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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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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고아다

 

人人, 都是孤兒

사람은 누구나 고아다.

 

과 함께 다시 돌아보게 된 단어는 고아. 한자를 살펴보니 외로울 고()’아이 아()’를 합친 단어다. “부모가 없다고 해서 꼭 외로운 것은 아니고, 반대로 부모가 있다고 해서 꼭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닌데, 고아(孤兒)라는 말에는 편견 어린 동정이 오롯이 내포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고아(孤兒)는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다. 또 기아(棄兒)라는 말도 있다. 기아는 길러야 할 의무(義務)가 있는 사람이 몰래 아이를 내다 버림. 또는 그렇게 버려진 아이다.

 

이 경우는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만 뜻하기 때문에 고아보다는 범주(範疇)가 좁다. 부모가 없는 성인은 고아로 불리지 않으며, 대신 '고아 출신'이라는 말을 쓴다. 성인이 된 이후에 부모를 잃은 경우는 어느 쪽에도 해당(該當)되지 않는다.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감투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正常家族)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排除)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부모님, 동창, 친구, 연인 등 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우리와 함께 인생여로(人生旅路)를 여행을 한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마감할 때까지 아무도 우리와 동행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혼자 현실을 직면(直面)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나와 항상 함께 있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이고, 다른 사람 역시 여전히 ​​​​나다. 아무도 당신을 위해 모든 고통을 감당(堪當)할 수 없다. 또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모든 걱정을 해결할 수도 없다.

 

우리는 자라서 이 세상의 모든 불만족(不滿足)스러운 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불가피(不可避)하다. 어려움이 닥치면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 마라. 그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원칙(原則)이 있다. 나는 여전히 나이고, 나의 세계의 독재자(獨裁者)이고, 때론 조용하고 행복하고 외롭고 끈기가 있다. 때론 의외의 감동에 져 눈물을 터트릴 때도 있다.

 

사람은 항상 혼자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세상의 누군가가 나와 함께 행복을 마련하기를 바란다. 사랑을 찾기 위해 쿵쿵 뛰는 심장을 안고 달리는 사람, 한 번만, 꼭 한 번만이라도 사랑을 기어이 찾고야 말리라는 맹세(盟誓) 같은 거,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마음속으로 웨치고 또 웨치며...

 

그런데 수천 명의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할까? 사실, 그 사람일 필요는 없다. 외로운 고독(孤獨)에 있으면 그를 만나고, 함께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고독한 환경에 없다면 굳이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너무 외롭고 고독하기 때문에 필사적(必死的)으로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나의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은 이같이 말했다: ‘우리 각자는 참으로 무력(無力)한 고아로서, 우연히 세상에 왔다가 불가피하게 떠나가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더 강하고 불멸(不滅)의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는 목적은 너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력감(無力感) 속에서 생각하고 무력함 속에서 삶을 배운다. 차근차근 빛나는 주인공으로 성장해 인생의 무대에서 마음껏 발휘해보라.

 

우리는 무력하기 때문에 도적을 무시하고 직접 필터링할 만큼 충분히 약하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어떤 로맨스에 얽매이지 않고 오랫동안 사랑에 빠지고 싶다. 의존적 발생과 소멸(消滅)로 가기 위해.

 

시끄러운 도시에 분주한 하늘, 뚫을 수 없는 벽 같은 분주한 길이 나를 고립(孤立)시켰다. 여기에서 매일 살아도 여기의 모든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풍족(豐足)하고 키가 커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나는 항상 떠다니는 뿌리 없는 오리풀처럼 느껴지고, 그것이 어디에서 끝날지 모른다.

 

그래서 외로움이 닥치면 말이 의지(依支)가 됐다. 그것은 나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고, 외로운 밤을 거듭할 때마다 참을성 있게 나와 동행한다. 집을 떠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주라. 말의 궁전은 연약하고 민감한 내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하다.

 

가끔 생각해보면 고아(孤兒)들의 세계도 참 아름답다. 고요한 생각, 고요한 멍함.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자신을 여왕처럼 대할 수 있다.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게 바로 지나온 햇수임을 안다. 햇수란 고통을 겪은 어떤 이가 더 이상 누구도 그 고통을 겪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이다. ‘부디 너는 나보다 덜 힘들었으면 좋겠어. 그러니 내가 알게 된 것들을 최대한 다 알려줄게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사자(當事者)가 아닌 이들이 할 수 있는 연대(年代)도 있다. 부모가 기본인 질문을 건네지 않는 것, 고아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것, 고아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固定)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 또한 그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은 모두가 고아이기 때문에 우리는 손익(損益)을 무시하고 모든 것이 마음을 따르도록 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膳物)이 아닐까?

 

간혹 고아인 내가, 라디오를 듣다가 문득 다른 채널이 듣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리저리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그렇게 세심하게 움직인 손이 찾은 그 채널이 바로 내 청각(聽覺)과 연결된다.

 

사랑도 똑같지 않은가? 어디에 있는지도,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감각(感覺)을 내세워 서로의 주파수(周波數)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드디어 찾은 주파수가 맞았을 때,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다. 물론 고()주파와 저()주파의 두 가지 음이 화합(和合)될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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