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글 쓰는 것을 집 짓는 것에 비유(比喩)하기도 합니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면밀한 설계도(設計圖)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 또한 탄탄한 구조(構造)와 좋은 재료가 마련되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장원한 관점(觀點)에서 볼 때 생각나는 대로 무작정(無酌定)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 없이 집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집이 세월(歲月)의 무게를 이겨낼 수 없고 오래 갈 수도 없습니다.
물론 대충 쓰는 글은 독자를 설득(說得)시키거나 이해시키거나 감동(感動)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독자가 설득되고 이해(理解)되고 감동될 만 글은 오로지 장인(匠人)이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최고의 집을 짓듯 좋은 재료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철학(哲學)과 생각이 담긴 소기(所期)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김동인(金東仁), 김남천(金南天), 임화(林花), 김영랑(金永郞), 박용철(朴龍徹), 이효석(李孝石) 등 각자 책 몇 권쯤은 너끈히 엮어낼 수 있는 한국 문학사(文學史)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자 글쓰기의 대가들로 꼼꼼하고 탄탄한 글쓰기로 이름 높습니다. 이에 많은 후배 문인(後輩文人)들 역시 그들의 글에서 글쓰기를 배웠다고 고백(告白)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글은 무작정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적지 않은 사람이 글 때문에 고민(苦悶)하고 글을 못 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목수(木手)가 집을 짓듯 꼼꼼하고 탄탄하게 글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합니다.
이에 탄탄하고 꼼꼼한 글 솜씨를 통해 수많은 독자를 매료(魅了)시킨 대가들의 글쓰기 철학과 비법(祕法) 및 원칙은 철저합니다. 그들의 글 쓰는 과정 및 글을 쓴 후에 생긴 흥미로운 뒷이야기는 참으로 글쓰기를 두려워하거나 처음부터 글쓰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글쓰기 지침서(指針書)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첫 소설 ‘출항’을 출간(出刊)하기까지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부커상 수상작인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은 16년 만에 세상에 나왔고,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는 엔딩을 무려 47가지를 썼다가 하나로 결정(決定)했습니다. 그러니 그 작품의 얼개 즉 어떤 사물(事物)이나 조직 전체를 이루는 짜임새나 구조는 마치 잘 지은 한 채의 집처럼 꼼꼼하고 탄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충분히 습작(習作)한 후 작가라고 불러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때 비로소 작품을 발표(發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부끄러운 증거물(證據物)을 세상에 영원히 남기게 된다. - 김동인
어떤 지식이건 그 윤곽(輪廓)이나 일부분만 어렴풋이 알아서는 도저히 붓을 댈 수 없다.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두지 않으면 단 한 줄의 묘사(描寫)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김남천
‘글, 쓰는 것이 아니다, 짓는 것이다’는 탄탄하고 꼼꼼한 글 솜씨를 통해 수많은 독자를 매료(魅了)시킨 한국 문학사의 글쓰기 대가(大家)들의 글쓰기 철학과 비법, 원칙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시와 소설은 물론 수필, 비평, 동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 비법(祕法)과 친절한 조언, 충고(忠告)도 함께 제시하고 있어, 글쓰기를 두려워하거나 처음부터 글쓰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합니다. 글 쓰는 과정(過程) 및 글을 쓴 후에 생긴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것 역시 하나의 볼거리입니다. 특히 글쓰기에 있어서 대가 소리를 듣는 그들 역시 글쓰기가 절대 쉽지만은 않음을 은밀히 고백(告白)하고 있습니다.
낳을 때의 고통(苦痛)이란 그야말로 뼈가 깎이는 일이요, 살이 내리는 일이다. 그러니 펜을 들고 원고지를 대하기가 무시무시할 지경이다. 한 자를 쓰고 한 줄을 긁적거려 놓으면 벌써 상상할 때의 유쾌함과 희열(喜悅)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무딘 붓끝으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한 번민과 고뇌가 뒷덜미를 움켜잡는다. 피를 뿜는 듯한 느낌이란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현진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 든든하고 풍부한 천품(天稟)을 타고 태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무엇을 깨닫고, 느끼고, 사색하는 것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러니 펜을 잡는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무엇을 쓴다는 것이 죄악(罪惡) 같을 뿐이다. - 나도향
글을 쓴다는 것은 제 살을 깎는 것과도 같았다. 쓰면 쓰는 만큼 건강(健康)이 부쩍 축났다. 이에 글이란 제 피로 아로새겨지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 계용묵
소설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흡인력(吸引力)이 있어야 합니다. 독자들의 구미에 맞아야 합니다. 신선한 감정세계를 그려야 합니다.
작자와 독자, 작중인물과 독자가 서로 통하고 호흡(呼吸)을 같이 해야 합니다. 각계계층 독자들의 수요를 파악해야 한다. 예술매력으로 독자들을 정복(征服)해야 합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내가 쓴 소설을 읽게 하고 계발(啓發)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철리적인 것, 나만의 독특한 것이어야 합니다. 작가는 세계를 창조합니다. 작가는 예술적인 천부(天賦)가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풍부한 상상력이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가공하는 능수(能手)여야 합니다.
소설은 장엄한 거짓말입니다. 생활에 있는 진실한 사실이라 하여 예술의 진실이 아닙니다. 꾸며낸 이야기도 예술의 진실(眞實)이 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찾아내고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체현(體現)해야 합니다. 깊은 생활체험과 풍부한 지식이 있고 사상적 매력(魅力)과 작가의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언어는 반드시 예술적이어야 합니다. 언어관 즉 언어는 작가의 기본공(基本功)입니다. 언어의 형상성, 언어의 매력. 언어는 색채가 있고 동태적(動態的)이어야 합니다. 작가는 언어의 마술사(魔術師)가 되어야 합니다. 언어예술의 대가로 되어야 합니다.
세절은 반드시 독특해야 합니다. 세절은 생활에서 받은 독특한 감수입니다. 세절은 때론 정절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노신(魯迅)의 ‘공을기’에서는 세 개의 세절로 ‘공을기(孔乙己)’의 일생을 묘사하였습니다. 감정은 반드시 진실해야 합니다. 생활의 독특한 발견이 있어야 하고 그 것을 심각하게 발굴(發掘)하여 발전시켜 창작해야 합니다.
소설은 사람을 쓰는 것입니다. 복잡(複雜)하고 변화가 많은 인간을 쓰는 것입니다. 인간의 깊은 내심세계를 파헤쳐야 합니다. 이야기는 신선하고 중복이 없게 비상적인 상태에서 인간의 진면모((眞面貌)를 그려낼 수 있습니다.
소설은 사람 사는 잔 이야기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통치자(統治者)가 한 개인의 운명까지 관계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는 작용을 문학이 해야 합니다. 읽고 나면 머리속에 형상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어야 성공적(成功的)입니다.
소설은 어느 짙은 인생의 단면(單面)을 그려주어야 합니다. 아직 누구도 써내지 않았던 나만이 보아낸 독특한 그 것을 써내야 합니다. 엄격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어느 인상적인 한 장면이 머리속에 박혀 그 것이 계기로 후에 한편의 엉뚱한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쓰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가장 요령(要領) 있게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선명하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후한 역사감(歷史感)과 선명한 당대성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철리적 상징성과 역사적 신비성이 조화적(調和的)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줄거리 구성의 굴곡성(屈曲性)과 세부묘사의 풍부성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통적 수법과 외래수법(外來手法)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고생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학은 물질적인 풍요(豐饒)와 만족한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진지성(眞摯性)을 가지고 파고들어야 합니다.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장 절실(切實)하게 꾸미지 않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생활이고 인생자체입니다. 문학의 5대 요소는 인간성, 사회성, 시대성, 민족성, 도덕성입니다. 문학의 3대 특성은 영원성, 독창성, 보편성입니다.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습작(習作)을 충분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간을 넘어선 뒤에 비로소 정식으로 발표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지나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작가로 인정받으려는 성급함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가로서 칭송(稱頌)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증거물을 세상에 영원히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히 습작한 후 작가라고 불러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때 비로소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모욕에 불과하다. - 김동인, ‘소설가 지망생에게 해주고 싶은 당부’ 중에서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라도 그것을 표현할 만한 기교(技巧)가 없다면 그 생각은 하나의 생각으로서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 예술품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용 없이 기교로서만 읽히는 작품이 적지 않다. 그런 화장 미인 같은 작품은 우리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설령, 도움을 준다고 한들 미미함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따라서 기교는 내용의 종속물(從屬物)로 삼아야 한다. - 최학송, ‘내용과 기교’ 중에서
테마는 현실에 배양(培養)시켜야만 비로소 생명을 갖는다. 현실적인 생활을 시킨다고 해도 좋다. 다시 말해 테마와 현실이 털끝만큼이라도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며, 무리(無理)가 있어서도 안 된다. 즉, 서로 어울려야 한다. 이것이 소설을 잘 쓰는 원칙 제1장 1조다. - 채만식, ‘소설을 잘 씁시다〉’ 중에서
신인은 글자 한 자 한 자에 문인의 생애(生涯)가 묻어 있어야 하며, 글 한 구, 글 한 편에 각기 생명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성작가를 능가(凌駕)할 만한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신인 된 패기와 실력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와 땀이 섞인 노력과 파도와 같은 정열, 바다와 같은 끈기가 필요하다. 나아가 문학의 생리(生理)를 벗어난 일체의 행동은 자신의 문학을 그릇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김영랑, ‘신인에게 주는 글’ 중에서
몇 천 년을 흘러온 문학의 역사를 볼 때, 세계적인 명작(名作)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새로운 사상과 감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작품을 위해서는 기성의 문학이 표현하지 못한 새로운 사상과 감정이 필요하다. 이에 새로운 사상과 감정 찾기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새로운 감정이야말로 새로운 문학의 모태(母胎)이기 때문이다. - 계용묵,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중에서
어떤 지식이건 그 윤곽(輪廓)이나 일부분만 어렴풋이 알아서는 도저히 붓을 댈 수 없다.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두지 않으면 단 한 줄의 묘사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태(世態) 혹은 풍속과 함께 당대 사회의 세계사적 이념(理念)까지 자세히 알지 않고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도 자세히 묘사할 수 없다. 또 안다고 해서 전부를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아는 것을 그대로 고스란히 기록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김남천, ‘창작여묵’ 중에서
정말 좋은 수필은 시시하고 지루한 일상의 사소사(아주 작은 일)를 사상의 높이까지 고양(高揚)하고, 거목의 잎사귀 하나하나가 강하고 신선한 생명을 간직하듯, 일상사가 작가가 가진 높은 사상과 순량한 도덕성의 충만한 표현으로서의 가치(價値)를 품고 있어야 한다. 즉, 수필은 좋은 생각만으로 써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명철한 관찰안(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 좋은 사상 역시 필요하다. - 임화, ‘수필론’ 중에서
시인은 오늘 불러야 할 시의 소재(素材)가 뒹굴고 있는 청계천 다리 밑이며, 성 언저리의 빈민굴, 부랑아 수용소의 주변을 답사하고, 쓰레기통을 헤쳐, 거기서 아름다운 장미를 피워야 한다. 그것이 오늘 한국 시인들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쓰레기통보다 더 추(醜)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요는 이 추한 소재를 시인이 아름답게 처리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 노천명, ‘시의 소재에 대하여’ 중에서
작품의 아기가 설 때처럼 유쾌(愉快)한 일은 없다. 그 거룩한 맛, 기쁜 맛이란 하늘을 줘도 바꾸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큰 땅덩어리를 줘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낳을 때의 고통이란! 그야말로 뼈가 깎이는 일이요, 살이 내리는 일이다. 그러니 펜을 들고 원고지(原稿紙)를 대하기가 무시무시할 지경이다. 한 자를 쓰고 한 줄을 긁적거려 놓으면 벌써 상상할 때의 유쾌함과 희열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무딘 붓끝으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한 번민과 고뇌가 뒷덜미를 움켜잡는다. 피를 뿜는 듯한 느낌이란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현진건, ‘쓸 때의 유쾌함과 낳을 때의 고통’
이처럼 소설은 이상화(理想化)를 반대하고 진실성을 추구(追究)해야 합니다. 성격묘사에 있어서 그 인물이 무엇을 하는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더욱 중요하게는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소설은 작가의 의지나 정서경향(情緖傾向)을 직접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나 환경, 사건, 인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의 진정한 가치를 파악(把握)해야 합니다. 이야기정절을 통해 인물형상(人物形象)을 두드러지게 해야 합니다. 알아듣게 글을 써야 하고 기쁨 속에 비관적 정서(悲觀的情緖)를 슬픔 속에 느슨함을 속된 장면에 우아한 언어를 쓰는 재치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지루한 것을 생동(生動)하게 묘사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깊게 파고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실이 작가를 통하여 얽히고 반죽 되여 작가의 것이 된다면 그것이 원 사실과 다른 거짓이라 하여도 그것이 더 진실하고 실물적(實物的)인 것입니다. 이론에 집착(執着)하기보다 쓰고자 하는 것에 깊이 파고들어야 합니다. 작중 인물을 꿈속에서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실체를 어떤 각도(角度)로 그려내야 합니다.
정녕 뿜어내지 않으면 못 견딜 강렬(强烈)한 그런 할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순수소설(純粹小說)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맞먹는 수준(水準)이나 자기보다 높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모든 힘을 다 내여 공을 들여 쓴 소설입니다.
우리들이 대가들의 명작(名作)에서 배워야 할 대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靈魂)을 정화시키는 주체적 사상입니다. 주체적 사상(主體的思想)의 여러 가지 양상(樣相)과 그 변화에 대해서 우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다른 대상들은 이와 연결(連結)되는 가지와 같은 것입니다. 모든 작품도 이에 연결되는 한 가지 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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