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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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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풋사랑(김일용 원장님 연주-제52호)

https://youtu.be/EJHHxmzSVB8?si=Kiti9MjVYFl3Aw6R

"일전에 업로드한 새로운 김일용원장님 아코디언연주 동영상입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노래소개

하룻밤풋사랑 / 작사 현인남, 작곡 이재현, 노래 손인호

 

허룻밤 풋사랑에 이 밤을 새우고
사랑에못이 박혀 흐르는 눈물
손수건 적시며 미련만 남기고
말없이 헤어지던
아 하룻밤 풋사랑

하룻밤 풋사랑에 행복을 그리며
가슴을 움켜안고 애태는 심정
이 밤도 못 잊어 거리를 헤매며
눈물을 벗을 삼는
아 하룻밤 풋사랑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 - 1930년대 부터 50년대 대표곡 26선

벅스와 한국대중음악박물관(kpopmuseum.com)에서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국대중음악 100년의 역사를 기념하고자 ‘한국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이라는 타이틀로 본 연재를 게재한다. 두 번째 연재인 이번 글에서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대중음악의 주요 기록과 주요 음악을 소개한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슬픔을 달랜 대중가요

대중음악으로써 제대로 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1930년대의 한국대중음악은 창가와 신민요, 유행곡, 서정소곡, 애정소곡, 영화주제가, 가요곡, 신가요, 만요 등이 주를 이루는 음반이 발매되었다. 1930년대 대중가요는 주로 단음계를 사용한 독특한 형태의 트로트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민요적 전통에 외래의 노래문화를 접목시킨 신민요가 양대양식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대중음악을 주도한 레이블은 오케레코드로써 이철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메이저 음반사로 군림했다. 이 외에도 씨에론, 태평을 비롯해 밀리온, 뉴코리아, 디어 등 군소 레코드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대중음악이 산업으로써 성장하게 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935년경 유성기의 보급대수는 35만 대, 판매된 SP음반은 백만 장에 가까웠다. 또한 라디오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던 시기를 지나 1930년대 후반에는 부산, 평양, 청진, 함흥, 이리 등 5개 지역방송국이 설립되었고 라디오 보급대수도 2만대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5. 4개의 최초 타이틀을 획득, 채규엽 ‘유랑인의 노래’ 1930년 콜롬비아레코드

작자 미상으로 전해오는 ‘학도가’는 유행의 물결을 탄 최초의 대중가요로 손꼽힌다. 이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시킨 채규엽은 대중음악사적으로 4개 부문에서 최초의 타이틀을 지닌 중요 뮤지션이다.

먼저 ‘한국 최초의 직업가수’를 시작으로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최초의 학사가수’, ’최초로 표절시비에 휘말렸던 인물‘이기도 하다. 1930년 경에 발표된 채규엽의 데뷔음반에는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를 부르자’ 2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유랑인의 노래’는 채규엽이 직접 작사, 작곡, 노래까지 도맡은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창작곡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80여 년 전에 상상조차 힘든 경이로운 업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채규엽은 故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기념하는 ‘마라손재패가’를 취입하는 등 광복 이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왔지만, 친일 행적은 지울 수 없는 오명으로 남아 있다.

 

6. 영화배우 최민수의 외할머니, 전옥 ‘항구의 일야’ 1933년 폴리도르

‘봄이 왔네 봄이 와’로 시작하는 봄을 대표하는 노래 ‘처녀 총각’으로 유명한 강홍식은 30년대의 막간가수로 ‘눈물의 여왕’으로 불렸던 악극 스타 전옥과는 부부사이다. 영화배우 최무룡은 이들의 사위고 최민수는 외손주로 이 가문은 노래와 연기를 겸했던 멀티플레이어 재능이 탁월했던 대중문화의 명가로 유명하다.

전옥의 창법은 가슴 속에 깊이 배여 있는 여러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데 과장되지 않고 안정적인 느낌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영화배우로 잘 알려진 전옥의 이름은 가수로서 영화의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제가를 부른 예가 많은 편이다.

나운규 프로덕션을 대표했던 전옥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항구의 일야’는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스크린으로 옮겨진 작품이다. 또한 이 곡은 악극 영화를 대표하는 노래로 이미 1933년 전옥의 목소리가 담겨진 극음반으로 발표되었던 곡이다.

 

7. 조선판 찰리 채플린, 신불출 ‘소문만복래’ 1934년 오케레코드

1930년대를 대표하는 음반사인 오케레코드는 1933년 2월부터 한국대중음악과 관련된 여러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면서 일제강점기 기간 동안 가장 돋보이는 레이블로 군림했다. 오케레코드는 대중 취향의 선곡과 저가정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한국 코미디의 뿌리로 평가받는 신불출의 만담과 같은 대중적인 소재를 개발해서 유행가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신불출은 찰리 채플린에 비견되는 30년대를 대표하는 만담가이자 연극인이다. 최초 무대에 섰던 ‘동방이 밝아 온다’에서 신불출은 대본과 상관없이 자기류로 바꾸어 연기를 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제의 강압과 사회 비판을 만담을 통해 표현하던 신불출은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되자, ‘에하라 노라하’로 발음되는 일본식 이름을 지었다. 이 뜻은 ‘될대로 되어라’라는 의미의 추임새를 의미한다. 신불출은 광복 후에 월북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제적인 문화정책을 비판한 것을 이유로 1962년에 숙청당했다.

 

8. 아버지 몰래 훔친 육십원이 대박으로, 고복수 ‘타향(타향살이)’ 1934년 오케레코드

30년대 음반사의 성공은 가수에 좌지우지되었다.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 1931년 국내 최초의 ‘전국 신인가수 선발대회’가 열렸다. 신문과 잡지, 라디오는 물론 대회가 다가오면서 비행기에서 전단지를 뿌리는 등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 경남지역 예선에서 1위를 차지했던 고복수는 경성에서 열린 본대회에서 3위로 입상했다.

아버지의 가게에서 육십원을 훔쳐서 상경했던 고복수는 결국 오케레코드와 천원이라는 거금의 계약을 맺게 된다. 1934년 12월, ‘부산태생의 천재 성악가’라는 광고 문구를 앞세워서 고복수의 데뷔곡 ‘타향’이 담긴 음반이 발표되었다.

이 앨범은 발매 한 달만에 5만 장이 판매되었고, 1940년대 이후 악극단 전성시기에는 ‘타향살이’로 제목이 바뀌어 불려졌다. 고복수의 ‘타향’은 비슷한 시기에 녹음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과 함께 오케레코드를 최고의 음반사로 끌어 올렸다.

‘타향’은 고복수의 생명을 구한 노래이기도 하다. 6.25전쟁 때 고복수는 인민군에 붙잡혀서 북으로 끌려가다가 평안도에서 극적으로 국군을 만나게 되었고, ‘타향살이’를 부른 가수라는 신분이 밝혀지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9. 이순신 장군의 원한이 서린, 이난영 ‘목포의 눈물’ 1935년 오케레코드

애절한 콧소리로 민족의 울분을 토해 낸 이난영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고통 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대변하는 한의 가락으로 평가받는다. 1934년 조선일보주최 전국 6대도시 ‘애향가’ 가사 공모전에 응모된 3천여 편의 작품 중 목포의 문일석 작품 ‘목포의 눈물’이 당선되었다.

오케레코드는 고복수를 위해 만든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 멜로디에 이 가사를 넣어 목포출신가수 이난영에게 부르게 했다.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연 공전의 히트곡인 ‘목포의 눈물’은 식민지 조선을 흐느낌으로 잠기게 했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했다.

‘목포의 눈물’의 가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노적봉과 관련된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부분이 있다. 이 가사 때문에 ‘목포의 눈물’은 조선총독부의 사전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뻔 했다.

그러나 검열을 위해 가사를 제출하면서 ‘삼백년 원한 품은’ 부분을 ‘삼백년 원앙품은’으로 바꿨고, 한글 받힘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승인을 해줬다. ‘목포의 눈물’은 발매이후 재발매를 거듭하면서 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10. 최초의 이중계약 소송, 황금심 ‘알뜰한 당신’ 1936년 빅터레코드

황금심은 1930년대 이후 활동하던 가수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1,000여 곡의 노래를 부르고 음반에 담아낸 황금심은 마이크를 굳이 쓰지 않아도 육성으로 풍성한 가창을 이룬 가수였다.

어린 시절 여관을 하던 부모님으로 인해 자주 오가던 가수 김용환의 처였던 이화자에게 노래를 배운 어린 황금심은 비상한 재능을 인정받아 14세 때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오디션에서 1등으로 선발되었으며, 1936년 16세의 나이에 ‘왜 못 오시나요’라는 노래를 취입했다.

이후 황금심은 그녀의 노래를 듣고 반한 작사가 이부풍의 주선으로 빅타레코드로 스카우트 되었고, 전속 작곡가 전수린과 콤비를 이뤄 대표곡인 ‘알뜰한 당신’을 발표하며 빅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사이 오케레코드와 빅터레코드는 황금심의 이중계약 문제로 소송이 벌어졌으며, 이 시기에 작사가 이부풍은 황금심의 안정과 성공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이부풍은 남인수가 히트시킨 ‘애수의 소야곡’ 등 많은 명곡을 완성시킨 1930년대의 대표적인 작사가이다. 1930년대를 상징하는 가수 고복수와 황금심은 국내 최초의 가수 커플로써 오케레코드 소속이던 고복수가 황금심에 반해 전속사를 옮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11. 3옥타브를 넘나들었던 가수, 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1937년 오케레코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남인의 목소리는 여러 노래에 실려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눈물보를 자극했다. 그의 대표적인 히트곡인 ‘애수의 소야곡’은 박시춘 작곡, 이부풍 작사로 완성되어 일제강점기 당시 ‘서정가요의 제왕’으로 불린 남인수의 출세작이다.

원래 이 노래는 남인수가 1936년 열여덟 살 데뷔시절 시에론레코드를 통해 강문수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던 ‘눈물의 해협’을 이부풍의 노랫말로 개사해서 재발매한 후 뒤늦게 빅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식민지의 설움과 시대적 아픔보다는 남녀 간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진 이 노래는 박시춘-남인수 콤비의 첫 히트곡이다.

떠나간 연인을 그리면서 우수에 젖어 있는 체념적인 내용의 서정적인 가사와 애절한 가락이 3옥타브를 넘나드는 남인수 특유의 미성과 잘 어우러진 이 노래는 인트로의 가사가 주는 애상이 매우 깊다. ‘애수의 소야곡’은 1962년 45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한 남인수의 장례식에서는 장송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12. 25년이 지나서야 히트한, 김정구 ‘눈물젖은 두만강’ 1938년 오케레코드

코믹한 만요를 주로 부른 김정구가 국민가수로 존경받는 원동력은 민족의 애환을 담은 명곡 ‘눈물젖은 두만강'을 불렀기 때문이다. 두만강은 백두산 천지의 남동쪽에서 발원하여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의 국경을 두루 거쳐서 흐른다. 1930년대 두만강 연안에는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삼엄한 경계 속에서 지나는 모든 이들을 검색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독립단 소속 열혈청년들과 민족 운동가들은 두만강을 넘어 다니며 피 뜨거운 독립운동을 펼쳤다. ‘눈물젖은 두만강’은 1936년 여름, 악극단 예원좌의 일원으로 두만강 유역의 도문에 공연 갔던 무명 작곡가 이시우가 창작한 곡이다. 음반으로 발표되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최초로 부른 가수는 막간가수 ‘장성월’이었으며, 김정구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무렵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이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1963년 민경식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개봉하며 도미도레코드를 통해 10인치 영화OST 음반을 제작하면서부터이다. 때를 같이 해서 1964년 KBS라디오의 인기프로그램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배경음악으로 ‘눈물젖은 두만강’이 방송을 타면서 국민가요로 떠오르게 되었다.

 

13. 최초의 걸그룹 멤버였던, 박향림 ‘오빠는 풍각쟁이야’ 1938년 오케레코드

국내 최초의 걸그룹으로 추정되는 저고리 시스터즈에서 이난영과 함께 활동했던 박향림이 부른 ‘오빠는 풍각쟁이야’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OST로 사용되면서 친숙해진 1930년대의 대표적인 코믹송이다. 박향림의 간드러진 노래는 빠른 비트와 랩을 즐기는 요즘 세대에게도 코믹한 가사와 흥겨운 리듬이 어필되어 노래방 애창곡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박향림의 깜찍하고 발랄한 창법에 어둡고 우울했던 기분을 이겨낼 수 있었다. 박향림은 16세 되던 1937년 서울에서 온 오케연주단(조선악극단)의 공연을 본 후, 서울로 찾아갔지만 이철 사장의 냉담한 반응에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된다.

이후 ‘청춘극장’과 ‘서커스 걸’을 발표해서 좋은 반응을 얻어내면서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스카우트된 박향림은 심술을 부리는 일상적인 남매 집안의 오빠들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오빠는 풍각쟁이’를 빅히트시켰다. 인기가수로 떠오르면서 결국 자신을 거절했던 오케레코드의 전속가수가 되면서 ‘코스모스 탄식’ 등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14. 오빠는 왜 그녀에게 울지 말라 했을까. 김영춘 ‘홍도야 우지마라’ 1939년 콜롬비아레코드

1938년 극단 청춘좌 임선규의 창작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큰 호응을 얻자 1939년 영화 역시 제작되었다. 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 김영춘이 노래한 ‘홍도야 우지 마라’는 영화주제가로 사용되어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노래의 가사는 1930년대 식민지 백성의 어두운 삶에 깊은 울림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무려 10만 장의 판매기록을 세웠다.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홍도’의 모습을 통해 ‘홍도’의 순정을 깨닫게 하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던 노래가 바로 ‘홍도야 우지마라’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 노래의 제목만 기억할 뿐 가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아서 누구의 노래인지 잘 모른다. 191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영춘은 1938년 스무 살에 콜럼비아레코드사 주최 전국가요콩쿠르에 출전해서 입상과 더불어 가수로 데뷔한 인물이다.

‘홍도야 우지마라’의 인기가 대단해서 김영춘의 다른 노래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원래 남일연이 불렀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란 노래의 뒷면에 실려 있던 곡으로 1950년대에 가수 박재홍이 리메이크해서 또다시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1970년대에는 같은 제목의 라디오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다.

 

1940년대,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대중가요

일제 강점기 말엽인 1940년대에 일본은 문화적인 측면에서 통제를 한층 강화하기 시작한다. 1940년대 초반 일제는 영화, 연극, 대중가요, 국악계에서 활동하던 모든 이들에게 기예증을 발급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대중가요 음반의 제작은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전쟁을 독려하는 군국가요만이 울려 퍼지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노래들은 당대의 대중음악인들에게 ‘친일’이라는 주홍글씨를 안기고 말았다. 해방이 되면서 국내 음반 산업을 주도했던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했고, 대중음악계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레코드문화협회와 대중음악협회가 발족하고, 1946년 조선레코드회사가 설립되었지만 음반을 제작할 장비와 물자가 없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서울 종각 앞 한청빌딩 녹음실에서는 왁스 판에 수록한 해방가요 1호 ‘사대문을 열어라’가 제작되었다.

이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 음반사들이 해방의 감격을 담아낸 노래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깐, 첨예했던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충돌은 대중음악마저 남과 북으로 분리시키고 말았다.

 

15. 10만 장 이상 판매되었던, 백년설 ‘나그네 설움’ 1940년 태평레코드

‘아내의 노래’로 기억되는 심연옥의 남편이기도 한 백년설은 1940년 나라 잃은 조선인의 마음을 대변했던 ‘나그네 설움’으로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라이벌이라 할 만한 남인수, 김정구, 진방남 등의 목소리보다 바이브레이션을 크게 흔드는 창법이 인상적인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은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의 작품으로 10만 장이 판매되는 빅히트를 기록했던 노래다. 조경환, 이재호, 백년설 트리오는 1940년 ‘어머님 사랑’, ‘제3 유랑극단’, ‘한 잔에 한 잔 사랑’ 등을 발표해서 모두 히트시켰다.

‘나그네 설움’에 이어 발표된 ‘번지없는 주막’은 나라 잃고 유랑했던 조선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명곡으로 백년설을 당대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게 했다.

 

16. 녹음하던 날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진방남 ‘불효자는 웁니다’ 1940년 태평레코드

1939년 ‘사막의 애상’으로 데뷔한 가수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는 시대를 초월해 많은 대중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명곡이다. 가수 진방남은 작사가 반야월이기도 하다. 진방남이 반야월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작품은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 처녀’ 등 즐비하다.

1939년 태평레코드사가 김천에서 개최한 전국신인남녀 가요콩쿠르대회에서 수백 명 경쟁자들을 제치고 진방남은 1등에 입상하며 전속가수가 되었다. 1940년에 발표된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는 당대의 메이저 음반사인 오케레코드를 위협할 정도로 태평레코드의 위상을 올려준 빅히트곡이었다.

진방남의 자전적인 스토리를 담은 이 노래에는 성공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난 아들을 위해 온 몸을 내던진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고전적인 한국여인상을 그려냈다. 일본으로 노래를 취입하러 떠났던 진방남은 현지에서 '모친별세'라는 급전을 받고 몇 차례 취입을 시도했지만, 목이 메어 노래가 나오질 않아 겨우겨우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진정성 가득한 가사와 애절한 멜로디는 수많은 불효자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17. 고향을 향한 애달픈 마음, 백난아 ‘찔레꽃’ 1941년 태평레코드

혜은이와 함께 제주 출신의 대표적인 가수인 백난아는 한서경이 신세대풍으로 리메이크해서 히트시킨 ‘낭랑 18세’를 불렀던 인물이자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을 작곡한 이재호는 그녀의 남편이다.

백난아는 작곡가 김교성과 가수 백년설에 의해 데뷔를 맞이했다. 김교성에 의해 태평레코드의 전속으로 계약을 맺었고, 본명이었던 오금숙을 백년설의 조언으로 백난아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백난아가 노래한 '찔레꽃'은 제주 한림읍의 '명월대'를 찾아 향수를 달래며 만든 노래로 알려져 있다.

2009년 제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전국 규모의 ‘백난아 가요제’가 개최되어 목포의 ‘이난영가요제’와 부산의 ‘현인가요제’와 더불어 대표적인 3대 지역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18. 웃음으로 채운 시대의 노래, 한복남 ‘빈대떡 신사’ 1947년 아세아레코드공사

이처럼 유쾌하고 서민적인 노래는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찾기 힘들다. 한복남은 1943년 ‘빈대떡 신사’를 히트시킨 이후 김해송이 주관하는 KPK악단에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대구에서 재봉상사를 통해 번 돈으로 도미도레코드를 설립해서 수많은 히트곡을 제작한 인물이다.

특별히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한복남의 악보는 전문가 이상의 섬세한 기품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빈대떡 신사’는 일제강점기에 대유행한 만요의 전통을 계승한 노래로 가사의 대부분이 웃음소리로 채워진 독특한 노래이다.

 

19. 청초한 색기,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 1948년 오케레코드

광복 이전까지 한국대중가요의 노랫말에는 북촌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명이 다수 등장한다. 장세정이 노래한 ‘울어라 은방울’은 ‘세종로’, ‘삼각산’, ‘보신각’, ‘덕수궁’ 등 친숙한 지역명이 상당수 등장하는 노래로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가사의 내용은 처음 발표 때와 달리 일부 수정되었는데, ‘황금마차’는 해방된 ‘역마차’로 ‘삼각산’은 ‘인왕산’으로 변경되어 불리어졌다. 장세정은 평양 화신백화점의 악기점에서 근무하던 15세 때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가요제에서 1등을 차지하며 가수가 되었다. ‘평양이 낳은 가희’라는 타이틀로 홍보되었던 장세정의 음색은 ‘청초한 색기’로 불릴 정도로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20. 손으로 빚은 희귀반, 이인권 ‘귀국선’ 1949년 오리엔트레코드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자 망명을 갔던 동포들은 광복의 감격과 기쁨을 얼싸안고 상해나 일본에서 혹은 북만주에서 조국으로 귀국하게 됨에 작곡가인 이재호와 작사가인 손호원이 부산 부두에서 이 광경을 보고 만든 노래가 바로 ‘귀국선’이다.

원곡가수는 신세영이지만, 대중들에게 히트를 기록한 버전은 이인권의 ‘귀국선’은 해방 이후를 대표하는 대중가요로 손꼽힌다. 특히 이 유성기음반은 손으로 음반을 빚어내며 녹음한 희귀음반으로 얼마 전 경매에서 4백 50만원에 낙찰된 유성반이기도 하다.

 

21. 진정한 모던보이, 현인 ‘신라의 달밤’. ‘베사메무초’ 1949년 럭키레코드

성악을 전공한 이국적인 마스크를 지닌 채 혜성처럼 등장했던 현인은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등 주옥같은 노래를 통해서 해방 전후를 대표했던 대중가요계의 거목이다.

특유의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그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청소년층의 단골 모창 메뉴로 각광받을 만큼 독특했다. 그의 대표곡 ‘신라의 달밤’과 ‘에스 이 오 유 엘’을 반복하는 ‘럭키 서울’은 특이하고 재미난 것을 선호하는 요즘 세대의 음악적 취향에도 충분히 소통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22. 이별을 상징하는 장소를 노래한, 현인 ‘비 내리는 고모령’ 1949년 럭키레코드

‘비내리는 고모령’은 현인과 함께 황금콤비를 이뤘던 유호와 박시춘의 작품이다. 좀 더 정확히 유호의 필명인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의 ‘비나리는 고모령’은 1948년에 발표되었는데, 노래의 배경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모령 고개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이 징용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하던 장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는 설을 비롯해서, 노래가 만들어진 유래에 대해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2005년 KBS 인기프로그램 ‘가요무대’가 방송 20돌을 맞이해서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를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와 ‘찔레꽃’에 이어 3위를 차지했던 노래이기도 하다.

 

1950년대, 진중가요와 미8군 쇼무대의 등장

1950년대 한국대중음악은 작사, 작곡, 편곡, 연주자의 정보는 물론 발표 년도와 제작 음반사조차 불명확한 상태로 방치되어 아쉬움이 크다. 더해서 당시 북으로 넘어간 모든 문인과 대중 문화인들의 작품은 내용과 상관없이 금지의 철퇴가 내려졌다.

연예인들은 군예대에 편성되어 전쟁터를 누비며 위문활동을 펼치는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휴전과 환도 이후 피난지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쇼 무대와 악극공연 그리고 레코드사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서울도심과 용산의 미8군 캠프, 여의도, 이태원에는 수많은 미8군 클럽들이 생겨나며 미8군 무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미군문화의 무차별 유입으로 춤바람 열풍과 함께 경쾌한 리듬의 댄스곡들이 대유행했다. 전쟁의 상흔이 점차 아물어 가면서 미8군 쇼 가수들의 일반무대 활동이 시작되었고 영화주제가 전성시대도 펼쳐졌다.

대한가수협회가 창립된 1958년에 국내 최초의 LP가 제작되면서 대중음악은 획기적인 발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한국 전쟁 때 대중가요는 또 한 번 큰 힘을 발휘했다. 동족상잔의 절박한 상황은 무수한 진중가요를 탄생시켰으며 피난민들의 고통과 애환을 달래준 명곡들이 많이 탄생되었다.

 

23. 한많은 이별의 에피소드를 지닌, 박재홍 ‘울고넘는 박달재’ 1950년 고려레코드

'울고넘는 박달재'는 한국전쟁을 목전에 둔 1950년 박재홍이 불러 수많은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국민가요의 반열에 올랐던 노래이다. 박재홍의 구수한 노래와 김교성의 애절한 멜로디도 훌륭했지만, 이별의 순간과 애달픈 사연을 스케치한 반야월의 가사가 압권인 넘버로서 작은 에피소드를 지니고 있다.

1948년 가을녁 남대문악극단의 지방순회 공연 중에 단원들을 태운 버스가 박달재 정상에서 펑크가 나고 말았다. 버스에서 내린 반야월은 박달재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부둥켜안고서 흐느끼는 젊은 부부의 이별장면을 목격하고 그 장면을 가사로 옮겼다고 한다.

 

24. 영화 ‘국제시장’을 함축한 노래, 현인 ‘굳세어라 금순아’ 1953년 오리엔트레코드

이 노래는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부두 씬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 노래이며, 6.25 전쟁 당시 상처받은 피난민과 이산가족의 마음을 위로하는 시대의 송가이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에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당대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정확하게 1950년 12월 15일부터 10일간 10여만 명의 피란민이 군용선과 목선, 그리고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등에 올라 흥남부두를 철수한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생생한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강사랑의 가사에 감명을 받은 박시춘은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의 다방에서 군용담요를 창문에 겹겹이 가리고 힘겹게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실향민의 아픔과 소망을 담은 애절한 가사와는 달리 경쾌한 멜로디를 차용해서 슬픔을 극복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25. 부산을 대표하는 이별가, 남인수 ‘이별의 부산정거장’ 1953년 유니버샬레코드

이 노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문성재의 ‘부산갈매기’보다 앞서서 부산을 상징하는 노래로 손꼽혔던 곡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발표된 이 노래는 환도하는 피난민들의 애환을 절절하게 담아냈다.

어수선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이 노래는 놀랍게도 10만 장이 넘는 판매기록을 세우며 ‘애수의 소야곡’ 이후 남인수에게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줬다. 이 노래는 1958년 LP시대가 개막되면서 10인치, 12인치로 재발매되었고, 이후 음반 미디어가 변화할 때마다 어김없이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해 나왔다.

 

26. 봄을 대표하는 시대의 송가, 백설희 ‘봄날은 간다’ 1953년 유니버샬 레코드

오랫동안 봄노래의 전형은 축축 처지는 멜로디가 아닌 발랄하고 흥겨운 리듬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소라의 ‘봄’이나 자우림의 리드보컬 김윤아가 부른 여러 봄노래를 들어보면 개인적 감성을 드러낸 슬프고 비장한 느낌도 강하다.

계간 시인세계에서 현역시인 100명에게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을 조사해서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1위곡은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였다. 1943년 데뷔한 백설희의 가정은 대중문화의 명가로 손색이 없다.

인상적인 연기력으로 5.60년대를 풍미했던 배우 황해는 그의 남편이고, 7.8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 전영록은 그의 아들이며, 손녀 전보람은 걸 그룹 티아라의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사실 이 노래는 화사한 봄날에 어울리는 봄노래의 전형에서 다소 빗겨난 슬픔과 퇴폐와 절망이 뒤엉킨 구슬픈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만큼 한국 여인들의 한스러운 마음을 잘 표현한 노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슬퍼서 더욱 아름다운 노래이기도 하다. 오리지널 가수 백설희 이후 금사향, 이미자, 배호, 조용필, 나훈아, 은방울자매, 하춘화, 문주란, 최헌, 이은하, 금과은, 심수봉, 김도향, 이동원, 장사익, 한영애, 홍서범 등 우리시대 최고의 가인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발표해 나왔다.

 

7. 처절한 생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고개’ 1956년 오아시스레코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작사가 반야월이 자신의 어린 딸을 전쟁 중 피난길에서 잃은 개인적 경험과 연결지어, 미아리고개에서의 이별이라는 주제로 가사를 썼던 곡이다.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기 때문에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유독 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이다.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가사는 매우 구체적이며 애절하다.

철사로 손을 묶이고 맨발로 다리를 절면서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북한으로 끌려가는 남편의 모습을 묘사하고, 기다리는 부인은 남편이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란다는 내용으로 이해연의 가슴을 헤집는 가창은 특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28.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된, 황정자 ‘처녀 뱃사공’ 1959년 라라레코드

‘낙랑악극단’은 혜은이의 아버지 최성택이 단장이었고 6.25 전쟁 이후에 막강한 인기를 구가했던 지방의 쇼단체였다. 낙랑악극단을 대표했던 윤부길은 원맨쇼의 일인자이자, 멀티 플레이어 윤복희와 키보이스의 창립멤버였던 윤항기목사의 아버지이다.

6살의 나이에 손가락에 상처를 내면서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당돌한 행동을 했던 윤복희와 함께 윤부길은 ‘윤부길과 천재소녀 윤복희’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전국을 누비여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윤부길은 경남 함안 악양나루터에서 나룻배를 젓고 있던 처녀뱃사공을 만나게 된다.

강을 건너며 처녀뱃사공이 오빠를 만나기 위해 강을 오가고 있다는 애절한 사연을 들은 윤부길은 노랫말로 담아냈고, 한복남에게 곡을 요청해서 국민 애창곡 ‘처녀 뱃사공’이 탄생되었다. 손인호의 ‘짝사랑’과 함께 유성반으로 처음 발표된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은 60년대 당시로서는 드물게 독집LP로 제작되기도 했다.

총 12곡이 수록된 이 음반에는 훗날 혼성밴드 들고양이에 의해 리메이크된 ‘오동동 타령’의 오리지널 버전도 수록되어 있다.

 

29. 주현미의 큰어머니, 박신자 ‘댄서의 순정’ 1959년 신세기레코드

1950년대는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대변되었듯이 여성들의 춤바람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었던 시기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던 당시 이 땅의 젊은 여성들은 고향을 떠나 여급 혹은 댄서로 살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댄서의 순정’은 그 같은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여성들의 현실을 증언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다. 이 노래의 오리지널 가수 박신자는 주현미의 큰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1959년 유성기 음반으로 발표된 이후 10인치 LP로 재발매되었지만, 1968년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가사가 저속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었다.

이후 1970년 김추자에 의해 ‘댄서의 순정’으로 리메이크되면서 빅히트를 기록했다. 빼어난 미모였지만 23살에 요절한 박신자의 노래는 시대적 아픔과 금지의 아픔까지 더해져 유성기 음반과 10인치 LP할 것 없이 전설적인 음반으로 남아 있다.

 

30. 신성일이 배우가 된 뒷이야기, 손시향 ‘이별의 종착역’ 1959년 내셔날레코드

‘한국의 짐 리브스’로 통했던 손시향은 중저음 톤이 매력적인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귀티가 흐르는 미남형 가수이다. 경북고등학교 동창인 신성일이 가수로 성공한 손시향에게 자극을 받아서 배우로서의 성공을 다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서울대 농대 재학시절 KBS 노래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면서 가수로 데뷔한 손시향은 1958년 작곡가 손석우를 통해 최고가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마카오 신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손시향은 박일호, 현양, 김성배와 함께 남성 4중창단 블루벨즈(Blue Bells)로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나왔다.

‘한국판 애수’로 인정받으며 전쟁을 소재로 한 멜로물이었던 영화 ‘이별의 종착역’의 음악은 손석우가 담당을 했고, 주제가는 역시 손시향이 불렀다. 전인권의 데뷔 솔로 앨범과 신촌블루스의 3집 앨범, 김현식의 유작 앨범인 6집 앨범에도 수록된 바 있는 ‘이별의 종착역’은 50년대 말의 애상을 지닌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이 아코디언 코너는 세계적인 아코디언 연주가이며 레슨 전문가이며 인간문화재인 김일용원장님 승인을 거치고 허락을 받아 아코디언연주 영상물을 올립니다. 음악애호자나 아코디언에 취미를 가지신 분들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많은 이용 바랍니다. 김일용 아코디언 연구소(카페주소: 김일용 아코디언 연구원 - Daum 카페)입니다.

 

◐ 원장님 소개 ◑

- 연변대 예술학부 아코디언 전공

- 중국 길림시 신초 예술단 악장 역임

- 용정중학교 음악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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