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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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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재물의 신, 중국 최고의 상성(商聖) 호설암(胡雪岩, 1823~1885 (62)

图片来源 蒋述丨胡雪岩:成功学里老讲他,他到底是个什么人?(文字版)

 

청나라 말기의 상인으로 상인 최초로 1품 관직인 포정사함에 제수되었다.

태평천국군이 항주를 점령했을 당시 군기대신 좌종당에게 군수물자를 조달하여 공을 세웠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환전상, 찻집, 견직물 가게, 약방, 소규모 은행인 은호 등 경제 분야에 탁월한 수완을 보여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호설암(胡雪巖, 1823~1885 (62))은 청나라 말기의 사업가이다.

이름은 광용(光墉), 자는 설암(雪巖)이기 때문에 호설암(胡雪岩)이라고 불렀다.

안후이의 지시현 출신으로 청나라 말기에 항저우에서 창업하여, 상하이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당시 관상으로 막대한 부를 얻은 한편 청나라 정부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게 된다. 관리에게만 허용하던 홍정모와 관복을 상인의 신분으로 극소수의 특례로 부여했기 때문에 '홍정상인(紅頂商人)'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호설암(胡雪巖)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타고난 장사 수완을 발휘하여 청나라 최고의 거상이 된 인물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했을 때 청나라 조정을 지원한 공을 인정받아 청나라의 상인 중 유일하게 1품 관직인 포정사함에 제수되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상성(商聖)'으로 숭배된다.

1823년 안휘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호설암은 이름이 광용(光鏞), 애명이 순관(順官)으로 설암은 자다. 그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따로 학문을 익힐 처지가 안 되어 독학으로 겨우 글씨를 익혔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집안 사정이 더욱 어려워지자 그는 집을 떠나 항주에 있는 전장(錢莊, 환전을 업으로 하는 상업 금융 기관)의 견습생으로 일했다. 일은 고되었지만 그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히 일해 전장 주인의 신임을 얻었고, 3년이 지나서는 전장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1860년 전장 주인이 병사하고 나서 호설암(胡雪岩)은 전장과 함께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때 그는 왕유령(王有齡)을 만나게 된다. 집이 가난하여 관직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왕유령의 능력을 알아본 호설암은 그에게 수금한 은자 500냥을 조건 없이 빌려 주었다. 상경한 왕유령은 민부우시랑이었던 하계청(何桂淸)의 도움으로 절강성 순무 문하에서 양대총판의 자리를 얻었다. 호설암(胡雪岩)의 도움으로 출사하여 절강성 순무로 승진한 왕유령은 그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왕유령은 호설암에게 절강성의 군사와 관계된 일을 일임했다. 이에 호설암은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조운(漕運, 현물로 거두어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수도까지 선박으로 운반하던 제도) 등의 사무를 처리했다. 관리의 비호 아래 사업을 하는 호설암의 전장은 더할 수 없이 번성해 갔다.

1861년 호설암(胡雪岩)은 좌종당과 인연을 맺으면서 한 번 더 크게 성공했다. 그해 홍수전과 농민 반란군이 세운 기독교 신정(神政) 국가 태평천국의 군대가 양절(兩浙) 일대에서 난을 일으키자, 호설암은 상해에서 군수물자와 군량미를 항주로 수송해 청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1862년에도 호설암은 상해에서 구입한 물자를 가지고 항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항주는 태평천국 군대에게 함락되었고, 항주를 방어하던 왕유령이 자결한 후라 호설암은 물자를 실은 배를 정박시킬 수 없게 되었다. 호설암은 군수물자를 배 안에 숨겨 두었다. 이때 좌종당의 부대가 군량미 부족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호설암은 그 길로 좌종당을 찾아가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모두 바쳤다.

이 일로 호설암(胡雪岩) 1862년 식량 공급을 담당하는 좌군판량대 겸 운송을 책임지는 전운국무에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스 군관과 함께 서양식 무기로 장비를 갖춘 군대를 훈련시키고 유해 안치, 우차 복구 등 전란 피해를 수습했다. 1865년 호설암은 좌종당에게 복주선정국을 창설해 청나라 해군력을 증강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좌종당은 그에게 선박 제조의 중임을 맡겼다. 호설암(胡雪岩)은 선박 제조에 필요한 외국인 조선 기술자들을 초빙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에게서 물품을 구입했다. 이후에도 호설암은 좌종당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77년 좌종당이 서정(西征)할 때 군량미와 1,200여 만 냥의 자금을 차관으로 들여와 서양의 무기를 구매해 지원했다.

호설암(胡雪巖)은 정부의 무기 구입 대행과 외국 차관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막대한 상업적 이익을 거두었다. 또한 그는 좌종당의 추천을 받아 포정사함의 1품 관직을 받았으며, 당시 군공을 세워야만 받았던 황마괘(黃馬褂, 황색 마고자)를 서태후에게 하사받았다. 이때 그는 1품 관료임을 상징하는 붉은 산호가 박힌 모자를 수여받아 당시 사람들에게 홍정상인이라고 불렸다.

호설암(胡雪巖)은 좌종당을 원조하면서도 본업인 전장에 전념하여 항주의 전장을 크게 성장시켰다. 그는 각 도시마다 전장과 은호(銀号, 소규모 은행)를 설치했다. 항주에는 부강전장과 부강은호, 상해에는 부강설기전장과 부강은호, 영주에는 통가전장과 통려은호, 복주와 한구에는 유성은호, 북경에는 부강복기은호 등 전국 규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였다. 청나라 조정대신과 부호들은 호설암의 점포에 돈을 예치했으며, 호설암은 그 자금을 활용하여 다른 사업으로 확장했다. 그는 26개의 전당포, 찻집, 견직물 가게, 약방 등을 경영하여 큰 부를 쌓았다.

특히 호설암(胡雪巖)은 호경여당약포라는 약방을 만들어 경영했는데, 그는 당시에는 획기적으로 '신보(申報)'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약 배달이라는 새로운 판매 전략을 내세워 상인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호설암의 약방이 문전성시를 이루자 경쟁 약방들은 담합을 시도했고, 이에 그는 약값을 인하하고 반드시 정가를 받게 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나누어 주었고, 군영에는 기부 형태로 원가에 약을 제공했다.

호설암(胡雪巖) 3천만 냥이 넘는 재산을 가진 부자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살아 있는 재물의 신이라 불렀다. 재산 규모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그는 황제에 버금가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항주에 있는 그의 저택은 몇 개의 골목에 이어져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이며, 구리와 도자기 가루를 넣은 벽돌로 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수많은 처첩을 두어 십이금채(十二金釵)’라 부르며 저택 안의 각 건물마다 한 명씩 기거하게 했다고 한다.

1882년 호설암(胡雪巖)은 외국 상인에게 넘어간 생사(生絲, 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정련이나 연사로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실) 사업을 회수하기 위해 거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2천만 냥을 투자하여 생사를 모두 사들였다. 생사를 구입할 수 없게 된 외국 상인들은 1883년 앙심을 품고 호설암의 생사를 보이콧했다. 생사 재고를 떠안게 된 호설암은 800만 냥의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고, 손실을 만회하고자 했던 투기가 실패하면서 다시 400만 냥을 손해 보았다. 생사 사업의 실패로 막대한 손실을 입자 채권자들이 몰려들었고, 호설암(胡雪岩)은 전장 점포를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33년 전장과 은호가 영업정지되면서 결국 파산했다.

호설암(胡雪巖)이 파산하자 그의 전장과 은호에 돈을 예치했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昕)과 협판대학사 문욱(文煜) 등의 고관대작들은 청나라 조정이 직접 호설암의 파산 처리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광서제는 호설암(胡雪岩)의 관직을 삭탈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심문을 명했다. 1885년 호설암은 울분 속에서 병사했다.

호설암(胡雪巖)이 상인으로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던 데는 항상 신용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시대와 권력의 흐름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다섯 가지의 원칙을 두고 장사를 했다.

첫째,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자 했다.

둘째, 타인의 도움으로 돈을 벌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

셋째, 돈을 버는 데 있어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친구에게 미안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넷째, 절대 신의와 양심을 저버리지 않으며 기회만을 탐하지 않았다.

다섯째,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지만, 선을 베푸는 데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확고한 경영철학과 더불어 단순히 개인의 이익만을 좇는 장사가 아닌 민족정신을 가지고 외국 상인과 당당히 맞서는 장사를 했기 때문에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음에도 중국인들은 그에게 서슴없이 존경심을 나타낸다.

 

 호설암고거(胡雪岩故居)

호설암(胡雪巖)은 항주 태생이며 설암(雪岩)과 함께 광용(光墉)으로 불렸다. 그의 본적은 안휘(安徽) 지방이다. 호설암은 유년 시절 은행을 설립했던 대부호 왕요린의 가게에서 일했다.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주종탕의 도움도 받았다.

호설암(胡雪巖)은 청나라 말기에 전설적인 거상으로 불린다. 호설암(胡雪岩)은 부동산, 무기 수출입, 실크 수출입 사업을 했다. 사업을 통해 쌓은 재력과 명성으로 그는 제약 회사를 차렸다. 이러한 경력으로 그는 중국 당국에서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호설암(胡雪巖)은 너무 가난했지만 혼자 스스로 학문을 익히고, 독학으로 글을 배웠다. 타고난 인품과 화려한 상술로 근대의 상성(商聖)이 된 그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홍정(紅頂) 상인으로 이름을 날렸다.(홍정상인이란 1품 관직을 상징하는 붉은 산호모자에서 비롯된 말이다)

호호설암고거(胡雪岩故居)는 절강성 항주시 상성구 원보가(上城区元宝街)에 위치한다.

호설암고거 공사는 1872년에 시작됐고, 1875년에 준공됐다. 규모는 5,815m²이다. 내란으로 훼손된 이곳은 90년대 중반에 대대적으로 수리·복원됐다. 중국 중요문화재다. 중국 전통건축 특색과 서방건축 미적 품격이 가미된 아름다운 저택이다.

중국 내에서 수리보전이 가장 잘 된 청말(晚清) 공상업형 건축군이며 안휘지방 건축풍격을 보이는 유명한 약방인 호경여당(胡庆余堂) 인근에 위치한다.

호설암고거(胡雪岩故居)로 가는 길 담벼락에 쓰인 문구가 있다.

'쑤저우에서 태어나 항저우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는 중국의 격언이다.

중국에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란 말이 있다. 위로는 천당이 있고, 아래에는 쑤저우(소주)와 항저우(항주)가 있다는 뜻이다. 그 만큼 소주와 항주가 아름답고 살기 좋다는 뜻이다.

호설암고거(胡雪岩故居)는 복합용도 구조이다. 13개의 방이 있고, 통로가 미로처럼 연결돼서 초행자는 자칫 이곳저곳으로 헤매게 된다. 특히 잘 계획된 정원이 있는데, 정원 이름은 지원(芝園)이다.

지원(芝園)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연벽당, 세추원, 청우정, 냉향원 등이고 중국에서 가장 큰 인공종유동(鍾乳洞)이 된 가산(假山)도 아름다움 저택이다.

호설암고거(胡雪岩故居)에는 태호석을 많이 사용했다. 태호석은 소주와 무석에 걸쳐 있는 큰 호수인 태호(太湖) 밑바닥에서 캐 올린다. 태호석으로 만든 석가산이 있고, 정원연못 중앙에 정자가 있고 회랑과 미로 같은 오솔길들이 포함돼 있다.

당시에 재료로 벽돌, 나무, , 진흙 등이 사용됐다. 정원에 있는 석가산은 인위적인 동굴인데 하층부분 기초석으로 태호석을 가져와 사용했다.

호설암고거(胡雪岩故居)는 중국중점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 편액

근선성영(勤善成榮): 근면하고 착하게 살면 영화(榮華)로운 삶을 살 수 있다.

 

红顶商人胡雪岩:30年从放牛娃成为清朝首富,却在3天内破产落败

来源: 厉羽萱

他把生命能量也发挥到了极致,他不是英雄,是人杰。——阎建刚

中国两千多年的封建社会中统治者将百姓分为四个等级,分别是士农工商,在这几个等级中商人的地位是最低的,历朝历代统治者都推行重农抑商。在清朝时期出现了“红顶商人”,他们是能够影响政府政策的企业界人士。

清朝最著名的红顶商人就是富甲天下的胡雪岩,他用了三十年的时间从一个放牛娃成为清朝首富,慈禧御赐黄马褂,临死前留下3句话。

放牛娃变掌柜

1823年,胡雪岩出生于安徽绩溪胡里村,由于从小他的家庭贫困,为了生活,胡雪岩在很小的时候就开始帮别人放牛赚零花钱。有一天胡雪岩在去放牛的路上发现了一个包裹,他打开包裹看到里面都是白银,那是他长那么大见过最多的银子。

但是面对这些银子他并没有心动,而是选择在原地等失主。失主找来后,胡雪岩把银子全数还给了失主,当时失主认为胡雪岩是个值得信任的孩子,于是推荐胡雪岩去杭州的一个钱庄干伙计。

胡雪岩进入钱庄后,他开始埋头学习。他知道自己要想过好生活就要有一门手艺。在平日空闲的时间里,他便向钱庄的一些老先生学写字、认字以及打算盘,有时学习得太认真,连吃饭和睡觉都忘了。在很短的时间里,他就学会了很多字,打得一手好算盘,钱庄的掌柜便将他提拔为钱庄的会计。

有一次正在赶路的胡雪岩遇上大雨,当时与他同路的一个陌生人没有带伞,他就帮人家打伞,后来只要是下雨天他总会在路上帮一些没带伞的陌生人打伞。来来去去这附近的人都认识他,对他大加称赞。

后来他的勤劳踏实让杭州阜康钱庄于掌柜十分喜爱,于是将他收为学徒。于掌柜年纪越来越大再加上没有子嗣,所以一直都将胡雪岩当作亲儿子培养,在于掌柜临终时把价值5000白银的钱庄悉数托付给胡雪岩。

走上官商之路

胡雪岩在茶铺里认识了一个落魄书生王有龄,王有龄虽然一身才气,胸怀大志,但他的家境贫寒,没有多余的钱让他进京赶考。那时的清朝官吏腐败,官官相惠,要想进京做官最重要的是要有足够多的银子去疏通关系。胡雪岩得知情况后,从钱庄借出500两的银票给了王有龄,让他进京。

王有龄十分感动,他进京谋职之后,步步高升成为了浙江巡抚。在这期间他一直都没有忘记胡雪岩给予他的帮助,他利用自己的官职让胡雪岩的商路广开,随着时间不断推移,胡雪岩的生意越做越大,当时的胡雪岩几乎掌握了浙江一半以上的财富。

1861年,太平军攻破了由王有龄统管的杭州,王有龄最终选择自杀向朝廷谢罪。随着王有龄的离世,胡雪岩没有了依靠,在这迷茫之际,他通过关系认识了新的浙江巡抚左宗棠,并且获得了左宗棠的信赖,逐渐掌握了浙江省的钱粮、军饷,从中收获了很高的利润。

红顶商人

胡雪岩常以亦官亦商的身份在通商口岸间来往,工作之余他还结交了许多外国商人,从外国人手中购买了大量洋枪洋炮,为左宗棠训练了约千余人的常捷军。这支军队的实力并不弱,与清军联合进攻被太平军攻占的地方。

那个时期大小将官在战争中所取得的战利品不论大小,都会拿到胡雪岩的钱庄中存放。胡岩也因此积攒了雄厚的资本,开始在各市镇设立商号,仅用了几年的时间,他的家产已超千万,成为浙江省的首富。

后来太平军消灭后,胡雪岩依靠左宗棠的权势,在全国各省设立二十多家钱庄以及开办各种商品贸易,操纵江浙商业。他一个放牛娃用了近三十年的时间依靠自己的经商才能,以及官场的人脉关系成为了国内首富,富甲一方。

在战乱时期,他救助因战乱而家破人亡的百姓,收殓了数十万因战事无人收敛的尸骸。他还极力劝说当地的富商、官员捐款,用来改善百姓生活等事务。胡雪岩也因此成为百姓口中的大善人,一时之间名声大噪。

胡雪岩成立国内首家新式造船厂,用了两年的时间成功造出了我国独立制造的第一艘轮船“万年青”号。随着不断地发展,胡雪岩的钱庄布及大江南北,后来由于胡雪岩辅助左宗棠有功,同治皇帝授予胡雪岩江西候补道,赐穿黄马褂,他也因此成为了一个典型的红顶商人。

3天从首富变穷人

1882年,胡雪岩在上海耗资2000万两白银开办蚕丝厂,企图垄断丝茧贸易。当时的蚕丝厂大部分都是外商在经营,所以胡雪岩的厂子在刚建成不久便引起外商联合抵制。

胡雪岩以高价收尽国内蚕丝上百万担,就在准备垄断蚕丝贸易的时候,中法战争爆发了。随着中法战争的爆发,蚕丝制品市面发生了翻天覆地的变化,国内金融危机也突然爆发。胡雪岩被迫贱卖蚕丝制品,亏耗1000万两。

由于亏损的数额过大,一时之间钱庄周转不灵,这件事情传播出去后,各地官僚竞提存款,群起敲诈勒索。仅仅用了三天的时间胡雪岩便破产了,最终宣布京城阜康银号倒闭。

当时清朝的当权者下谕旨,将胡雪岩革职,并让左宗棠追回胡雪岩欠款。左宗棠迫于朝廷的压力派人去查封胡雪岩名下的商号以及各种生意店铺。其实胡雪岩到破产的地步,最主要的原因就是他的官商的身份。

左宗棠和李鸿章在朝廷上是一对不可和解的敌人,胡雪岩作为左宗棠的左膀右臂,自然也成为李鸿章的敌人。胡雪岩资金周转不灵的消息是李鸿章联合外商散布出去的,胡雪岩其实就是李鸿章和左宗棠政治斗争下的牺牲品。

1885年,胡雪岩在贫恨交加中郁郁而终,享年62岁。在临终前他留下了三句遗言“后人不要从政”、“后人不要经商”、“胡姓子孙不与李姓通婚”。以此来警示后代不要步他的后尘。

胡雪岩曾这样评价过自己的一生,他认为自己的一生其实就是在赌博,看似风光无限,实则如履薄冰。虽然他最终以破产收场,但是这并不意味着他失败了,他的经商之道,从古至今依旧值得后人学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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