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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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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아가씨(김일용 원장님 연주-제60호)

https://youtu.be/AJjoB-dDjw0?si=rYWIlh-KVozlYG_p

"일전에 업로드한 새로운 김일용원장님 아코디언연주 동영상입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노래소개

경상도 아가씨 -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러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고향 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 장수 하더라도 살아보세요

정이 들면 타관땅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뼈에 젖은 내 고장이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영도 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던 날 밤

옷소매를 끌어잡던

경상도 아가씨가 안타까워 우는구나

그래도 잊지 못할 내 고장이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경상도 아가씨'는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의 박재홍이 부른 트로트 곡으로 1951년 미도파 레코드에서 발매된 노래입니다.

 

'경상도 아가씨'는 부산 중구 중앙동에 있는 40 계단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곡으로, 6·25 전쟁으로 월남한 피란민들의 애처롭고 고단한 생활과 애환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노래입니다.

 

'경상도 아가씨'는 시대의 아픔을 대변한 노랫말과 피란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경쾌하고 흥겨운 리듬과 멜로디로 발표가 되자 크게 히트를 하였습니다.

 

'경상도 아가씨'를 작사한 손로원은 반야월과 함께 작사가의 양대산맥을 이룬 작사가로 '봄날은 간다', '백마강', '비 내리는 호남선', '열아홉 순정', '샌프란시스코', '무영탑 사랑', '경상도 아가씨', '밤의 탱고', '고향의 그림자', '불국사의 밤', '마음의 순정'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작사하였습니다.

 

'경상도 아가씨'를 작곡한 이재호는 '나그네 설움',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대지의 항구', '홍콩 아가씨', '귀국선', '물방아 도는 내력',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의 명곡들을 작곡하였습니다.

 

慶尙道 處女 -朴載弘 演唱, 孫露源 作詞, 李在鎬 作曲

 

1.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러이 우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2. 고향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사 하더래도 살아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뼈에 맺힌 내 고장이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3.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던 날 밤 옷소매를 부여 잡듯

경상도 아까씨가 서러워서 우는구나

그래도 잊지 못할 가고싶은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경상도 아가씨...피난민 애처로운 흔적 '촉촉' 후한 인심 경상도사람 상징적 표현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인 주씨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미군상륙함(LST)에 몸을 의지하고 목적지도 모르는 피란길에 오른 것이 벌써 47년전의 일.

 

지금이야 부산이 더없이 포근한 도시가 되었지만,당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한 피란민에 불과하던 주씨가 거제도를 거쳐 1954년 정착한 부산은 처절한 생계유지의 터전이었다.생계를 위해 국제시장 거리에 자리를 벌여놓고 품팔이를 하던 때가 아련히 떠오를 때면 주씨의 입에서는 으레 <경상도 아가씨>의 몇 소절이 흘러나온다.

 

1953년에 발표된 <경상도 아가씨>(작사 손로원.작곡 이재호.노래 박재홍)는 그런 노래였다. 8.15 광복귀환동포와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애처로운 삶의 흔적을 더듬어갈 때 흔히 <경상도 아가씨>가 언급되곤 하지만,이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현실비관적인 자조의 분위기가 아니라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현실극복 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4분의 2박자 경쾌한 폴카리듬으로 곡이 구성된 것도 비록 고단한 피란생활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경상도아가씨는 경상도사람 모두를 대표해서 지칭하는 것으로 피란민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이곳 사람들의 후한 인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했다.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우는 나그네/울지말고 속시원히 말좀하세요.

가사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사십계단 은 <경상도 아가씨>로 더욱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당시 피란민들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낮에는 영도다리를 바라보고 밤에는 부산항에 정박해 있는 선박의 불빛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랬던 피란생활의 상징 사십계단 은 당시 피란민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중구 동광동과 영주동 판자촌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

 

갑남을녀의 가쁜 숨결과 함께 한 시대를 버티고 이어온 사십계단 에는 이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지난 92년말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유서 깊은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지 8개월만인 93년 8월6일.부산 중구청은 주민과 향토사가를 찾아 사십계단 의 기원과 배경에 관한 고증을 거친 뒤 중구 중앙동 4가 38번지에서 기념비 제막식을 가지게 된다. 가로 60cm,세로 1백80cm,너비 60cm의 이 기념비에는 앞면에 서예가 김용옥씨의 사십계단기념비 휘호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경상도 아가씨> 노랫말 1절과 사십계단의 내력이 적혀 있다.

 

<경상도 아가씨>는 48년 <빈대떡 신사>를 작사 작곡하고 직접 노래까지 부른 한복남씨가 부산에 세운 도미도레코드사에서 앨범의 제작을 맡았다.

 

이제,피란민들의 주 생활무대가 되었던 부산 국제시장에서 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경상도 아가씨>를 가슴에 담아 부르던 그 때의 피란민들을 만나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그 가사,그 멜로디는 사십계단기념비 에 각인되어 있듯 어려웠던 과거를 되새기며 오늘의 삶을 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뚜렷이 남아있다.

 

1.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우는 나그네

울지말고 속시원히 말좀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이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우는 이북고향

언제가려나

 

2. 고향길이 틀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수 하더라도 살아보세요

정이들면 부산항도 내가사는 정든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눈물만이 흘러젖는 이북고향

언제가려나

 

"많이들 불렀지요.피란민들만의 노래라기보다는 전쟁의 와중에 한데 엉켜 살았던 모든 이들이 즐겨부르던 부산의 노래였습니다.어린애들까지 의미도 모른 채 같이 흥얼거리곤 했으니까요." <경상도 아가씨>의 곡 녹음에 아코디언 연주를 맡아 참가했던 최익봉씨(64.부산MBC 음악단장)는 44년 전의 녹음현장이 머리에 스쳐가는 듯 감회에 젖었다.

 

"남포동 동해 사무실을 빌려서 녹음을 시작했지요.가마니로 사방을 감싸서 방음장치로 대신하긴 했는데 어디 잘 됐겠어요.지나가는 차의 경적소리에 녹음이 중단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당시 녹음에 참여했던 사람은 작사자 손로원,작곡자 이재호,가수 박재홍씨를 비롯해 모두 10여명이었으며 악기반주는 7인조로 구성된 연주팀이 맡아 구색은 모두 갖추었다고 최씨는 전한다.

 

아코디언을 연주한 최씨를 비롯,백운봉(피아노) 고숙희(드럼) 임창준(드럼) 허영철(색소폰) 김종원(콘트라베이스) 임문규씨(바이올린)는 당시 부산에서 취입된 곡의 연주를 도맡았던 베테랑들.

 

"야간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밤샘작업이 있을 때면 당시 부산지구 지역헌병대인 15P 검열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에 어려움도 참 많았습니다.<경상도 아가씨>의 녹음에는 꼬박 15일이 걸렸지요."

 

최씨는 "1곡 녹음에 15일이란 오랜 기간이 걸린 것은 당시 여건이 열악한 이유도 있었지만 연주자가 악보를 완전히 외우고 가수가 멜로디에 익숙해져 감정을 곡에 담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녹음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며 최근 가요계의 곡들이 너무 고민없이 쏟아져 나오는것을 안타까워했다.

 

"당시 1백80~2백원 정도하던 LP판의 가격이 싼 편은 아니었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경상도 아가씨>는 무려 3만장이나 팔려 나가 KBS 부산방송국에서 재판 레코딩을 한 기억이 납니다.1만장 이상 팔리면 빅히트라고 할 때였으니까 이 곡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실거예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잇던 최씨의 눈은,어느새 국제시장에 좌판을 벌여 놓고 날품팔이를 하던 힘든 시절이었지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경상도 아가씨>를 들으며 피란생활의 처량함을 달래던 필부필남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현> - 부산.97.5/1 -

경상도 아가씨

사십계단 층층대에/앉아우는 나그네 울지말고 속시원히/말 좀 하세요.

피란살이 처량스레/동정하는 판잣집에/경상도 아가씨가/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우는 이북고향/언제 가려나.(경상도 아가씨 1절)

 

손로원 작사,이재호 작곡으로 가수 박재홍이 불러 지난 1950년대 히트했던 대중가요 ‘경상도 아가씨’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온 사람들의 고달팠던 삶과 떠나온 고향을 애타게 그리는 실향민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지금은 이들 3명 모두 고인이 됐지만, 노래 만큼은 아직도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네들이 취기가 얼큰하게 오르면 흥얼거리는 대표적인 곡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경상도 아가씨’는 ‘40계단’이 없었다면 아마도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중가요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작사가 김지평(62)씨에 따르면 가수 박씨가 피란내려와 당시 일명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던 부산 국제시장에다 잡화 가게를 차렸다고 한다. 그런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나는 바람에 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박씨의 가게가 몽땅 불에 타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는 것.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박씨를 위로하기 위해 작사가 손씨와 김초성·이인곤씨 등 지인들이 박씨를 찾아갔다.

 

마침 점심때라 식사를 하기 위해 40계단이 있는 인근 복국집으로 자리를 옮겼다.일행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 지 한참 됐는데도 손씨가 들어오지 않자 일행중 한 명이 바깥을 향해 “손형 빨리 들어와.”라며 소리지르며 찾았다. 그래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밖으로 나가보니 손씨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껌팔이 소녀와 개비 담배를 팔던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계단수를 세고 있더라는 것.얼마뒤 40개 층층계단으로 시작되는 경상도 아가씨의 노랫말이 태어났다.

 

손씨는 작곡가 이씨에게 곡을 붙여 줄 것을 부탁했으며,이씨는 평소 친형제처럼 절친하게 지내오던 박씨에게 곡을 선사하게 됐다.변변한 녹음 스튜디오 하나 없던 시절이어서 노래 취입은 미군이 한국군에 불하한 해군 함정(LCI)에서 힘겹게 이뤄졌다.

 

가수 박씨는 타계하기전 김지평씨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음반 취입과 관련한사연을 이렇게 전했다. “부산항에 정박해 놓은 이 배에는 해군정훈클럽과 장교클럽이 있었으며,김광수악단이 연주를 했다.댄스홀은 한꺼번에 500여명이 들어갈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로 가끔 결혼식도 열리곤 했다.”고 기억했다. 박씨는 “육지에서는 방음 장치가 제대로 된 곳이 없어 가수들이 음반취입 장소로 많이 이용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우여곡절끝에 음반이 발매되자 당시 사회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져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다.노랫말 첫머리에 나오는 40계단은 부산 중구 중앙동 4가 39의51에 위치해 있다. 40계단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일제때인 1900년대 초 인근 산쪽인 동광동과 중앙동을 연결하는 통행로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이 유명하게 된 것은 피란민들 때문이었다.당시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로 판자촌을 이뤘던 동광동과 영주동 산동네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이다.

 

피란민들은 아침이면 이 계단을 통해 자갈치시장이나 부산항 부두,부산역,국제시장 등으로 일을 나갔다.일부 피란민들은 호구지책으로 부산항 부두에서 구호물자를 몰래 빼내 40계단 부근에 들어선 ‘구호물자 장터’에 내다팔았다. 이때 암거래라는 뜻의 ‘얌생이 몬다’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40계단 일대도 세월의 변화와 더불어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피란살이의 고달픔을 한탄했던 그 자리에는 새 모습으로 말끔하게 단장됐고,계단 입구에는 ‘40계단 기념비’가 세웠졌다. 또 40계단을 기념하기 위한 ‘40계단 문화관’이 지난해 문을 열었으며, 인근 도로에는 40계단 여인상, 뻥튀기 장수 등 지난 50∼60년대의 모습을 담은 각종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지난 99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도입 부분이 이곳에서 촬영된 이후 시민들이 즐겨찾는 새 명소로 떠올랐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부산 - 40계단 문화관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중구 중앙동 뒷길. 어린 여자아이가 깡총거리며 내려 오는 맞은편 40계단 풍경은 적막하고도 눈부시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안성기(극중 장성민)는 표적인 마약상을 향해 무참히 칼을 휘두른다. 99년 흥행작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도입부 한 장면이다. 이후 해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릴 때면 40계단은 타지에서 찾아 오는 2030세대의 명소가 되었다.

 

그들은 극중 삽입곡인 비지스의 히트곡 '할리데이'의 감상적인 선율과 함께 우수와 광기 어린 그 장면을 떠올리며 40계단의 추억을 만든다. 40계단을 올라가 속칭 인쇄골목이라고 부르는 도로 오른쪽으로 150m 정도 가면 왼편으로 2003년 2월 개관한 <40계단 문화관>이 보인다. 한세대 앞인 5060세대의 눈물의 역사가 고여 있는 아스라한 추억의 공간이다.

 

40계단 문화관

지상 6층 건물의 동광동 사무소 5~6층 130평에 마련된 40계단 문화관은 1950년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생활문화전시품 15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조영옥씨는 '이곳은 부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보석과 같은 곳'이라고 말하고 6·25 관련 물품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서울 인사동 골목 등 전국 어디나 달려가 수집해 온다고 한다.

 

특히 요즘은 학생들이 단체로 중구 관내 백산기념관, 근대문화역사관을 거쳐 이곳까지 테마여행을 많이 온다고 한다. 5층에는 놋그릇,손다리미,호롱병,물지게,흑사탕 비누,축음기,군용 철사로 만든 장바구니 등 50년대 생활용품 100여점과 괴나리 봇짐을 맨 대형 피란민 사진 20여점,피란시절 학생들의 수업 모습을 축소·재현한 미니어처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전시돼 있다.

 

6층에는 영사기,유명영화 스틸 사진 등 부산극장측에서 개관 기념으로 기증한 영화 관련 물품 및 일제 시대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대형지도 등이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옆에는 장독대와 돌절구 등으로 단장한 10평 남짓한 아담한 옥외 휴게실도 있다.

 

개관후 12월 현재까지 1만5천여명이 관람했다. 하루 평균 100명 내외가 관람을 하며 외국인 관람객은 대부분 일본인이다. 개관시간은 동절기 오전 10시~오후 6시,하절기 오전 10시~오후 7시, 토·일요일 오전10시~오후5시며 월요일은 휴무다. 관람료는 물론 무료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관람객들 중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했던 분들은 5층 전시실의 축음기 LP판에서 흘러 나오는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로 시작되는 박재홍의 애환어린 <경상도 아가씨>를 들으며 씨레이션,개떡,옥수수죽을 먹던 피란 시절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고.

 

산동네 길목 40계단

산이 많아서 그런지 부산에는 유난히 계단이 많다. 용두산공원 계단을 비롯, 산비탈에 오밀조밀한 판자집을 이어주는 계단 등. 그 중 40계단은 6·25전쟁 때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로 판자촌을 이뤘던 동광동과 영주동 산동네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했던 길목이다. 피란민들은 아침이면 이 계단을 거쳐 자갈치시장이나 부두,부산역,국제시장 등지로 장사하러 나갔다. 40계단 일대는 많은 구호물자나 암달러를 사고 파는 돗데기 장터였으며 실향민끼리 고향 소식을 주고 받는 정보교환소이기도 했다.

 

40계단은 언제,누가 만들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중앙동 일대를 1908년 매립해 그 땅을 '새마당'이라고 명명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 40계단 문화관이 위치한 언덕길에서 새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그 때 생기지 않았을까 관계자들은 추측한다.

 

일제때는 '꼬지집'들이 많아 술꾼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53년 부산역 대화재 때 판자촌 대부분이 불타 없어지고 새로이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40계단은 본래 위치에서 영주동 쪽 25m 떨어진 현재 위치에 새로 만들어 졌다고 전한다.

 

40계단 테마거리

40계단 인근에는 현재 내년 4월 준공을 목표로 테마거리 조성 작업이 한창이다. 지하철 중앙동역에서 시작, 40계단 앞 도로를 지나 디귿자로 감싸면서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 끝나는 500여m 도보 거리다. 테마거리는 현재의 노상 주차장을 없애고 기찻길과 바닷길을 소재로 각종 이색 볼거리로 채워질 예정이다. 기찻길 거리는 보도에 레일과 침목을 깔아 피난길 분위기를 조성하고 바닷길은 푸른 보도블록을 이용, 부산의 이미지를 상징하게 된다.

 

흥남 부두를 떠나 부산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40계단을 올라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곧 고향에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게 벌써 50년이 흘러 나이 많은 실향민들은 가슴에 한을 삭이며 하나둘 스러져 갔다. 중구청에서는 내년 테마거리 조성에 맞추어 실향민 수기공모, 음악제등 다양한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방학을 이용,자녀와 함께 40계단 문화관을 찾아 궁핍했던 그 시절을 함께 생각해 보고 오래된 맛집이 즐비한 40계단 거리에서 외식을 하며 가족의 정을 느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아코디언 코너는 세계적인 아코디언 연주가이며 레슨 전문가이며 인간문화재인 김일용원장님 승인을 거치고 허락을 받아 아코디언연주 영상물을 올립니다. 음악애호자나 아코디언에 취미를 가지신 분들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많은 이용 바랍니다. 김일용 아코디언 연구소(카페주소: 김일용 아코디언 연구원 - Daum 카페)입니다.

◐ 원장님 소개 ◑

- 연변대 예술학부 아코디언 전공

- 중국 길림시 신초 예술단 악장 역임

- 용정중학교 음악교사 역임

- 일용 아코디스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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