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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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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과 조조 그리고 적벽대전은 실제 역사적 재현인가?

[사진 = 百度圖片]


제갈량이 조조를 미워하게 된 원인은?
193년, 제걀량(諸葛亮)의 나이 12살 때이다. 이때 서주(徐州)의 햇볕은 나른했다. 외지의 각종 할거전쟁(割據戰爭)도 제갈량의 가족에게는 머나먼 일이었다. 다만 총명한 제갈량은 이때 이미 적지 않은 책을 읽었고 사회와 인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생각을 갖추고 있었다. 서주의 담담한 생활은 괜찮은 편이었다. 이 난세(亂世)에 이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제갈량은 조용한 생활가운데 생각이 요동(搖動)쳤다. 어쨌든 그는 태산군(泰山郡), 서주성정도만 볼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해의 어느 날,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그는 중요한 임무(任務)를 받았기 때문에 아마도 늦어서야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공부한 것은 형인 제갈근(諸葛瑾) 혹은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에게 검사받으라고 당부했다. 원래 중요한 큰 인물이 태산군 화현(華縣)으로 와서 노년을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은 아주 이 일을 중시하여 서주의 대소 관리들을 동원하여 접대업무(接待業務)에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큰 인물이 노년을 보낼 곳인 태산군의 군수는 더욱 이 일을 중시했다. 태산군수 응소(應卲)는 사람들을 모아서 임무를 나누어 주었다. 너는 관사(官事)를 준비하고, 너는 환영현수막(歡迎懸垂幕)을 만들고 모두 준비에 서둘렀다. 이때 제갈규는 화초(花草)를 준비했다. 모두 움직여야 할 때이다 보니 평소처럼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 큰 인물(人物)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는 바로 조숭(曹嵩)이다. 바로 조조(曹操)의 부친이다. 당시 조조는 서주와 접경한 연주(兗州)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자신의 세력(勢力)을 키워갔다. 아들 조조가 연주의 우두머리인데 부친은 왜 연주에서 노년을 보내지 않았을까? 오늘날 같으면 아들이 광동에서 관리로 있는데 부친이 티벳으로 가서 노년을 보낸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확실히 조조는 부친 조숭(曹嵩)에게 연주로 와서 노년을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숭도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은 일반인과 달랐다. 조숭의 양부는 환관대장추 조등(曹騰)이다. 조등은 동한말기 환관전권시대(宦官全權時代)에 세력이 아주 컸다. 양부의 덕으로 조숭은 사례교위(四禮校尉)를 지냈다. 제갈량이 조상인 제갈풍(諸葛豊)과 같은 직위이다.

한영제 시기에는 관직을 돈을 주고 공개적으로 팔았다. 이런 매관매직(賣官賣職)의 기회를 조숭(曹嵩)이 어찌 그냥 넘길 것인가. 그래서 그는 거액을 들여서 "대사도(大司徒)"의 관직을 산다. 대사도는 삼공(三公)의 하나이고 그 위는 황제(皇帝)뿐이다. 황제가 황위까지 돈을 받고 팔지는 않을 테니까. 조숭으로서는 살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을 산 것이다. 이 위치에서 조숭은 당연히 적지 않은 돈을 긁어 모았고 금방 엄청난 재산을 모은다. 조조(曹操)가 거병하면서 돈이 필요할 때 조숭이 많은 자금지원(資金支援)을 해준다.

이제 조숭(曹嵩)은 늙었고 말년을 보내야 한다. 아들은 연주(燕州)로 오라고 하는데 그는 거절한다. 거절(拒絶)한 원인은 바로 연주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다. 조숭은 평생동안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았고 고생을 겪지 않았다. 연주는 즐겁게 놀 곳도 없고 맛있는 먹을 것도 없다. 그는 거기는 재미없다고 여긴 것이다. 어쨌든 조숭의 마음속에는 서주(徐州)가 노년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태산(泰山)에서 일출(日出)을 볼 수도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세계의 선경(仙境)인 것이다.

조숭(曹嵩)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떠난다.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은 각 방면의 역량을 동원하여 준비업무를 한다. 제갈규(諸葛珪)도 야근(夜勤)을 하면서 준비했다. 왜 도겸이 이렇게 열정적(熱情的)이었을까? 이치대로라면 현재의 군벌할거시대(軍閥割據時代)에 서주는 바로 도겸의 땅이다. 누구든 자기 땅에서는 자기가 주인이다. 도겸은 조숭이나 조조를 무시해도 되고, 조숭이 경계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 도겸이 열정적인 주요한 원인은 바로 그가 조숭이 서주에 와서 노년을 보내는 기회에 조조와의 긴장관계(緊張關係)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먼저 당시의 할거형세를 간단히 알아보자. 도겸(陶謙)의 서주 북쪽은 조조(曹操)의 연주이다. 연주의 북쪽은 원소(袁紹)의 기주(冀州)이다. 기주의 북쪽은 공손찬(公孫贊)의 유주(幽州)이다. 이때의 도겸은 공손찬과 관계가 괜찮았다(유비도 거기에 있었다). 공손찬은 원소와 사이가 나빴으나 조조는 원소와 같은 편이었다. 그래서 "친구의 친구는 친구(親舊)이고, 친구의 적은 적이다"라는 원칙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도겸은 조조와 적대적(敵對的)이어야 했다. 게다가 서주와 조조의 연주는 접경(接境)하고 있어 먼 친척도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리저리 고민(苦悶)해 보다가 도겸은 이것이 조조와 관계를 개선(改善)할 좋은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모든 조치를 취한 후 성의(誠意)를 표시하기 위하여 도겸(陶謙)은 200여명의 고급호위를 보내어 조숭(曹嵩)을 호송한다. 이 200명의 우두머리는 장개(張闓)이다. 그는 대표적인 토비(土匪)이다. 도겸이 이 임무를 장개(張闓)에게 맡길 때 주로 장개가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무술(武術)도 뛰어나기 때문에 각지의 토비(土匪)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도겸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장개는 원래 토비였다. 정치사상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힘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주 위험한 인물이다. 장개는 임무를 받은 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이건 그저 평소에 하던 일일 뿐이다. 그러나 조숭 일가의 짐을 보자 그는 자신의 마음을 주체(主體)할 수 없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누군가 수백억 원의 현금(現金)을 들고 시골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그게 어떤 충동(衝動)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스스로를 통제(統制)할 수 있을까? 토비인 장개는 돈을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본 적은 없다. 그의 당시 심리상태(心理狀態)가 어떤지 지금 알 수는 없다. 단지 그는 중요한 결정(決定)을 내린다. 살인강도(殺人强盜) 이렇게 하여 삼공의 직위에 있던 조숭 일가 40여명은 모조리 토비의 손에 죽는다. 장개는 돈을 들고 튀어버린다. 그저 노년을 보내려던 큰 인물이 이렇게 죽어버렸다. 그런데 이 일의 영향(影響)은 아주 컸고 주로 아래의 몇 가지 방면이다.

첫째, 도겸(陶謙)이 곤란하게 되고 조조(曹操)는 분노한다.

둘째, 노년을 보낼 목적지인 태산군의 우두머리이자 제갈량부친의 상사인 응소(應劭)는 놀라서 그날 밤으로 바로 원소(袁紹)에게 투항한다.

셋째, 조조는 서주(徐州)를 공격하여 도륙(屠戮) 낼 결심을 한다. 이렇게 하여 서주는 세외도원(世外桃園)에서 인간지옥으로 바뀐다.

넷째, 유비는 도겸(陶謙)에 투신한다.

다섯째, 제갈량의 부친 제갈규(諸葛珪)가 사망한다. 제갈규의 사망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見解)가 있다. 일설(一說)에서는 병사하고 하고 일설에서는 조조(曹操) 측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상사인 응소(應劭)가 도망치기 전에 제갈규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제갈규(諸葛珪)는 남아서 책임을 지기로 하고 도망치지 않았다.

여섯째, 제갈량(諸葛亮)은 조조(曹操)에게 아주 나쁜 인상을 갖게 된다.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인물로 이 인상으로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그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지략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절개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제갈공명의 활약상은 ‘삼국지(三國志)’에서 가장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는데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이 삼국시대(三國時代),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거쳐 수(隨)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분열 시기(分裂時期)에 해당된다. 이 때 지방 호족(豪族)들이 많이 나와 활약하게 되는데 공명도 그 호족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제갈공명의 생애(生涯)에 나타난 그의 지략과 충정 어린 인간미(人間美)를 살펴보기로 한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태어난 해는 서기 181년(光和 4年)이며 공명이 한창 활약한 2 ~ 3세기는 약 4백년간 계속되어온 한(漢)왕조에 의한 통일 지배(統一支配)가 마지막 고비에 이른 시기였다.

공명의 본명은 량(亮), 자(字)가 공명이며 시호는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耶郡 陽都縣: 山東沂水縣)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와 어머니 장씨(章氏)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의 이름은 근(瑾)이라 했고 공명과는 7살 차이가 난다. 공명의 얼굴은 길어서 말상이었다고 한다. 공명은 열 살 때 어머니를 잃었으며 몇 해 되지 않아 아버지 또한 사별(死別)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공명은 아우 균과 함께 형주(荊洲: 湖北省)에 있는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에게 가서 그의 밑에서 자랐는데 후한 말의 전란으로 그의 숙부(叔父)와도 사별하게 된다.

숙부 제갈현(諸葛玄)이 죽자 공명은 양양(湖北省) 북서 20리에 있는 융중(隆中)에서 살게 된다. 그는 17세부터 약 10년 동안 청년이 될 때까지 후한 말의 전란(戰亂)을 피하여 벼슬하지 않고 청경우독(晴耕雨讀: 날이 개일 땐 밭을 갈고 비가 오면 책을 읽음) 하였으며 때로는 집 서쪽에 있는 낙산(樂山)에 올라 유랑하면서 시를 읊기도 했다. 이때부터 양양지방에서는 공명의 호연지기한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며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공명(孔明)은 유비(劉備)의 열의와 성심에 감동하여 결국 유비를 섬긴다. 공명은 27세 되던 해 세상에 나올 계기(契機)를 갖게 된다. 당시 유비는 왕족(王族)의 일족으로서 환관 세력(宦官勢力)인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荊州)에 있으면서 천하평정(天下平定)의 뜻을 두고 있었다. 유비는 용맹성(勇猛性)과 인자함으로 인해 널리 백성들의 인망(人望)에 올라 있었으며 오직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모신(某臣)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깊이 통감(痛感)한 유비가 당시 지방 유지를 통해 추천(推薦) 받은 사람이 바로 제갈공명(諸葛孔明)이었다. 유비(劉備)는 공명이 살고 있는 초려를 세 차례나 내왕한 끝에 겨우 공명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이다. 이 만남에서 공명은 유비의 열의(熱意)와 성심(誠心)에 감동하여 결국 유비를 섬기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때 공명이 유비(劉備)에게 들려준 것이 ‘초려대(草廬對)’로써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이다. 이것은 평소 공명(孔明)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생각으로써 그 내용은 당시 유비가 머물고 있던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손에 넣고 그 국경(國境)을 굳게 지키며 이어 동쪽의 오나라 손권(孫權)과 손을 잡은 뒤 북쪽의 조조(曹操)와 대립하는 계책이었다. 이로써 공명은 유비 휘하(麾下)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신임은 ‘군신수어지교 (君臣水魚之交: 유비와 공명의 사이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긴밀함)’라고 불리 정도로 두터운 관계가 되었다.

‘전경(典經)’에 보면 다음과 같은 공명의 활약상이 나오고 있다. “모든 일을 알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므로 될 일을 못되게 하고 못될 일은 되게 하여야 하나니 손빈(孫臏)의 재조는 방연(龐涓)으로 하여금 마능(馬陵)에서 죽게 하였고 제갈량(諸葛亮)의 재조는 조조(曹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게 하는데 있느니라.” (교법 3장 28절)의 내용 중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대한 부분은 서기 208년 ‘적벽대전(赤壁大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싸움은 유비가 오(吳)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유비가 머물고 있는 형주(荊州)를 점령하기 위해 남진한 조조(曹操)와 양자강 북쪽 적벽에서 대치(對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오와 촉의 동맹군은 조조군에 비해 숫자상으로 불리한 위치(位置)에 있었는데 공명의 지략으로 화공법(火功法)을 쓰게 되었다.

여기서 공명은 조조(曹操)가 진을 치고 있는 쪽으로 동남풍(東南風)을 불게 하기 위해 칠성단(七星檀)을 만들어 칠일칠야(七日七夜) 동안 공을 들였으며 이 기도는 효험(效驗)이 있어 사흘째 되던 날 드디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를 기회로 동맹군(同盟軍)은 적의 수군을 향해 화공을 퍼부은 결과 조조군은 대패(大敗)하고 말았다는 싸움이다.

한편 이 대전에서 공명은 조조(曹操)를 사로잡는 데 있어 신출귀몰(神出鬼沒)한 계책을 발휘함으로써 조조를 궁지(窮地)에 몰아넣게 된다. 동맹군에 쫓긴 조조는 패잔병(敗殘兵)들을 이끌고 그의 본거지인 강릉으로 패주 할 때 가는 곳마다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 복병(伏兵)을 만나게 되는데 모두가 조조의 예상을 뛰어넘은 습격(襲擊)이었다. 쫓고 쫓긴 조조는 어느 갈림길에 이르게 되는데 한쪽은 폭 넓은 평지 길이며 한쪽은 골짜기가 심한 ‘화룡도(華容道)’로 가는 길이었다. 이때 화룡도 쪽은 여기저기서 희미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어 적의 매복이 있음을 암시(暗示) 해주고 있다.

도리어 이 순간에 조조(曹操)는 그의 지모(智謀)를 살린다하여 화룡도(華容道)로 가는 길을 택하게 되는데 이것은 병서에 “허측실지(虛則實之)하고 실측허지(實則虛之)하라.”의 유인술(誘引術)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조의 지모(智謀)보다 한 차원 높은 공명의 재주는 기진맥진하여 화룡도로 올라온 조조 군으로 하여금 관우(關羽)가 이끈 유비군사들과 만나도록 만들게 된다. 

여기서 조조군은 관우의 인정(人情)으로 무사히 도망(逃亡)하였지만 공명의 지략은 이를 계기(契機)로 조조 군이나 오의 손권(孫權)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전후(戰後)에 공명은 ‘군사중랑장(軍事中郎將)’이라는 군사, 재정을 관장(管掌)하는 중요한 지위에 올라 법의 적용을 아주 엄격히 하고 반면 공 있는 자에게는 관직을 두터이 하여 임금의 은혜(恩惠)를 받도록 하는데 힘썼다.

‘전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천지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나니 공명지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 (교법 3장 29절) “상제께서 김형렬을 불러 물으셨도다. ‘네가 나의 사무를 담당하겠느냐’ 형렬이 ‘재질이 둔박하와 감당치 못할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꾸짖으시니 형렬이 대하여 ‘가르치심에 힘입어 담당하겠나이다.’ 여쭈니 상제께서 ‘무한유사지불명(無限有司之不明)하라. 마속(馬謖)은 공명(孔明)의 친우로되 처사를 잘못하므로써 공명이 휘루참지(揮淚斬之)하였으니 삼갈 지어다.’고 일러주셨도다.” (권지 2장 38장) 이 내용들은 상제님께서 ‘공명’의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일 처리를 높이 평가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일화(逸話)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례로 당시 공명의 형이었던 제갈근(諸葛瑾)은 공명의 나라와 대립된 관계에 있는 오나라 장수였는데 공명은 그 형과 공적인 회의석상(會議席上)에서나 얼굴을 대할 뿐 사적인 만남은 일체 하지 않으므로써 공사(公私)를 엄중히 하여 조금도 남에게 의혹(疑惑)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예로 ‘마속(馬謖)’과 ‘공명(孔明)’의 일화를 보기로 한다. 이 일화(逸話)는 앞서 인용한 ‘전경(典經)’ 구절에 나오는 것이다. 서기 228년 공명이 47세 되던 해의 일이다.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때를 기다리던 공명은 중원(中原)의 젖줄기라 할 수 있는 가정(佳亭)을 점령하기 위해 직접 북정(北征)의 길에 올랐다.

이때 공명이 왕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그의 충성심(忠誠心)이 가장 잘 드러난 일대의 명문(名文)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문장(文章)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상황은 누가 먼저 가정(街亭)을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勝敗)가 결정되는 중대한 상황이었다. 이때 공명은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부하 마량(馬良)의 아우 마속(馬謖)을 선봉장으로 발탁(拔擢)하게 된다.

마속은 공명(孔明)으로부터 그의 재주를 인정받았고 공명의 남정(南征)때 전략의 기본 방침을 제의하여 공명이 채용(採用)했을 정도로 공명과는 신의(信義)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봉장 마속(馬謖)은 의기충천(意氣衝天)하여 산 위에다 진을 치지 말라는 공명의 말을 무시하고 산 위에다 진을 쳤다. 이를 기회로 적장 사마중달(司馬仲達)이 즉각 보급로를 차단시키자 마속은 전쟁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敗北)하게 된다. 이 한 순간의 잘못으로 공명은 삼국 통일이라는 대망(大望)을 눈앞에서 놓치게 된 것이다.

그 후 오장원(五丈原) 벌판에서 전쟁에 지쳐 병들어 죽을 때까지 공명은 자기가 속한 촉나라를 위해 수없이 많은 업적(業績)을 쌓았다. 전쟁에 쓸 ‘운반구, 목우(木牛), 유마(流馬)’ 등을 발명하고, 고래부터 병법을 구하여 ‘팔진도(八陳圖), 삼면원진(三面圓陳), 연형진(連衡陳)’ 등을 완성하였으며 10연발의 ‘연노(連駑)’와 적의 진격(進擊)을 막는 ‘칠질려’ 그리고 ‘통유개’와 ‘편수개철오’ 등의 고안(考案)이 그것이다.

서기 234년 공명은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죽을 때까지 그는 군주(君主)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공명(孔明)이 죽을 때까지 심지어 그의 후임(後任)까지 일러 주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모든 권력(權力)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던 막강한 실력자(實力者)였지만 공명은 평소 가진 재산이 뽕나무 800그루와 자갈밭 15경이었다. 이것으로 충분(充分)히 집안 식구들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하며 절대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과연 그의 말대로 그 이상의 재산(財産)은 없었다고 한다.

진정으로 그의 검소(儉素)함과 공리(公利)를 위하는 마음은 유구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히 후세 사람들의 귀감(龜鑑)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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