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반응형

[문학 비평]

알베르 카뮈 <이방인> 다시 읽기

보도자료 다운로드 (책세상-이방인-양장_보도자료-1.hwp)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1913.11.7 ~ 1960.1.4)]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1942이방인을 발표하여 칭송을 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 희곡 칼리굴라등을 통해 부조리한 인간과 사상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소설 페스트등의 작품을 남겼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알베르 카뮈<이방인> 다시 읽기(1)

"그러나 (만약 있다면) 그의 적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명백한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그가 수많은 젊은이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프랑수아 모리아크

 

<이방인>을 읽으면 당혹감을 느끼는 걸까?

브라이언 피치(Brian Fitch)<‘이방인의 나레이터와 서술>에서 "<이방인>에 관해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말은 이미 남들이 다 해놓은 것이 아닐까, 남이 한 말을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이 떠드는 꼴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탄식하듯이 썼습니다.

 

저 역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누군가가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회의에 젖어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이방인(L'étranger)> 수업을 들으면서 저는 안타까웠습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많은 후배들이 <이방인>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 한 권의 소설을 읽고 느끼는 바가 사람마다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한 권의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일정한 규범이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읽는 이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텍스트를 잘못 읽을 경우, 우리의 사유와 논의는 미궁 속을 맴돌 뿐입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을 읽고 났을 때 처음 떠오르는 느낌은 '당혹감'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괘씸'하기까지 합니다. 독자를 우롱하는 듯한 카뮈의 화법은 답답하기도 하고, 외면하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이방인>은 일체의 친절한 설명을 배제한 채, 하나의 섬처럼 그것 그대로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친구들은 제게 이렇게 투정했습니다: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나?" 또는 "뫼르소는 싸이코야." 저는 한편으로는 이런 반응을 이해하지만, 텍스트를 읽는 여러분들의 시각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당혹감을 느꼈던 이유를 내 나름대로 차근차근 설명해보려 합니다.

 

1: 뫼르소는 정말 바보일까?

그러면 먼저 제1부부터 읽어봅시다. 여러분의 당혹감은 먼저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뫼르소(Meursault)의 언행에 대한 당혹감일 것입니다. 소설의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Maman est morte, ou peut-etre hier)"는 뫼르소의 무심한 성격을 대번에 드러내줍니다.

 

그는 어머니가 언제 사망했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무관심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도 않고 카페오레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후안무치한 행동에서 재확인됩니다. 그는 장례식에서 돌아오자마자 회사동료 마리 카르도나를 만나 해수욕을 하고 페르낭델의 코미디 영화를 본 후 바로 섹스를 합니다.

 

그는 결혼하자는 마리의 프로포즈에도 시큰둥하며, 마리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냉정하게 내뱉습니다. 하지만 정부에게 모욕적인 편지를 써달라는 레몽의 부탁은 흔쾌히 들어줍니다. 뫼르소의 행동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레몽의 정사사건에 연루된 아랍인에게 피스톨을 다섯 번 발사하게 됩니다.

 

많은 후배들이 이런 뫼르소의 성격을 'indifférent(무관심)'하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점은, 뫼르소의 태도는 무관심(indifférent)한 것이 아니라 무차별(indifférent)하다는 점입니다. 언뜻 보기에 바보처럼 보이는 뫼르소의 행동 이면에는 뿌리깊은 무신론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뫼르소의 무신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 까라마조프의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무신론과 이상하리만치 닮아있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뫼르소의 살인사건 바로 다음에 이어질 재판은 부친살해건에 대한 재판입니다. 이는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드미뜨리의 재판을 연상시킵니다). 사르트르 말마따나,

 

"도대체 <악령>을 쓰든 카페오레를 마시든 모든 것은 같은 값을" 갖습니다. 뫼르소는 이것과 저것에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모두가 죽어야한다는 단 하나의 진실, 곧 삶의 부조리 앞에서는 모든 것이 같은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뫼르소는 무엇보다 본능과 감각에 충실하려 한 인물입니다. 이는 무엇보다 '대지에 충실하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명령에 대한 복종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카뮈는 대학 시절 니체의 숭배자였습니다). 기존 도덕에 대한 외면, 지상의 사물들에 대한 남다른 집착, 철저한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뫼르소에게서 니체의 사상을 찾아내긴 쉽습니다. 그러나 뫼르소는 단순히 니체 사상의 형상화로 규정하기에는 훨씬 구체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인물입니다.

 

뫼르소는 유달리 예민한 감각을 지녔습니다. 그는 화물차를 따라가 집어타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며, 마리와의 관계에서도 무엇보다 육체적 관계를 우선시합니다. 마리가 입은 물방울 무늬 옷, 마리의 탄력있는 젖가슴, 손을 닦을 때의 수건의 감촉, 달릴 때 느끼는 육체의 약동, 발끝을 적시는 바닷물결의 감촉 등, 이 모든 감각들은 마치 교향악의 음표처럼 그의 삶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비를 쏟아붓는 듯한 태양의 심벌즈 소리 속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1악장 인트로처럼 네 번의 발포를 하는 부분이 그 절정을 이룹니다.

 

뫼르소가 사회의 통념으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진 '이방인'으로 인식되는 것은, 그가 보편적인 모랄보다도 이러한 삶의 구체성과 죽음의 확실성을 더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카뮈 자신은 뫼르소가 '이방인'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게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게임은 어떤 게임일까요? 사회란 일종의 약속체계입니다.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는 세계의 진실을 사유할 수도 없고, 감당해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합니다. 인생의 제()문제를 놓고 사람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약속합니다. 그러나 카뮈가 보기에 이 거대한 약속체계, 즉 도덕체계는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와 같다는 진실을 가려버립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다시 읽기(2)

"앞으로도 계속 우리가 온갖 종류의 도살장 옆에서 살아가고, 중국에서처럼 공공장소에서, 그리고 무관심한 카메라의 렌즈 아래에서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살아간다면, 이 복잡미묘하고 비밀스러우며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이야말로 사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유일한 예술일 수 있으며, 이 예술의 첫 출발자이자, 추구자는 바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알베르 카뮈일 것이다." - 장 카이롤 <나사렛 문학>

 

2: 우리는 범인의 목을 자를 권리가 있는가?

2부에서는 이 도덕체계의 메커니즘이 더 신랄하게 고발됩니다. 사법체계가 그의 사형을 합의하기 위해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는 동안 뫼르소는 자신을 변호할 생각조차 않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이 점이 우리의 눈에는 매우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는 가끔 '나도 할 말이 있다'는 충동을 느낄 뿐입니다. 그 곁에서 마리를 비롯한 뫼르소의 이웃들은 뫼르소를 변호해주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마음씨 좋은 식당주인 셀레스트는 증인석에서 "그는 남자입니다(il est un homme)"라고 말합니다. '남자'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그는 '남자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다 안다'고만 대답합니다. 결국 그는 '그것은 하나의 불운'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중언부언하다가 증인석에서 내려옵니다. 그 때 뫼르소는 처음으로 '한 명의 인간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어 마리가 끌려올라오는데, 검사는 침착한 태도로 마리와 뫼르소와의 관계에 대해 묻고, 마리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얘기하도록 종용합니다. 결국 마리는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 그들이 본 영화가 페르낭델의 영화였다고 자기 입으로 얘기하게 되는데,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집니다(페르낭델은 당시 인기있던 코미디배우였습니다).

 

그러자 마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증언하도록 시켰다며 흐느낍니다. 사법시스템은 이렇게 법정에 선 서민들에게서 뫼르소의 목을 자를 근거를 얻기 위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뫼르소와 그의 이웃들의 무력함은 검사를 비롯한 사법관들의 무자비함과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현란한 말솜씨로 뫼르소의 처형을 주장하는 검사에 비해 범인들은 변호할 힘이 없습니다. 변호사는 참다못해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라고 두 팔을 쳐들어올리며 외치는데, 뫼르소는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드러난 풀먹인 셔츠의 주름'만을 봅니다(카뮈의 후배세대인 누보로망 작가들은 이 부분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게 됩니다. 그들은 여기서, 내러티브의 중심에 놓인 사건과는 관계없는, 본질적이지 않고 시시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의 생생한 묘사를 봅니다). 결국 배심원들은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뫼르소가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될 것을 언도합니다.

 

사형폐지론자 카뮈에게 재판의 세계는 일종의 암적인 존재였습니다. 모두가 수학공식처럼 정확히 죽어야만하는 실존적 상황 속에서 또다시 누군가를 끌어내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카뮈가 보기에 너무나 부조리한 현실이었습니다. 카뮈는 이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일부러 외관상 혐의가 분명한 진짜 범인을 데려다놓고 심판을 합니다. 뫼르소는 사회의 도덕을 무시하고 있으며, 한 아랍인을 쏘아죽인,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죄인입니다. 그는 명백한 범인입니다. 그러나 이 범인으로부터 우리가 삶을 빼앗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2부의 5장에 나오는 뫼르소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30세에 죽든지 60세에 죽든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죽는 바에야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이방인>의 메시지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남을 재판하지 말라'는 경구일 것입니다. 인생은 부조리합니다. 그리고 그 부조리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죽음을 사유할 수 없으며 이웃의 죽음을 선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다른 이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단두대로 끌고 가 목숨을 빼앗습니다.

 

<이방인>에서 카뮈는 그 자신이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명명한 뫼르소의 죽음을 통해 '남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을 끌어냅니다. 여러분이 제 글을 읽은 후 <이방인>을 다시 한 번 읽게 될 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사형하지 말라'는 법이 카뮈에겐 결국 같은 말이라는 것을 읽어내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