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원리를 알고 이해를 통해 지식(知識)을 깨칩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깨치는 것이 배움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내가 배우기 위해서이고 내가 배움으로써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 깨치는 것입니다.
인간은 배움이란 깨달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存在)라는 걸 많이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배움이란 문구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배운다는 건 자신과 약속(約束)된 언행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배워서 알게 되는 깨달음이 곧 내게 작은 울림을 남겨줍니다.
배움은 현실의 꿈입니다. 배움의 어원은 배우거나 들어서 이룬 지식이나 교양(敎養)입니다. 배움의 아상(我相)은 몸과 마음에 참다운 ‘나’가 있다고 집착(執着)하는 일입니다. 정말 그런지는 내게 중요(重要)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니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만 배우는 건 이기적(利己的)이고 함께 배울 줄 아는 마음이 참된 것이라는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벽공기의 청량(淸凉)한 원형적 생기처럼 맑고 싱그러운 배움의 힘이 몸에 하나 그득 차 있는 새날이 밝아옵니다. 나는 이런 삶만이 최고의 삶이고 최고로 기쁜 삶이고 최고로 건강한 삶이라고 주장(主張)합니다.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창조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成熟)하게 사는 삶을 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배움이 깃든 사람을 성인(成仁)이라 칭한다는 말은 요즘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만 떠올려 봐도 금방 공감(共感)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배움이 깃든 삶을 통해 행복(幸福)과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말에도 무릎을 쳤습니다.
KBS의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 가운데 우리말 달인(達人)을 가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보통의 퀴즈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문제의 정답(正答)을 많이 맞히는 이가 승자(勝者)가 됩니다. 그런데 그 문제로 나오는 말들이라는 것이 대개는 평범(平凡)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전(事典)에서조차 본 기억이 거의 없는 그런 말들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생활 속에서 늘 쓰는 말의 참 뜻과 뿌리와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저자와 대화(對話)를 하며 생각을 나누는 일입니다. 하루 종일 책만 읽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가볍고 얇은 책이라 하더라도 하루 이틀에 책 한 권을 뚝딱 읽었다고 뽐내는 건 대개의 경우(境遇)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못 됩니다. 일 년에 책을 백 권 정도 읽었다는 이야기도 그리 대단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책을 짓는 작자(作者)는 적어도 몇 달이란 시간을 보내며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고 한 문장 한 문장을 다듬어 책을 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글들을 하루 이틀에 급하게 먹으면 체합니다.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 생각의 위인 뇌에 부담(負擔)만 줄 뿐입니다. 그렇게 읽은 책은 내 안에서 제대로 소화(消化)도 되지 않고 그저 잠깐 기억에 남았다가 잊히기 십상입니다.
나는 글을 읽다가 종종 읽기를 중단(中斷)하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책 읽기의 속도(速度)가 보통 사람보다 느립니다. 사람이 글을 읽을 때 굳이 소리 내어 읽지 않더라도 뇌에서는 글자를 눈으로 읽어낸 시각 신호(信號)를 청각 신호로 바꾸어 이해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글은 책이라는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고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잠든 말을 깨워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 페이지의 글을 단 몇 초 만에 뚝딱 읽어낸다는 이야기는 아주 빠른 말을 흘려듣고도 다 이해(理解)할 수 있다는 말이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나누는 대화를 모두 귀담아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설사 외계인(外界人) 같은 사람이 출중한 능력을 지녔다 해도 부럽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책을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이나 책이 그렇게 읽히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글쓴이와 함께 호젓이 대화를 나누며 생각을 나누는 글 읽기를 하고 싶습니다. 또한 내가 쓴 글을 읽는 이가 그렇게 읽어줬으면 합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말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생각을 그 토양(土壤)으로 해서 맺어진 열매인지를 살펴보고 생각해보고 글로 담아내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 말 속에 자리 잡은 우주(宇宙)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우주를 함께 여행(旅行)해보지 않겠냐고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그런 글을 짓고 싶고 그런 책을 쓰고 싶습니다.
깨달음은 쉽습니다. 눈앞에서 얼른대는 그림자를 보면 누구나 배후에 무언가 있음을 압니다. 그림자의 배후에 전달체(傳達體)가 있고, 피사체(被寫體)가 있고, 매개체(媒介體)가 있고, 광원(光源)이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층이 있어줘야 뭔가 있어 보입니다. 전체가 한 줄에 꿰어져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바닥에서부터 뻑적지근하게 차오르는 충일감(充溢感)이 있습니다.
어원(語源)으로 보면 배움의 본래 의미는 배우거나 들어서 이룬 지식이나 교양(敎養)입니다. 머리에 지식이 가득차면 좋습니다. 학문(學問)이란 밥그릇에 지식을 꽉꽉 눌러 담아주면 좋습니다. 깨달음은 가득 차는 느낌이고 언어감각(言語感覺)에서 유래합니다. 틀리면 어색(語塞)하고 맞으면 자연스럽습니다. 본래는 깨닫고 깨치고 할 것도 없이 느낌으로 그냥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表現)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사실은 모르는 게 더 이상합니다. 궁금하고 어색하고 위화감(違和感)을 견디기 어딘가 찝찝해져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불편해져서 마음이 편안(便安)해질 때까지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그 편안한 쾌감에 중독성(中毒性)이 있습니다. 언어의 자연스러움을 따라가서 마음의 자연스러움에 이르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어려서 학교에서 배운 것은 원인과 결과(結果)입니다. 결과는 변화라면 원인은 근본(根本)과 같다고 봐야 합니다. 근본 배후에 당연히 있어야 되는 변화와 그 근본과 변화를 매개하는 돈은 언제나 그렇듯이 뒷전에서 뛰는 전주(錢主)가 있고 앞전에서 뛰는 선수(選手)가 있습니다. 배후(背後)가 있고 배후의 배후에는 또 배후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여 전달(傳達)하려고 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언어는 듣는 상대방 기준(基準)에 맞추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깨닫지 못한 사람의 기준에 맞추니 깨달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다만 배후의, 배후의, 배후의, 배후까지 캤을 때의 전율(戰慄)할 듯한 느낌을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1초 만에 느낍니다.
만남의 느낌, 반가운 느낌, 그런 느낌이 있으니 이 글을 읽으러 블로그를 찾아오는 하루 백여 명의 방문자(訪問者)가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뇌 속 깊은 곳에 저장된 쾌감(快感)을 필자의 글이 불러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그때 내가 느꼈던 것처럼 똑같이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필자의 글은 재미없고 재미가 없으니 읽혀지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타고나는 것이고, 각성하는 것이고, 공명(共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집단의 일원으로 태어나고 집단의 하부구조(下部構造)로 종속됩니다. 모든 사람이 깨달았다며 멋을 내고 있으면 그것도 곤란하고 다만 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소식을 전파(傳播)하면 구성원 모두에게 전달되어야 하고 수신(受信)이 가능해야 합니다.
세상이 발전(發展)할수록 사람 구실하기가 힘듭니다. 이천 오백년 전 석가모니(釋迦牟尼)가 깨달았을 때만 해도 무지한 민중과의 격차(隔差)는 컸습니다. 누구든 쉽게 멋을 낼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알아도 지역 분위기를 확 바꿔놓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좀 안다고 해도 과학과 경쟁(競爭)해야 합니다. 과학을 이기는 깨달음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배움터로 달려가는 것은 뇌 속의 안테나가 반응(反應)하기 때문입니다. 잡음(雜音)이 섞였지만 무언가 들리더라도 라디오 역할만 하면 실패(失敗)합니다. 21세기는 스마트 시대입니다. 아프리카 TV만 해도 초보자(初步者)가 ‘먹는 방송’ 정도는 해내는 세상입니다. 일인방송국(一人放送局)이 되려면 뇌 안의 잠들어 있는 기능(機能)을 깨워야 합니다. 단 방송국 안테나는 높아야 합니다.
명작(名作)이 좋다는 건 말 안 해도 다 알고 느낌이 와 닿습니다. 그러나 설명(說明)하라고 하면 내용을 망치고 맙니다. 나는 아직 평론가(評論家)들 중에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몇몇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뿐 분명(分明)히 있습니다. 광원이 있고, 매개체가 있고, 피사체가 있고, 전달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고, 있을 건 다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어도 납득(納得)할 수 있습니다. 뇌가 반응하면 뭔가 있는 것입니다. 설명은 내가 할 테니 여러분은 따라오면 됩니다. 전혀 반응하지 않는 사람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패션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어느 분야든 설명하기 어려워도 내밀한 작동원리(作動原理)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압니다.
반응하면 깨달음이 옵니다. 그런데 가짜 정보는 반응할 작정으로 작심(作心)하고 억지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열광적(熱狂的)으로 반응하기 좋아하지만 정작 반응해야 할 새로운 버전이 나오면 침묵(沈默)합니다. 눈치 봅니다. 진짜라면 새로운 버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공부가 있습니다. 생존(生存)을 위한 공부의 세상은 이미 실업(失業)시대가 아닌 무업(無業) 시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 예술과 문학이 훌륭하고, 학문이 진실이라도 그것으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아무 소용(所用)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재화(財貨)벌이 공부를 우선해야 합니다. 예를 든다면 자신의 적성(適性)과도 타협하고 또 사회에서 요구되는 일자리로 돈벌이도 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경제, 경영, 기술, 기능, 영업, 기타 직업관련 기술' 등과 같은 일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래야 자신은 물론 가족(家族)들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돈 많은 사람들은 직장에 다니질 않습니다. 그들은 돈쓰는 것이 직업(職業)인 사람들 입니다.
공동체(共同體)의 이해와 배려에 대한 공부가 생존에 대한 안정이 어느 정도 마려되어 의식(衣食)이 풍부해지면, 사람다운 품격(品格)을 갖추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른바 배부르고 등 따뜻한 다음에는 공동체에 대한 이해(理解)와 이웃에 대한 나눔 등 배려를 실천(實踐)하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런 내용들의 공부는 '문학, 역사, 철학'의 공부 속에 있습니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고는 배부른 짐승이 된다고 합니다. 인식의 범위가 좁아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世界觀)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가치관(價値觀) 등이 만들어지지 않거나 좁습니다. 문사철(文史哲)의 공부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진지(眞摯)한 대화를 나눌 친구들이 많이 생겨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놀며 배우는 공부이자 좋은 공부인 인생은 권태(倦怠)와 번민의 사이를 오고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타고난 외로움의 작동(作動)으로 생각만 있는 연약한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더불어 인간은 지루함을 못 견뎌 합니다. 따라서 수시로 함께 놀며 배우는 공부를 해야 되고 이에 따른 노하우도 축적(蓄積)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취미(趣味)'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질적으로 좀 더 진행시켜야 합니다. 구체적(具體的)으로 거론하면 '詩쓰기, 그림 그리기, 노래하기, 춤추기, 낚시하기, 연극하기, 명상하기, 서예하기, 테마 여행하기, 스포츠 즐기기'등등 기쁘고 즐겁게 노는 공부(工夫)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자를 배우는 목적(目的)을 한자 시험, 급수 시험, 승진 시험을 치기 위함에 둡니다. 하지만 배움에서 주장(主張)하는 한자를 배워야 하는 목적은 다릅니다. 한국말은 약 70% 이상이 한자어(漢字語)이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낱말 중 명사는 대부분 한자어에서 왔습니다.
더욱이 초ㆍ중ㆍ고, 대학교에서 암기(暗記)해야 하는 용어들의 90% 이상이 한자어입니다. 즉 우리나라 교육(敎育)에서 한자는 학문의 기본이 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모든 한자가 원리(原理)에 따라 만들어졌듯이 모든 용어도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런 용어(用語)를 만든 사람은 한자를 만든 사람처럼 나름대로 고민(苦悶)하여 용어가 가지는 뜻을 최대로 살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자와 그 속뜻을 알면 우리가 암기해야하는 용어들의 의미(意味)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암기하기도 쉽습니다.
가령 오히려 상(尙)자는 원래 높이 지은 건물(建物)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입니다. 그래서 ‘높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문을 숭상하다’에서 숭상(崇尙)은 ‘높고(崇) 높게(尙) 여기다’는 뜻입니다. 상서성(尙書省)은 ‘높은(尙) 곳의 글(書)을 받아 집행하는 관청(省)’으로 고려 때 왕의 명령(命令)을 집행하는 관청(官廳)입니다. 고려 때 조직이나 관직 이름 중에 상(尙)자가 들어가는 것이 많은데, 모두 높은 곳에 있는 왕(王과) 관련됩니다. 예를 들어, 상궁(尙宮)은 왕을 모시던 여자입니다.
이렇게 한자로 만들어진 글자의 뜻을 알고 암기를 하면 평생 잊히지 않을뿐더러 우리말을 완벽(完璧)하게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한 어휘력(語彙力)을 갖추려면 반드시 한자를 알아야 합니다. 배움은 국어(國語)에 나오는 한자어는 물론 일반 상식 한자어 예문을 활용(活用)하여 어휘력 확장(擴張)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誤解)를 사지 않으려고 분명히 해두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필자는 학자가 아니어서 학문적 검증(檢證)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언(附言)해 둡니다. 또한 말이나 문장의 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나 믿을만한 전거(典據)가 아니라는 점도 첨부(添附)합니다. 메모장의 여러 문장에서 모아 기록한 그런 집록(輯錄)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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