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을 놓고 조촐함이 매화(梅花)보다 낫다고 극찬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도 출렁이는 바닷소리 들으며, 와보는 이 없어도 고결하게 ‘빨갛게 멍든 꽃’을 달고 서있을 네가 그립다. 가끔은 해풍에 흩날린 짠물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겠지. 겨울채집에서 허기진 배를 너의 꽃물(화밀·花蜜)로 달래던 그 처참함이 이제는 아스라이 그리움으로 돌아오는구나. 나를 구황한 고맙기 그지없는 너! 실은 세한(歲寒)의 설중동백(雪中冬栢) 너에게서 인고를 배웠지 동백나무(冬柏木)는 딱딱하고 매끄러운 줄기, 광택 나는 이파리에 새빨간 꽃잎이 특징이다. 주로 바닷가에 나고, 떼 지어 군락을 이루는데 12월이면 벌써 저 남쪽에서는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오는 해 4월까지 화려한 꽃 잔치를 이어간다. 주로 중부 이남에 자생하며 동해안은 울릉도, 서해안은 대청도가 북방한계선이다. 우리나라 동백은 모두 홑꽃이며 부숭부숭 여러 겹으로 피는 것은 거의가 일본 동백이다. 꽃받침과 꽃잎은 모두 다섯 장이고 암술 하나에 둘러 난 여러 개의 수술은 꽃잎 아래에 유착(癒着·달라붙음)해서 뚝뚝 꽃잎이 떨어지는 날이면 암술만 혼자 남는다. 동백나무 잎은 염료나 모기향으로 쓰고, 재목은 단단하여 악기나 농기구를 만들고, 열매 속 씨(보통 3개)는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으로 쓴다. 바닷가 할머니들이 씨 주워 대소쿠리에 말리는 것을 어디서나 본다. 여인네들은 동백기름 바르고 자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를 참빗으로 곱게 빗어 내리고, 꽃잎으로 전까지 부쳐 먹으니 귀염 받아도 마땅한 나무로 조상들의 애잔한 삶의 때가 묻어있다. 동백꽃의 꽃말은 ‘삼가고 조심하며 허세부리지 않는다’는 ‘신중(愼重)’이라 한다. 참고로 김유정의 글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은 이 동백나무가 아니고, 이른 봄 산수유 꽃 닮은 샛노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다. 한국 사람들은 반개(半開)한 꽃을 좋아한다고 한다. 정녕 미개(未開)한 꽃에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이 숨어있고, 이미 기개(開)한 것에는 시듦이 들어있어 싫다. 하나, 지는 꽃이 향기를 풍기고, 꽃이 진 뒤에는 열매를 남긴다. 그런데 찬바람 쌩쌩 불어대는 겨울과 봄 문턱에 핀 동백꽃은 무슨 수로 꽃가루받이(受粉ㆍ수분)를 하는 것일까. 그 샛노란 꽃가루를 옮길 봉접(蜂蝶)이 얼음 추위에 나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바람이 꽃가루를 퍼뜨리는 풍매화(風媒花)도 아니다. 동백꽃은 새가 꽃가루를 날라주니 조매화(鳥媒花)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드문 일로, ‘동박새’가 동백꽃의 화분(花粉)을 옮긴다. 이 새는 참새 목(目) 동박새 과(科)에 속하는데 실제로 크기나 모양이 참새를 닮았다. 그러나 깃털은 앞가슴이 황록색이고 그 아래에 흰 털이 나고 꽁지는 귤색이며 나무에 집을 짓는다. 곤충이나 나방의 유충인 송충이를 먹는데 벌레가 없는 겨울엔 나무 열매나 동백꽃의 꿀물을 빨아먹는다. 동백나무와 동박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질긴 인연의 끈으로 묶인 것이다. 사슬인 연(緣)을 귀하게 여기라고 했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예쁜 꽃은 진한 향기가 없지만 대신 달콤한 꿀이 있다. 더 긴 이야기를 해 무엇 하랴. 애련에 피 멍든 당신!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네….” | 글 : 권오길 (강원대학교 명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