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 음력 6월 3일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위가 건국된 이후 추증(追贈)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卓越)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諸侯)들을 연달아 격파(擊破)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魏)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曹操)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시인 두보(杜甫) 는 나..
삼국지 인물사전 - 유비(劉備) 유비(劉備)의 생애 유비(劉備, 161년 음력 6월 7일 ~ 223년 음력 4월 24일)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재위: 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이다. 자는 현덕(玄德)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위가 한나라의 대통(大統, 임금의 계통)을 계승한 정통 국가라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皇帝)로 존칭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불렀다. 진서 열전(晉書列傳)에서 유비의 묘호(廟號)를 열조라고 칭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니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추증(追贈)한 묘호이다. 유주 황건적 평정 이후 그 세력이 한창 상승할 때에는 유예주(劉豫州), 유좌장군(劉左將軍), 의성정후(宜城亭侯)라고도 불렸다. 유비는 어릴 때 돗자리를..
제갈량과 조조 그리고 적벽대전은 실제 역사적 재현인가? 제갈량이 조조를 미워하게 된 원인은? 193년, 제걀량(諸葛亮)의 나이 12살 때이다. 이때 서주(徐州)의 햇볕은 나른했다. 외지의 각종 할거전쟁(割據戰爭)도 제갈량의 가족에게는 머나먼 일이었다. 다만 총명한 제갈량은 이때 이미 적지 않은 책을 읽었고 사회와 인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생각을 갖추고 있었다. 서주의 담담한 생활은 괜찮은 편이었다. 이 난세(亂世)에 이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제갈량은 조용한 생활가운데 생각이 요동(搖動)쳤다. 어쨌든 그는 태산군(泰山郡), 서주성정도만 볼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해의 어느 날,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그는 중요한 임..
권력 명예 재부를 가진 자들은 왜 여자만 밝히는 호색한인가? 인류는 사회과학을 포함한 과학을 발전시킴에 따라 문명과 문화 또한 발전했는데 그 결과 성관념(性觀念) 또한 체계적으로 변화하였다. 그중 가장 특기할 만한 주의사항은 바로 함부로 이성에게 손대지 않는 것이다. 단순한 귀축(鬼畜)이나 색마(色魔)와는 이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호색한(好色漢)은 성희롱과 섹스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다. 그 예로 정종(定宗)은 특이하게도 본부인인 정안왕후(定安王后)와는 자식이 없었지만 후궁들 사이에서 엄청난 자식을 보아 조선조에서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왕이 되었다. 그러나 후궁 수와는 별개로 정비 정안왕후와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 호색한(好色漢)이지만 본처에게도 충실한 인물이었다. 태종(太宗)은..
모사 제갈량, 세객 제갈근이 “삼국지연의”에서 미치는 영향과 특수 관계 제가 어려서부터 제일 좋아한 책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고 또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삼국지연의”입니다. 아마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거의 오백 번 이상은 읽은 것 같습니다. 너무 뒤지고 만지다 보니 책은 그만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래서 찢어진 부분을 밥풀로 붙였는데 참 가관(可觀)이었습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는 저의 인생행로(人生行路)에 도움이 되는 양서(良書)라 생각되어 여기서 모사 제갈량과 세객 제갈근이 “삼국지연의”에서 미치는 영향과 특수 관계(特殊關係)에 대해 알아봅니다. 제갈 근(諸葛瑾, 174년 ~ 241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의 정치가로 자는 자유(子瑜)이며 서주 낭야국 ..
사람과 관련(關聯)된 한자 어원(語源)과 그 의미 아들 자(子): 조그마한 아기가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 | 아들 자(子) | 여자 녀(女) | 늙을 로(老/耂) 아들 자(子)자는 조그마한 아기가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模襲)을 본떠 만든 글자입니다. 아들이란 뜻을 가졌지만, 원래는 남자든 여자든 상관(相關)없이 아기나 아이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아들 자(子)자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使用)됩니다. 자녀(子女), 자손(子孫)에서는 아들, 자식(子息)은 아들과 딸, 남자(男子), 여자(女子)에서는 사람, 공자(孔子), 맹자(孟子)에서는 스승을 의미(意味)합니다. 분자(分子), 원자(原子), 소립자(素粒子), 입자(粒子) 등에서는 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接尾語)로 사용됩니다. [사진] 십이지수(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