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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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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스테판 에셀[프랑스]

스테판 에셀 (Stephane Frederic Hessel, Stephane Hesse..) 작가.
출생 1917년 10월 20일 독일~2013.02.27일 ㅡ프랑스 타계.

레지스탕스의 동기, 그것은 분노
이런 우리에게 혹자는 말한다. 시민을 위해 이런저런 조치들을 하는데 드는 비용을 국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그러나 해방 프랑스-유럽이 파산 상태였던 시기-이래로 창출되는 부의 양은 괄목할 만큼 증가했는데도 이제 와서 그간 얻은 성과를 유지하고 이어나갈 돈은 부족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만약 그럴 돈이 부족하다고 강변한다면 그건 아마도, 이젠 국가의 최고 영역까지 금권의 충복들이 장악한 상태에서 레지스탕스가 투쟁 대상으로 삼았던 금권이 전에 없이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민영화된 은행들은 우선 자기들의 이익배당과 경영진의 고액연봉 액수에나 관심을 보일 뿐 일반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극빈층과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적도 일찍이 없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 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고. 정치계․경제계․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 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도 안되며 이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려서도 안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이 구체적인 실천방안까지 명시한 이 권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역사를 보는 두 관점
무엇이 파시즘을 초래했는지, 프랑스가 무엇 때문에 파시즘의 침탈을 받았고 비시 정권이라는 괴뢰정권이 세워졌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이렇게 혼잣말을 하게 된다. ‘가진 자들은 이기적인지라 볼세비키 혁명을 지독히 두려워했다’고. 그들은 그 두려움이 이끄는 대로 생각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만약 그때처럼 오늘날 행동하는 소수가 일어선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겐 반죽을 부풀릴 누룩이 생기는 셈이다. 물론 1917년생인 나 같은 늙은이의 체험은 오늘날 젊은이들의 체험과는 다르다. 나는 종종 중등학교 교사들에게 말하곤 한다. 당신들이 학생들에게 이야기 좀 할 수 없느냐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물론 당신들이 참여하는 뚜렷한 이유가 우리의 그것과 같을 수야 없다. 우리 때는 독일의 강점과 프랑스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저항이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일이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식민지의 독립 또한 단순했다. 그러다가 알제리 전쟁이 발발했다. 알제리가 프랑스 식민지를 벗어나 독립해야 한다는 것,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스탈린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 모두는 1943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나치에 맞서 거둔 승리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이미 1935년에 벌어진 스탈린의 ‘대숙청’의 진실을 알았을 때, 비록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마로서 공산주의에 한 귀는 열어 두어 균형을 맞출 필요는 있었다 해도 전체주의라는 이 견딜 수 없는 체제에 맞서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다가왔다. 나는 남들보다 훨씬 오래 살다 보니 분노할 이유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이런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 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 나는 청년 시절 파리 고등사범학교 학생으로서, 학교선배인 사르트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르트르의 저서『구토』『벽』『존재와 무』는 나의 사상 형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주었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이것은 절대 자유주의의 메시지였다. 어떤 권력에도, 어떤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인간의 책임. 권력이나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 했다. 1939년 파리 윌름 거리에 있는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철학자 헤겔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리고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세미나를 들었다. 메를로퐁티의 강의에서 우리는 구체적 체험, 복수(複數)의 감각과 대면하는 커다란 유일자로서의 몸, 이런 것을 탐구했다. 그러나 바람직한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낙관적 성향을 타고난 나로서는 메를로퐁티보다는 헤겔 쪽에 더 끌렸다. 헤겔 철학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의미있는 어떤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그 의미란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 한 단계씩 진보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연이은 충격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도전을 염두에 둔 생각이다. 수많은 사회들의 역사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여 종국에는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됨으로써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국가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를 이와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자유, 경쟁, ‘언제나 더 많이’갖기 위한 질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진보란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풍처럼 체험될 수 도 있다. 우리 아버지의 친구 한 분이 바로 역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 분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우리 아버지와 함께 독일어로 번역한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린 <새로운 천사>를 보고 비관적인 메시지를 날렸다. 이 그림에서 천사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진보라는 폭풍을 끌어안으면서도 내치는 몸짓을 하고 있다. 그 후 나치즘을 피해 망명하던 중 1940년 9월에 자살한 벤야민에게, 역사의 의미란 재앙에서 재앙으로 이어지는 저항할 길 없는 흐름이었다.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
맞다. 분노의 이유가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누가 명령하며, 누가 결정하는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흐름들을 샅샅이 구분한다는 것이 늘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의 상대는 이제 하나의 작은 특권 계층만이 아니다. 어느 작은 특권 게층의 행동쯤이야 우리가 명확히 알아 차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대는 광활한 세계이며, 그 세계가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더 강력한 상호연결성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도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은 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려면, 제대로 들여다보고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 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 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 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커다란 도전이 두 가지있다. 첫째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에 가로 놓인,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격차, 이는 20세기와 21세기가 낳은 새로운 폐해다. 지금 세계의 극빈층은 하루에 2달러도 채 벌지 못한다. 이 격차가 더욱더 벌어지게 방치할 수는 없다.
둘째, 인권, 그리고 지구의 현재 상태. 프랑스가 독일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후, 나는 세계인권 선언의 문안을 작성하는데 참여했다. 유엔은 이 선언문을 1948년 12월 10일 파리 샤이오 궁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나는 당시 유엔 부사무총장 겸 유엔 인권위원회 간사였던 앙리 로지에의 보좌팀 팀장 자격으로 몇몇 사람과 함께 이 인권 선언의 문안 작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선언문을 만들때 1941년 런던에 수립된 자유 프랑스 정부의 법무 및 교육담당 국가위원이었던 르네 카생-1968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역할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작성한 문안은 유엔 경제사회위원회의 위원이었던 피에르에게 제출되었고, 그의 검토를 거쳐 사회 문제와 인도주의 문제, 문화 문제를 다룬 유엔총회 제3분과위원회에서 검토되었다. 당시 이 위원회의 회원국 수는 54개국이었으며, 나는 사무국 일을 보고 있었다. 세계 인권 선언에 영어권 국가들의 대표들이 제안한 ‘국제적’이라는 말 대신 ‘보편적’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르네 카생 덕분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 끝난 당시에는, 세계를 겁박하던 전체주의 위협에서 해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위협에서 해방되려면 유엔 회원국들로부터 이 선언에 나오는 보편적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내야 했다. 한 국가가 자국 영토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하면서도 버젓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강변을 깨부수는 하나의 방법이 바로 이 인권 선언이었던 것이다. ‘내 나라 안에서는 내가 주인이니 마음대로 대량학살을 자행해도 된다’고 생각한 히틀러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보편적 선언은 나치즘, 파시즘, 전체주의에 대한 보편적 반감에 힘입은 바 크며, 우리(나와 레지스탕스 동료들)가 동참했기에 레지스탕스 정신으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모든 국가들이 이런 가치들을 충실하게 지키고 널리 펴나갈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이를 지키도록 강요라도 하려 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동참한다고 공언하면서 실제로는 약소국 정복을 일삼는 국가들의 위선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며, 신속히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절감하고 있었다.
여기서 세계 인권 선언 제15장을 인용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개인은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그리고 제22항도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에 힘입어 각국의 조직과 경제적 형편을 감안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그 인성의 자유로운 계발에 필수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이 충족을 성취함을 근간으로 한다.”
이 선언이 지는 효력이 그야말로 선언적인 것에 그칠뿐 법률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떻든 이 인권 선언이 1948년 이래로 강력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식민 지배를 받던 민족들은 이 인권 선언에 힘입어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이 선언은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해나가는 그들에게 정신적 토대의 씨앗을 뿌려준 셈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비정부기구들, 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제추진협회(ATTAC)와 같은 사회운동단체, 국제인권연합(FIDH), 국제사면기구(엠네스티 인터내셔날) 등 활동적이고 실천력있는 조직들이 아주 많아졌다. 이제는 효율적으로 활동하려면 네트워크 단위로 행동하면서 현대적인 소통방식까지 두루두루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나는 젊은이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겁니다. 강력한 시민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인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나의 분노
오늘날 나는 주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요르단 강 서안지구(West Bank)에 관해 분노한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바로 분노를 자아내는 원천이다. 2009년 9월 리처드 골드스톤이 가자 지구에 대해 쓴 보고서는 필독할 만한 글이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유대인 출신의 남아프리카공화국 판사 골드스톤은-심지어 시온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인데- 이스라엘 군대가 3주간 ‘캐스트 리드(Cast Lead)’작전을 수행하면서 ‘전쟁범죄에 가까운, 어쩌면 어떤 상황에서는 반인륜적인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저질렀고 비난하고 있다.
나 자신이 2009년 가자 지구를 다시 찾아갔고,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덕분에 아내와 함께 그곳에 들어가서 이 보고서에 담긴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우리와 함께 간 사람들은 가자 지구 내부까지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지 못했다. 우리 내외는 가자 지구에도 갔고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도 갔다. 또한 1948년부터 유엔 산하 기관인 국제연합 팔레스차인 난민 사업기구(UNRWA)가 설립한 팔레스타인 난민수용소도 방문했다. 그곳에는 이스라엘에 의해 살던 땅에서 쫓겨난 300여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귀환문제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가자 지구, 그곳은 150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이 감옥에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조직적으로 힘을 합쳐 버텨 나가고 있다. ‘캐스트 리드’작전에 의해 ‘적신월(赤新月)’ 병원이 무너진 사건같은 물질적 파괴보다 한층 더 깊이 우리 기억속에 각인된 것은 가자 지구 주민들의 행동, 애국심, 바다와 해변에 대한 애정, 끊임없이 자녀들의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 등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강요된 모든 결핍 상황에 그들이 어찌나 지혜롭게 대처하던지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탱크가 밀어버린 가옥 수천 채를 다시 짓는데 시멘트가 없어서 벽돌을 직접 만들어 쓰는 모습도 보았다. 이스라엘군대가 수행한 ‘캐스트 리드’작전 기간에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는 남녀노소 합쳐 1,400명이 사망했다. 반면 이스라엘측은 부상자만 50여명이었을 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판사 골드스톤이 내린 결론에 동의한다.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전쟁범죄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어떤 민족이 자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예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몇 차례의 총선에서 승리한 하마스가 가자 지구주민들이 처한 고립과 차단상황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 도시들을 향해 끝내 로켓포를 쏘고야 말았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당연히 테러리즘은 용납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지닌 무기와 비교도 안될만큼 우월한 무력적 방법에 의해 점령당한 쪽의 입장에서 보면, 민중의 반응이 꼭 비폭력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스데로트 시에 로켓포를 발사하면 효과가 있는가? ‘없다’가 답이다. 그런 행동은 포를 쏜 쪽의 대의명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자 지구 주민들의 이런 몸짓을 보고 격분에 의한 행동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다. 분노가 끓어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한다면, 폭력이란 도저히 용납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테러리즘이 격분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격분은 부정적 표현이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안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폭력, 우리가 가야할 길
미래는 비폭력의 시대, 다양한 문화가 서로 화해하는 시대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폭력이라는 길을 통해 인류는 다음 단계로 건너야만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사르트르와 생각이 같다. 폭탄을 던지는 테러리스트를 용서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1947년에 이렇게 썼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 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거하는 행위 자체가 자칫 폭력을 영속화 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폭ㄹㄱ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나는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이라고. 알제리 전쟁 때 혹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에게 자행된 테러사건을 생각해보자. 앞에서 말한 원칙을 내세워 사르트르처럼 테러리스트를 지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사르트르 자신도 결국 말년에는 테러리즘의 의미에 대해 물음표를 찍고, 테러리즘이 꼭 있어야만 하는지를 의심했다.

“폭력은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폭력의 힘을 빌리는 이들을 단죄해야 하는가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테러리즘은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다. 이때 효과라는 개념에는 비폭력적인 희망이 들어 있어야 한다. 혹시라도 ‘폭력적인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런 일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에 나오는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다!” 라는 구절에서나 가능하리라.
정치에서는 폭력적인 희망이란 없다. 사르트르는 1980년 3월, 임종을 3주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
“끔찍한 지금의 세계가 기나긴 역사의 발전 속에서 보면 그저 한순간일 뿐일 이유를, 숱한 혁명과 봉기를 이끈 주도적 힘의 하나는 언제나 희망이었음을, 내가 미래를 생각하면서 여전히 그래도 미래는 희망이라고 보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그 길을 따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압제자아 피압제자 양측이, 압제를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더 이상 테러리즘의 폭력이 없게 된다. 증오가 너무 많이 쌓이도록 놓아두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넬슨 만델러, 마틴 루터 킹, 이런 분들의 메시지는 이미 이념대립과 정복 만능의 전체주의 시대를 지난 오늘의 세계에서 정말로 타당한 내용이다. 현대의 여러 사회들이 서로 이해하고 끊임없이 인내한다면 충분히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분노를 촉발해 마땅하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평화적 봉기를 위하여
매주 금요일마다 빌린 시의 시민들은 장벽까지 걸어가서, 돌도 안던지고 어떤 무력행위도 없이 항의시위를 한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반응이 어떤지를 나는 주시했다.(이를 주시한 사람이 물론 나 하나만은 아니리라) 이스라엘 정부 당국은 이 시위를 ‘비폭력 테러리즘’이라고 규정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야 이런 비폭력 행위를 ‘테러리즘’이라고 규정할 수 이도 있으리라. 무엇보다도 압제에 반대하는 전 세계인의 지지와 이해와 후원을 불러일으키는 비폭력의 효과 앞에 당혹스러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 터이다.
서양인들의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은 세계를 위기로 이끌었으며,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면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이러한 질주는 비단 금융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윤리, 정의, 지속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때다. 더없이 심각한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위험으로 말미암아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려인류가 시도하는 모든 일들이 영영 종말을 고할 수 도 있다.
그러나 1948년부터 중요한 발전이 있었더 것도 사실이다. 식민지의 독립, 인종차별 철폐, 소비에트 제국의 궤멸,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이 바로 그런 예다. 반면 21세기 첫 10년은 퇴보의 시기였다.나는 이 퇴보의 원인 중 일정 부분은 조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 9.11 사태, 그 결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 같은 재앙이 발생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었으면서도 새로운 발전정책을 도입하지 못했다. 또한 지구온난화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열린 코펜하겐 정상회의는 진정으로 지구를 지키는 정책을 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 첫 10년의 끔찍한 공포와 앞으로 다가올 10년의 가능성 사이, 그 문턱에 서 있는 셈이다. 그래도 어쨌든 희망은 간직할 일이다.
1990년대는 이런 면에서 대단한 진보의 원천이었다. 유엔은 리우 환경회의(1992), 베이징 여성회의 (1995) 등을 소집했고, 2000년 9월에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의 주도하에 191개국 회원국이 ‘발전을 위한 새천년(21세기) 8개 목표’를 채택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191개국 회원국들은 특히 앞으로 2015년까지 전 세계의 빈곤을 절반으로 줄이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유렵연합도 아직까지 이 계획의 실천단계에서 기본적 가치에 근거해 자신들이 어떻게 기여할지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 나는 참으로 유감스럽다.

‘분노하라’고 호소하는 이 글을 어떻게 끝맺으면 좋을까?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개혁안 발표 60주년을 맞아, 레지스탕스운동과 자유 프랑스 투장(1940~1945)에 동참한 노전사(老戰士)로서 우리는 2004년 3월 8일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분명 ‘레지스탕스에 동참한 형제자매들의 희생과 파시즘의 야만에 맞선 여러 나라의 단결 덕분에 나치즘은 궤멸되었다. 그러나 그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것은 아니며 불의에 맞서는 우리의 분노는 여전히 그대로 살아있다’고.
그렇다. 이러한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憤怒吧-斯蒂芬·埃塞爾[法國]

Stephane Frederic Hessel, Stephane Hesse.. 作者
出生日期:1917年10月20日德國~2013.02.27日-法國去世。

抵抗的動機,那就是憤怒
有人對這樣的我們說。 國家再也無法承擔爲市民採取各種措施所需的費用。 但是解放法國-歐洲處於破產狀態的時期-這樣創造的財富量增加了令人刮目相看的程度,現在卻還缺乏維持期間成果的資金,怎麼能這樣呢? 如果強辯說缺乏這樣的資金,也許是因爲在金券忠僕掌握國家最高領域的情況下,抵抗運動把金券當作鬥爭對象,變得前所未有的自私、巨大、傲慢無禮。 現在民營化的銀行首先只關心自己的利益分配和管理層的高額年薪金額,而不顧普通大衆的利益。 特困階層和富裕階層的差距從來沒有這麼大過。 而且人們從未如此煽動過追逐金錢的競爭。
抵抗運動的基本動機是憤怒。 作爲抵抗運動的百戰老將和"自由法國"的鬥爭動力的我們呼籲年輕一代。 "一定要救活抵抗者的遺產及其以上,傳播。" 這樣對你們說。 "現在接過槍桿吧。 憤怒吧!" 政界、經濟界、知性界的負責人和社會全體成員不能對使命視而不見,也不能被威脅該社會和平與民主主義的國際金融市場的獨裁所左右。
我希望你們每個人都有自己的憤怒動機。 這是一件珍貴的事。 就像我對納粹主義感到憤怒一樣,如果大家對什麼感到憤怒,那麼到時候我們就會成爲有力量的鬥士、參與的鬥士。 這時我們將加入歷史潮流,歷史的這股滔滔不絕的潮流將在我們各自的努力下綿延不絕。 這條河水朝着更大的正義、更大的自由方向流去。 在這裏,自由不是雞窩裏的狐狸隨意享受的無限制的自由。 1948年《世界人權宣言》明確規定了具體的實踐方案,這一權利是普遍的。 如果你們遇到任何一個沒有好好享受這個權利的人,一定要站在他一邊,幫助他找回權利。

看待歷史的兩個觀點
如果努力理解什麼導致了法西斯主義,法國爲什麼受到法西斯主義的侵略,建立非西政權這一傀儡政權,就會這樣自言自語。 因爲有錢人自私,所以非常害怕伏爾塞維基革命。" 他們按照那恐懼的引導行動。 但是,如果像那時一樣,今天行動的少數人站起來,那就足夠了。 那麼對我們來說憤怒吧-斯蒂芬·埃塞爾[法國]

Stephane Frederic Hessel, Stephane Hesse.. 作者
出生日期:1917年10月20日德國~2013.02.27日-法國去世。

抵抗的動機,那就是憤怒。
有人對這樣的我們說。 國家再也無法承擔爲市民採取各種措施所需的費用。 但是解放法國-歐洲處於破產狀態的時期-這樣創造的財富量增加了令人刮目相看的程度,現在卻還缺乏維持期間成果的資金,怎麼能這樣呢? 如果強辯說缺乏這樣的資金,也許是因爲在金券忠僕掌握國家最高領域的情況下,抵抗運動把金券當作鬥爭對象,變得前所未有的自私、巨大、傲慢無禮。 現在民營化的銀行首先只關心自己的利益分配和管理層的高額年薪金額,而不顧普通大衆的利益。 特困階層和富裕階層的差距從來沒有這麼大過。 而且人們從未如此煽動過追逐金錢的競爭。
抵抗運動的基本動機是憤怒。 作爲抵抗運動的百戰老將和"自由法國"的鬥爭動力的我們呼籲年輕一代。 "一定要救活抵抗者的遺產及其以上,傳播。" 這樣對你們說。 "現在接過槍桿吧。 憤怒吧!" 政界、經濟界、知性界的負責人和社會全體成員不能對使命視而不見,也不能被威脅該社會和平與民主主義的國際金融市場的獨裁所左右。
我希望你們每個人都有自己的憤怒動機。 這是一件珍貴的事。 就像我對納粹主義感到憤怒一樣,如果大家對什麼感到憤怒,那麼到時候我們就會成爲有力量的鬥士、參與的鬥士。 這時我們將加入歷史潮流,歷史的這股滔滔不絕的潮流將在我們各自的努力下綿延不絕。 這條河水朝着更大的正義、更大的自由方向流去。 在這裏,自由不是雞窩裏的狐狸隨意享受的無限制的自由。 1948年《世界人權宣言》明確規定了具體的實踐方案,這一權利是普遍的。 如果你們遇到任何一個沒有好好享受這個權利的人,一定要站在他一邊,幫助他找回權利。

看待歷史的兩個觀點
如果努力理解什麼導致了法西斯主義,法國爲什麼受到法西斯主義的侵略,建立非西政權這一傀儡政權,就會這樣自言自語。 因爲有錢人自私,所以非常害怕伏爾塞維基革命。" 他們按照那恐懼的引導行動。 但是,如果像那時一樣,今天行動的少數人站起來,那就足夠了。 這樣一來,我們就有了誇大麪糰的酒麴。 當然,像1917年出生的我這樣的老人的體驗與現在的年輕人不同。 我經常對中學教師說。 你們能不能跟學生們談談。 對他們這樣說。 當然你們參與的明確理由不能和我們一樣。 在我們時期,拒絕接受德國的優勢和法國的失敗是抵抗。 那是相對簡單的事情。 之後延續下來的殖民地的獨立也很簡單。 阿爾及利亞戰爭爆發了。 阿爾及利亞必須脫離法國殖民地獨立,這是理所當然的事情。 說說斯大林的故事吧。 1943年蘇聯紅軍與納粹抗衡取得的勝利,讓我們爲之鼓掌。 但是,當得知1935年斯大林"大肅清"的真相時,作爲對美國資本主義的對抗者,有必要對共產主義敞開一隻耳朵保持均衡,但必須面對全體主義這一無法忍受的體制,這已是顯而易見的。 我比別人活得更久,憤怒的理由層出不窮。
這種憤怒的理由與其說是出於某種感情,不如說是出於參與的意志。 我在青年時期是巴黎高等師範學校的學生,受到了學校前輩薩特的極大影響。 薩特的著作《古土》、《牆》、《存在與無》對我的思想形成起到了非常重要的作用。 薩特教我們這樣對自己說。 "你作爲個人有責任。" 這是絕對自由主義的信息。 任何權力,任何神都不能屈服的人類的責任。 不是以權力或神的名義參與,而是以人類的責任的名義參與。 1939年考入巴黎威爾姆街的高等師範學校時,我是哲學家黑格爾的忠實信奉者。 然後聽了莫里斯•梅洛龐蒂的研討會。 在梅洛龐蒂的講座中,我們探討了具體的體驗、面對複數感覺的巨大唯一者的身體等。 但是,對於希望所有理想的事情都能實現的樂觀傾向的我來說,比起梅洛龐蒂,更傾向於黑格爾。 黑格爾哲學將人類漫長的歷史解釋爲有意義的過程。 其意義就是人的自由會逐級進步。 歷史由連續的衝擊組成,這是考慮到諸多挑戰的想法。 無數社會的歷史會朝着更好的方向進步,最終達到人類的完全自由,從而擁有理想形態的民主國家。
當然也有觀點認爲歷史與此不同。 自由、競爭、爲了"隨時都更多"而奔跑,這些東西組成的進步就像破壞周圍一切的風暴一樣。 我父親的一位朋友就是這樣形容歷史的。 這位是把馬塞爾·普魯斯特的《尋找失去的時間》和我父親一起翻譯成德語的德國哲學家瓦爾特·本雅明。 他看到瑞士畫家保羅·克萊的《新天使》後發出了悲觀的信息。 在這幅畫中,天使張開雙臂,擁抱着進步的風暴,卻做出甩開的動作。 此後,本雅明爲躲避納粹主義流亡,於1940年9月自殺,而歷史的意義卻從災難演變成災難,這是無法抗拒的潮流。

漠不關心是最壞的態度
沒錯。憤怒地理由今天可能比以前更明確。 或者世界變得太複雜了。 誰命令, 誰決定? 徹底區分支配我們的所有潮流並非易事。 我們的對手已經不僅僅是一個小特權階層了。 某個小的特權蟹層的行動我們才能明明白白地瞭解。 但我們深切感受到,我們的對手是廣闊的世界,這個世界是相互依存的。 我們生活在比任何時代都強大的相互連接性中。 但在這樣的世界裏也有無法忍受的事情。 要想知道那是什麼事,就要好好看看,好好找找。 我對年輕人說。 "求你找找看,那樣就會找到的。"
最糟糕的態度是不關心。 "我能做什麼? 我只能好好收拾殘局...就是這樣說話的態度。 這樣做的話,你們就會失去一個構成人的基本要素。 令人憤怒的力量。 而且永遠失去結果"參與"的機會。
我們已經有了兩個巨大的挑戰可以識別。 首先,橫亙在極端貧困階層和最高富裕階層之間的差距越來越大,這是20世紀和21世紀造成的新弊端。 當今世界的特困階層一天收入不到2美元。 不能放任這一差距進一步拉大。
第二,人權和地球的現狀。 法國從德國佔領中解放出來後,我參與起草了《世界人權宣言》。 聯合國於1948年12月10日在巴黎夏奧宮正式採納了該宣言。 我當時以聯合國副祕書長兼聯合國人權委員會幹事亨利·羅傑的輔佐組組組長的身份,與幾個人一起參與了該人權宣言的文本的制定。 制定該宣言時,1941年在倫敦成立的自由法國政府負責法務及教育的國家委員勒內•卡生-1968年度諾貝爾和平獎獲得者-的作用將永遠無法忘記。 另外,法國皮埃爾·芒德斯也難忘。 我們擬定的文案提交給曾任聯合國經濟社會委員會委員皮埃爾,經過他的討論,由涉及社會問題、人道主義問題、文化問題的聯合國大會第3分科委員會討論。 當時該委員會的成員國數爲54個,我負責事務局的工作。 世界人權宣言中沒有英語圈國家的代表們提議的"國際性"一詞,而是加入了"普遍性"一詞,這得益於雷內·卡生。 因爲在第二次世界大戰剛剛結束的當時,從威脅世界的極權主義威脅中解放出來是最重要的問題。 要想從這種威脅中解放出來,必須從聯合國成員國那裏得到尊重該宣言中普遍權利的誓言。 打破一個國家在本國領土上肆意進行反人倫犯罪,卻可以堂堂正正地行使主權的江邊的方法就是人權宣言。 希特勒認爲"在我的國家,我是主人,可以隨意進行大屠殺"。 這一普遍宣言得益於對納粹主義、法西斯主義、極權主義的普遍反感,而且我們(我和抵抗主義同事)也參與其中,因此得到了抵抗主義精神的很多幫助。 並不是所有國家都有忠實地維護和廣泛開展這些價值的意圖,但我們只是想強迫他們遵守這些價值。 表面上宣稱要參與,但實際上我深切地感受到不能被專事征服弱小國家的僞善所矇蔽,要迅速付諸行動。
在這裏不得不引用《世界人權宣言》第15章。 "每個人都有權利擁有國籍",第22項也提到"每個人作爲社會成員,都有權享受社會保障制度的優惠。 社會保障制度得益於國家的努力和國際合作,考慮到各國的組織和經濟狀況,以滿足人類尊嚴及其人性的自由開發不可或缺的經濟、社會、文化權利爲基礎。"
雖然該宣言的效力只是宣言而已,並不是法律上的,但無論如何,該人權宣言自1948年以來起到了強有力的作用。 受到殖民統治的民族們藉助這一人權宣言展開了獨立鬥爭,該宣言爲進行自由鬥爭的他們播下了精神基礎的種子。
在過去的數十年裏,非政府組織、爲支援市民的金融交易課題推進協會(ATTAC)等社會運動團體、國際人權聯合(FIDH)、國際赦免機構(Menesty International)等具有活躍性和實踐力的組織變得越來越多。 現在,要想有效率地進行活動,必須以網絡爲單位行動,同時充分利用現代的溝通方式。
我對年輕人說。 "看看周圍。 那麼,我們就會看到將我們的憤怒正當化的主題-移民者、非法滯留者、吉普賽人如何看待等等。 將會看到不得不採取強有力的市民行動的具體情況。 找找看,那樣會找到的。"

我對巴勒斯坦的憤怒
如今,我主要對巴勒斯坦、加沙地帶、約旦河西岸地區(West Bank)感到憤怒。 在這裏發生的矛盾就是引起憤怒的源泉。 2009年9月理查德·戈德斯通對加沙地帶的報告書是必讀的文章。
撰寫該報告書的猶太人出身的南非共和國法官戈德斯通-甚至自稱是錫安主義者-以色列軍隊在執行爲期3周的"卡斯特Lead"作戰時犯下了"接近戰爭犯罪、在某些情況下接近反人倫犯罪的行爲"。
2009年,我再次來到加沙地帶,因爲持有外交官護照,我和妻子一起進入那裏,親眼目睹了該報告書中的真相。 和我們一起去的人沒有得到可以進入加沙地帶內部的許可。 我們夫婦既去了加沙地帶,又去了約旦河西岸地區。 另外,他還訪問了從1948年開始由聯合國下屬機構聯合國巴勒斯坦難民事業機構(UNRWA)設立的巴勒斯坦難民收容所。 在那裏,被以色列趕出土地的300多萬巴勒斯坦人翹首以待回到故鄉。 但是他們的迴歸問題卻變得更加困難。
加沙地帶,對150萬巴勒斯坦人來說,無異於沒有窗櫺的監獄。 在這座監獄裏,他們爲了生存而互相組織起來堅持着。 比起"cast read"作戰導致"赤新月"醫院倒塌的事件等物質上的破壞,更深刻地留在我們的記憶中的是加沙地帶居民的行動、愛國心、對大海和海邊的關愛、不斷注意子女安全的面貌等。 他們如此機智地應對一切迫於無奈的缺乏狀況,我們深有感觸。
記者還看到,在重新建造數千棟坦克推倒的房屋時,因爲沒有水泥,所以自己製作磚頭使用。 在以色列軍隊執行的"卡斯特里德"行動期間,巴勒斯坦難民村男女老少合計有1400人死亡。 相反,以色列方面的傷者只有50多人。 我同意南非法官戈德斯通作出的結論。 猶太人總是會這樣肆意犯下戰爭罪行,這是難以忍受的事情。到目前爲止,很難找到一個民族從自己的歷史中吸取教訓的例子。
我還知道,在過去幾次議會選舉中獲勝的哈馬斯爲了回答加沙地帶居民所處的孤立和切斷情況,最終向以色列城市發射了火箭彈。 當然我認爲恐怖主義是不能容忍的。 但是必須承認,從被自己擁有的武器無法比擬的優越的武力方法佔領的一方的立場來看,民衆的反應不一定非暴力。
哈馬斯向以色列斯德羅特市發射火箭彈有效果嗎? 答案是"沒有"。 那種行爲不利於開炮的一方的大義名分。 但是看到加沙地帶居民的這種動作,可以理解爲是激憤的行爲。 如果說憤怒沸騰的狀態是"憤怒",那麼暴力就是站在處於無法容忍狀況的人的立場上做出的令人遺憾的結論。 如果理解這一點,可以說恐怖主義是表現激憤的一種方式。 當然,這種憤怒是否定的表現。
不能"過分憤怒",總要抱有希望。 憤怒是指否定希望的行爲。 憤怒是可以理解的事情,也可以說是安然無恙的事情。 但這並不意味着可以接受。 因爲,如果希望有可能產生積極的結果,可能會因爲憤怒而錯過希望。

非暴力,我們要走的路
我確信未來是非暴力的時代,是多種文化相互和解的時代。 人類必須通過非暴力這條道路進入下一階段。 在這一點上,我和薩特的想法是一樣的。 雖然不能原諒投擲炸彈的恐怖分子,但可以理解。 薩特是在1947年這樣寫的。
"不管以何種形式出現的暴力,暴力首先都是失敗的事實。 但是,這一失敗是不可避免的。 因爲我們生活在暴力的世界裏。 依靠暴力的行爲本身就有可能使暴力永續化。 即便如此,停止暴力行爲的唯一手段也是暴力。"
我想在這裏再加一句。 非暴力是停止暴力的更確切的手段。 讓我們想想阿爾及利亞戰爭時期或1972年慕尼黑奧運會上對以色列選手肆意進行的恐怖襲擊事件吧。 不能像薩特那樣以前面所說的原則支持恐怖分子。 那不是有效的方法。 最後,薩特自己也對恐怖主義的意義畫上了問號,懷疑是否一定要有恐怖主義。

"暴力不是有效的手段。"
這樣說比追究是否應該對藉助暴力力量的人進行定罪更爲重要。 恐怖主義不是有效的手段。 此時,效果這一概念中應該包含非暴力的希望。 如果存在"暴力希望",那麼這種事情只有在紀堯姆·阿波利內爾的詩中"希望怎麼這麼激烈"的句子中才能發生。
政治上沒有暴力希望。 薩特在1980年3月臨終前3周說了這樣的話。
"在可怕的當今世界漫長的歷史發展中,我們應該努力說明爲什麼只是一瞬間,引領無數革命和起義的主導力量之一總是希望,我在思考未來的同時,仍然認爲未來是希望的理由。"
要知道暴力是背離希望的事情。 比起暴力,更應該選擇希望,非暴力的希望。 我們必須學會遵循那條路。 被壓迫者與被壓迫者雙方應該尋找結束壓迫的協商途徑。 只有這樣,恐怖主義的暴力纔不再存在。 不能放任仇恨太多的原因就是這個。
納爾遜•曼德勒、馬丁•路德•金,這些人的信息在理念對立和征服萬能的極權主義時代已經過去的當今世界中是真正妥當的內容。 這是相信只要現代的各個社會相互理解和不斷忍耐,完全可以克服矛盾的希望信息。 無論侵犯人權的主體是誰,都應該觸發我們的憤怒。 對人類的權利沒有妥協的餘地。

爲了和平起義
每週五, 借來的市市民走到牆壁上, 不扔石頭, 沒有任何武力行爲, 進行抗議示威。 以色列政府當局將示威定性爲"非暴力恐怖主義"。
只有站在以色列的立場上,才能將這種非暴力行爲定義爲"恐怖主義"。 最重要的是,在引起全世界人民支持、理解和贊助的非暴力效果面前,他感到困惑,所以才做出這樣的反應。
西方人的"以生產爲主的思考方式"將世界引向了危機,要想擺脫危機,必須果斷地告別"總是更多"的疾馳態度。 這種疾馳不僅在金融領域,在科學技術領域也是如此。 現在是必須優先考慮倫理、正義、可持續均衡問題的時候。 因爲極其嚴重的危險正在威脅着我們。 因爲這種危險,地球成了人類無法生存的地方,人類嘗試的所有事情都有可能永遠結束。
但從1948年開始有了重要的發展也是事實。 殖民地的獨立、種族歧視的廢除、蘇維埃帝國的潰滅、柏林牆的倒塌等就是一個例子。 相反,21世紀的第一個10年是退步的時期。我認爲,退步的原因中,有一部分是喬治·布什成爲美國總統、9.11事件、美國軍事介入伊拉克等災難。 韓國雖然經歷了嚴重的經濟危機,但卻沒能引進新的發展政策。 另外,爲制定應對全球變暖的對策而召開的哥本哈根首腦會議未能制定真正保護地球的政策。
我們現在站在21世紀頭10年的恐怖和即將到來的10年的可能性之間。 但無論如何,希望還是值得珍藏的。
20世紀90年代在這方面是非常進步的源泉。 聯合國召集了里約環境會議(1992年)、北京婦女會議(1995年)等,2000年9月在祕書長安南的主導下,191個成員國通過了"爲發展的新千年(21世紀)的8個目標"。
根據其內容,191個國家的成員國承諾,今後到2015年將全世界的貧困減少一半。 但是,無論是美國的奧巴馬總統還是"遊獵聯合",至今都沒有根據該計劃的實踐階段的基本價值做出任何貢獻,這實在令人遺憾。

呼籲"憤怒"的這篇文章該如何結束呢?
在迎來法國全國抵抗運動評議會改革方案發表60週年之際,作爲參與抵抗運動和自由法國鬥將(1940~1945年)的老戰士,我們曾在2004年3月8日這樣說過。 因爲參與抵抗的兄弟姐妹們的犧牲和對抗法西斯野蠻的各國團結,納粹主義被毀滅了。 但是這種威脅並沒有完全消失,我們對抗非正義的憤怒依然存在。"
是的。這種威脅並沒有消失。 所以我們仍然在呼籲。
"對於我們的年輕人來說,只有大量消費、對弱者的蔑視、對文化的輕視、普遍化的遺忘症、對萬人過度競爭的大衆媒體,這是真正的和平起義。"

"創造,那是抵抗。
抵抗,那就是創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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