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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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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부상리 남근석·여근석 마주보는 男·女石…마을 수호신으로

영동 부상리 남근석·여근석

부상골 남근석은 3m 가까운 높이로 강함을 상징한다.충북 영동군은 곶감과 박연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영동나들목을 빠져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보은 쪽으로 가다가 514번 지방도로 갈라져 약 6.4 정도를 가면 부상리 부상골이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약 200m 정도로 내려가면 큰골이 있다.
원래 부상골이 먼저 개척되고 나중에 큰골이 형성된 듯하다. 왜냐하면 부상골에는 여흥 민씨 집안의 99칸 집이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상골에는 효자로 소문났던 민대혁(閔大爀)의 정려비가 세워져 눈길을 끈다. 흥미로운 것은 화려한 비각과는 대비되는 초라한 돌탑과 선돌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민대혁의 효자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말기였다. 민씨 집안은 당시 명성황후의 당질이었던 민병주에 의해 이곳에서 토호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는 농민들에 의한 민란이 자주 일어날 정도로 국정이 문란했던 때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효자비를 세운 것은 민중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효자비 옆에 세워진 돌탑이나 선돌이 민중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부상골에게 탑이나 선돌에 대한 제의는 단절된 상태다.
부상골에서 조금 지나면 큰골이 나타난다. 그런데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부상리 마을자랑비’가 세워져 있다. 무려 5m나 됨직한 거대한 ‘마을자랑비’ 옆에 서 있는 남근석과 여근석은 초라하게 보인다. 마치 효자비와 비각에 가려진 돌탑과 선돌과 같은 처지라고 할 만하다.
자랑비 옆에는 마을의 유래를 설명한 비문도 같이 세워 놓았다. 그 글 중에서 자웅석(雌雄石)과 관계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40년경에 남석(男石)만이 서 있었는데, 가뭄이 극심했던 1940년쯤에 어느 노승이 지나가다가 여석(女石)이 울고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정들을 동원해서 여석을 가져다가 마주보게 하니 마을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 정월 대보름마다 제의를 올린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도 남근석은 수탑이나 남석, 여근석은 암탑이나 여석이라고 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명칭이다. 여근석 앞에 살고 있는 민노식(65)씨는 이 돌들을 수톨과 암톨이라고 부른다. 명칭은 그렇다고 치고, 그 형상은 영낙없이 남성기를 닮아 있다. 남근석의 크기는 약 266㎝인데, 밑에서부터 위로 170㎝ 지점에서부터 좌우로 귀두를 표시하듯이 약 2∼3㎝ 정도의 폭으로 도드라져 있다. 여근석은 한쪽에서 보면 마치 남근석과 유사하지만, 정면에서는 직사각형으로 보인다. 이를 임신한 여성으로 보고 있는데, 약간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크기는 최고 높이가 203㎝에 가로가 140㎝ 정도다.
사실 이 남근석도 현재의 위치에 있지 않고 도로보다 동쪽의 옛날 도로에 있었다고 한다. 즉 보은으로 통하는 도로에 ‘말차쟁이’라는 주막이 있었는데, 그곳에 수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로가 폐쇄되고 밭이 되어 탑도 눕혀지면서 마을에 줄초상이 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래서 수톨을 세우고 마을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 동제를 중단했다. 추측컨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신 타파의 일환으로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영동군지’에는 이 제사터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제사터에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돌탑이 있던 장소에는 샘을 팠다는 것이다. 그런데 샘을 팔 때 참여한 사람이나 그들의 부인이 계속 죽어 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 뒤에 이 집을 보건소로 이용했는데, 까치가 유리창에 부딪쳐서 스스로 죽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은 흉가로 변했다.
흉흉한 사건이 발생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다시 동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금 모시고 있는 자웅석, 즉 남근석과 여근석이 그 대상이었다. 지금도 정월 보름날에 맞춰 동계에서 유사 2명을 정한다. 1명은 반장이며, 다른 한 명은 탑제만을 지내도록 한다. 특히 탑제를 담당한 유사는 몸을 정갈히 하는 등 정성을 드려야만 한다. 만약 동네에 불상사가 일어나면 이 유사의 정성이 부족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이 유사를 맡지 않으려고 하기에 순번제로 정했다. 즉 떠맡아서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제사는 남근석에서만 하는데, 이를 위해 2∼3일 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제물로는 백설기와 삼실과, 메, 명태포, 술 등이다. 음력으로 정월 14일 밤 12시쯤에 제물을 차리고 유교식 제의로 행한다.
이 마을에서 전해지는 남근석과 관련한 이야기는 당(堂)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남근석을 단순한 돌이 아니라, 마을을 수호하는 신통력을 지닌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선돌이 지니고 있는 탁월한 생산 기능을 믿어온 우리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근거한다. 그것은 비단 아기를 점지해주는 능력뿐 아니라 곡식의 풍요로운 수확에도 영향력을 준다는 믿음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부상리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남근석의 명칭 때문인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남근석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을 없애고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글 : 김종대 (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발췌 : 세계일보 

嶺東富商裏男根石、女根石對面的男、女石……村裏的守護神路


受傷球南根石高度接近3米,象徵着強大。忠北永同郡以柿餅和樸淵的出生地而聞名。 從京釜高速公路駛出嶺東出入口後,沿着19號國道向報恩方向行駛,最後被分爲5~14號地方公路,再走約6.4公里,就能看到扶桑裏扶桑谷。 從這裏往下走200米左右,就能看到一個大山溝。
原來傷病溝是先開拓的,後來形成了一個大山溝。 因爲據說富商谷裏有呂興民家的99間房子。 特別是,在富商谷樹立了以孝子著稱的閔大赫的正麗碑,吸引了人們的視線。 有趣的是,這裏擺放着與華麗的碑刻形成鮮明對比的簡陋的石塔和石子。
閔大赫的孝子碑建立在朝鮮末期。 閔氏家族是當時明成皇后的堂侄閔炳周在此處落戶土豪的。 但是,當時國情混亂,農民經常發生民亂。 在那種情況下建立孝子碑與民衆的情緒相去甚遠。 相反,建在孝子碑旁的石塔或石塔反而對民衆的生活起到了重要作用。 但是,目前對於受傷的骨骼,塔或柱子的提議處於斷絕狀態。
傷病溝過一會兒,大溝就出來了。 但是,這裏豎起了過去從未見過的巨大"富商裏村落驕傲碑"。 站在足足有5米高的"村莊驕傲雨"旁的南根石和呂根石看起來非常寒酸。 就像被孝子碑和碑刻遮蔽的石塔和石船一樣。
驕傲碑旁還立有說明村子由來的碑文。 從文章中概括與翟雄石有關的內容如下。 1740年左右只有男石站在那裏,在乾旱嚴重的1940年左右,有一位老僧路過時告訴了女石哭的地方。 所以動員長征們把女石拿過來,讓他們面對面一看,村子裏就豐收了。 據說,從那以後,他每次元宵節都會請來守護村莊的信徒。
在這個村莊,南根石雖然也被稱爲水塔或南石,呂根石也被稱爲巖塔或呂石,但名稱並不準確。 住在呂根錫面前的民勞植(65歲)稱這些石頭爲"水託"和"母託"。 雖然名稱是那樣,但其形象與男性氣質十分相似。 南根石的大小約爲266釐米,從下到上170釐米處左右,像標明耳頭一樣,寬約2~3釐米。 呂根石從一邊看就像南根石,但正面看起來是長方形。 她認爲這是懷孕的女性,我認爲這有點誇張。 其最大高度爲203釐米,寬爲140釐米左右。
事實上,南根石也不在現在的位置,而是位於比公路更東側的舊公路上。 也就是說,在通往報恩的道路上有一個叫"馬車王"的酒館,那裏有水土。 但是,隨着這條道路被封閉,變成了農田,塔也倒塌了,村子裏出現了接連不斷的慘劇。 因此建立了樹託,並祭奠了村子。
但進入20世紀70年代後,他中斷了同濟。 據推測,這是新村運動開始後,作爲打破迷信的一環而中斷的。 《永同君志》中記錄了與該祭司相關的有趣內容。
有人在祭司舊址上蓋了房子,石塔所在的地方挖了泉。 但是,在出售泉水時,發生了參與者或他們的夫人不斷死去的事件。 據說,後來將該家用作保健所,結果喜鵲撞到玻璃窗而自殺。 所以那個房子變成了凶宅。
兇險的事件發生後,村民們決定再聚到一起做同夥。 所以現在供奉的紫雄石,即南根石和呂根石就是其對象。 目前,冬季仍將在正月十五日確定兩名類似選手。 一人是班長,另一人只負責塔祭。 特別是負責塔祭的儒士要保持身體整潔等誠意。 因爲如果小區發生意外事件,難免會受到"李有士缺乏誠意"的指責。 出於這種原因,人們不想擔任類似職務,所以決定按順序進行。 也就是說,只能包辦。
祭祀只在南根石舉行,爲此,在2~3天前打上金鍊,撒上黃土。 祭品有白雪糕、麻線、梅、明太魚脯、酒等。 農曆正月14日晚12點左右舉行祭品儀式,舉行儒家儀式。
該村流傳的有關南根石的故事可以說是強調黨神聖性的裝置。 南根石不是單純的石頭,而是具有守護村莊的神通力的存在。 這種情況基於我們一直相信先驅所具有的卓越生產功能的傳統思維方式。 這不僅是對嬰兒的佔有能力,而且對糧食的豐饒收穫也會產生影響力的信念。
這種情況並不只適用於浮上裏。 但是,也許是因爲南根石的名稱,沒有得到應有的待遇也是事實。 因此,即使從現在開始,也要消除對南根石的盲目排斥感,正確地告知文化的本質。
文章:金鐘大(文學博士,國立民俗博物館民俗研究科長) 摘錄:世界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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