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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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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새에게 자기 알을 맡기는 뻐꾹새

지금도 내 연구실 앞 건물에 우뚝 선 피뢰침 꼭대기에서 뻐꾸기 수놈 한 마리가 목청을 한껏 높여 사랑노래를 부르고 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지. 녀석은 언제나 확 트인 높다란 곳에서 뻐꾹 뻐꾹 세차게 소리를 내지른다. 암놈을 꼬드기는 행위다. 절대로 구슬픈 울음이 아니다. 부럽다. 종명(終命)을 기다리고 있는 이 늙다리의 귀에는 저 소리가 정녕 신비롭기만 하다. 여느 동물이나 수놈은 잘 울어대지만 암놈은 음치(音癡)다. 뻐꾸기의 암놈도 다르지 않아서 ‘삣 빗 삐’ 들릴락 말락 낮은 소리를 낼 뿐이다.
한데, 저것들은 분명히 작년에 이 근방 숲에서 태어난 놈들이리라. 녀석들은 제비처럼 제가 태어나 자란 곳(서식지)을 기억하여 대만이나 필리핀 등지의 동남아시아에서 월동하고 오뉴월에 귀신같이 찾아온다. 뻐꾸기(cuckoo) 무리는 우리나라말고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도 서식한다.
그런데 제 알을 제가 품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집어넣어 새끼치기 하는 것을 탁란(托卵)이라 한다. 탁란하는 새(탁란조)는 모두가 두견(杜鵑)이과(科)로 우리나라에는 뻐꾸기, 두견이, 매사촌, 벙어리뻐꾸기가 있고 뒤의 두 종은 아주 귀한 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두견새는 꾀꼬리의 둥지에 알 하나를, 그리고 뻐꾸기는 때까치, 알락할미새, 붉은머리오목눈이(뱁새)의 둥우리에 역시 한 개를 낳는다. 지구상 새의 약 1%가 얌체족인 탁란조다.
“뻐꾸기가 둥지를 틀었다”고 하면 가능성이 없는, 웃기는 일을 비꼬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 탁란을 다른 말로는 ‘부화기생(brood parasitism)’이라고 하며 어미가 알을 품지 못하니 새끼도 따라 못한다.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어찌 줄 수가 있나. 십자매에 금화조나 문조의 알을 품게 하는 것도 탁란이 아닌가. 하나 분명한 것은 귀소본능(歸巢本能)은 물론이고 자기를 키워준 어미 새와 같은 둥지에 알을 맡길 것이다. 어미와 보금자리가 이미 각인(刻印)되어 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탁란하는 새(기생 새)와 탁란을 당하는 새(숙주 새)가 서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요, 무엇보다 알의 색깔이 서로 같다.
뱁새가 알(보통 3~5개)을 품고 있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기회만 노리던 눈치 빠른 뻐꾸기는 잽싸게 달려들어 알 하나를 깨먹거나 굴려 떨어뜨리고, 제 것 하나를 재빨리 낳고는 줄행랑을 친다. 이렇게 이 둥지 저 둥지를 배회하면서 12~13개의 알을 낳는 요사(妖邪)한 암놈 뻐꾸기다. 보통 새알이 부화하는 데 14일이 걸리는 데 비해 뻐꾸기의 것은 9일이면 된다. 부화 후 10시간이 지날 무렵에 드디어 망나니 본성이 발현(發現)한다. 제 잔등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하면 날갯죽지를 뒤틀어서 집 바깥으로 밀어내버리는 본성을. 이렇게 하여 어미를 독차지한다.
그것도 모르는 뱁새 어미! 알고도 속아주는 것일까? 제 몸을 삼킬 듯이 다 자란 뻐꾸기 새끼를 금이야 옥이야 보살펴 키우는 어미 뱁새다. “영리한 자의 속임수란 말인가? 뻐꾸기에게 탁란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어미 뱁새는 날개가 헤져 너덜거리며 먹이 찾아 숲속을 힘들게 쏘다니고 있을 때 다른 어미 뻐꾸기는 먼 나무 위에서 청아(淸雅)한 소리로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낳은 어미와 기른 어미, 두 어미를 가진 뻐꾸기! 뻐꾸기를 욕할 처지가 못되어 할 말을 잃고 만다. 유구무언(有口無言)! | 강원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권오길

布穀鳥把自己的蛋託付給別人。


直到現在,在我研究室前建築中矗立的避雷針頂端,一隻布穀鳥的雄鹿還在大聲地唱着愛情歌曲。 他說:"飛高的鳥兒看得遠。" 小傢伙總是在豁達的高處布穀布穀地大聲叫喊。 這是慫恿母子的行爲。 絕對不是悲傷的哭聲。 真羨慕。等待終命的這條老橋的耳朵裏,那聲音真神祕。 其他動物和公子都愛哭,但母子是音癡。 布穀鳥的雌鳥也沒有什麼不同,只能發出"嗶嗶嗶嗶"的低沉聲音。
但是,那些肯定是去年在這附近樹林裏出生的傢伙。 小傢伙們像燕子一樣記得我出生長大的地方(棲息地),在臺灣或菲律賓等地的東南亞越冬,五六月像鬼一樣來到這裏。 布穀鳥(cuckoo)羣不僅棲息在韓國,還棲息在歐洲、非洲、亞洲等地。
但是,我不抱自己的蛋,偷偷地塞進其他鳥的巢中喂崽,這被稱爲託卵。 鳥類(託卵鳥)都是杜鵑科科,在韓國有杜鵑、杜鵑、梅沙村、啞巴杜鵑,後面的兩種鳥都成了非常珍貴的鳥類。 杜鵑在黃鶯的巢穴裏產下一顆蛋,布穀鳥在飛毛腿、白鸛、紅頭鴨頸眼的巢穴裏產下一顆蛋。 地球上約1%的鳥是無恥族的託蘭鳥。
如果說"布穀鳥築巢了",那可能是對沒有可能、搞笑的事情的諷刺。 是的。託卵用另一種語言叫做"孵化寄生(brood parasitism)",母子不能抱蛋,連幼子也跟不上。 未曾接受的愛,怎能給予呢。 讓十字姐妹懷抱金花鳥或文鳥的卵不也是託卵嗎? 但可以肯定的是,鳥巢不僅歸巢本能,而且鳥巢裏也會存活於養育自己的母鳥。 因爲已經刻上了母親和家園。 換句話說,打蛋的鳥(寄生鳥)和打蛋的鳥(宿主鳥)是固定的,最重要的是卵的顏色是一樣的。
小鳥抱着3~5個蛋(一般情況下是3到5個),在暫時離開的時候,只盯着機會的眼力見快的布穀鳥迅速撲上去,吃掉一個蛋或滾落,迅速產下一個蛋後逃跑。 這樣徘徊在鳥巢裏,生下12~13個蛋的邪惡的雌鳥布穀鳥。 一般鳥蛋孵化需要14天,而布穀鳥孵化只需9天。 孵化後過了10個小時,野蠻的本性終於顯現出來。 如果碰到自己背上的硬東西,就會扭動翅膀,把翅膀推到屋外。 這樣獨攬母親。
連這個都不知道的裴鳥媽媽!難道知道還騙我嗎? 像吞噬自己身體一樣長大的布穀鳥幼仔是金子玉子般照顧和飼養的母鳥。 "難道是聰明人的騙術嗎? 被布穀鳥託亂是不可避免地宿命嗎? 當母鳥的翅膀散開,在樹林裏尋找食物時,另一隻母鳥在遠處的樹上用清雅的聲音愉快地唱歌。" 生下地母親和養地母親,擁有兩個母親地布穀鳥! 因爲不能罵布穀鳥,所以無話可說。 有口無言! | 江原大學生命科學系教授權五吉

 

뻐꾹새에게 답하다
 
늦은 봄부터 울기 시작한 뻐꾹새 울음소리. 한여름에도 들린다. 뻐꾹새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애틋한 느낌이 든다. 아득히 먼 곳에서 쓸쓸함, 외로움 같은 것을 말하는 듯한 울음소리. 신새벽 잠결에 들리던 뻐꾹새 소리는 한낮에도,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들려와 내 마음에 애달픈 여운을 남긴다.

날마다 뻐꾹새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애절한 울음에 절로 감정이입이 되어 불볕더위도 장마도 코로나도 잊고 뻐꾹새가 우는 세상으로 이끌려간다. 숲에서는 뻐꾹새 소리 말고도 사이사이 멧비둘기, 꾀꼬리, 까치, 소쩍새 소리도 들리고 이따금 꿩이 우는 소리도 들린다. 그 가운데서도 유독 뻐꾹새가 해종일 나를 이끈다.

뻐꾹, 뻐꾹, 뻑뻐꾹, 그 아련한 울음소리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호소하는 것만 같아서 한번은 뻐꾹새에게 무엇이라고 답을 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애틋하기도 서럽기도 한 소리는 메아리가 울려 더욱 마음을 안쓰럽게 해서다. 그것이 왜 내게는 인생의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뻐꾹새가 우는 것은 암컷을 부르는 소리요,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는 다른 새가 부양하는 자기 새끼들에게 둥지를 배회하며 참부모가 자기라는 것을 세뇌시키는 소리라고 조류 전문가들은 말한다.

나는 그런 뻐꾹새의 야릇한 생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울음소리가 혹시 나처럼 하릴없는 사람에게 무어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뻐꾹새한테 나도 무어라 답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너무나 간절하고 구슬픈 울음소리에 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뻐꾸기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한 대목을 보면 ‘지금도 나는 네 소리를 들을 수 있구나./ 들판에 누워 귀를 기울이면/ 어느덧 꿈 많고 행복스러웠던 소년시절이/ 나에게 다시금 되돌아온다.// 오오 행복스러운 새여!/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대지가/ 다시금 멋진 꿈나라가 되고/ 네가 살기에 적합한 곳이 되는 듯하다.’

그렇다. 뻐꾹새 울음소리가 들리는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 순간 어린 시절의 천국으로 되돌려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뻐꾹새는 꿈나라로 나를 데려가는 전령 같은 새다.

뻐꾹새는 가을이 오면 추위를 피해 먼 남쪽 나라로 간다. 그 새가 봄에 와서 여름 한철을 내 마음의 동무가 되었다가 먼 나라로 간다. 뻐꾹새가 가고 나면 나는 다시 내년 봄을 기다려야만 한다.

은퇴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아도, 다만 뻐꾹새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 설레이며 사는 그것만으로 나는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뻐꾹새는 마치 인생은 쓸쓸한 것이라고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다.

나처럼 미약한 존재가 세상에 무슨 큰일을 할 재간도 없고 그저 뻐꾹새와 교감하며 자연의 오묘한 신비 가운데 사는 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펼친다. 그것으로 되었다. 이렇게 인생의 먼 길을 지내와서 보니 내가 뛰어다니며 아등바등 살아온 날들을 울어주고 싶다.

그때 뻐꾹새 울음소리를 들었더라면, 그때 마음속에 뻐꾹새 울음소리를 들여놓았더라면…. 숲에서 들려오는 뻐꾹새 울음소리는 내게는 이 대자연이 들려주는 설법처럼 들린다. ‘쓸쓸함, 쓸쓸함!’이라고.

나는 아둔해서 이렇게밖에 뻐꾹새 소리를 알아듣질 못하지만 인생은 헛되다라고 생각다가도 뻐꾹새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생에는 우리가 알지 못할 더 큰 뜻이 있으며 결코 덧없는 것이 아닌, 고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끝끝내 그것을 찾아야 한다. 내가 뻐꾹새 울음소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쓸쓸함의 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숲에서는 뻐꾹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워즈워드처럼 나도 뻐꾹새 소리를 들으려고 얼마나 헤매었던가. 내가 뻐꾹새 울음소리를 듣는 지금 이 시간 나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 명예, 부, 그 무엇도 다 내 것이 아니다. 저 뻐꾹새 울음소리 말고는 나는 가까이하고 싶은 것이 없다. 이것이 내가 뻐꾹새에게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뻐꾹새 소리는 바로 옆 상수리나무 가지에서 울어도 아스라이 저 멀리에서 우는 듯이 들린다. 한마디로 뻐꾹새는 어디서 우나 멀리 떨어져서 우는 것처럼 들린다. 아주 멀리는 아니고 조금 멀리서.

뻐꾹새 울음소리는 나를 일상에서 벗어난 현실 바깥의 나라로 데려간다. 시름없는 그들 세상으로 오라고 초대하는 것만 같다. 뻐꾹새가 들려주는 울음소리에 우리가 알아야 할 무엇인가의 실마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뻐꾹새여, 네 노래 참 고맙다! 너와 함께 이 힘든 세상 고락을 잠시 잊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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