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팔호기와 오자양장, 원소 하북사정주, 유비 오호상장, 손권 강표십이호신 조조(曹操)에게는 "팔호기(八虎騎)"와 "오자양장(五子良將)"이 있고 원소(袁紹)에게는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가 있으며 유비(劉備)에게는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다. 그렇다면 손권(孫權)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원래 손권에게도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이 있다. 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또는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혹은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은 오에서 활약(活躍)이 뛰어났던 열두 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진수(陳遂)가 지은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에서 비롯한 말로 촉한(蜀漢)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조위(曹魏)의 오자양장(五子良將)과 같..
삼국지 인물사전 - 장흠(蔣欽) 장흠(蔣欽,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공혁(公奕)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수춘현(壽春縣) 사람이다. 생애 흥평(興平) 원년(194년),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에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고 흥평 2년(195년),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할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병사를 받았고 손책의 측근이였던 주태(周泰)와 함께 손책을 따라 단양, 오, 회계 3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예장 공격에도 참가했다. 갈양위(葛陽尉)가 된 뒤로 세 현의 장을 역임(歷任)하여 도둑을 잡았고 서부도위로 승진(昇進)했다. 동야에서 여합(呂合)과 진랑(秦狼) 등이 손씨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토..
삼국지 인물사전 - 허저(許褚) 허저(許褚)는 후한 ~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중강(仲康)이며 예주 초국(譙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호치(虎癡)란 별명이 있다. 우월한 완력(腕力)과 우직한 성품으로 조조의 신임(信任)을 받아 그 경호(警護)를 맡았으며 용맹을 떨쳤다. 생애 괴력의 사내 : 후한 말 수천 명으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도적을 방비(防備)했다. 여남군(汝南郡) 갈피(葛陂)의 도적 1만여 명이 쳐들어오니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극한(極限)에 다다를 때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화살이 떨어졌어도 돌을 던지며 저항(抵抗)하니 도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식량마저 동나자 일단 강화(强化)하고 소를 주는 대신 먹을 것을 받기로 했다. 도적(盜賊)이 와서 소를 몰고 가려 했는데 자꾸 도망치는..
삼국지 인물사전 - 조운(趙雲) 조운(趙雲, ? ~ 229년 11월)은 중국 후한 말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자는 자룡(子龍)이며 기주(冀州) 상산군(常山郡) 진정현(眞定縣) 사람이다. 생애 초반 조운은 처음에 원소(袁紹)에게 졸백(卒伯-병졸의 우두머리)으로 임관하였으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看破)하여 공손찬(公孫瓚) 아래로 들어갔다. 소설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창술(槍術)의 명수로 등장(登場)하며 처음에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스스로 공손찬 밑으로 달려가고 문추(文醜)를 상대하여 공손찬(公孫瓚)을 궁지에서 구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유비와의 만남 그 무렵 유비(劉備) 또한 공손찬(公孫瓚)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공손찬이..
삼국지 인물사전 - 황충(黃忠) 황충(黃忠, ? ~ 220년)은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한승(漢升)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람이다. 생애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가 그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삼아 유반(劉磐)과 함께 유현(攸縣)을 수비하게 했다. 조조(曹操)가 형주를 점령하자 임시로 비장군(裨將軍) 직을 대행하게 하니 예전 임무에 종사(從事)하며 장사태수(長沙太守) 한현(韓玄)에 속하게 되었다. 유비(劉備)가 남쪽으로 여러 군(郡)을 평정하자 황충(黃忠)이 마침내 몸을 맡기기로 하고는 그를 수행해 촉(蜀)으로 들어갔다. 가맹(葭萌)에서 임무를 받아 군대를 돌려 유장(劉璋)을 공격하니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올라 함락(陷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익주(益..
삼국지 인물사전 - 마초(馬超) 마초(馬超, 175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벌(軍閥)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는 맹기(孟起)이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황충(黃忠), 조운(趙雲)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렸다. 생애 마초는 192년(초평 3년) 마등과 한수(韓遂)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진입하자 한 왕조는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임명해 금성으로 귀환(歸還)시키고 마등을 정서장군에 임명해 미에 주둔시킨다. 192년 한수(韓遂,와 마등(馬騰)이 서로 불화해지자 군을 이끌고 대립(對立)하였다. 이때 마초와 염행(閻行)이 1대1로 붙어 마초가 크게 패하고 죽기직전까지 패하였다. 사례교위 종요(鍾繇)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복종하는 ..
삼국지 인물사전 - 장비(張飛) 장비(張飛, 165년 ~ 221년 6월)는 후한 말 ~ 촉한의 군인으로, 자는 익덕(益德)이며 유주(幽州) 탁군(涿郡) 사람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와 함께 황건적(黃巾賊)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기지를 발휘해서 조조(曹操)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정벌 시 엄안(嚴顔)을 회유하여 파촉정벌(巴蜀征伐)에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태수(巴西太守)의 자리에 올랐고 한중정벌 당시 위나라의 장합(張郃)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復讎)를 위해 출정을 준비하던 도중 휘하 무장 범강(范疆)과 장달(張達)에게 암살당했다. 장남 장포(張苞)가 장비보다 (약간) 일찍 요절(夭折)하여 차남인 장소(張紹)가 가계를 이었다. 장비의 장녀와 차녀..
삼국지 인물사전 - 관우(關羽) 관우(關羽, 162년? ~ 219년 음력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본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동생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蜀漢)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忠誠心)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將帥)로 손꼽히며 한대(漢代) 이후로 남송(南宋)의 악비(岳飛)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사서(中國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 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民譚)이나 민간전승(民間傳承), ..
삼국지 인물사전 - 여포 (呂布) 여포(呂布)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봉선(奉先)이며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사람이다. ‘마중적토 인중여포(馬中赤兎 人中呂布)’라는 말로 표상되듯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천하의 명성(名聲)을 얻었다. 동탁(董卓)의 부하였으나 왕윤(王允)과 공모하고 동탁을 죽여 왕윤 정권의 군사적 중추(中樞)에 있었으며 이각(李傕) · 곽사(郭汜) · 장제(張濟) · 번조(樊稠)와 싸워 져 왕윤 정권을 몰락(沒落)시켰다. 이후 각지를 떠돌다 서주(徐州)를 근거지로 조조(曹操)와 맞섰으나 패망(敗亡)하고 처형되었다. 여포의 생애 힘이 세고 궁마술(弓馬術)에 능숙하여 전한 무제 때의 명장(名將)인 이광(李廣)에 비유되며 비장(飛將)이라 일컬어졌다. 병주자사(幷州刺史..
삼국지 인물사전 - 육손(陸遜) 육손(陸遜, 183년 ~ 245년 2월)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나라(吳)의 정치가로 자는 백언(伯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이다. 촉한과 위나라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擊退)하여 오나라를 지켜냈으며 여몽(呂蒙)을 도와 관우(關羽)를 사로잡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원한을 갚고자 침공(侵攻)한 유비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로 병법에 능통했고 기계(奇計)를 잘 썼다. 처음에는 유생으로 알려졌지만 웅재(雄才)와 대략(大略)을 품었었다. 편장군(偏將軍), 우도독(右都督)이 되어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육구(陸口)에 둔병하였으며 형주(荊州)를 함락시켜 관우(關羽)를 죽게 한 것은 그의 지모(智謀)에서 나온 것이다. 뒤..
삼국지 인물사전 - 노숙(魯肅)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자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양주(楊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사람이다. 생애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祖母)와 함께 살았다. 집안이 부유(富裕)하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救恤)하고 인재들과 교제(交際)를 쌓아 고을의 환심(歡心)을 샀다. 주유(周瑜)가 거소장(居巢長; 거소현의 현장)일 때 노숙(魯肅)에게 군량을 요청하였고 노숙은 각각 3천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주유에게 아주 내어 주어 이로써 주유와 친교(親交)를 쌓았다. 원술(袁術)이 불러서 동성장(東城長; 동성현의 현장)으로 삼았으나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손권(孫權) 오태조 대황제 손권(吳太祖 大皇帝 孫權, 182년 음력 5월 18일 ~ 252년 음력 4월 16일)은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나라의 초대 황제로 자는 중모(仲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견(孫堅)의 차남으로 손책(孫策)의 동생이며. 200년에 형 손책이 급사(急死)하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江東)을 다스렸다. 수성(守成)의 명수로 평가되고 있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손견(孫堅)은 갓 태어난 그의 풍모(風貌)를 보고 고귀(高貴)한 위치에 오를 상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초평 3년(192년)에 아버지 손견(孫堅)이 전사하고 원술(袁術)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유비(劉備) 유비(劉備)의 생애 유비(劉備, 161년 음력 6월 7일 ~ 223년 음력 4월 24일)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재위: 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이다. 자는 현덕(玄德)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위가 한나라의 대통(大統, 임금의 계통)을 계승한 정통 국가라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皇帝)로 존칭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불렀다. 진서 열전(晉書列傳)에서 유비의 묘호(廟號)를 열조라고 칭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니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추증(追贈)한 묘호이다. 유주 황건적 평정 이후 그 세력이 한창 상승할 때에는 유예주(劉豫州), 유좌장군(劉左將軍), 의성정후(宜城亭侯)라고도 불렸다. 유비는 어릴 때 돗자리를..
제갈량이 유비에게 추천한 군사후계자에 대한 엉터리계책 서서(徐庶)는 언제 제갈량(諸葛亮)을 유비(劉備)에게 추천하였는가? 제갈량(諸葛亮)이 출도하기 전에 유비에 관한 멋진 장면은 당연히 서서가 조조군을 격파(擊破)한 것이다. 명사 서서는 선복(單福)이라는 가명으로 스스로 유비(劉備)를 찾아온다. 그리고 유비의 군사참모(軍事參謀)가 되어 조조군에 두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조조(曹操)가 그를 주목하게 되고 서서의 진실한 신분을 알아내고 나서 서서의 모친을 인질(人質)로 잡아 서서를 조조군영으로 오도록 만든다. 유비(劉備)는 겨우 쓸 만한 모사(謀士)를 한명 구했는데 부득이 조조군영으로 보내야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안타까운 심경(心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보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서서(徐庶)가..
방통과 제갈량은 똑같은 명성을 가졌지만 삼국지는 왜 방통을 저평가했는가? 형주(荊州)의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제갈량과 방통 중 누가 정확했을까? 제갈량(諸葛亮)의 융중대(隆中對)에서는 형주(荊州)에 대하여 "북거한면(北據漢沔), 이진남해(利盡南海)"라고 하면서 그 땅의 주인인 유표(劉表)는 지킬 능력이 없어 하늘이 유비(劉備)에게 준 자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방통(龐統)은 이렇게 말한다. "형주황잔(荊州荒殘)" 이미 이곳을 차지한다고 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만들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누군가 이를 근거로 방통(龐統)이 형주를 더욱 정확하게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형주는 도대체 부유(富裕)한 땅인가 아니면 황량한 땅인가? 혹은 방통과 제갈량 중 누구의 말이 더 맞았을까? 한 사람이 한 말이 정확한지..
제갈량과 조조 그리고 적벽대전은 실제 역사적 재현인가? 제갈량이 조조를 미워하게 된 원인은? 193년, 제걀량(諸葛亮)의 나이 12살 때이다. 이때 서주(徐州)의 햇볕은 나른했다. 외지의 각종 할거전쟁(割據戰爭)도 제갈량의 가족에게는 머나먼 일이었다. 다만 총명한 제갈량은 이때 이미 적지 않은 책을 읽었고 사회와 인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생각을 갖추고 있었다. 서주의 담담한 생활은 괜찮은 편이었다. 이 난세(亂世)에 이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제갈량은 조용한 생활가운데 생각이 요동(搖動)쳤다. 어쨌든 그는 태산군(泰山郡), 서주성정도만 볼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해의 어느 날,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그는 중요한 임..
중국 사대기서 중 하나인 고전소설 '삼국지연의' 역사배경 분석 (4) 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따르면 대략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 전쟁 막바지였던 무술년(戊戌年)에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인 진린(陳璘)이 조선수군 수영에 온 뒤 이순신(李舜臣)의 인품에 감화된 일화(逸話) 중 하나가 전해진다. 어느 날 진린이 천문(天文)을 봐서 장군성이 흔들리니 이를 이순신 장군의 별이 흔들리는 봐 다가올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크게 다치거나 전사할 위험에 대한 조짐이니 이순신에게 제갈무후(諸葛武侯)의 고사를 들며 이순신에게도 기도(祈禱)를 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본인의 능력과 업적(業績)은 무후만도 못할진대 어찌 감히 무후처럼 기도를 올리겠냐며 정중히 사양(辭讓)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를 ..
모사 제갈량, 세객 제갈근이 “삼국지연의”에서 미치는 영향과 특수 관계 제가 어려서부터 제일 좋아한 책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고 또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삼국지연의”입니다. 아마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거의 오백 번 이상은 읽은 것 같습니다. 너무 뒤지고 만지다 보니 책은 그만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래서 찢어진 부분을 밥풀로 붙였는데 참 가관(可觀)이었습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는 저의 인생행로(人生行路)에 도움이 되는 양서(良書)라 생각되어 여기서 모사 제갈량과 세객 제갈근이 “삼국지연의”에서 미치는 영향과 특수 관계(特殊關係)에 대해 알아봅니다. 제갈 근(諸葛瑾, 174년 ~ 241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의 정치가로 자는 자유(子瑜)이며 서주 낭야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