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티마을 남근석. 지난 마을 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아직도 남아 있다.은티 마을은 멀고도 멀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나에게는 그렇게 멀어만 보이던 그 마을에 많은 사람들을 위한 주차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은티 마을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에 있는 것으로 관련 책자에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분지리를 찾아가 안말과 가장 깊숙이 있는 흰두뫼까지 들어가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다.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괴산으로 방향을 돌려 내려오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영감님을 만났다. 찾아온 이유와 함께 남근석이 있는 마을을 물었더니 주저 없이 주진리(周榛里)라고 알려 주었다.
낯선 이방인에게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도 찾기 어려웠다. 사람을 만나면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 해서 겨우 은티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 마을은 희양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위치하기 때문에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등산을 하지 않는 이에게 마을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미로게임이나 다름없었다.
산골 마을이지만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괴산지명지’를 찾아보니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 병자호란 때 김해 김씨들이 이곳으로 피란을 오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속 무릉도원으로서 이 마을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진리는 조선시대에 연풍군 현내면에 속했던 마을이다. 1914년 여러 마을을 합쳐 주진리라고 하였으나, 8·15 광복이 되면서 행정구역을 세분화하여 3개 마을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도 은티리는 희양산 자락에 위치한 가장 산골 마을이었다.
조선시대 특산물로 송이버섯과 석이버섯, 잣, 꿀 등이라는 점에서 농사가 별로 없는 산골임이 분명하다. 현재도 주로 콩과 고추 등의 밭작물과 사과 같은 과일이 주 작물이다.
은티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커다란 화강암 판석에 마을의 유래를 적은 것이 보인다. 이런 마을에 무슨 남근석이 필요할까 매우 궁금하던 차에 이 내용을 보니 쉽게 이해가 되었다.
사실 은티 마을은 여느 산골 마을처럼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근곡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타난다. 신라 선덕여왕은 세 가지의 일을 미리 알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 병사를 찾아낸 일이다. 즉 겨울인데도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여왕이 군사를 여근곡에 보냈다. 그곳에는 경주를 습격하기 위해 백제 병사들이 숨어 있다가 전멸됐다. 게다가 이들의 후미에 있던 병사까지 몰살됐다고 한다.
개구리가 우는 것은 남자가 성냄을 뜻하는 것이요, 옥문은 여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근곡에 병사가 숨어 있음을 알아내고 이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선덕여왕은 ‘남자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로 들어가면 필경 죽는다(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라고 하는 설명으로 대신했다. 매우 탁월한 표현법이 아닐 수 없다.
이 마을도 역시 여근곡이기 때문에 이를 맞춰줄 어떤 장치가 필요했던 듯하다. 즉 마을이 번창하고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는 남근석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가 가미되었다. 여근과 남근을 합체시킴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인식 때문이다. 물론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반대로 여근곡만 있을 경우 마을이 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자들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는 풍수 비보(裨補)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 즉 남근석을 마을 입구, 즉 여성기의 입구에 세움으로써 그 바람기를 막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남근석보다는 탑이라는 장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마을이 배의 형국일 경우가 그러하다. 과거에 배라는 것은 돛이 달렸기 때문에 바람을 이용해서 항해한다. 그렇기에 바람이 불면 마을이 쉽게 흔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돌탑을 세웠던 것이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도마리 탑동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하지만 은티 마을은 남근석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마을의 형국이 여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남근석은 하나의 선돌을 세운 것이 아니다. 약 120㎝짜리 남근석을 가운데 세우고 그 옆으로 조그만 돌들을 세워서 아기자기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지난 마을 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주위에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세워져 있는데 300∼400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남근석에 대한 제의가 매년 섣달 20일에 행해지며, 이를 ‘동구제(洞口祭)’라고 부른다. 아마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붙인 명칭인 듯하다. 음식을 장만하는 주판집과 지관, 축관 등 4명을 선출해서 제사를 올린다. 대개 농사가 잘되고 동네가 화목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 거주하는 28가구의 대주(大主·바깥주인)를 위한 소지를 올려주는 것으로 끝난다.
문제는 이 마을의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대상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마을을 수호하는 신앙체로 자리잡았는데, 이것은 남근석이 자식 점지라는 기자신앙의 한 모습으로만 정착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남근석을 모시는 신앙의 중심은 바로 마을의 평안과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것임을 은티 마을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 글 : 김종대 (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발췌 : 세계일보
槐山恩地村南根石餘根谷抱住地村南根石建成陰陽調和
恩地村南根石。 上一次村裏祭奠時搭建的金鍊還留存着。恩蒂村又遠又遠。 但更讓我無語的是,那個看似遙不可及的小鎮上爲許多人設置了停車設施。 據相關書籍記載,恩地村位於忠北槐山郡延豐面盆地裏。 但是,他找到盆地裏,深入到安馬爾和最深處的白豆蔻進行詢問,卻無人知曉。 懷着虛脫的心情,他再次轉向槐山,在下去的時候遇到了騎着摩托車前行的老頭子。 在詢問來此的理由的同時,記者還毫不猶豫地詢問了南根石所在的村莊,該村莊是周真理。
對於陌生的異鄉人來說,連進村子的入口都很難找到。 見到人就問了很多人,好不容易纔進了恩蒂村。 該村位於通往喜陽山的路口,因此是許多登山者慕名而來的地方. 但是對於不登山的人來說,尋找村莊無異於玩迷宮遊戲。
雖然是山村,但似乎很早以前就形成了村子。 在"槐山地名地"中發現,推測是朝鮮初期。 可能是丙子胡亂時期金海金氏們到這裏避難後形成了村子。 也許是選擇這個村莊作爲可以避免戰爭的深山武陵桃源。 朱津裏是朝鮮時代屬於延豐郡縣內面的村莊。 1914年,將多個村莊合併爲主鎮裏,但隨着8·15光復,細分行政區域,分爲3個村莊。 其中,恩蒂裏是位於喜陽山腳下的最山村。
朝鮮時代的特產有松茸、石耳、松子、蜂蜜等,從這一點來看,這裏肯定是沒有多少農活的山村。 目前主要農作物是大豆和辣椒等旱地作物和蘋果等水果。
到了恩蒂村入口,就能看到巨大的花崗岩石上寫着村莊的由來。 我很好奇這樣的村莊需要什麼男根石,但看到這個內容就容易理解了。
事實上,恩蒂村和其他山村一樣,都是以溪谷爲中心發展起來的。 因此,這種形勢就像女性的生殖器一樣,是女根谷。 將此稱爲"女宮穴"。
關於女根曲的記錄也出現在《三國遺事》中。 新羅善德女王提前瞭解了三件事,其中之一就是找到了藏在女根谷的百濟士兵。 據說,雖然是冬天,但靈廟寺玉門池裏還是有青蛙鳴叫。 女王聽到這個後,把士兵送到了女根谷。 那裏有百濟士兵爲襲擊慶州而藏匿,最終全軍覆沒。 而且據說,他們尾部的士兵也被殺死了。
青蛙叫意味着男人性內向,玉門意味着女人。 因此,在女根曲中發現士兵藏身其中,很容易制服他們。 善德女王用"男人的生殖器進入女性的生殖器,必然會死"來代替。 這不能不說是非常卓越的表達方法。
這個村子也是女根谷,因此似乎需要某種配合的裝置。 也就是說,爲了村子繁榮昌盛、多生兒子,必須建立南根石。 這是因爲通過將女根和男根合二爲一來實現陰陽協調的認識。 當然,說可以生很多兒子也包含着另一種含義。
相反,如果只有餘根谷的話,意味着村子很有可能倒閉。 這可以看作是起到平息女性風氣的風水祕補的作用,反而更合適。 即,將南根石建在村口,即女性旗的入口處,起到阻擋風氣的作用。
與南根石相比,這些事例更多地被用於塔這一裝置。 村子是船的形態。 過去叫船是因爲有帆,所以乘風航行。 因此,他相信,如果颳風,村子很容易發生動搖。 因此,他樹立了能夠抓住重點的石塔。 江原道江陵市旺山面都馬裏塔洞就是很好的例子。 但是恩地村提出了南根石的特殊事例,這是因爲村子的形態相當於餘根石。
這塊南根石不是立了一塊船石。 將約120釐米的南根石立在中間,旁邊立着小石頭,看起來非常可愛。 而且,上一次提議時,還保留着金鍊子。 據說,這周圍豎立着可供瞻仰的樅樹,距今已有300~400年左右。
對南根石的祭奠每年臘月20日舉行,被稱爲"洞口祭"。 可能因爲建在村口,所以起了這個名字。 選出4名準備食物的算盤店和支館、畜館進行祭祀。 大略祝願莊稼收成,村莊和睦。 最後,爲目前居住的28戶大主(外主)提高持有權。
問題是該村的南根石不是記者信仰的對象。 也就是說,南根石是守護村莊的信仰體,這意味着南根石並沒有成爲"占卜孩子"的記者信仰的一種。 通過恩蒂村可以再次確認供奉南根石的信仰中心就是祈願村子平安和豐收。 | 文章:金鐘大(文學博士·國立民俗博物館民俗研究科長) 摘錄:世界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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