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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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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학가(道學家) 대정치가인 송시열(宋時烈)

사진 = 조선 문신ㆍ학자 송시열(宋時烈)

조선시대의 도학가(道學家)요 대 정치가인 송시열 선생은 이 고장에 많은 제자와 일화를 남기신 분입니다. 선생은 선조 40년(1607)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리(忠淸北道 沃川郡 九龍里)에서 송갑조(宋甲祚)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덟 살 때부터 친척 되는 송이창(宋爾昌)에게 글을 배웠습니다. 송이창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인데 그때부터 선생은 자기보다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생활(政治生活)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송시열선생은 22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인조8년(1630)에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그는 연산에 은거하는 당대의 거유(巨儒)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습니다. 사계(沙溪)는 율곡의 으뜸가는 제자로서 예학(禮學)의 일인자입니다. 우암은 이로써 율곡(栗谷)의 학통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 뒤에는 사계(沙溪)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다시 배워 학문을 대성했습니다. 이러한 당대 굴지(屈指)의 학자 부자(父子)에게 정주(程朱)의 학을 배운 우암이 그것을 평생의 귀감(龜鑑)으로 삼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인조11년(1633)선생은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습니다. 그 시험의 문제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한다.’라는 철학적 문제였습니다.

선생은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와 천지근원의 조화를 논한 문답식 논문을 제출하였습니다. 이때 시험관인 대제학 최명길(崔鳴吉)은 무릎을 치며 ‘일찍이 드물게 보던 선비가 생겼으니 이제 중국의 도학(道學)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하고 극구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선생의 명성(名聲)은 사방에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해 10월에 경릉참봉(敬陵參奉)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떠나 먼 곳에 머물 수 없다고 하여 곧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인조13(1635)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니 봉림은 즉 후일의 효종(孝宗)으로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졌던 것입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매(1636)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어가(御駕)를 모시고 갔다가 성이 함락(陷落)된 후에는 이내 벼슬을 내놓고 향리 회덕으로 돌아왔습니다.

효종이 즉위하자(1649) 다시 부름을 받아 진선(進善) 집의(執義) 등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책을 건의하는 등 활약(活躍)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선생은 효종과 특히 정분이 두터웠습니다.

효종은 정치기강(政治紀綱)을 바로잡고 정부의 새로운 체제(體制)를 확립하기 위하여 당시 김자점일당(金自點一黨)을 몰아내고 학문과 행실이 맑고 깨끗한 학자들을 불러서 썼습니다. 조정에 나온 선생은 정치를 바로잡는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이는 대략 임금의 덕을 함양(涵養)하고 기강확립을 서둘러 국력을 기른 뒤에 북벌을 도모(圖謀)하자는 내용의 13개 항목입니다.

이때 김자점(金自點)은 파면을 당한 뒤로 불평을 품고 역관 이덕장을 시켜 청나라 조정에 무고를 하였다. 그리고 인조의 능지(陵誌)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아울러 고발(告發)하였습니다. 이 능지는 송시열선생이 지으신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굴복(屈伏)시킨 때라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던 시대입니다.

효종은 선생에게 내리는 교지(敎旨:사령장)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고 송시열선생도 그와 같이 하였던 것이다. 이는 청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며 오랑캐를 정벌(북벌)하여 병자의 치욕(恥辱)을 씻고자 한 군신간의 맹약(盟約)이며 주체의식의 발로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청의 압력(壓力)이 가하여지자 선생은 자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향리(鄕里)에 은거한 선생은 윤선거, 이유태, 유계 등 학우들과 서원에 모여 학술을 토론하고 돌아가신 옛 사계선생이 저술한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며 혹은 율곡·조헌·사계 등 선유(先儒)들의 연보나 행장을 기술하여 학계의 공적(功績)을 추모하였습니다.

효종 9년(1658) 다시 부름을 받은 선생은 찬선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하였습니다. 송시열선생이 효종의 부름을 받은 때는 50세였습니다. 이때 그는 평생 배운 바를 국사(國事)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송시열선생을 총애(寵愛)하던 효종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시끄러워졌습니다. 이 예송문제는 처음에는 예설 즉 복제의 시비요, 학설의 시비논쟁인 듯하던 것이 뒤에 우암에 대한 인신공격(人身攻擊)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당쟁(黨爭)은 그 어느 한 사람의 공과(功過)보다도 그 시대가 안고 있었던 정치제도 및 제반제도(諸般制度)와 사회, 경제적 모순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주도(主導)되었던 것 같이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보여 집니다.

효종 승하(昇遐) 후 벼슬을 물러난 송시열선생은 그 뒤 다시 부름을 받아 조정의 중요관직(重要官職)을 거쳐 우상, 좌상에까지 이르렀으나 뜻은 항상 산천에 있었습니다.

푸른 물은 성낸 듯 말이 없구나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을 살피니
내 세파에 인연함을 싫어하노라

송시열선생은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에 은거(隱居)하였다. 숙종15년(1689)선생83세에 왕세자(경종)가 책봉(冊封)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안치(安置)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의 책동(策動)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으니, 일세를 풍미(風味)하던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송시열선생의 학문은 대체로 율곡선생의 이론을 계승(繼承)하였으나 견해를 달리 한 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궁극적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여 사학의 종사(宗師)가 되었습니다.

송시열선생은 28세부터 82세까지 50년간에 걸쳐 소명(召命)과 임명을 받은 것이 무려 109회이고 이에 응한 것은 26회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888책으로 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삼천 번 이상 나오는 것은 선생 한 사람뿐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의 큰 사건이든 작은 일이든, 아니면 좋은 일이었든 나쁜 일이었든 간에 선생이 관여(關與)되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당대에 선생이 차지(借地)했던 위치가 중요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송시열선생이 행동한 바와 생애 자체가 기복(起伏)이 심하고 파란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나 뒷날에 선생의 언행(言行)을 적어 비평한 많은 글들이 그를 찬양(讚揚)하기도 하고 헐뜯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이 너무나 양극(兩極)을 이루어 선생의 참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분명한 퇴진(退陣)은 ‘대의 성취(大義成就)’와 ‘대의의 지킴’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숙종20년(1694)에 신원이 되었고 문묘(文廟)를 비롯해 많은 서원에 배향(配享)되어 후세 학자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상(宋時烈像)

송시열의 초상은 심의에 복건을 쓰고 공수 자세를 한 좌안칠분상입니다. 깊게 팬 얼굴 주름은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 일생을 잘 보여주는 듯하며, 구부정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다소 과장된 체구는 조선 후기 학문과 사상을 지배한 거유(巨儒)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덥수룩하게 늘어진 그의 흰 수염은 그의 강한 눈썹 및 어두운 얼굴색과 대조(對照)를 이룹니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후 갈색 세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간결하게 선으로 표현(表現)함으로써 인물의 얼굴에 전체적 초점을 두었다.

이 초상은 송시열의 자경문(自警文)과 1778년 정조의 어제 화찬이 있는 ‘송시열 초상(국보 제239호)’을 바탕으로 그려진 이모본(移模本)입니다. 초상화(肖像畵) 위에 화찬이 없어 정확한 제작시기를 밝히기 어렵지만, 화풍으로 보아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창협과 권상하의 찬문이 있는 김창업 필 ‘우암선생칠십사세진(尤庵宋先生七十四歲眞)’과 비교할 때, 이 초상화는 74세 이후 송시열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영수였습니다. 자는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입니다.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沒頭)하였는데,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강력한 지배 이념이 되었습니다.

그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화친이 이루어지자 낙향하였습니다. 곧 효종의 대군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효종에게 발탁(拔擢)되어 북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으나 효종의 붕어로 무산되었습니다. 효종의 장례 때 대왕대비의 복상(服喪) 문제가 송시열의 주장대로 1년으로 결정되었으나, 그 후에도 논란은 지속되었습니다. 현종도 그를 신임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어 좌참찬으로 임명하였지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에 대한 논란으로 사임하고 화양동에서 은거(隱居)하였습니다. 

1666년 8월에 화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강학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이후 우의정(右議政)으로 복직되었으나 현종이 돌아가고 숙종 대에 이르러 귀양살이를 하였다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다시 등용되었습니다. 1689년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인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제주로 유배되었고 이후 사사(賜死)되었습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복권되었고, 1744년에는 문묘에 배향(配享)되어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확고히 공인받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화양서원(華陽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祭享) 될 만큼 사후에도 조선 후기 정치, 사회,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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