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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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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이름이 성공이나 출세의 운명을 바꿔줄 수 있는 동아줄인가

图片信息 《登崖州城作》是唐代名相李德裕所创作的一首七言绝句.

이름이란 한 개인(個人)을 부를 때 사용합니다. 이름이란 명칭(名稱)의 기원은 12세기 이전으로 추정(推定)됩니다.

아기가 출생하면 곧 이름을 지어 부르는데 이것은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공통적인 풍습(風習)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짓는 구체적(具體的)인 풍습은 나라와 민족에 따라 그리고 역사적 시대와 시기에 따라 다릅니다. 원래 우리 조상(祖上)들은 고유한 우리말로 된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우리나라에 유교사상(儒敎思想)이 전파되고 지배계급이 사대주의사상(事大主義思想)에 물젖게 되면서 관청이름, 벼슬이름, 고장이름 등과 함께 사람의 이름도 한자말로 지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실례로 신라사람 이사부를 태종(苔 이끼, 宗 마루)으로, 거칠부를 황종(荒 거칠, 宗 마루)으로, 모말을 제상(堤 방축, 上 윗)으로, 소나를 금천(金 쇠, 川 내)으로 표기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고유한 우리말로 된 이름을 한자로 표기(表記)한 것인데 그것이 본명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정식이름은 기본이름이라는 뜻에서 본명(本名)이라고 하는데 봉건시기에는 소년시절이 끝나고 어른이 되는 관례(冠禮)를 치르는 것을 계기로 짓게 된 데로부터 관명(冠名)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처음에 지배계급(支配階級) 속에서 보급된 한자말로 된 이름은 점차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본명 외에 아명(兒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명이란 아이가 출생하자 처음으로 지어주는 이름으로서 거기에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기대의 뜻이 많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명(兒名)을 사랑스러운 이름이라는 뜻에서 애명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역사기록들에서는 흔히 소자(小字) 또는 소명(小名)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명은 아이가 출생(出生)하자 곧 지어 주었는데 보통 사흘부터 초이레 즉 7일안으로 지어주는 것이 보편적인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리 남자이름과 여자이름을 지어두었다가 출생한 아기의 성별(性別)에 따라 이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간혹 나쁜 아명(兒名)을 달아주는 수도 있었는데 이것은 흔히 어린이에게 나쁜 것이 달라붙지 말라는 뜻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어린이양육을 과학적(科學的)으로 할 수 없었던 봉건사회에서 어린이의 사망률(死亡率)이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계(五戒)와의 접촉에서 연약한 어린이는 병에 걸리면 살려내기가 힘들었습니다. 부모들은 어린이를 나쁜 병으로부터 보호(保護)하기 위한 방책으로 어린이에게 나쁜 아명을 붙여주어 ‘귀신’이 달라붙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비과학적(非科學的)인 노릇이나 어린이를 건강하게 키우려는 부모들의 소박(素朴)한 심정이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지배계급은 이름(본명), 아명 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18세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옛날에는 아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갓 나서 지은 뒤에는 아름답거나 나쁘거나 그대로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그 사람을 이롭게 하지 못함을 안다면 나쁜 이름이 그 사람을 해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뒷날에 와서는 반드시 정식이름을 따로 짓고 또 반드시 덕행(德行)을 표시하는 자(字)를 지으니 이만해도 벌써 다 갖추어졌는데 벼슬한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시호(諡號)를 짓고 근세에 와서는 또 이른바 별호(別號)라는 것이 있어서 남이 지어주기도 하거니와 스스로 짓는 것도 허다합니다.

스승을 존경(尊敬)하여 스승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면 고장이름을 붙여서 부르면 아름답고 나쁜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자체로 호(號)를 짓는 자가 그것으로써 품성을 수양(修養)하는 뜻을 표시한다면 그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성(誠 정성), 명(明 밝을), 홍(弘 클), 대(大 큰)와 같은 아름답고 훌륭한 호칭(呼稱)까지도 마음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는 것은 과연 무슨 심사인가?”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사람이 본명(本名), 아명(兒名), 자(字), 별호(別號)와 같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중 자(字)는 아명(兒名)으로 불리던 소년시절이 끝나고 어른이 되는 관례(冠禮)를 하는 계기에 지어주게 되어있었습니다. 관례를 계기로 본명(本名)과 함께 ‘자’라는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된 것은 어른이 지어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삼가야 했던 데로부터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본명이외에 자를 지어 쓰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였습니다. 그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7세기사람 김인문(金仁問)이 인수(仁壽)라는 자를 가지고 있은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자를 지어 부르는 생활관습은 그 후 우리나라 봉건사회(封建社會)의 전 기간에는 물론 근세까지도 존속(存續)되었습니다. 통일신라의 설총(薛聰)의 자는 총지(聰智)였고 김양(金陽)의 자는 위흔(魏昕), 그리고 9세기에 세운 전라남도 곡성(谷城) 대안사(大安寺)의 적선탑비(積善塔碑)에는 선사(禪師)의 자를 체공이라 하였고 9세기에 세운 충주(忠州) 월광사(月光寺)의 낭원선사탑비(圓朗禪師塔碑)에도 선사의 자를 대융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통일신라(統一新羅)에서 불교 중들을 포함한 상류지배계급(上流支配階級)들 속에서 자를 지어 부르는 생활관습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봉건사회 양반지배계급들 속에서는 호 또는 별호(別號)라 하여 본명(관명)이나 자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생활관습(生活慣習)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호(號)를 짓기 시작한 것은 자를 지어 쓰기 시작한 삼국시대로 추정(推定)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통일신라 때 사람 성각이 호를 스스로 거사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기재(記載)되었습니다. 호는 그 후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근세까지도 널리 보편화(普遍化)되었습니다. 호는 문필활동을 하던 사대부들 속에서 널리 일반화(一般化)되었으나 글에 조예가 깊은 무인(武人)들도 호를 지어 부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별호는 자기 스스로 짓기도 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지어주기도 하였는데 그의 생활과 인연이 깊은 고장이름이나 그와 관련된 고사(故事)나 사실에 기초하거나 자기의 정신수양(精神修養)이나 희망을 염원하는 글자를 따서 지었습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실례로 16세기의 철학가 서경덕(徐敬德)의 호 화담(花潭)과 18세기 말~19세기 초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호 연암(燕巖), 16세기의 명필 양사언(楊士彦)의 호 봉래(蓬萊)를 들 수 있습니다.

그중 양사언(楊士彦)의 호(號)는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 것인데 봉래산은 여름의 금강산(金剛山)을 말합니다. 천하명승(天下名勝) 금강산은 사계절마다 달리 불리었는데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양사언은 우리나라 명산가운데서도 금강산(金剛山)을 가장 사랑하였고 말년에는 금강산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며 자기의 호를 봉래(蓬萊) 라고 하였습니다.

호는 대체로 두 글자로 되어있는데 아래글자는 산과 강을 비롯한 자연지물(自然之物)과 서재를 비롯한 건물 등을 나타내는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름난 관료, 학자, 문인, 서예가, 화가들의 호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송강(江) 정철, 양촌(村) 권근, 율곡(谷) 이이, 서포(逋) 김만중, 퇴계(溪) 이황, 담헌(軒) 홍대용, 완당(當) 김정희, 농암(巖) 김창협, 백사(沙) 이항복, 면암(巖) 최익현, 석봉(峯) 한호, 의암(菴) 유린석, 다산(山) 정약용, 포은(隱) 정몽주, 초정(政) 박제가, 서애(厓) 유성룡, 오주(洲) 이규경, 단원(園) 김홍도, 단재(齋) 신채호, 명월(月) 황진이, 약천(泉) 남구만

호에는 3자 또는 4자로 된 것도 있으며 지어 5자로 된 것도 있습니다. 매월당-김시습, 사임당-신씨, 남명루-최한기, 연려실-이긍익, 고산자-김정호, 쌍명재-이인로, 난설헌-허씨(초희), 동안거사-이승휴, 백운거사-이규보, 효창노인-심봉원, 석간매하옹-조은흘

이러한 호는 저서, 편지, 비문, 묘지명(墓誌銘) 등에 많이 썼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학자, 관료, 문인, 서예가, 화가들 가운데는 정식이름인 본명보다도 호가 더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실례로서 호가 국내는 물론 이웃나라들에까지 널리 알려진 이퇴계, 이율곡, 정다산(또는 여유당), 박연암 등과 조선시대의 3대 명필인 양봉래, 한석봉, 김추사 그리고 명화가들인 현동자(안견)와 단원(김홍도), 혜원(신윤복)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본명(本名)보다도 호가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중요하게는 ‘율곡전서’, ‘퇴계집’, ‘여유당전서’, ‘연암집’과 같은 그들이 쓴 책들과 글씨, 그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과 관련(關聯)되어 있습니다.

자와 호는 한사람에게 반드시 하나씩만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한사람이 자와 호를 여러 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박제가(朴齊家)는 재선(在先 이외에도 차수(次修), 수기(修其라는 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김시습(金時習)은 매월당(梅月堂) 이외에도 동봉(東峯), 청한자(淸寒子), 오세라는 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정희(金正喜)도 추사(秋史) 이외에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보담재(寶覃齋), 담연재(覃硏齋),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과 같은 여러 개의 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백성들은 자, 호 같은 것을 짓거나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의 이름 짓는 풍습에서 중요한 것은 성과 이름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되 성(姓)을 먼저 부르고 그 뒤에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성은 아버지의 핏줄기를 따른 것으로서 아들들은 물론 딸들도 언제나 아버지의 성을 따랐습니다. 성에는 황보(皇甫), 남궁(南宮), 선우(鮮于), 독고(獨孤) 등과 같은 두 글자로 된 복성(複姓)도 있으나 김(金), 이(李), 박(朴)과 같은 하나의 글자로 된 단성이 대부분입니다.

성과는 달리 이름은 하나의 글자로 된 외자이름도 있으나 그 대부분이 두자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 사람들은 이름 두 글자와 성 한 글자를 합하여 ‘이름석자’라고 합니다.

이름석자는 모두 일정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아버지의 핏줄기를 따른 것이고 이름 두 글자 중에서 한 글자는 돌림자입니다. 돌림자는 문중안의 항렬(行列)을 나타내고 나머지 한 글자만이 그 자신에게 고유(固有)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목화씨를 구해온 문익점(文益漸)에게는 중용, 중성, 중실, 중진, 중계라는 이름을 가진 다섯 아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에서 중(中 가운데)은 형제들의 돌림글자로 항렬을 표시(標示)한 것입니다. 오직 용, 성, 실, 진, 계만이 다섯 아들 각자를 표시하는 글자였습니다.

두 글자로 된 이름의 돌림자는 아버지 대에서는 첫 글자로 하고 아들 대에서는 둘째 글자로 하였으며 손자 대에 가서는 다시 첫 글자로 하는 식으로 정(定)하였습니다. 이러한 돌림자를 먼 친척까지 모두 쓰게 하기 위하여 돌림자를 미리 족보(族譜)에 정해놓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먼 친척(親戚)이라도 서로 만나서 통성(通姓)하면 형제벌인가 아저씨 조카사이인가 하는 것을 제꺽 분간(分揀)할 수 있었습니다.

이름 짓는 풍습에서 항렬(行列)을 나타내는 돌림자는 남자들에게만 썼고 여자들의 이름에는 돌림자가 없었습니다. 봉건사회에서 여자들은 출생하면서 지은 아명 하나만으로 한생을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관명(冠名)이나 자, 호를 따로 짓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황진이(黃眞伊)와 허란설헌(許蘭雪軒), 신사임당(申師任堂)과 같은 이름난 여인들이 자나 호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것은 특이한 실례(實例)였습니다.

봉건사회에서는 여성들이 혼인(婚姻)을 하고 시집을 가면 이름을 부르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시집에서는 성씨를 따서 김씨, 이씨, 박씨 등으로 부르거나 택호(宅號)라 하여 친정집의 고장이름을 따서 평양집, 안주집, 수원댁 등으로 불렀습니다. 심지어 친정에서까지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사위의 성씨를 따서 ‘김집’, ‘박집’이라 하거나 아이의 이름을 붙여서 ‘○○엄마’, ‘○○어미’ 등으로 불렀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이름 짓는 대표적인 관습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남자들은 건강과 장수, 행복과 총명 등을 염원(念願)하여 만수, 만복, 장수, 복동, 명철, 바위, 돌쇠, 억쇠 등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여자들은 아름다움과 정절(貞節), 순정 등을 상징하여 꽃분이, 이뿐이, 분이, 정숙, 길순, 순녀, 은실 등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출생(出生)한 해와 난 달을 반영(反映)하여 남자들은 갑돌 · 구월쇠 등으로, 여자들은 갑순 · 정월 · 시월녀 등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또한 딸만 있는 경우 딸은 그만 낳고 아들을 낳을 것을 염원(念願)하여 후남, 복동, 필녀, 딸막이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름 짓기에서 일반백성(一般百姓)들은 일찍부터 고유한 우리말로 자식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것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봉건사회에서 고유한 우리말로 지은 이름이 양반사대부(兩班士大夫)들에 의해서 아명으로 천시(賤視)되고 속된 것으로 비난(非難)받기까지 하였으나 백성들은 어린이들에게 이쁜이, 별이, 곰손이, 삼손이 등과 같이 우리말로 부르기 쉽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고유한 말을 사랑하며 어린이들의 이름을 보다 정답고 아름답게 지으려는 데서 나온 좋은 풍습(風習)의 하나였습니다.

“이름 속에 뭐가 들어있죠?” 전 세계를 둘러보면 작명(作名)에 대한 전통은 ‘예법과 관습’을 통째로 할애(割愛)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많습니다. 이집트의 전통의식(傳統意識)에서부터 중국의 ‘만월(满月)’ 잔치까지 아기의 이름을 짓기 위해 새로운 부모와 가족(家族)들이 함께 모여서 신중(愼重)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름이 아기가 세상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표시하는 중요한 방법(方法)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름의 중요성과 관련한 풍습은 문화권(文化圈)마다 다릅니다. 미국 원주민인 나바호(Navajo) 부족(部族)과 같이 어떤 사회에서는 이름을 아주 소중하고 강력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중에 누군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이 금기시(禁忌視)되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아기는 ‘유아명(乳兒名)’을 따로 갖고 있습니다. 이는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서 진짜 이름을 얻을 때까지 악령(惡靈)과 불행을 쫓아내기 위한 수단(手段)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도(印度)의 아이들은 집안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이 부르는 ‘가족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좀 더 품위(品位) 있고 예의를 갖춘 이름은 학교나 집밖에서 생활할 때에만 사용합니다.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한 관습(慣習) 역시 다양합니다. 스페인(西班牙)에서는 오늘날에도 이름을 짓는 규칙(規則)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첫 딸에겐 아버지의 어머니 즉 할머니의 이름을 붙이고 첫 아들에겐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이는 식(式)입니다. 프랑스(法國)에선 양쪽 할머니의 이름을 딸의 가운데 이름으로 하고, 양쪽 할아버지의 이름은 아들의 가운데 이름으로 합니다.

종교적(宗敎的)인 전통 또한 이름의 선택에 강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합니다. 미국의 청교도(淸敎徒)들은 미덕을 나타내기 위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즉, 자비라는 뜻의 ‘Mercy’, 명예라는 뜻의 ‘Honor’, 그리고 신중함이라는 뜻의 ‘Prudence’같은 이름이 그것인데, 흥미(興味)로운 사실은 이 이름이 모두 여자 아이들을 위한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犹太人)은 종종 죽은 친척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친척(親戚)의 이름을 따서 짓지는 않았습니다. 이와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세파르디(Sefardi) 유대인은 아기 이름으로 살아있는 친척의 이름을 사용하며 죽은 친척(親戚)의 이름은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기의 이름을 짓는 시기도 다양(多樣)합니다. 무슬림의 아키카(aqeeqah) 의식(儀式)은 출생 후 7일째 되는 날 유대인의 할례의식(割禮儀式)과 일본의 오시치야(osichiya) 의식은 8일째 되는 날 행해집니다. 중국의 ‘만월(滿月)’잔치는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불교도(佛敎道)의 ‘남카란(namkaran)’ 의식은 약 3개월 즈음에 행해집니다.

아버지 이름을 딴 이름과 어머니 이름을 딴 이름은 과거 인간이 집단(集團) 안에서 서로 구별(區別)하기 위해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이 성은 그 사람의 고유한 내력(來歷)과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족은 장사하는 내용에 따라 성을 붙였습니다. 그런 이름의 예로는 베이커(Baker)나 휠러(Wheeler)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화권(文化圈)에서는 성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름에서 딴 다음 아이의 이름을 추가해서 만들었습니다.

아이슬란드(冰岛)에서는 올라프(Olaf)란 이름의 한 남자가 해럴드(Herald)란 이름의 아들을 가졌다고 하면 그 아들은 해럴드 올라프선(Herald Olafsson)이며 딸은 시그리드 올라프선(Sigrid Olafsson)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계혈통(母系血統)을 선호하는 가족도 있는데, 예를 들어 시그리드 올라프선의 아이들은 아마 리브 시그리즈도티르(Liv Sigridsdottir)와 레프 시그리즈도티르(Leif Sigridsdottir)가 될 것입니다. 러시아(俄罗斯)의 이름에는 부칭이 있지만, 이 부칭(父称)은 아들인지 딸인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즉, 이반(Ivan)의 아들은 미하일 이바노비치(Mikhail Ivanovich), 딸은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가 되는 식입니다.

보통 이름이라 하면 성(姓) 아래에 붙여 다른 사람과 구별(區別)하여 부르는 말(名)이지만 성과 이름을 모두 합쳐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인의 이름, 즉 성명(姓名)은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성(姓)과 개인을 가리키는 명(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은 본관과 결합(結合)하여 가문을 나타내고, 명은 항렬을 통하여 가문의 대수를 나타냅니다. 지배층(支配層)에서 성명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부터이며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다변화(多變化)되며 친족공동체가 분화(分化)됨에 따라 성과 본관도 세분화(細分化)를 거듭해 왔습니다.

본디 한국인의 이름은 토착어(土着語)인 알타이제어(Altaic languages)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한자(漢字)의 유입과 성(姓)의 보급에 따라 고려시대(高麗時代)에서 점차 후대로 올수록 토착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줄어들며 한자식(漢字式)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왕족(王族)도 토착어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았으나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르러서는 양반(兩班), 심지어 양민(良民)인 경우에도 한자식 이름을 짓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에서는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는 나라의 이름으로 짓지 않으며, 해와 달로 짓지 않으며, 질병의 이름으로 짓지 않으며, 산천(山川)의 이름으로 짓지 않는다(名子者 不以國 不以日月 不以隱疾 不以山川.)”라고 하면서 자식(子息)의 이름을 짓는 법에 대해 적고 있고,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桓公)’ 6년 조(條)에서도 사람의 이름을 짓는 방법(方法)을 신(信)・의(義)・상(象)・가(假)・유(類)의 다섯 가지로 구분(區分)하여 자세히 서술(敍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륜(河崙; 1347~1416)이 아들의 이름을 ‘구(久)’라고 지으면서 이름에 담긴 뜻에 대한 글을 적었듯이 예전에는 이름을 지어줄 때에 이름에 담긴 의미(意味)를 함께 적어서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인(韓國人)에게 이름은 단순히 호칭 부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주술적 부호(呪術的符號)의 역할도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이에 대한 장래 희망(將來希望)과 기원을 담아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한번 지어지면 수없이 불리는 이름은 공감원리(共感原理)에 근거하여 이름에 담긴 뜻과 소리 등을 통해 당사자의 입신출세(立身出世)와 부귀영화, 무병장수(無病長壽), 행복 등을 유도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우선 부르기 쉽고 듣기 좋으며 뜻이 좋게 짓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그렇지만 전문 작명가들은 그 밖에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수리(數理)・사주(四柱)・역상(易象) 등도 반드시 참고해서 길한 이름을 짓습니다. 현대 한국사회(韓國社會)에서 전문 작명가들이 활용하고 있는 작명방법(作名方法)은 대략 아홉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역상(易象) 성명학, 수리(數理) 성명학, 음령오행(音靈五行) 성명학, 용신(用神) 성명학, 삼원오행(三元五行) 성명학, 측자파자(測字破字) 성명학, 곡획(曲劃) 성명학, 신살(神殺) 성명학, 소리(音聲) 성명학 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널리 활용(活用)되고 있는 것은 수리 성명학(數理姓名學)과 음령오행 성명학(音靈五行姓名學)입니다.

한국사회의 작명 경향(傾向)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각 가문의 항렬자(行列字)를 따라 이름을 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항렬자를 따르지 않고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항렬자를 따르는 방식은 주로 양민(良民) 이상의 남성에게, 항렬자를 따르지 않고 짓는 방식은 노비나 여성에게 적용(適用)되었습니다. 항렬자를 따르는 경우도 다시 세분(細分)되는데 오행(五行)을 기준으로 하기, 천간(天干)을 기준으로 하기, 지지(地支)를 기준으로 하기, 숫자(數字) 순서로 하기, 덕목(德目) 문구로 하기, 절충(折衝)하기 등으로 나뉩니다. 그러나 항렬자를 따라 짓는 경우에는 대부분 오행의 상생배열(相生排列)을 따르고 있습니다.

항렬자를 따르지 않는 경우는 출생 상황(狀況; 태몽・시기・장소・서열)을 반영하기, 부모의 소망(所望)・감정을 반영하기, 외모・재능의 특징(特徵)을 반영하기 등으로 구분됩니다. 요즈음에는 순우리말로 짓기, 믿는 종교(宗敎)의 인명을 빌려서 짓기, 영어로 말하기 좋게 짓기 등의 경향도 두드러집니다. 최근에는 항렬자를 따르지 않고 부모의 희망(希望)에 따라 개성 있는 이름으로 작명하려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름의 일반적 특성으로는 이름의 주인공인 특정 개인을 지칭한다는 개별성(個別性),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다수 존재한다는 중복성(重復性), 성과 항렬자 등을 통해 가계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계통성(系統性) 등이 있습니다.

기복신앙祈福信仰의 관점에서 작명은 다섯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즉 주술성(呪術性)—역설(逆說)과 유사(類似) 주술, 음양오행의 중화(中和) 및 상생(相生) 중시, 상수역학(象數易學)의 길수(吉數) 중시, 고유성(固有性)과 운명성(運命性), 현세(現世) 중시 및 세속성(世俗性) 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작명은 ‘주술성—역설과 유사 주술(類似呪術)’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장차 훌륭하게 성장(成長)하기를 바라는 일념으로 부모는 우선 아기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 주려고 합니다. 좋은 이름은 부를 때마다 잘되라는 축복(祝福)이 되며 나쁜 이름은 망하라는 욕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명위복(賤名爲福)’이라 해서 귀한 아이일수록 오히려 아명을 비천하게 지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귀(邪鬼)들의 시기와 질투(嫉妬)를 피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고종(高宗)의 아명은 ‘개똥이’였고, 황희(黃喜) 정승의 아명은 ‘도야지’였습니다.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본래 소망(所望)대로라면 ‘길동(吉童)’이나 ‘귀동(貴童)’, ‘금동(金童)’, ‘옥동(玉童)’이, ‘좋은 아이’, ‘귀한 아이’란 뜻이므로 이름으로 적합하겠지만, 오히려 역설적(逆說的)으로 ‘개동(介同)’, ‘계동(季同)’이란 이름을 붙여서 잡귀(雜鬼)의 질투를 예방하고 무병장수를 기원(祈願)하였습니다. 

몽골에서도 역신(疫神)을 속이기 위해 집에서 사용하는 ‘이상한’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 남자아이가 여자 이름을 가지거나, 심지어 개의 이름을 가지기도 합니다. 딸아이에게 ‘끝년’이나 ‘말숙이’, ‘종희’, ‘막녀’ 등으로 이름을 붙여 자녀의 출산을 중단(中斷)하고자 했으며, 아들이 귀한 집에서는 딸아이에게 ‘붙들이’나 ‘바래’, ‘후남(後男)’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끝’이나 ‘말(末)’, ‘종(終)’, ‘막(莫)’은 마지막이란 뜻으로 단산(斷産)을 기원하는 것이고, ‘붙들이’나 ‘바래’, ‘후남’은 사내아이를 붙들어 오거나 사내아이를 바라는 것이며, 다음(後)은 꼭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비는 것으로, 이상은 모두 유사 주술적 행위(呪術的行爲)입니다. 이러한 주술적 이름 짓기 풍속은 티베트에도 있으며 구약성서시대(舊約聖書時代)에도 귀신들이 매력적(魅力的)인 아이를 소유하려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혐오감(嫌惡感)이 느껴지는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 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천명위복(天命威福)’의 작명 행위는 초자연적(超自然的) 존재인 귀신을 사람이 직접 속이고 조작・통제하려는 주술 행위입니다. 예쁜 아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오히려 “그놈 밉게 생겼다.”라고 반대로 말하는 것도 같은 이치(理致)입니다. 딸아이에게 ‘말’, ‘종’, ‘후남’ 등의 이름을 붙여서 단산이나 득남(得男)을 기원하는 행위는 유사 주술(類似呪術)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 여기에는 말이 씨가 된다는 언참(言讖) 사상과 말의 주력(呪力)을 믿는 관념이 함축(含蓄)되어 있습니다. 각 가문의 항렬자(行列字)를 따라서 이름을 짓느냐 여부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름의 주술적 효력(呪術的效力)을 믿고서 아이에 대한 장래의 희망과 기원(祈願)을 담아 이름을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근년 들어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개명(改名)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 이름을 지었을 때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아름다운 축복(祝福)이 깃들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고민(苦悶)하면서 숱한 이름가운데서 골랐을 좋은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원인(原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놀려준다거나 흔한 이름이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남이 고치니 덩달아 고친다거나 또는 이름을 고쳐야 출세(出世)한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는다거나 등등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겠지만 과연 이름을 고친다고 운명(運命)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모택동(毛澤東)은 1947년 3월 13일에 호종남(胡宗南)이 쳐들어왔을 때 연안(延安)을 떠나야 승리한다는 뜻인 리득승(离得胜)과 음이 같은 리덕승(李德胜)으로 개명했기에 전국을 해방하고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대립(戴笠)은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좋다는 우농(雨农)이라고 개명했지만 결국 좋은 끝장을 보지 못하고 1946년 3월 17일에 비행기추락사고(飛行機墜落事故)로 비속(雨中)에서 죽었습니다.
 
진정 성공했거나 출세(出世)한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지어서 출세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름을 지을 때 출세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지으면 출세는 근심하지 않아서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동성동명(同姓同名)이 많습니다. 그러나 같은 성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운명은 서로 다릅니다. 동성동명이라고 해도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장수(長壽)한 사람과 단명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이름 탓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성공(成功)한 사람들이 이름을 잘 지어서 출세(出世)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 세상에 이름 하나 잘 지어서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개명(改名)한 후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개명한 후 손 놓고 아무 노력(努力)도 하지 않았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좋은 이름을 지어서 출세한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개명 후 실패(失敗)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이름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부모의 마음 지극(至極)히 옳은 것이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명하려는 사람의 마음도 나무람 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이름에 너무 집착(執着)해 자주 개명하려고 하고 일이 뜻대로 안되면 이름 탓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만은 바꿔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만족시키고 충족(充足)시키는 좋은 이름은 없습니다. 절대적(絶對的)으로 좋은 이름은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름이 좋다고 너도나도 그 이름을 지으면 중복(重複)이 생기고 개성(個性)이 없어지게 됩니다. 작명소(作名所)가 생겨나고 이름 짓기에 도움을 주는 이름 짓기 프로그램이 나오면서 좋은 이름에 열광(熱狂)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은 이름일 뿐 운명을 개변(改變)하지 못합니다. 운명(運命)을 개변하는 것은 좋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두 손입니다.
 
이름 없이 마당쇠로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이름 석 자로도 모자라 자, 호까지 달고 숱한 별명까지 길게 붙여서 자신을 나타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름이 없건 이름이 하나이건 이름이 여러 개이건 또는 좋은 이름이건 수수한 이름이건 모두 죽으면 후세(後世)에 이름이 남는 사람은 극소수이(極少數)입니다. 대부분은 죽음과 함께 그 이름도 사라집니다.
 
이름을 바꾼다고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다고 하는 이름으로 개명해도 자신의 노력이 없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명의 좋은 점도 있습니다. 이름을 바꾸면 자신심(自信心)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제야 자아(自我)를 찾은 것 같고 이제야 진정한 내가 된 것 같아 날것만 같은 심정일수 있습니다. 이런 자신심에 날개를 달고 훨훨 날려면 자아도취(自我陶醉)에 취해 꿈만 꾸지 말고 꾸준한 노력의 날개 짓을 힘차게 해야 합니다.
 
개명(改名)이 헛되게 되지 않으려면 원대한 포부(抱負)는 아니어도 자신만의 당찬 포부를 품고 참다운 인생관(人生觀)을 세워야 합니다. 자신의 웅대(雄大)한 목표를 위해 꾸준히 날개 짓을 해야 좋은 이름에 걸 맞는 결과(結果)가 이루어 질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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