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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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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서경덕을 배출한 개성에 살았던 기인 도술가 전우치

[사진 = INSUSIMBBO] 


환술과 도술에 능했던 실존 인물 전우치(田禹治)
전우치(田禹治)는 16세기 명종 연간에 황진이(黃眞伊)와 서경덕(徐敬德)을 배출한 도시 송도, 즉 개성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던 기인이자 도술가(道術家)였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이나 “대동기문(大東奇聞)” 같은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에는 전우치가 "환술(幻術, 변신술, 둔갑술)과 기예(技藝)에 능하고 귀신을 잘 부렸다"거나 "밥을 내뿜어 흰나비를 만들고 하늘에서 천도(天桃)를 따 왔다", "옥에 갇혀 죽은 후 친척들이 이장(移葬)하려고 무덤을 파니 시체는 없고 빈 관만 남아 있었다"는 등 그에 관한 신비한 행적(行蹟)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의 다음 기록은 전우치의 행적을 간략히 보여 준다.

전우치(田禹治)는 송도의 술사(術士)로 기억하지 못하는 책이 없었다. 가업(家業)을 일삼지 않고 산수 간에 마음껏 노닐며 둔갑술과 몰귀술(沒鬼術, 귀신이 되는 술법)을 얻었다. 이때 박광우가 재령 군수가 되었는데 전우치가 여러 책에 박식(博識)한 것을 사랑하여 아주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관아 동헌(官衙東軒)에 마주 앉아 있는데 박광우(朴光佑)에게 편지와 공문이 전해졌다. 이것은 감사(監史)가 보낸 비밀한 일이었다. 박광우는 그것을 뜯어보고는 얼굴색이 변하여 급히 자리 밑으로 감추었다. 편지의 내용은 조정에서 전우치의 요술(妖術)을 무척 시기하여 기필코 우치를 잡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전우치가 무슨 일인지 계속 묻자 박광우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고 전우치(田禹治)에게 달아날 것을 청하였다. 전우치는 웃으며 "내 알아서 마땅히 처리하겠소"라고 한 후 그날 밤 목을 매어 자결(自決)하였다. 박광우(朴光佑)는 전우치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 주었는데, 2년 후 전우치가 찾아와 자신의 지팡이를 찾아갔다. 지금도 재령군(載寧郡)에는 전우치의 묘가 있다.

전우치(田禹治)가 일찍이 벗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는데 좌중 사람들이 말하였다. "자네는 천도를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전우치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가는 밧줄 백 가닥만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공중(空中)에 던지고 아래에 있는 동자에게 밧줄을 타고 올라가라고 명하면서 "밧줄이 다하는 곳에 벽도(碧桃, 전설상의 복숭아)가 무척 많이 열렸을 것이니 따서 던지거라"라고 말하였다. 아래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나와 벽도(碧桃)를 주워 먹었는데 그 맛이 인간 세상에 있는 바가 아니었다.

전우치(田禹治)와 친분을 맺은 박광우(朴光佑, 1495~1545)는 중종대의 인물로 1536년에 재령 군수를 역임하였다. 따라서 전우치의 활동 시기를 짐작(斟酌)해 볼 수 있다. 또한 조정에서 전우치의 요술을 싫어하여 그를 죽이라는 공문(公文)을 지방에까지 보낸 것을 보면 전우치가 당시 상당한 위험인물(危險人物)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우치전(田禹治傳)”은 이러한 실존인물(實存人物) 전우치의 행적을 소설화(小說化)한 작품으로, 그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삽화(揷話)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현재 “전우치전(田禹治傳)”은 필사본(筆寫本), 경판본(京板本), 활자본(活字本) 등 다양한 판본이 전하는데, 1책의 분량이 17장에서 43장 정도로 구성은 무척 간략한 편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송도에 사는 전우치(田禹治)는 신기한 도술(道術)을 얻었으나 재주를 숨기고 살았는데, 이때 남방 해변(南方海邊)의 여러 고을에 바다 도적(盜賊)이 나타나 노략질을 해 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마다 흉년(凶年)을 겪게 된다. 전우치는 가난한 백성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하늘의 관리로 가장하여 국왕 앞에 나타나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명령이라며 황금으로 들보를 만들어 바칠 것을 요구한다. 그 황금(黃金) 들보를 팔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穀食)을 골고루 나누어 준 전우치는 거리에 방(榜)을 붙이는데, 여기에는 소설의 작자가 전하려는 내용이 압축적(壓縮的)으로 나타나 있다.

이번 곡식을 나눔으로 혹 나를 칭송(稱頌)하는 듯하나 이는 마땅치 아니한지라. 대개 나라는 백성을 뿌리 삼고 부자는 빈민(貧民)이 만들어 준 것이어늘 이제 너희들이 양순(良順)한 백성과 충실한 일꾼으로 이렇듯 참혹(慘酷)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벼슬한 이가 길을 트지 아니하고 감열(感悅)한 이가 힘을 내고자 아니하니 과연 천리에 어그러져 신인(神人)이 공분(公憤)하는 바이므로 내 하늘을 대신하여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이러저러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깨달아 잠시 남에게 맡겨 놓은 것이 돌아온 줄로만 알고 남의 힘을 입은 줄은 알지 말지어다.

이 인용문(引用文)에는 '나라는 백성을 뿌리로 삼아야 한다'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이 핵심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국가가 제대로 민생문제(民生問題)를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잠시 맡겨 놓은 곡식을 백성에게 되돌려 준 것뿐이라는 논리(論理)가 제시되어 있다.

전우치(田禹治)는 후에 그의 행적이 탄로 나서 관가에 체포(逮捕)되었으나 곧 탈출하였고, 이후에도 가난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불쌍한 백성들을 도와주었다. 그는 역적의 혐의를 받은 후에는 도망쳐서 세상을 등지고 도술로 한 시대를 풍미(風味)하며 살았는데, 인근에 사는 서경덕형제(徐敬德兄弟)와 도술을 겨루다가 굴복(屈伏)한 후 함께 산중에 들어가 도를 닦으며 만년(晩年)을 보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소설의 전반부가 뛰어난 도술을 발판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救濟)해 주는 전우치(田禹治)의 활약상을 중심 줄거리로 삼고 있는 것과 달리, 후반부는 친한 벗을 위하여 절부(節婦)를 훼절(毁節)시키려다가 강림 도령에게 제지(制止)를 당하고 서경덕 형제와 도술시합(道術試合)을 벌이다가 패하는 등 도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1536년 재령 군수 박광우(朴光佑)와 전우치의 대화가 담긴 “어우야담(於于野談)” 등 여러 문헌의 기록들을 종합(綜合)해 보면 전우치는 실제로 부패한 관리(官吏)들을 상당히 괴롭힌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러한 사실이 이야기로 전해지면서 과장(誇張)과 전설이 섞이게 되었고 결국에는 “전우치전(田禹治傳)”전이라는 의적소설(義賊小說), 사회소설(社會小說)이 탄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도가 사상의 유행과 “전우치전”의 탄생
전우치(田禹治)가 살았던 16세기에는 도가사상(道家思想)에 심취하여 도인(道人)의 기질을 보인 인물이 다수 배출되었다. 소설 속에서 전우치와 도술을 겨루는 서경덕 형제를 비롯하여, 이지함(李之菡, 1517~1578), 남사고(南師古, 1509~1571), 정렴(鄭, 1506~1549),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 도가적 경향을 보인 인물 대부분이 이 시기 사람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들은 학자이면서 동시에 신이(神異)한 행적을 보였으며 예언자적(豫言者的)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공통점(共通點)이 있다.

특히 전우치가 화담 형제와 도술경쟁(道術競爭)을 벌였다가 결국 패배하여 화담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는 “전우치전(田禹治傳)”의 내용은 흥미를 끈다. 이러한 내용은 사실 여부를 떠나 서경덕과 전우치가 사상적으로 서로 통하는 면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서경덕의 학풍에 도가적인 성향(性向)이 있다는 사실은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해동이적(海東異蹟)”과 같은 자료에도 나타나 있으며, 서경덕의 두 아우인 형덕과 숭덕에게 도가의 이술(異術)이 있었다는 기록이 1648년(인조 26)에 김육(金堉) 등이 편찬한 “송도지(松都誌)”에 전해지고 있어서 서경덕 집안의 분위기가 도술에 상당히 경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술적인 능력과 가장 관련이 깊은 사상은 노장사상(老莊思想)으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시기에 도가 사상이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流行)한 것일까?

이것은 무엇보다 사화(士禍)와 관계가 깊다. 16세기의 시작과 함께 50여 년에 걸쳐 전개된 사화는 지식인들에게 현실 정치에 대한 실망감(失望感)을 안겨 주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계속 이어지면서 능력을 갖춘 학자들이 정치적 탄압(政治的彈壓)을 받아 처형되거나 귀양길에 올랐다. 사화로 인해 많은 인재들이 지방에 은거(隱居)한 사실은 조헌(趙憲)이 올린 다음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오직 사화(士禍)가 혹심하였기 때문에 기미(幾微)를 아는 선비들은 모두 출처에 근신(謹愼)하였습니다. 성수침(成守琛)은 기묘사화(己卯士禍)의 난을 알고 성시(城市)에 은거하였고, 성운(成運)은 형이 희생되는 슬픔을 당하고 보은에 은거하였습니다. 이황(李滉)은 동기(同氣)가 화를 입은 것을 상심하여 예안으로 물러났고, 서경덕 같은 사람은 화담(花潭)에 은둔하였습니다. 조식(曺植)과 이항(李恒)이 바닷가에 정착한 것은 을사년(乙巳年)의 화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제원(成悌元)은 송인수의 변을 목격하고 해학(諧謔)으로 일생을 보전했습니다. 이지함은 안명세(安名世)의 처형을 보고 해도(海島)를 두루 돌아다니며 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조정의 큰 그릇들이고 세상을 구제(救濟)할 재목들이었으나, 기러기가 높이 날아 주살을 피하듯이 세상을 버리고 산골짜기에서 늙어 죽었습니다.

사화로 대표되는 16세기 전반기(前半期)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정치에 나아가는 것보다 현실에 은둔하는 처사(處士)의 길을 택했고, 좌절된 정치 현실의 돌파구(突破口)를 찾는 방안으로 피안(彼岸)의 세계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자연과의 친화(親和)를 강조한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신선의 술법, 현실에서 벗어나 불로장생(不老長生)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도가 사상은 큰 매력(魅力)이 아닐 수 없었다.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도가적 성격을 지닌 38명의 인물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6세기, 사화(士禍)가 연속되던 시대에 활약한 인물이 무려 10여 명에 이른다.

특히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중에는 도가 사상에 심취(深醉)한 인물이 많았다. 천민 출신의 서기(徐起), 서얼 출신인 박지화(朴枝華)가 그 대표적인 인물로, 한문학 4대가의 한 사람인 이식(李植)은 “택당집(澤堂集)”에서 "박지화는 박학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또한 이학(理學)으로 명성이 있었다. 서기는 천인이다. 경학(經學)에 밝아 문인들을 가르쳤으며 산수를 좋아하여 명산에 은거하였다. 대개 화담 문하의 제자들은 자못 기이한 것을 좋아하니 세상에서 신선(神仙)이라 여긴다. 서경덕은 전지지술(前知之術)이 있었으니 화담의 학풍(學風)을 배운 자는 대개 이와 같았다"며 화담 문하에 도술적(道術的)인 분위기가 상당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지함의 “토정비결(土亭秘訣)”, 남사고의 “격암유록(格庵遺錄)”, 정렴의 “북창비결(北窓秘訣)” 등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비결류(祕訣類) 저술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쓰였거나 이들의 명성에 가탁(假託)한 것을 통해서도 이 시대에는 사화라는 좌절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로서 도가사상(道家思想)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결류의 저술은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미래에 대한 예언(豫言)과 함께 꿈과 희망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전우치(田禹治)는 바로 이런 시기에 생존(生存)했던 인물로서, 그의 신비한 도술능력(道術能力)이 시대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소설 속 주인공(主人公)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서경덕, 황진이 그리고 전우치를 배출한 도시, 개성
“송도지(松都志)”에 의하면 전우치의 집은 송도의 영전(影殿) 옆에 있었다고 한다. 또 “대동기문(大東奇聞)”의 ‘전우치분식화접(田禹治噴食化蝶)’에는 전우치의 이인(異人)적인 풍모와 그가 송도에 오랫동안 거주한 사실이 기록(記錄)되어 있고, “어우야담(於于野談)”에도 송도 출신이라 쓰여 있어 전우치(田禹治)가 주로 개성 지역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은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수도였기에 조선시대에 정치적 탄압(政治的彈壓)을 받기도 했지만, 학문적 전통과 기반(基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특히 학문적인 분위기는 개방적(開放的)인 지역 정서와 맞물려 성리학(性理學) 이외에도 도가 사상 등 다양한 사상이 유행하였다. 경기 북부인 고양(高陽)·장단(長端)·개성(開城) 등은 육로(陸路)뿐만 아니라 임진강(臨津江)·한강(漢江) 등 수로(水路) 교통이 발달하여 한양과 왕래가 잦아 하나의 학문 교육권(敎育權)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서경덕 같은 대학자(大學者)가 탄생했던 것이다.

“송도지(松都志)” ‘토속(土俗)’ 편에는 개성의 상업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수록돼 있다. 즉, 남자가 10세가 되면 행상에 종사(從事)한다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업(商業)을 업으로 삼으며 본전이 없으면 대출(貸出)하여 사용한다는 글들은 이 지역에서 상업 활동이 매우 활발(活潑)했음을 보여 준다.

16세기의 학자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은 “송도기이(松都記異)”에서 개성 지방에 대해 "세대가 멀어져서 고려조의 남은 풍속이 변하고 바뀌어 거의 없어졌는데 오직 장사하고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습관은 전에 비하여 더욱 성해졌다. 그 때문에 백성들의 넉넉한 것과 물자의 풍부한 것이 참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 하겠다. 상가(商家)의 풍속은 저울눈을 가지고 다투므로 사기로 소송하는 것이 많을 듯한데 순후한 운치(韻致)가 지금까지 오히려 남아 있어서 문서 처리할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언급하였다. 또 서경덕(徐敬德)·차식(車軾)·안경창(安慶昌)·최영수(崔永壽)·황진이(黃眞伊)·한명회(韓明澮)·차천로(車天輅)·한호(韓濩)·이유성(李有成)·전승개(田承漑)·임제(林悌) 등 개성 출신 인사들에 얽힌 일화들을 주로 소개하였는데, 개성 지역의 상업적 분위기, 무과 출신자(武科出身者)가 많다는 내용 등이 주목(注目)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한양에 사는 사람과 개성부의 장사치들이 의주 사람들과 왕래하며 멋대로 무역을 한 경우가 매우 많고, 개성부의 주민들은 모두가 장사하는 사람들로서 괴로움을 견디고 행실(行實)을 익히며 하는 일에 근면하여 경성의 시정(市井)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개성에 상업적인 분위기가 형성(形成)된 데는 조선 건국 후 이곳이 고려 왕조의 수도(首都)였기에 받은 지역 차별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우치전(田禹治傳)”의 배경이 된 개성 지역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6세기의 유명 인물들이 다수 배출(輩出)된 점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전우치(田禹治)와 도술을 겨룬 서경덕을 비롯해 서경덕과의 스캔들로 유명한 기생 황진이, 조선 중기 서예의 최고봉 한호(한석봉), “강촌별곡(江村別曲)”으로 유명한 차천로 등이 모두 개성 출신이다. 이들은 재미있는 일화들을 남기면서 민중 속에 그 이름을 깊이 각인(刻印)시켰다.

학문적 식견(識見)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도 지녔으며 도술에도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던 서경덕(徐敬德), 신이한 도술 능력의 소유자 전우치(田禹治), 기생이라는 신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명사들과 학문을 교유했던 황진이(黃眞伊), 등잔불을 끄고 어머니와 시합을 벌인 한석봉(韓石峯). 이러한 유명한 일화 모두가 이들 개성 출신자들의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허균(許筠)은 아버지 허엽(許曄)이 서경덕(徐敬德)의 수제자라는 인연으로 개성 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허균은 "송도는 산수가 웅장하고 꾸불꾸불 돌아서 인재가 무리 지어 나왔다. 화담(花潭)의 학문은 조선에서 첫째이고 석봉(石峯)의 필법은 내외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일에는 차씨의 부자 형제(차식·차천로·차운로를 일컬음)가 또한 문장으로 명망(名望)이 있다. 황진이(黃眞伊) 또한 여자 중에 빼어났다"고 하여 개성(開城)에 빼어난 인물이 많았음을 칭송(稱頌)하였다.

유명한 사람들에 관한 일화(逸話)는 대개 그의 출생 지역을 중심으로 전해 온다. 16세기 전반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에 얽힌 일화가 주로 그가 활동했던 진주·합천 등지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개성출신(開城出身) 인물의 일화는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전파(傳播)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유명 인물들과는 차이가 있다. 개성의 인물들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개성 지역의 상업발달(商業發達)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개성의 활발한 상업 분위기는 수많은 행상(行商)을 낳았다. 거주지에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타 지역 사람들과 달리 개성의 상인들은 상행위(商行爲)를 위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일반적으로 개성의 여인들은 화초(花草) 가꾸기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는 남편이 타 지역에서 행상하는 일이 빈번하여 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한 하나의 방편(方便)이었다고 전해 온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개성상인들이 지역의 자랑거리인 서경덕(徐敬德)이나 황진이(黃眞伊), 전우치(田禹治), 한석봉(韓石峯)의 이야기를 곳곳에 전파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요즈음에는 그리 흔하지 않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외딴 지역에서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화장품(化粧品)을 팔던 외판 아줌마들이나 떠돌이 봇짐장수들이 곳곳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처럼 개성지역(開城地域)의 인물들이 전국구 인물로 널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 개성상인(開城商人)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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