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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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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경농무 출신인 제갈량이 관직에 오른 후 황제 꿈을 가진 적 있었는가?

[사진 =  wpckucdy]


제갈량은 관직에 나가기 전에 농사를 지었을까?
제갈량을 얘기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중국에서는 ‘三顧茅廬’라 한다)로 관직에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려(草廬, 중국에서는 ‘茅廬’)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印象)은 바로 농촌의 초가집이다. 그렇다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농민이다. 사서(史書)에서도 제갈량은 남양(南陽)에서 "궁경농무(躬耕隴畝)"했다고 하고 제갈량도 스스로 자기는 원래 "포의(布衣)"라고 말해서 더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제갈량(諸葛亮)은 관직에 나오기 전에 농사를 지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러했을까?

제갈량은 낭야 양도(琅邪陽都) 사람이다. 조상은 한나라의 사례교위(司隷校尉) 제갈풍(諸葛豊)이다. 그는 제갈량의 시대보다 200여년 앞선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이 8대도 넘는 조상(祖上)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가 제갈량(諸葛亮)에게 미친 영향은 거대하다. 유비가 더욱 먼 중산왕의 후예(後裔)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놀라게 된다. 한나라는 집안과 출신을 매우 중시한 완조이다. 비록 "거효렴(擧孝廉)"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지만 만일 강력한 가족의 배경(背景)이 없다면 누가 너를 추천(推薦)해 주겠는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동오(東吳)에 있는 형이나 위(魏)에 있는 동생도 모두 추천을 받아 관직(官職)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제갈량(諸葛亮)이 낭야(琅邪)에서 남양(南陽)으로 온 것에서 더더욱 가족의 명망(名望)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제갈량의 부친은 제갈규(諸葛珪)이다. 한나라말기에 태산군군승(泰山郡郡丞)을 역임했고 제갈량이 아주 어렸을 때 사망한다. 제갈량의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은 원술이 추천하여 예장군태수(豫章郡太守)가 된다. 제갈량과 그의 동생 제갈균(諸葛均)은 숙부를 따라 임지로 간다. 마침 조정에서 별도로 주호(朱皓)를 예장태수로 임명하여, 제갈현은 예장태수가 되지 못한다. 제갈현은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와 교분이 있어서 그에게로 가서 의탁한다. 이렇게 하여 제갈량일가는 남양으로 와서 남양군의 섭현(葉縣)에 거주한다. 제갈현은 건안2년에 병사한다. 이때 제갈량의 나이 16살이다. 숙부가 죽은 후, 제갈량은 남양군의 등현(鄧縣)으로 가서 양양성(襄陽城)에서 서쪽으로 이십리 떨어진 곳에 거주한다. 구체적인 지명은 융중(隆中)이다. 제갈량은 이곳에서 글을 읽고 농사를 짓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원래 태수의 관직을 받은 숙부(叔父)를 따라갔는데 숙부가 태수(太守)로 취임하지 못하자 다른 사람에게 의탁(依託)한다. 그리고 얼마 후 죽는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 후의 생활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리걸식(遊離乞食)하지도 않고 농사지을 땅도 있었다. 한 곳에서 지내기 힘들면 다른 곳으로 옮겨서 여전히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이 토지(土地)도 규모가 적지 않았다. 일가족의 생계(生計)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유가 있어 글을 읽고 유학(留學)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책'에 대하여 말하자면 현재는 비싸서 사지 않으려는 사람은 있어도 비싸서 살 수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때는 달랐다. 일반 사람들은 책을 살 수 없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책을 어디에서 파는지도 알지 못했다.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 마을에서 아무도 학교(學校)에 다니지 않는다거나, 책 한권도 없는 일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전란(戰亂)의 시대에 종이는 사치품이고, 고적(古籍)은 서간(書簡)이고 비단에 편지를 쓰던 시대에 편안하게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어떤 집안이겠는가? 당연히 제갈량(諸葛亮)의 책은 아마도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조상이 가치(價値)가 엄청난 서적을 남겨줄 수 있다면 단순히 농사(農事)짓는 집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의 토지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아마도 두 가지 방법(方法)일 것이다. 하나는 구매(購買)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표(劉表)가 그의 집에 준 것일 것이다. 후자의 가능성은 아주 적다. 왜냐하면 그의 숙부가 처음에는 융중(隆中)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전자라면 그의 집안은 돈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당시는 전란(戰亂)의 시대여서 노는 땅이 많았겠지만 형주(荊州)는 달랐다. 형주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많은 외지인구들이 이곳으로 피난(避難)을 와 있었다. 특히 양양성의 근처는 토지가격(土地價格)이 절대로 싸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제갈량이라는 이 농사짓는 선비는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제갈량이 사귀던 사람을 보자. 최균(崔鈞, 자는 州平), 석도(石韜, 자는 廣元), 서서(徐庶, 자는 元直), 맹건(孟建, 자는 公威)의 4명을 '제갈사우(諸葛四友)"라 칭했다. 이 4명은 서서가 '단가자(單家子)'라고 칭해지는 외에 나머지 3명은 모두 직접 관직(官職)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균의 부친은 더더욱 한나라의 태위(太尉)였다. 이를 보면 제갈량의 이 관료집안 후대는 유비(劉備)처럼 몰락하여 '신발를 팔고 돗자리를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덕조(司馬德操)는 '덕공(德公)'으로 칭해지고, 방덕공(龐德公)은 '방공(龐公)'으로 칭해졌는데 이렇게 '공(公)'으로 칭해지는 것은 사회에서 존경(尊敬)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유표(劉表), 조조(曹操), 유비(劉備) 같은 제후들에게 중시되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모두 제갈량과 교분(交分)이 있었다. 이를 보면 제갈량이라는 이 농사짓는 포의(布衣)는 절대 일반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제갈량가족의 혼인관계(婚姻關係)도 있다.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龐山民)은 제갈량의 둘째언니를 처로 취했는데 방통(龐統)은 바로 방덕공의 조카이다. 이렇게 보면 제갈가와 방가는 인척관계(姻戚關係)에 있다. 제갈량의 처인 황씨(문학작품에서는 ‘黃月英’이라고 불린다)는 현지호족인 황승언(黃承彦)의 딸이다. 이 황승언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형주의 최대가문인 채씨(蔡氏)가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채풍(蔡諷)의 누나는 한나라의 태위인 장온(張溫)에게 시집을 갔고 채풍의 큰 딸은 황승언에게 시집을 간다. 둘째딸은 유표에게 시집을 갔다. 유표의 계실(繼室)이다. 그리고 채풍의 아들이 바로 채모(蔡瑁)이다. 제갈량을 기준으로 보면 황승언은 장인이고 유표는 이장인(姨丈人)이다. 그리고 구장인(舅丈人)은 채모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황승언이 딸을 제갈량에게 시집보낸 것은 딸이 못생겨서라고 한다. 그러나 황씨집안과 같은 지위에서 아무리 못생겼더라도 보통 지주에게 시집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황제의 딸은 시집못갈 걱정은 없다." 호족집안의 딸도 마찬가지이다. 시집못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물며 이 혼인은 황승언이 먼저 제안(提案)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첫째, 두 집안은 문당호대(門當戶對)해야 한다. 즉 비슷해야 한다. 둘째, 황승언이 제갈량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첫째 요건은 제갈량이 낭야의 명문집안 후예(後裔)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형주에 와서도 절대로 몰락(沒落)한 지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요건은 제갈량이라는 외래인이 형주의 상류사회와 밀접하게 교류(交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마휘(司馬徽)도 절대 그를 "와룡(臥龍)"이라고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諸葛亮)이라는 이 농사짓는 인물은 그저 잠시 관직(官職)을 맡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반대로 형주의 일반적인 하급관리(下級官吏)는 근본적으로 제갈량과 비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사마휘(司馬徽)나 방덕공(龐德公)과 마찬가지로 관직을 맡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설사 관직은 맡지 않았지만 그들이 형주 상류사회(上流社會)의 신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사서에는 왜 제갈량의 '궁경농무(躬耕農務)'를 강조하고 그 자신도 '포의(布衣)' 신분을 강조했을까? 결국 이는 제갈량의 큰 뜻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의 역사적인 공적은 자신의 학문 지혜와 천하대세(天下大勢)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장악에 있고 정무를 보는데 근면하고 공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족배경이나 처족배경(妻族背景)은 이후 위대한 정치가(政治家)가 된 제갈량에게 있어서 실로 큰 작용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갈량은 자신에 황제에 오르려고 생각한 적이 있을까?
제갈량은 역대이래로 충신의 대표인물(代表人物)로 받들어져 왔고 천고에 모범(模範)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제갈량은 간신이고 야심가이고 음모가(陰謀家)이며, 왕망(王莽), 조조(曹操) 내지 나중의 사마소(司馬昭), 유유(劉裕)와 일구지학(一丘之貉) 즉 한통속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대부분은 인터넷글이며 수준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이고 영향력도 적다. 그러나 상해대학 역사학과 주자언(朱子彦) 교수의 ‘성단에서 걸어내려 온 제갈량; 삼국사신론)(중국인민대학출판사 2006년 12월 제1판)’에서는 외관적으로 보기에 제대로 된 학술저작(學術著作)이다. 주교수는 이 책에서 제갈량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엎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제갈량은 기실 황제(皇帝)에 오르려는 야심을 지녔다고 논증(論證)하려 시도했다.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찬성(贊成)할 수가 없다는 반론을 냈다. 다수의 독자들도 주교수의 의견에 동의(同意)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검토하고 반박(反駁)하기 전에 우리는 주교수가 어떻게 하여 이런 결론(結論)에 이르렀는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1) 제갈량은 젊었을 때부터 황제가 되려는 "야심(野心)"을 품고 있었다. 제갈량(諸葛亮)은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이 점은 의문(疑問)이 없다. 그러나 주교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제갈량의 뜻은 일반인이 상상(想像)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천하를 쟁탈하고 패왕지업(霸王志業)을 건립하려는 웅심이 있었다" 이유의 하나는 이것이다. 제갈량은 일찌기 석도(石韜), 서서(徐庶), 맹건(孟建)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 셋이 벼슬길에 나선다면 자사(刺史), 군수(郡守)까지는 할 것이다." 세 사람이 제갈량에게 당신은 무슨 관직까지 오를 것인지 물어봤는데 제갈량은 "웃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笑而不言)."(삼국지 권삼십오 ‘제갈량전’ 주인 ‘위략’). 주교수는 대담하게 추측(推測)한다. 제갈량은 왜 그저 웃기만 했을까? 왜냐하면 자사, 군수 같은 류의 관직은 제갈량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큰 뜻은 실로 남에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동한 말기는 정국이 혼란(混亂)했고 황제를 칭하는 자도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제갈량의 지향이 그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저 남의 신하로만 남아 있어야 한단 말인가? 군왕(君王)이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이를 통해서 단정한다. 제갈량은 처음부터 황제를 칭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의 권력(權力)의 길은 완전히 계획되고 단계적으로 진행된 '음모(陰謀)'라는 것이다.

(2) 제갈량은 유비집단(劉備集團)의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차도살인(借刀殺人)으로 관우(關羽)도 죽이고 기회를 틈타 법정(法正)으로부터 촉군 태수의 직위도 빼앗았다. 나아가 '음모설(陰謀說)'을 입증한다. 관우의 패망(敗亡)에 성도 쪽에서는 군사 한명 보내지 않았다. 이는 기묘(奇妙)한 일이고 역사에서도 의문으로 여기는 부분이다. 장태염(章太炎)은 일찌기 제갈량이 관우를 죽였다는 설을 제기한 바 있다. 주교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제갈량은 유비집단의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관우라는 관문(關門)을 넘어야 했다. "형주(荊州)를 잃을지언정 그래도 오나라사람의 손을 빌어 관우를 제거해야 한다" 법정에 대하여 제갈량은 법정(法正)이 유비를 따라 한중(漢中)을 북벌하러 가는 동안에 심복인 양홍(楊洪)으로 하여금 법정의 촉군 태수직을 대리하게 하고 군수물자조달(軍需物資調達)을 책임지게 한다. 일이 끝난 후 양홍(楊弘)은 촉군 태수직에 정식 취임한다. 이를 통하여 법정의 "외통도기(外統都畿)"(수도주변을 통할하는) 권리를 빼앗아 버린다. 주교수의 묘사로 독자들에게 남긴 인상(印象)은 제갈량은 "야심"이 아주 크고 깊이를 알 수 없다. 그의 권력의 길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계략(計略)과 음모로 가득 차 있다.

(3) 제갈량이 죽자마자 승상참군(丞相參軍), 안한장군(安漢將軍) 이막(李邈)은 후주에게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제갈량은 곁에 병력을 집중시켜놓고 (身杖强兵), 낭고호시(狼顧虎視)했으며 신뢰할만한 인물을 곁에 두지 않아서 신은 항상 위험하게 여겼다" ‘화양국지(華陽國志)’ 권십 ‘광한사녀(廣漢士女)’. 소위 "낭고(狼姑)"라는 것은 늑대와 같이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얼굴을 돌려 뒤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비인신(非人臣, 남의 신하로 있지 않을)"의 상이라는 것이다. 사마의(司馬懿)는 바로 이런 '낭고'의 상을 지니고 있다. 이막이 여기에서 '낭고'라는 말을 쓴 것은 그 뜻이 불측(不測)한 일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주교수는 여기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한다. "제갈량은 집권 때 당시 사람들의 눈에 군왕을 예로 모시고 나라에 충성(忠誠)하는 모법(模範)으로 보여 지지 않았다"

(4) 제갈량과 같이 고명(顧命)을 받은 이엄(李嚴)은 일찌기 제갈량에게 서신을 쓴다. "제갈량이 마땅히 구석(九錫)을 받아야 하고, 작위를 주어 왕(王)을 칭해야 한다"고(‘삼국지’ 권사십 ‘이엄전’ 주인 ‘제갈량집’). 소위 "구석"은 서주(西周)때 "구명(九命)"으로 칭하던 것으로 고대제왕이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9종의 예기(禮器)이다. 왕망(王莽)이후 구석은 권신이 선양(禪讓)받아 황위를 찬탈(簒奪)하는 도구가 된다. 조조(曹操)는 바로 구석(九錫)을 받고 위왕을 칭한다. 그리고 나아가 아들 조비(曹丕)가 선양을 받는다. 이엄(李嚴)의 건의에 대하여 제갈량의 회답은 이러했다. "나는 원래 동방의 하사(下士)이다. 선제(先帝)에게 잘못 쓰여져서 지위가 신하 중 최고에 올랐고 녹봉(祿俸)으로 백억을 하사받았다. 지금 적을 토벌하는데 공이 없고 선제께서 나를 알아봐준 은혜에 아직 보답(報答)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예전에 제나라 진나라 때처럼 스스로 귀하고 크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리에 맞는 것이 아니다. 만일 위를 멸하고 조예(曹叡)를 죽이고 황제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면 여러분들과 같이 승진한다면 십명(十命)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구사(九邪)는 말할 것도 없다." 주교수는 제갈량의 이 말은 기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완전히 스스로 말한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고 하던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 거꾸로 난신적자(亂臣賊子)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5) 제갈량(諸葛亮)과 후주의 관계는 실제로 좋지 못했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반복하여 각종 건의(建議)를 내놓는다. 심지어 후주(後主)의 대신임명까지도 간여한다. 주교수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제갈량이 정권을 잡은 후 후주 유선(劉禪)은 눈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지시하고 걸핏하면 황제를 교육시켰다" 유비(劉備)가 살아있을 때 제갈량은 일찌기 후주에 대하여, "아량(雅量)이 아주 크고 수양(修養)이 깊어 바라던 것 이상이다."(‘삼국지’권삼십이 ‘선주전’ 주인 ‘제갈량집’)라고 하였다. 그러나 북벌전날에는 제갈량이 다시 후주를 "나이가 어려서, 좋고 나쁜 것도 구분하지 못한다(富於春秋, 朱紫難別)"라고 말한다.(‘삼국지 ’권삼십구 ‘동윤전’). 그러므로 동윤(董允)을 보내어 궁중의 숙위친병(宿衛親兵)을 통할하게 하고 후주에게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말고 모두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라고 말한다. 주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완전히 "기군(欺君)"의 행위이다. 나아가 이렇게 탄식(歎息)한다. "세상 사람들은 조조가 주군(主君)을 괴롭히고 한헌제(漢獻帝)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왜 제갈량의 기군행위(欺君行爲)는 보고도 못 본 척 하는가? 실로 이해(理解)하기 어렵다." 제갈량의 사후 후주는 성도(成都)에 제갈량의 묘를 세우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주교수는 "솔직히 말해서, 이는 일종의 보복(報復)이다."라고 말한다.

(6) 제갈량의 사후 촉한은 더 이상 승상(丞相)의 직위를 두지 않는다. 나중에 집정자인 장완(蔣琬), 비위(費褘)의 관직은 모두 대장군, 녹상서사(錄尙書事)이다. 이에 대하여 주교수는 자문자답(自問自答)하기를 이렇게 한다, "유선(劉禪)이 왜 승상제(丞相制)를 폐지하였을까?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바로 절대로 다시 제2의 제갈량이 출현(出現)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여 권력(權力)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7) 유비(劉備)가 죽기 전에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 두 사람에게 탁고(托孤, 아들을 맡기다)한다. "이엄(李嚴)은 중도호, 통내외군사로, 영안에 주둔하라"(‘삼국지’ 권사십 ‘이엄전’), 다만, "이런 정치국면(政治局面)은 제갈량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갈량은 "이엄을 타격(打擊)하고 배척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이엄은 재동(梓潼)으로 귀양 간다.

(8) 손권(孫權)과의 외교왕래에서 사자 등지(鄧芝)는 항상 제갈량(諸葛亮)을 언급했고 제갈량도 자신의 명의(名義)로 손권과 대화한다. "외교적으로 완전히 유선(劉禪)을 무시했다."

(9) 제갈량은 임종 전에 심복 장완(蔣琬), 비위(費褘)를 후계자로 지정하는데 이는 독단적(獨斷的)으로 결정한 것이고 "후주와 상의하지 않았다."

(10) 제갈량(諸葛亮)의 5차 북벌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승산(勝算)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제갈량은 일생의 노력(努力)을 바친다. 왜 그랬을까? "제갈량 북벌의 목적은 구석(九錫)을 받고 나아가 촉한(蜀漢)을 넘겨받아 황제를 칭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제갈량 개인에 있어서 북벌(北伐)하지 않으면 그의 군사적 재능(才能)을 드러낼 수가 없고 촉의 선비들이 마음으로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며 개인의 위망(位望)을 수립할 수가 없다. 최종적으로 황제의 보좌에 오르려는 목적(目的)을 달성할 수가 없다." 만일 북벌이 성공하면, "그는 자신의 공로가 높으므로 '재능 없는' 유선(劉禪)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데 두터운 정치적 자산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교수는 환온(桓溫)과 유유의 예와 비교하여 제갈량의 방식이 환온 등의 "입공하삭(立功河朔) 환수구석(還受九錫)"의 아이디어와 일치한다고 본다.

(11) 제갈량은 북벌 전에 이미 일부 구석의 물건을 받았다. 후주(後主)는 "조서를 내려 제갈량(諸葛亮)에게 금부월 1구, 곡개 1개를 내렸다. 전후로 우보고취 각 1부를 내리고 호분(虎賁) 60인을 내린다." 부월, 호분은 바로 구석의 하나이다. '우보고취(羽葆鼓吹)는 구석 중의 '악칙(樂則)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은 북절 전에 이미 삼석(三錫)을 받았다. 춘추시기(春秋時期)의 패주 제환공(齊桓公)보다도 일석이 많다.

당연히 주교수의 목적은 제갈량을 폄하(貶下)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제갈량(諸葛亮)이 한나라를 대체하여 황제에 오르는 것은 죄상으로 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조류에 순응(順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관점(觀點)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는 오대(五代) 시기에 군벌 안중영(安重榮)이 말했듯이, "천자에 씨가 따로 있는가? 병력(兵力)이 강한 자가 하는 것이다!"라는 이론에 다름 아니다. 제갈량이 황제(皇帝)가 되려고 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제갈량을 폄하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다시 주제(主題)로 돌아와서 제갈량이 과연 황제가 되려고 했을까? 우리는 주교수의 논거(論據)를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자.

(1) 제갈량이 "소이불언(笑而不言)"한 것에 대하여 그가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고 말하는 것은 '포풍착영(捕風捉影)'의 느낌이 강하다. 동시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칭왕칭제(稱王稱帝)했다는 것으로 제갈량도 칭왕칭제하려 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억지스럽다. 요즘은 도둑이 많은데 그렇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물건(物件)을 훔치려한다고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 주장은 성립(成立)되기 어렵다.

(2) 관우(關羽)를 차도살인(借刀殺人)하고 법정(法正)의 직위를 빼앗았다는 것에 관하여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주교수의 말대로 하더라도 당시 제갈량은 아직 유비집단(劉備集團)의 최고 권력을 차지하지 못했다. 지위는 관우, 법정보다 낮았고 심지어 미축(縻竺)보다도 못했다. 그런데 제갈량이 어떻게 관우를 지원할 것인지 말 것인지 법정을 교체(交替)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법적 용어로 말하자면 관우를 죽이고 제갈량을 죽이는데 제갈량은 그저 '실행범(實行犯)'이고 이 '실행범'의 뒤에 더욱 지배적 지위를 가진 '교사범(敎唆犯)'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비이다. 관우는 사람됨이 오만하고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의 후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후세를 위하여 유비는 관우(關羽)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만일 유비와 관우가 정말 형제같이 가까웠다면 그는 당연히 형주로 구원병(救援兵)을 보내어 양양전투(襄陽戰鬪)를 도왔을 것이다. 절대로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갈량이 '군사로서의 직책(職責)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유비가 그냥 자리에 앉아서 관우가 패망(敗亡)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마 유시가 허수아비라도 되는가? 법정에 관해서는 모두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만일 유비의 허가(許可)가 없다면 제갈량은 아예 촉군태수(蜀郡太守)와 같은 중요 직위를 임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삼국지’에서 이 일을 기록할 때 이렇게 쓰여 있다. "제갈량은 표를 올려 양홍이 촉군태수가 되도록 했다."(‘삼국지’ 권사십일 ‘양홍전’). 제갈량은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라 유비에게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제갈량은 일처리가 조심성(操心性) 있다. 이는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유비와 사전에 얘기되지 않았다면 제갈량이 이렇게 대담한 건의를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법정의 직위변동(職位變動)은 분명히 유비의 뜻이다. 제갈량이 다시 '실행범'의 역할을 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교사범'은 유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유비는 왜 법정의 촉군태수직을 빼앗았을까?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진한위진사탐미’)(중화서국 2-004년 중정본)에서 촉한신구지쟁(蜀漢新舊之爭)을 논하면서 우리에게 단서(端緖)를 제공했다. 촉한의 유씨정권은 외래정권(外來政權)이다. 유비가 성도(成都)에 와서 황제에 오른 후 통치 집단은 두개의 주요부분으로 구성(構成)되어 있었다. 하나의 부분은 유비에게 투항(投降)해온 유장의 옛 부하와 익주본토(益州本土)의 귀족들이다. 이들은 유비가 오기 전부터 성도에 거주했고 현지에 광범위(廣範圍)한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다. 유비가 통치를 실행하는데 그들의 영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구인(舊人)"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인물은 바로 법정(法正)이다. 그리고 나중의 이엄(李嚴)이다. 또 다른 일부분은 유비가 형주에서 데려온 사람이다. 인원수는 많지 않았다. 다만 조직에서는 핵심지위에 있다. "구인"에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신인(新人)"이다. 가장 전형적인 대표인물이 제갈량(諸葛亮)이다. 구인과 신인은 불가피하게 이익충돌(利益衝突)과 갈등이 생긴다. 나아가 유비의 기본정책(基本政策)은 신인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신구관계를 조화(調和)롭게 하는 것이다. 이 정책은 나중에 제갈량에 의하여 계승(繼承)된다. 이 큰 배경으로 보자면 촉에서 발생한 많은 중대한 정치사건(政治事件)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법정을 예로 들면 유비가 법정에 우호적(友好的)이면 구인들이 좋아한다. 다만 법정이라는 사람은 인품(人品)에 큰 문제가 있었다. 한 가지를 먼저 말하자면 그는 구주인 유장을 팔아먹고 부귀(富貴)를 차지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유비는 이런 사람을 경계(警戒)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법정은 촉군태수가 된 이후에 "밥 한 끼 얻어먹은 은혜(恩惠)가 있거나 눈 한번 흘긴 원한이 있으면 하나하나 모두 갚았다. 마음대로 죽이고 다친 인원이 여러 명이었다."(‘삼국지’ 권삼십칠 ‘법정전’). 소인득지(小人得志)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제갈량은 그를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았다. 이는 당연히 제갈량이 그의 권세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유비에게 이용가치(利用價値)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중북벌(漢中北伐) 때 법정의 가장 핵심적(核心的)인 관직인 촉군태수를 빼앗아 균형(均衡)과 보상을 이룬다. 유비는 한중왕을 칭했을 때 법정을 상서령, 호군장군에 임명한다. 다만 법정은 얼마 후에 우울(憂鬱)하게 죽는다. 이것은 또한 설명한다. 법정이라는 사람은 체면을 중시하고 허영심(虛榮心)이 많았다. 기복(起伏)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사람을 잘 쓰는 유비는 이런 사람을 오래 쓰지 않는다. 결국 법정의 운명은 완전히 유비의 손에 장악(掌握)되어 있었다. 제갈량은 그저 정책을 집행(執行)했을 뿐이다. 책임(責任)을 모조리 제갈량에게 돌릴 수는 없다. 만일 이것이 제갈량이 혼자서 짠 음모(陰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엄청나게 억울한 일일 것이다.

(3) 이막의 보고서만을 가지고 주교수는 "제갈량의 집정 때 당시 사람들은 그가 주군(主君)을 예로 모시고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고 단정(斷定)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주 부당하다. 이 이막은 어떤 인물인가? 조사를 해보니, 이막은 광한(廣寒) 처(郪)의 사람이다. 유장(劉璋)때 우비장(牛鞴長)을 지낸다. 전형적인 "익주본토파(益州本土派)"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촉한의 여러 중대정치사건은 모두 신구지쟁(新舊之爭)의 배경 하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비, 제갈량이 집권한 시대에 구인은 탄압(彈壓)을 받았고 제갈량이 죽은 후에는 아직 정책방향(政策方向)이 어디로 갈지 모를 때였다. 구인들은 후주 유선의 뜻을 헤아리려 했고 그래서 이막(李邈)은 상소(上訴)를 올린 것이다. 이막은 이렇게 추측했다. 후주와 제갈량(諸葛亮)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약간은 긴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후주(後主)는 아마도 자기의 주장에 동의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구인들은 국면(局面)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다만 이막은 확실히 형세(形勢)를 잘못 읽었다. 후주는 비록 멍청하기는 하지만 신인이야말로 촉한집단의 지주(支柱)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구인들이 마음대로 판세를 뒤집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당시 집정하고 있던 장완(蔣琬), 비위(費褘) 등은 구인들이 도전하는 것을 좌시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제갈량은 이막에 대하여 일찌기 구명지은(救命之恩)이 있다. 성도를 처음 취했을 때 이막은 설날아침에 술을 먹고 유비의 면전에서 질책(職責)했다. 당시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제갈량이 나서서 도와주는 바람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제갈량이 죽자마자 이막(李邈)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이런 행위는 후주도 싫어할 일이다. 그래서 이막은 결국 하옥(下獄)되어 주살된다. 이는 특별히 기이(奇異)한 일이 아니다. 주교수는 이막이 피살된 원인에 대하여 "주외기위(主畏其威)"라고 하여 후주 유선까지도 제갈량의 위세를 두려워했다고 하여 "일찌기 괴뢰군주(傀儡君主)였던 유선의 자존심을 아프게 찔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런 주장(主張)은 당시 신구양파의 정치 갈등을 무시하는 것이고 너무나 겉핥기식의  분석(分析)이다. 제갈량의 당시 평가문제에 관하여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미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권력을 독점(獨占)했지만, 예를 잃지는 않았고, 군주가 해야 할 일을 했지만, 나라사람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專權而不失禮, 行君事而國人不疑), "법을 멍하게 집행하였지만 나라사람들은 기꺼이 받아들였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힘들게 했지만,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다"(行法嚴而國人悅服, 用民盡力而下不怨)(‘삼국지’ 권삼십오 ‘제갈량전’). 이것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普遍的)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태어난 진수는 당연히 천년이후의 주교수보다 당시 사람들이 제갈량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주교수는 제갈량을 칭찬(稱讚)하는 많은 자료들을 손만 뻗으면 가져와서 볼 수 있었지만 제갈량을 폄훼(貶毁)하는 자료 하나만 꽉 붙들고 자기의 주장(主張)을 펼친다. 이는 "어느 주전자든 끓지 않는 게 있으면 그것만 든다"는 게 아닌가.

(4) 이막(李邈)의 고증(孤證, 유일한 증거)만으로는 확실히 제갈량을 타도(打倒)하기 어렵다. 그래서 주교수는 다시 이엄이 제갈량(諸葛亮)에게 쓴 서신과 제갈량의 회신을 내놓는다. 이 두 통의 서신(書信)은 아주 대단하다.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九錫)을 받고 왕의 작위를 받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제갈량은 더더욱 시원스럽다. 십석(十錫)도 받을 텐데 하물며 구석이야 뭐라고 말이다. 멀리 왕망(王莽)까지 가지 않더라도 조조(曹操)는 바로 구석을 받은 후 자손이 황제(皇帝)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것은 두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제갈량은 구석(九錫)에 대하여 진지하게 자신이 구석을 받는 것에 대하여 논한다. 그 뜻은 어디에 있는가? 보기에 이 문제를 제대로 해명(解明)하지 않으면 제갈량은 스스로의 결백(潔白)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진한위진사탐미(秦汉魏晋史探微)’에서 이 문제를 아주 잘 해석(解釋)해 놓았다. 전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유비로부터 '그대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취해도 좋다(君可自取)라는 말도 있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하고, 다시 제갈량과 이엄(李嚴) 간의 구석(九錫), 십명(十明)과 같은 말이 오고간 것을 보면 이해가 쉽다. 유비로부터 정중하게 부탁을 받은 바도 있으니 제갈량으로서는 이엄의 시험하는 말에 그다지 군신의 구분(區分)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제갈량이 이엄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실제적 이유(理由)이다." 이엄은 구인집단을 대표한다. 그래서 고의로 '구석'같은 민감한 말로 제갈량을 시험(試驗)하려 했다. 그 뜻은 아주 음험(陰險)하다. 만일 제갈량이 "정색을 하고" 거절한다면 오히려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다. 그래서 제갈량은 교묘하게 변통(變通)하여 논리적인 '귀류법(歸謬法)'으로 이엄에게 대답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강한 어투로 반문하는 식의 회답(回答)이다. 요즘 말로 번역해서 말하자면, "만일 북벌에 성공하지 못하면 나는 자연히 구석을 받을 자격이 없고 만일 북벌에 성공하면, 나는 십석(十錫)도 받을 수 있다. 구석이 문제냐?" 그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구석"을 별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멸시(蔑視) 내지 무시이다. 군신의 명분은 유비의 "군가자취(君可自取)"라는 말이 있으므로 제갈량으로서는 그에 구애(拘礙)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보면 이엄 일당이 제갈량의 강경(强硬)하고 교묘한 대답 앞에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십명"(十錫)은 바로 '귀류(歸謬)"의 용법이다. 주교수는 그 교묘(巧妙)함을 알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십명"을 '구석(九錫)' 외에 '일석(一錫)'이 더 해지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이는 천진하고 단순하다.

(5) 제갈량과 후주(後主)의 관계가 아주 좋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그 자체는 맞다. 다만 제갈량이 걸핏하면 후주를 교육(敎育)시킨 것은 조조의 '기군(欺君)'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제갈량은 그의 부친의 부탁을 받은 것이다. 만일 하자는 대로 따라서 오나라의 고옹(顧雍)처럼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행동한다면 그것은 선제의 부탁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다. 유비(劉備)는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유선(劉禪)으로 하여금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모시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訓戒)하는 것이 뭐 잘못된 것인가?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모두 제갈량은 "권력을 독점(獨占)하였지만 예를 잃지 않았다"고 여겼다. 무슨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는 절대로 제갈량(諸葛亮)에게 야심(野心)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6) 촉국(蜀國)이 더 이상 승상을 두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이것도 실은 이해(理解)하기 어렵지 않다. 촉한은 동한(東漢)의 법제도를 계승한다. 동한은 원래 승상(丞相)이라는 직위가 없었다. 동탁이 상국(相國)을 맡고 조조가 승상(丞相)이 되었다. 이는 모두 비상시기의 비상직위(非常職位)이다. ‘진서(晉書)’에도 이렇게 말한다. 위진 이래로 승상(丞相), 상국(相國)은 '모두 일반적인 신하의 직위가 아니었다.'(‘진서’ 권이십사 ‘직권지’). 제갈량이 승상을 맡은 것도 비상시의 직위였다. 제갈량이 죽은 후 이미 "비상시기(非常時期)의 신하"가 이 직무(職務)를 맡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더 이상 두지 않은 것일 뿐이다. 주교수는 이를 가지고 후주가 대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취한 조치라고 보고 있다. 그것도 당연히 원인(原因)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제갈량의 생전에 권력이 막강(莫强)했다는 것이지 제갈량에게 황제의 야심(野心)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모든 권신(權臣), 중신(重臣)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7)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을 동시에 보정으로 안배(安排)한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었을까? 주교수는 이를 제갈량(諸葛亮)의 권력을 분산(分散)시키기 위함으로 본다. "제갈량이 정치를 담당(擔當)하고, 이엄이 군사를 담당한다". 실제로, 이는 신구관계의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 실행한 것은 "신인의 지위를 공고(鞏固)히 하고 신구관계를 조화롭게 한다"는 정책이었다. 구인은 많은 정도에서 억제(抑制) 받았다. 유비가 죽은 후 구인(舊人)들이 어떤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은 유비가 걱정하는 바였다. 그래서 그는 이엄을 발탁(拔擢)한 것이다. 그리하여 구인집단으로 하여금 중용(重用)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동시에 이엄은 회유(懷柔)했고 그로 하여금 제갈량을 도와서 신구관계를 잘 조화(調和)시키도록 한 것이다. 제갈량, 이엄 두 사람은 비록 동시에 '고명(顧命)'을 받았지만 구분은 명확히 있었다. 특히 유비는 제갈량에게 '군가자취(君可自取)'의 말까지 남긴다. 실제로 이엄 등 구인집단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다. 목적은 제갈량의 지위를 강화(强化)시켜 주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신인집단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인을 핵심으로 하는" 조직노선(組織路線)을 관철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엄은 나중에 유비의 뜻에서 멀어져 제갈량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는 군대를 북벌(北伐)하는데 내놓는 것을 거절하고 강주에 성을 축성(築城)하고 파주자사를 설치할 것을 요구한다.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개부치사(開府治事)"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는 전체 촉한 신인집단이 용인(容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제갈량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엄이 폐출(廢黜)된 것은 신구양파의 갈등(葛藤)의 결과이다. 제갈량이 혼자서 타격하고 배척(排斥)한 것이 아니다.

(8) 손오(孫吳)와의 외교왕래(外交往來)에서 제갈량(諸葛亮)은 확실히 자신의 명의로 손권과 대화한다. 이는 제갈량에게 "유선(劉禪)을 제외시키려는"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손권이 걱정한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촉의 주군(主君)이 나이가 어리고 약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맹정책(聯盟政策)을 장기적으로 유지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하여 제갈량이 직접 나서서 손권과 얘기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명의로 손권(孫權)에게 보증하였다. 이는 바로 손권의 우려를 없애주기 위함이다. 이는 연맹에 유리했다. 만일 군신명의에 얽매었다면 오히려 오해(誤解)와 불신(不信)을 없애는데 불리했을 것이다. 보정의 명을 받은 제갈량은 외교적인 대치국면(對峙局面)을 타파하기 위하여 신축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이니, 이는 완전히 합리적(合理的)이고 뭐 움츠려들고 감출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9) 제갈량이 후계자(後繼者)를 지정하면서 "아예 후주와는 상의(商議)하지 않았다"는 점은 실로 억울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유선이 사람을 보내어 전선에 있는 제갈량에게 '국가대계(國家大計)'를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선은 전체적으로 봐서 멍청했다. 비록 어떤 때는 자잘한 수단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대사(國家大事)는 그가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생전에 그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제 제갈량(諸葛亮)이 돌연 없어지니 그는 아마도 초조(焦燥)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쓸 지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주교수는 이를 근거로 소하와 비교한다. 한혜제(漢惠帝)는 소하(蕭何)에게 승상후계자인선(丞相後繼者人選)을 물어본다. 소하는 결국 대답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 비교할 수가 없다. 소하가 권력을 장악(掌握)한 정도는 제갈량과 같은 반열(班列)에서 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소하의 말년에는 천하가 이미 안정되고 국가에는 근본적인 우려사항(憂慮事項)이 없었다. 소하는 특별히 후계자를 지목(指目)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권력이 막강했고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후임자(後任者)는 아마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출사(出師)하여 승전을 거두지도 못했고 먼저 총사령관의 장례를 치러야하는 특수시기에 국면이 안정(安定)되지 않았으니 능력 있는 후계자를 지명하여 후방의 대국을 주재(主宰)하도록 하는 것이 확실히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후주(後主)가 사람을 천리 먼 길 보내와서 물어보는데 제갈량(諸葛亮)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소하와 한혜제가 얼굴을 마주한 상황과는 또 다르다. 결론적으로 '독단전횡(獨斷專橫)'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10) 제갈량(諸葛亮)은 왜 북벌을 고집했을까? 이는 역대 역사가(歷史家)들이 오랫동안 계속 연구했으나 해답을 얻지 못한 난제(難題)이다. 여기에서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제갈량이 북벌과 환온(桓溫)과 같은 자의 "입공하삭(立功河朔) , 환수구석(還受九錫)"을 연결시키는 것은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외에 필자가 추가로 첨언(添言)할 말이 없다.

(11) 제갈량(諸葛亮)은 확실히 "부월(鈇鉞)", "호분(虎賁)", "우보고취(羽葆鼓吹)"를 받았다. 다만 이게 무슨 문제를 설명하는가? 구석(九錫)은 원래 제왕이 공신에게 내리는 하사품(下賜品)이다. 비록 나중에 그 기능이 변질(變質)되기는 했지만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다.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구석은 서로 다른 경우에 쓰인다. 구석이라는 것만 가지고 선양(禪讓)을 생각하고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것을 생각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민감(敏感)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그가 받은 것은 구석의 일부분이었다. 실제로 나중에 양진시기의 많은 제후(諸侯)들 그리고 석포(石苞), 왕도(王導), 도간(陶侃) 등의 중신(重臣)들도 황월, 호분(虎賁), 반검, 우보고취(羽葆鼓吹) 같은 류의 물건을 받았다. 이들 물건은 공로를 치하하는 하사품의 역할을 한 것이지 황제를 칭하는 전주곡(前奏曲)은 아니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교수의 논거는 실제로 하나도 성립되지 않는다. 제갈량은 황제를 칭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혹은 더욱 엄격하고 더욱 완곡하게 말하자면, 제갈량이 황제를 칭하려고 했다는 증거가 아예 없다.

나는 역사를 전공하는 연구자(硏究者)처럼 역사서를 많이 읽지는 않았다. 전여경 선생의 ‘진한양진사탐미’는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이고 느낌이 좋았던 책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것을 읽은 지 얼마 후에 다시 주자언 교수의 ‘성단에서 걸어내려온 제갈량’을 읽었다. 제갈량(諸葛亮)의 문제에 있어서 두 책의 견해는 비교적 큰 차이를 보인다. 진지하게 비교하고 검토한 끝에 나는 전선생이 견해(見解)가 비교적 깊이 있고 비교적 설득력(說得力) 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전선생의 견해는 촉한의 신구양파(新舊兩派)의 싸움이라는 정치적인 배경 하에서 이를 단서로 하여 촉한(蜀漢)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들 그 주요인물(主要人物)의 각종 행위를 설명하여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역사인물(歷史人物)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유물주의(歷史唯物主義)의 관점이다. 그런데 주교수의 견해는 많은 경우 마음을 추단(推斷)하고 그저 추측(推測)할 뿐이다. 객관적인 정치, 사회요소에 대한 고려(考慮)가 확실히 부족하다. 특히 촉한 통치 집단 내부(集團內部)의 신구지쟁을 무시했고 각종 정치사건(政治事件)에 대한 이해를 단순히 개인 간의 권력다툼이나 감정싸움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포풍착영(捕風捉影)의 느낌이 있고 많은 논점이 근본적으로 단단한 기초를 갖지 못했으며 순수하게 상상력(想像力)을 무한 발휘한 것일 뿐이었다. 만일 추리소설이라면 이렇게 쓰면 재미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학술전문서적(學術專門書籍)이라면 엄격함에 있어서 결함(缺陷)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제갈량은 이천 년이래 충신의 모범(模範)으로 받들어져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돌연 이에 의문(疑問)을 품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내 생각에 사회적 도덕가치(道德價値)가 붕괴된 결과일 것이다. 전통적인 충(忠), 의(義), 성(誠), 신(信)등의 기준을 사람들은 더 이상 신봉(信奉)하지 않는다. 각종 기담괴론(奇談怪論)이 횡행하고 있다. 과거에 사람을 "깡패"라고 하면 그것은 욕하는 말이다. 현재의 사람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얘기한다. "나는 깡패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도덕(傳統道德)의 붕괴, 가치기준(價値基準)의 전복을 의미한다. 제갈량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의심받고 있다. 이것도 이런 사회배경(社會背景) 하에서 나타난 것이다. 제갈무후(諸葛武侯)의 문장, 사적(事迹)은 일찌기 감동적이고 많은 국내외의 지사들을 고무(鼓舞)시켰다. 그리하여 그들 마음속의 모범이 되었고 그들이 이상을 위하여 분투(奮鬪)하도록 격려(激勵)했다. 악비(岳飛)는 일찌기 전후 ‘출사표(出師表)’를 쓰면서 이를 좌우명으로 삼았고 일본의 메이지천황은 일찌기 이런 말도 했었다고 한다.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도 아니다." 현대의 중국인들은 그러나 ‘출사표’에서 "권력찬탈(權力簒奪)" "야심" "음모"를 읽고 있다. 심지어 제갈량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깜짝 놀랄만한 비밀"을 발견(發見)하기도 한다.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 문제(問題)가 있는 것일까? 제갈량인가 아니면 제갈량을 해석(解釋)하는 사람들인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고증(考證)에 해박한 역사학자들이 원만한 ‘해답(解答)‘을 제시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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