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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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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서서 바라보다는 지관(止觀)의 한자풀이

 

 

지관(止觀)은 불교개념용어로써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리의 실상을 관찰하는 불교수행법을 일컫는 말이다.

오랜 시간 사랑을 받고 있는 스테디셀러 중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현대인에게 잠시 멈추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소중한 가치들이 비로소 보인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일반인에게도 많은 인기가 있었고 저자인 출가사문을 스타로 만들기도 했다. 이 멋진 제목은 천태종의 수행체계인 지관(止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과연 멈추면(止) 어떤 것들이 보이는(觀) 것일까?

그칠 지(止)자는 발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발이 움직여 일정 지점(地點)에서 '그치다(止)'라는 뜻의 글자이다. 지(止)자는 '그치다'라는 뜻이지만 실제 뜻은 '가다, 이동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 지(止)자가 부수(部首)로 쓰인 글자들 역시 “움직여 이른 후 그치다”라는 의미(意味)가 스며있다. 또한 지(止)자는 이래 표처럼 다른 부수(部首)와 만나 14 개의 새로운 부수(部首)를 만든다. 그러니 이들 부수(部首)들도 결국(結局) 움직이는 동작(動作)이 스며있다. 여기서 지(止)자는 사람의 발목 아래를 그렸으며 일반적(一般的)으로 알려진 '그치다'의 정적(靜的)인 의미(意味)보다는 '움직이다, 이르다' 등의 동적(動的)인 의미(意味)에 가깝다. 단지 동적(動的)인 행동(行動)의 결과(結果)로 정적(靜的)인 순간(瞬間)에 이른 상태(狀態)라고 할 수 있다. 그칠 지(止)는 발의 모습(模襲)을 본 따 만든 글자이다. 그칠 지(止)는 발로 걸어간다는 뜻도 있고, 반대(反對)로 발을 땅에 붙임으로서 정지(停止)한다는 뜻도 있다. 또한 지나온 자취(迹)라는 의미(意味)도 가진다. 서든지 가든지 우선(于先)은 발이 있어야 한다. 발이 있어야 일어 설수도 있고, 또 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다', 혹은 '그치다'라는 뜻의 '지(止)'자나 '갈 지(之)자가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둘 다 발의 모습(模襲)에서 나왔다. 갑골문(甲骨文)의 '발가락, 뒷꿈치, 발목'을 그린 발(疋)'자가 금문(金文)에서는 '辵'의 모습(模襲)으로 되었다가 지금의 '설 지, 혹은 그칠 지止)가 된 것이다. '갈 지(之)' 자는 똑같은 발 모습(模襲)의 뒷꿈치 부분(部分)에 횡선(橫線)인 땅, 혹은 출발선'ㅡ'이 그어져 있어서 '막 걸으려 하는 동작(辵)을 나타내고 있다. 금문(金文)의 '㐄', '夂' 등의 모습(模襲)이 되었다가 지금(只今)의 '之'자로 된 것이다. 갑골문(甲骨文)이 발견(發見)되기 전에는 '屮'자나 '㞢'자만 보고 땅에서 풀이 솟아나는 모습(模襲)으로 추정(推定)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선다(止)'혹은 '간다(之)'라는 뜻으로 보더라도 둘 다 '발(止)'의 모습(模襲)에서 나왔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참고(參考)로 '다리 족(足)'자가 갑골문(甲骨文)에서는 정갱이까지 그린 '갑'의 모습(模襲)이었다가 금문(金文)에서는 ''의 모습(模襲)으로 바뀌면서 밑 부분(部分)이 '발 지(止)'와 같은 변화(變化)를 보이고 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가 있을 것이다. 

볼 관(觀)의 구성요소(構成要素)는 황새 관(雚)과 볼 견(見)으로 짜여있다. 관(雚)의 자형(字形)은 머리모양(艹)과 두 눈(口口)을 강조(强調)하면서 새 추(隹)를 첨가(添加)하였는데, 황새의 특징 중에서도 특히 두 눈을 강조(强調)하였다. 이는 황새의 식생(植生)을 파악(把握)한 것으로 물 가운데 고요히 서서 먹잇감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살피다가 순식간에 낚아채는 동적 면모(面貌)가 담겨 있다. 견(見)자 역시 눈을 강조(强調)한 것으로 어진사람 인(儿)에 눈 목(目)을 더해 오감 중에서도 보는 것을 중시(重視)하고 있다. 따라서 관(觀)자에는 황새(雚)가 먹잇감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쏘아보거나 사람(儿)이 사물(事物)을 눈여겨 바라본다(目)는 의미(意味), 즉 철저(徹底)하게 눈으로 파악(把握)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관은 지(止)와 관(觀)의 합성어이다. 지는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적정해진 상태이며 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와 관은 서로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으며 지계(持戒) 등과 함께 불교의 중요한 실천덕목이 되어 원시불교 이래의 여러 불경에 실려 있다. 

지관은 지(止)와 관(觀)의 상반된 개념의 합성어다. 따라서 지와 관을 각각 설명하기로 한다. 지(止)는 범어 ’Samatha‘의 번역이다. 사마타(舍摩他), 사마타(奢摩他)라 음역한다. 모든 상념을 멈추고 생각을 끊어 마음이 적정(寂靜)해진 상태를 말한다. 

천태종(天台宗)에선 지(止)를 공. 가. 중의 삼관에 대해 삼지로 분류한다. 관(觀)은 범어 ’vipasyana‘의 번역이다. 관찰(觀察)이라고도 한다. 또한 지혜로 객관의 대경(對境)을 비취 본다는 뜻인데 관념(觀念)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상관(九想觀)이나 일상관(日想觀)처럼 각종의 생각을 마음에 떠올려 관하는 초보적인 관을 관상(觀想)이라 한다. 

천태종(天台宗)에서 말하는 관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일심삼관(一心三觀)처럼 자기 마음의 본성을 관하는 것이므로 관심(觀心)이라 한다. 관은 깨달음의 경계에 통하는 길이므로 법상종과 화엄종에선 관도(觀道)라 한다. 관의 대경(對境)을 관경(觀境), 관하는 지혜를 관지(觀智), 관하는 방법을 관문(觀門) 또는 관법(觀法)이라 한다. 관은 지에 상대적인 말이지만 중도관(中道觀)의 관은 지와 관이 잘 조화된 상태(止觀均行)를 나타내는 사(捨)의 의미와 부합된다. 또 관에는 선정(禪定)이란 의미도 있으므로 선정이란 의미의 관을 출관(出觀) 또는 출정(出定)이라 한다. 관의 내용은 동일하지 않지만 제법을 분석하여 공한 것으로 관하는 소승과 성실종의 관법을 석공관(析空觀)이라 하며, 인연 따라 일어난 제법의 당체에 즉일[卽一]해서 현상계 그대로가 공이라고 체득하는 대승의 관법을 체공관[體空觀]이라 한다. 요컨대 관은 마음을 하나에 기울여 지혜로써 부처님과 가르침의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고 염상[念想]하여 깨닫는 방법이다.

‘옛날 천태종에서 수행하던 지관(止觀)을 되살려야 한다’는 식자들의 의견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간화선 일변만 고집하는 조계종이나 관음수행을 하는 현재의 천태종을 의식한 말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처음 수행에 들어가는 것은 (지와 관) 두 문을 벗어나지 않는다.”면서 “지와 관을 함께 닦으면 모든 수행이 다 갖추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수행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선정(參禪)이나 염불이고 지관은 천태의 수행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유는 지관이 선정의 원리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이나 구체적 방법에 대해 설명해 놓은 경론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제선문(次第禪門)’의 설명에 따르면 지란 일어나는 마음, 즉 생각을 제어하는 것과 생각을 한데 모아 잡념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란 자신의 뜻대로 일정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불쑥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정에 들고자 마음을 다잡을 때는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뜻하지 않게 불쑥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빨리 알아채서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가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전일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던 온갖 잡념이나 망상 등의 거친 생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는데 이를 그친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제어하여’ 잡념을 ‘그치는’ 작용을 ‘지’라고 한다는 것이 천태대사의 정의이다. 여기서 제어한다는 것은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고 그친다는 것은 일어나는 잡념을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의 뜻 가운데 첫 번째 그침이란 “각(覺)과 관(觀), 그리고 온갖 망념과 사(思)·상(想)들이 모두 고요히 쉬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각과 관은 신역으로는 심(尋)과 사(伺)라고 하는데 보통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라고 풀이되는 부정(不定)심소이다. 전오근(前五根)과 오식(五識)에 의하여 생기는 첫 느낌이 각이고 의근과 의식이 상응하여 이 느낌을 분별하는 것이 관인데 선정의 첫 단계에서 고요한 마음을 방해하는 대표적 작용이다.

망념이란 의지와 관계없이 집요하게 맴도는 허망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염(念)’이란 ‘구사론’에서는 대지법, 유식에서는 별경심소로 분류되는 마음작용으로서 염불(念佛), 사념처(四念處) 등의 용례에서 보듯 한 생각을 놓치지 않고 늘 상기하는 것을 말한다.

삼지란 체진지·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이고 삼관이란 공관(空觀)·가관(假觀)·중관(中觀)이다. 체진지와 공관은 공을 체득하는 것이고 방편수연지와 가관은 가제(假諦), 즉 언어·천문지리·의술 등 중생교화를 위한 방편을 익히는 것이다. 식이변분별지와 중관은 삼제가 원융한 제법실상을 여실히 깨달아 일체종지를 얻는 것인데 이들을 한 마음에서 한 번에 증득하는 것이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는 것이 이 설의 요지이다.

현대생활의 여러 어려움을 불교 수행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수행 이론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 까닭은 조계종이나 태고종 등 전통종단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가풍 때문에 이론 방면이 미약하고, 천태종이나 진각종 등 새롭게 창건된 종단은 아직 수행 이론이 체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주요 종단에서 행해지는 수행법이 모두 지와 관을 원리로 삼고 있음을 안다면 그 수행 이론 또한 천태지관에 의지할 수 있다. 다만 지금처럼 원돈지관에만 주목하지 않고 점차지관에 눈을 돌린다면 천태의 지관이론은 현대 불교의 각종 수행 원리와 방법론에 대한 훌륭한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

 

지관 (止觀)

불교 개념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리의 실상을 관찰하는 불교수행법.

 

정의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리의 실상을 관찰하는 불교수행법.

 

내용

지관은 지()와 관()의 합성어이다. 지는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적정해진 상태이며, 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와 관은 서로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으며 지계(持戒) 등과 함께 불교의 중요한 실천덕목이 되어, 원시불교 이래의 여러 불경에 실려 있다.

 

이러한 지관을 종합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은 수나라 때 천태 지의(天台智顗)가 지은 ≪마하지관 摩訶止觀≫으로서, 좌선할 때의 마음의 문제를 10종으로 분류하고, 나아가 그 마음의 파악 문제를 10종으로 분류하여 자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지의 이후 천태종의 근본 교리가 되었다.

 

천태종에서는 지는 마음의 동요를 누르고 본원의 진리에 정주(定住)하는 것, 관은 부동의 마음이 지혜의 활동이 되어 사물을 진리에 따라 올바로 관찰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때의 지는 정(定)에, 관은 혜(慧)에 해당한다. 즉, 지는 주체의 확립, 관은 이 주체의 확립에서 모든 현상을 전체적·객관적으로 관찰하여 정확히 판단하고 자유로이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형식에는 3종이 있다. ① 선정을 닦아 차례로 실상의 진리를 깨닫는 점차지관(漸次止觀), ② 수행자의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 실천의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은 부정지관(不定止觀), ③ 처음부터 실상을 대상으로 삼아 원만하게 결핍됨이 없이 즉시 깨닫는다고 하는 원돈지관(圓頓止觀)이 그것이며, 원돈지관을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는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지관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가하고 있다. 원효는 “보살이 모든 법(法)에 분별하는 바가 없으므로 지라 이름하고, 모든 법의 본질적인 의미와 무한히 깊은 도리에 대한 세속적 탁월한 지혜를 관이라 한다.”고 지관을 정의하였다.

 

즉, 지는 진여문(眞如門)에 의지하여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을 끊어 분별을 두지 않는 것이고, 관은 생멸문(生滅門)에 의지하여 인연의 생멸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그 본질적인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원효는 지에 대하여 상세한 주석을 가하였다. 먼저 지를 닦기 위해서는 고요한 곳에 머무를 것, 계율을 청정하게 지킬 것, 의복과 음식에 부족함이 없을 것, 훌륭한 스승인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것, 모든 반연되는 일들을 쉴 것 등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의 구체적인 수행법을 ≪대승기신론≫에서 내주(內住)·등주(等住)·안주(安住)·근주(近住)·조순(調順)·적정(寂靜)·최극정(最極靜)·전주일취(專住一趣)·등지(等持)의 아홉 가지 과정으로 나눈 것에 대하여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그 요점을 정리해보면, ① 내주는 세속의 인과관계 속에서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다 마음을 산란되게 하는 육진(六塵)이므로, 이와 같은 육진에 생각이 끌려감이 없이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라는 것이다. ② 등주는 평등한 생각으로 차별적인 번뇌들을 꺾어 미세하게 하는 것이다. ③ 안주는 차별적인 번뇌를 끊는 방편인 평등한 생각마저도 버림으로써, 외경에 대한 번뇌를 대치한다는 생각을 모두 비워서 편안히 머무는 것이다.

 

④ 근주는 일체법이 본래 무상(無相)임을 깨달아 일체법에 능히 생각할 만한 것이 없음을 밝게 아는 것으로, 무상을 깨닫는 데 근주의 묘(妙)가 있다. ⑤ 조순은 다시 바깥 사물에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조절하는 것이다. ⑥ 적정은 모든 분별하는 상(想)이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데, 앞과 같이 닦아 익힌 마음으로 움직이는 마음을 동하지 않게 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⑦ 최극정은 그래도 또 마음이 흩어져 동요를 일으키면, “마음뿐이요 바깥 경계가 따로 없다[唯心無外境界].”는 정념(正念)을 일으켜서 마음의 동요를 다스리고 곧바로 마음의 자상(自相)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⑧ 전주일취는 이와 같은 적정이 앉았을 때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 어떠한 일을 하든 간에 적정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을 말한다.

 

⑨ 등지는 이와 같은 적정의 상태가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가 진여삼매(眞如三昧)의 상태이며, 이를 바꾸어 한결같이[等] 마음을 유지[持]한다고 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지는 진여삼매를 목표로 하며, 구종심주는 지에 의하여 생멸하는 마음을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 과정을 아홉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지에만 치중하면 마음이 가라앉아 게을러지고 모든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을 즐기지 않을 뿐 아니라 대비(大悲)의 이타행(利他行)을 등한히 할 우려가 있으므로 반드시 관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면의 관찰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① 이 세상에서 인과의 법칙에 따라 전변(轉變)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도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것이 없으며, 쉬지 않고 생성 파괴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할 것[無常觀].

 

②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모두 망념(妄念)의 발동으로 인하여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며,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고 관찰할 것(苦觀).

 

③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우리가 생각해 내는 모든 의식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자주성을 지닌 것이 아니며, 과거의 것은 꿈과 같고 현재의 것은 번개와 같고 미래의 것은 구름과 같이 별안간 나타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관찰할 것[無我觀].

 

④ 인간의 육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육신은 모두 부정한 것이며, 갖가지로 더럽혀져 있어 하나도 진실로 즐길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관찰할 것[不淨觀] 등이다. 이들 네 가지 관은 현실세계의 실상에 대한 기본적인 관이다. 이 관을 흔히 법상관(法相觀)이라고 부르는데, 법상관에 입각하여 보살은 대비관(大悲觀)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중생은 근본적으로 모두 무명(無明)의 훈습(熏習) 때문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온갖 고통을 받게끔 되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한없는 핍박을 당하고 있으며 앞으로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다. 실로 버리기도 힘들고 벗어나기도 힘들며, 그 무명을 헤치고 지혜로워진다는 것 또한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이 불쌍한 존재임을 전제한 다음 수행자는 큰 용기를 내어 대서원(大誓願)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원컨대 내 마음에서 모든 차별 대립적인 의식을 없애고, 어느 곳 어느 때나 착하고 좋은 일을 하며, 가능한 방법을 다하여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통을 벗어나 평화를 얻도록 하겠다.”는 원을 발하는 것이다.

 

즉, 관이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심을 보다 깊이 심는 수행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스스로의 번뇌를 다스려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지의 수행과 함께 반드시 세상의 실체를 관찰하고 중생을 고통에서부터 구제하겠다는 관행(觀行)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결론적으로 지와 관이 함께 갖추어지지 않으면 깨달음의 길에 완전히 들어섰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지관의 수행은 원효 이후 교학(敎學)을 닦는 수행자들에 의하여 널리 채택되었고, 중국 지의의 지관수행법과 함께 우리 나라 고려의 천태종 수행법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선종의 발달과 함께 고려 중기 이후에는 지관보다 참선(參禪)의 수행법이 불교도들 사이에서 더 많이 채택되었다.

 

참고문헌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원효사상』 Ⅰ(이기영, 홍법원, 1967)

『불교학개론』(김동화, 보련각,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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