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아파트 옆 푸른 소나무가지에서 이름 모를 새가 흥겨워 지저귑니다. 고운 날개를 펼치고 허공(虛空)에 깃을 치며 의미 깊은 어조(語調)로 재잘거립니다. 마치 “내 울음소리에 해는 동쪽에서 뜨고 사람들은 꿈에서 일찍 깨어나네.”라고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색문장(五色文章)이 있다면 시보다 더 좋은 문장(文章)은 없습니다. 오늘도 나는 괴테시집(哥德詩集)을 집어 들었습니다.
공기가 청신한 새벽에 무성한 나무숲에서 노니는 새들의 날갯짓과 지저귐 속에서 나는 괴테의 시 ‘발견(發見)’을 읽고 있습니다. ‘나는 숲속을 홀로 걸었다 /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 / 그저 생각에 잠기면서, 그늘 속에 서 있는 조그만 꽃을 보았다 / 별처럼 반짝이는 / 아름다운 눈매 같은 작은 꽃을. 나는 꺾고 싶었다 / 그러자 꽃이 달콤하게 말했다 / 내가 꼭 꺾어져야 하나요? 뿌리 채 그 꽃을 뽑아 / 집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 그것을 가져왔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 꽃을 다시 심었다 / 이제 그것은 자꾸 번져나가 꽃을 피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숲속을 홀로 걸으며 별처럼 반짝이는 조그만 꽃의 생명력(生命力)을 뿌리 채 뽑아 아름다운 정원(庭園)으로 가져와 조용한 곳에 심으니 자꾸 번져나가 ‘꽃을 피우는 여름날’의 ‘발견’을 어떤 언어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이를 ‘생취(生趣)’ 또는 ‘생의(生意)’라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살아 영동(靈動)하는 운치(韻致)입니다.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사물의 중심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核心)을 찌르려면 올곧은 정신, 예리한 안목(眼目)을 가져야 합니다. 시인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온갖 형상을 관찰하는 예지(叡智)를 길러야 합니다. 또한 이론적으로는 예언(豫言)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미래의 일을 미리 지각하는 초감각적 관찰력(觀察力)이 있어야 합니다. 생동하는 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비의(秘儀)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작업 그 자체에 기쁨을 발견합니다. 1823년 젊은 시인 요한 페터 에커만은 당대 문필가(文筆家)였던 괴테의 집을 찾습니다. 괴테에게 시 평론(評論)을 보낸 뒤 그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괴테의 열렬한 숭배자(崇拜者)인 에커만은 이후 10년간 조수로 괴테를 보필(輔弼)합니다.
매주 정기적으로 이뤄진 에커만의 방문은 두터운 대화록(對話錄)으로 남았습니다. 괴테(哥德)는 에커만과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괴테 문학전공자(文學專攻者) 사이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評價)받는 “괴테와의 대화”를 ‘푸른숲’이 번역(飜譯)했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만년의 인생관과 예술관(藝術觀)을 엿볼 수 있는 책입니다. 40세나 나이 어린 에커만은 스승 괴테의 말씀을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소크라테스(苏格拉底)의 대화, 공자(孔子)의 논어와 비슷한 형식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작가는 제작과정에서 최상의 기쁨을 발견(發見)한다네. 재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예술자체에 만족하지 않고 작업을 끝낸 뒤 얻게 된 이익(利益)에만 관심을 갖게 되지. 그러한 세속적인 목적(目的)으로는 결코 위대한 것을 이룰 수 없네.”
괴테와 에커만의 대화는 문학, 철학, 역사, 연극, 음악, 건축 등을 넘나듭니다. 괴테는 셰익스피어(莎士比亚)를 위대한 심리학자라고 하는가 하면 바이런(拜伦)을 고금을 통틀어 가장 생산적인 시인이라고 평합니다.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莫里哀), 영국 소설가 월터 스코트(沃尔特斯科特),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维克多·雨果)에게도 찬사를 보냅니다. 나폴레옹(拿破仑)과 헤겔(黑格尔), 베토벤(贝多芬)과 모차트르(莫扎特)도 괴테와 교류를 나눈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근대 철학자 중에서 칸트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네. 칸트의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을 읽어보게. 그는 나와 비슷한 길을 걸었네. 나의 ‘식물변형론(植物變形論)’은 칸트와 같은 정신에서 비롯된 것일세.” 중국과 인도 문학에도 조예(造詣)가 깊었던 괴테는 종교(宗敎) 및 역사문제(歷史問題)에도 관심을 보입니다.
“나의 ‘베르테르’가 나오자 이탈리아에서도 번역(飜譯)이 되었네, 순식간에 초판이 한 권도 남지 않았지. 주교가 교구의 사제를 동원하여 초판(初版)을 매점해 버린 것이네. 나는 그것을 알고 화가 나기보다 ‘베르테르’가 카톨릭교도에게 악서란 것을 간파(看破)한 신부들에게 기꺼움을 느꼈네.”
에커만과의 대화는 괴테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히는 책에 속합니다. 일찍 니체(尼采)는 “독일 최고의 양서(良書)”라고 말했습니다. 손자(孫子)의 재롱에 즐거워하는 인간 괴테의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1749년 프랑크푸르트생인 괴테는 아내와 아들을 잇따라 잃는 슬픔 속에서 만년 대작 "파우스트"를 완성(完成)했습니다. 1792년생인 에커만은 괴테의 마지막 10년을 함께 한 뒤 문학평론가(文學評論家)로 활동하다 1854년 세상을 떴습니다.
괴테(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는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이며 한 때는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생하였습니다.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연구가이고, 바이마르 공국(公國)의 재상으로도 활약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제실고문관(帝室顧問官)으로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시장(市長)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하여 아들의 좋은 이해자(理解者)었습니다. 7년 전쟁(1756∼1763) 때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평화롭고 부유했던 괴테의 집도 프랑스 민정장관(民政長官)의 숙사(宿舍)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계획 역시 중단되었으나 괴테는 자유롭게 프랑스의 문화에 접할 기회를 얻었으며 15세 때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생활을 보내다가 1768년 각혈(咯血)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무렵에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鍊金術)에 관심을 갖게 되고, 어머니의 친구인 크레텐베르크의 감화로 경건파(敬虔派)의 신앙에 접근하였습니다. 그녀는 후일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공부(法學工夫)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G.헤르더를 알게 되어 종래의 로코코 취미의 문학관은 철저히 분쇄(粉碎)당했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 감정의 순수성(純粹性)에 시의 본질을 구하려는 노력이 “들장미”의 가작(佳作)을 낳게 하였습니다.
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牧歌的)인 사랑을 하였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破棄)하였습니다. 그 후 회한(悔恨)과 마음의 부담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主題)가 되었습니다. 1771년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 사업을 개업(開業)하였고, 1772년에는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實習生)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습니다. 이 때 샬로테 부프와의 비련(悲戀)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을 썼는데 이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독일적 개성해방(個性解放)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疾風怒濤)’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습니다.
1775년에 바이마르 공국의 젊은 대공(大公)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서 여러 공직(公職)에 앉게 되고 재상(宰相)이 되어 10년 남짓 국정(國政)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동안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治積)을 쌓는 한편,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하여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하였습니다. 1784년 동물에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간악골(間顎骨)을 발견하여 죽기 1년 전에 학회에서 인정되었는데 비교해부학(比較解剖學)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戀愛)를 하여 부인으로부터 인간적 및 예술적 완성에 큰 영향(影響)을 받았으나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부인과의 애정관계(愛情關係)는 끝을 맺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업하는 화가로서의 생활을 보내면서 l,000매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으며,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1787)”, “에그몬트(1787)" 등을 써서 슈타인 부인에게 바쳤습니다.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轉換點)이 되었으며 고전주의에의 지향(志向)을 결정한 시기로서 중요합니다.
1788년에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조화업(造花業)을 하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하면서(정식 결혼은 l806년),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幸福)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에 그는 시인과 궁정인의 갈등을 그린 희곡 ”타소(1789)“와, 관능의 기쁨을 노래한 ”로마 애가(哀歌; 1790)“를 발표하였습니다. 과학논문 ”식물변태론(植物變態論)“도 이 시기의 산물입니다. 1791년에는 궁정극장의 감독(監督)이 되었으며 그 때부터 고전주의 연극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1789년 이후의 프랑스 혁명의 격동(激動)은 바이마르 공국도 휩쓸게 되어 1792년에 괴테는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從軍)하였습니다. 1794년부터 그는 실러가 기획한 잡지 ”호렌(Horen)“에 협력하여 굳은 우정을 맺었습니다. 이념(理念)의 사람 실러와 실재(實在: 자연)의 사람 괴테와의 이 우정(友情)은 l805년에 실러(席勒)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에 괴테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勇氣)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Faust)“의 재착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 시절(1796)“의 완성하였으며,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1797)“의 발표 등 ‘현재에서의 완성을 지향(志向)하는’ 독일 고전주의는 여기서 확립(確立)되었습니다.
1797년에는 실러(席勒)의 ”시신연감(詩神年鑑)“에 공동작의 단시(短詩) “쿠세니엔(손님에게 드리는 선물)” 414편을 발표하여 문단을 풍자(諷刺)하였습니다. 또한 문단의 물의(物議)를 외면한 채 이야기체로 쓴 시(詩)를 경작(競作)하여 1797년은 ‘발라드의 해’라고 일컬어집니다. 1805년 실러(席勒)의 죽음과 더불어 괴테는 만년기(晩年期)를 맞이하였습니다. 만년의 괴테의 문학 활동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세계문학’의 제창(提唱)과 그 실천이었습니다. 괴테는 그 무렵에 이미 유럽 문학의 최고 위치(位置)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 위치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나아가서 신대륙인 미국의 문학을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 국민문학의 교류(交流)를 꾀하고 젊은 세대를 위한 세계 문학적 시야(視野)를 넓혔던 것입니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1829)”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最高峰)을 이룹니다. 전자(前者)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傑作)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後者)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 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莊嚴)한 드라마입니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大作)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입니다. 인생과 우주(宇宙)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情熱家)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體驗)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미나 헤르츨리프와의 사랑으로서 이 소녀를 모델로 하여 소설 “친화력(1809)”을 썼습니다. 또 하나는 아내 불피우스가 죽은 뒤에 알게 된 빌레머 부인과의 사랑으로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西東詩集; 19)”이 간행(刊行)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괴테는 마리엔바더로 피서여행(避暑旅行)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처녀 우를리케 폰 레베초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은 거절(拒絶)되었으나 그 연모(戀慕)의 정이 시집 “마리엔바더의 비가(1823)”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밖에 만년(晩年)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기행(1829)”과 자서전(自敍傳)인 “시와 진실(1833)” 등이 있습니다.
또한 그의 광학(光學) 연구의 결정인 “색채론(Zur Farbenlehre)”이 1810년에 발표(發表)되었는데 여기에는 뉴턴(牛顿)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 들어 있어 순 학문적인 견지(見地)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나 탁월(卓越)한 관찰과 견해가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괴테는 문학작품이나 자연연구에 있어서 신(神)과 세계를 하나로 보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세계관을 전개하였습니다. 그의 종교관(宗敎觀)은 범신론적 경향이 뚜렷하지만 복음서(福音書)의 윤리에는 깊은 존경(尊敬)을 표시하였습니다. 괴테의 유해(遺骸)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席勒)와 나란히 안치(安置)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괴테의 시 ‘들장미’를 헤르더 식으로 그저 “작은 우화동요(寓話童謠)”로 읽기는 힘듭니다. 또한 이 시에 묘사(描寫)된 ‘거친’ 양성관계(兩性關係)를 아무런 이의(異議) 없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문제(問題)가 있습니다.
에로틱의 영역에서도 여성에게 독자적인 행동의 여지를 허락(許諾)하지 않고 아름다운 희생물(犧牲物)의 역할만을 내어주는 것은 결코 미화(美化)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년, 들장미, 장미를 꺾는다는 메타포, 반복되는 후렴구(後斂句)는 괴테 시의 핵심적(核心的)인 모티프와 이미지들은 이미 옛 민요에 각인(刻印)되어 있습니다. 시인 괴테의 예술적 능력(能力)은 새로운 것의 창조가 아니라 주어진 것의 솜씨 좋은 변형(變形)에서 증명됩니다.
괴테(哥德) 시의 생성 과정에서 소년과 꽃의 대화가 연출(演出)되어 있고 세 단계의 극적 스토리 전개를 보이는 헤르더의 시 꽃 도 연결고리로서 중요한 역할(役割)을 했습니다. 괴테는 ‘발견된’ 시적 소재(素材)를 탁월한 솜씨로 가공(加工)하여 서정성과 음악성이 풍부한 빼어난 형상을 만들어냈습니다.
효과적으로 압축(壓縮)된 형식, 소박하면서도 세련(洗練)된 언어, 절로 노래하고 춤추도록 하는 율동적인 음조(音調)는 이 시가 여러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독자와 음악가를 끌어 모으고 명작(名作)으로 추켜세워진 이유를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별감수성(性別感受性)이 요구되는 21세기인 오늘날에 이 시(詩)에서 내비치는, 관행처럼 되풀이되어온 남녀관계 묘사의 상투성, 남성적 욕망의 폭력적(暴力的) 실현, 방어하면서도 무력하게 굴복하고 마는 희생물(犧牲物)로서의 여성마저 찬미(讚美)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 아래에 괴테의 시 ‘들장미’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들장미 / 괴테
소년은 보았네, 한 떨기 들장미
거친 들에 피어난 예쁜 장미꽃,
가까이 보고 싶어 곁으로 다가가서
흐뭇이 바라봤네, 소년은 기뻤네.
소년은 말했네, 너를 꺾을 거야
장미는 대답했네, 그럼 찌를 테야
오래 두고 아픔을 잊지 못하게
쉬이 꺾일 내가 아닐 걸...
어이하랴 장미는 꺾이었구나,
성미 거치른 소년 애에게
가시로 그의 손 마구 찔렀건만
눈물도 한숨도 소용없었네.
장미여, 장미여, 빨간 들장미
거친 들에 피어난 장미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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