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제: 한비자와 “한비자”
한비자(韓非子)는 법가의 대표자이자 선진(先秦) 시기 최후의 대 사상가이다. 한(韓)은 그의 성, 비(非)는 이름, 그리고 자(子)는 위대한 스승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한비자는 B.C. 280년경에 한(韓)나라의 공자로 태어나, 이사(李斯)와 더불어 순자(荀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한나라는 본래 주(周) 왕실과 동성(姬氏)으로 한원(韓原) 지역에 제후로 봉해졌기에 후손들은 한 씨로 성을 삼았다. 한은 원래는 진(晉)에 속했으나, 훗날 진이 한(韓), 위(魏), 조(趙)로 분할됨에 따라 독립 국가로 성립하게 되었다. 전국 시대 말기에 들어 한은 비록 7웅(齊, 楚, 燕, 趙, 韓, 魏, 秦)에 들기는 하였지만, 영토가 워낙 작은 데다 국력이 쇠약하여 서쪽의 진(秦)으로부터 빈번하게 침탈을 받았으며, 동쪽의 제(齊), 북쪽의 위(魏), 남쪽의 초(楚)나라로부터도 위협을 받았다. 국가 존망(國家存亡)의 위기 상황에서 한비자는 여러 차례 국왕에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중신들의 배제와 공격을 받았다. 한비자는 말이 어눌하여 언설 능력(言說能力)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글재주가 뛰어나 10여 만 자의 저술(著述)을 남겼다.
훗날 시황제로 불리는 진왕(秦王) 정(政)은 우연히 한비자(韓非子)의 글을 구해 읽고 “아!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고 말했다. 진왕을 도와 고위 관직에 있던 이사는 한비자를 얻기 위한 계략(計略)을 제시했다. 진이 한을 치면, 한은 진의 공격을 멈추게 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오기 마련인즉,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라고 요구하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B.C. 237년 진이 한을 공격하여 한이 감당할 수 없게 되자 B.C. 233년 한왕은 한비자를 화친을 위한 사신으로 진에 파견(派遣)하였다. 진왕은 사신으로 온 한비자를 볼모로 잡았다. 한비자는 진에 머물면서, 진과의 화친을 통하여 한의 보존을 도모하는 한편, 진의 공격을 조와 제로 돌리려는 입장에서 진왕에게 건의문(建議文)을 올렸다. 진왕은 이사에게 건의문을 평가하도록 했다. 이사는 이를 조목조목 반박(反駁)하는 한편, 한비자가 진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꺼려서 그를 죽여 없애고자 진왕에게 모함(謀陷)했다. 진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사는 채 죄목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한비자에게 사약(賜藥)을 보내 자결하도록 만들었다. 한비자가 죽은 뒤 3년 후(B.C. 230년) 진은 결국 한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한비자(韓非子)의 저술에 대한 기록은 “사기”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최초로 보인다. 사마천은 “‘한비자가’ 예전 정치의 성패와 득실의 변천을 고찰하여 ‘고분(孤憤)’, ‘오두(五蠹)’, ‘내외저(內外儲)’, ‘세림(說林)’, ‘세난(說難)’ 편 등 10여 만 자의 글을 저술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한비자” 는 모두 55편으로, 이중 ‘초견진(初見秦)’과 ‘존한(存韓)’ 편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한비자(韓非子)”에는 역사의 변천에 관한 광활한 시야와 현실 정치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력(洞察力)이 들어 있으며, 정치 이론의 측면, 역사 문헌적(文獻的) 측면, 그리고 문학 · 문체의 측면에서 고루 뛰어난 가치를 담고 있다. 먼저 정치 이론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관료 부패와 정실주의를 억제하기 위한 제도적(制度的) 방략, 경제적 이익을 증대하기 위한 각종 정책, 법과 형벌의 사회적 기능과 효과, 군주의 리더십과 정치술(政治術),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원리(理)에 대한 탐구, 관념과 이론을 현실의 장에서 검증(檢證)하는 문제, 현실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인간관(人間觀), 도덕과 공리의 관계, 사회 변동(社會變動)에 따른 규범의 변천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로 볼 때 “한비자”에서는 당시 사회에서 답이 요구되던 중대한 문제들을 거의 망라하고 있어서, 선진 정치사(先秦政治史)와 사상사 연구에 필수적인 학술서(學術書)라고 할 수 있다.
역사 문헌적 가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비자(韓非子)”에는 상고 시대부터 전국 말기까지의 귀중한 역사 자료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고대 인류(古代人類)의 실상에 관한 자료를 포함하여 요 · 순 · 우의 업적과 생활에 대한 전설, 은 · 주의 법률 제도와 사회 상황, 관자 · 자산 · 공자 등 춘추 시기(春秋時期)의 인물과 제도, 그리고 전국 말기(戰國末期)의 사회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가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비자(韓非子)”는 선진 시기의 다른 저작들에 비해 문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구성 방식도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한비자”에는 장편으로 된 정론(政論), 단편으로 된 잡문, 경설체(經說體), 주석체(註釋體), 논박체(論駁體), 문답체(問答體), 서신체(書信體), 4자 1운의 운문체(韻文體) 등이 고루 들어 있으며, 이 책에 실려 있는 300여 편의 우언과 고사는 깊은 철학적 통찰(洞察)을 담고 있다. “한비자”에 실려 있는 수많은 역사 고사들은 서사적 구성의 완결성이나 선명한 인물 묘사 때문에 명(明) 대 사람들은 그를 소설 장르의 비조(鼻祖)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2. 덕치와 법치: 어떤 정치 체제가 효율적인가?
전국 시대에는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와 소유욕(所有慾)의 확대로 인하여 제후국들은 주 왕실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국가(獨立國家)로 이행을 서두르고, 각국 내에서도 기존의 지배 질서에 도전(挑戰)하여 새로운 계급 질서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서주(西周) 이래 국제 관계와 국내 질서를 규정해주던 ‘예’(禮)는 규제력을 상실하고, 제후국 간에는 토지를 쟁탈(土地爭奪)하기 위한 전쟁이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국제 관계와 국내 영역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극심한 혼란(混亂)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가와 법가(法家)는 서로 다른 처방을 제시하였다. 유가와 법가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의 차이와 현실에 대한 인식(認識)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러한 차이는 결국 실천적 처방에 있어서도 ‘덕치’와 ‘법치’라는 상이(相異)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공자(孔子)의 덕치사상을 이어받은 맹자(孟子)는 당시의 혼란이 지배 계급의 탐욕과 포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도덕적 자각과 덕성의 함양을 통하여 인(仁)하고 의(義)로운 정치를 실행하도록 촉구(促求)하였다. 반면에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는 당시의 혼란이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힘’들 사이의 갈등(葛藤)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엄격한 ‘법’의 적용과 무거운 형벌을 통하여 강력한 군주권(君主權)을 확보하는 길만이 혼란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물론 유가가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을 앞세웠다고 해서 ‘법’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자는 너그러움(寬)과 사나움(猛) 즉 덕(德)과 형(刑)을 조화롭게 운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맹자 역시 ‘인의’라는 도덕규범(道德規範)과 ‘법’이라는 강제 규범이 동시에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유가 사상가들은 혼란의 극복을 위해 ‘덕’과 ‘법’의 필요성을 다 같이 긍정하되, 이 중 ‘덕’을 일차적인 것으로 그리고 ‘법’을 보조적인 수단으로 간주(看做)했다고 할 수 있다.
유가가 ‘덕’을 주로 하고 ‘법’을 보조적 수단으로 삼는 ‘덕주형보’(德主刑補)의 정치 이념을 추구한 반면, 한비자(韓非子)는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의 효용성(效用性)에 의문을 제기하고 오로지 ‘법’만이 공적 영역에서 관철(貫徹)되어야 할 유일한 규범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한비자의 정치사상에서 흥미있는 것은 ‘법치’의 확립을 위해서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은 반드시 배격되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우리의 의식 구조 속에 유교 문화(儒敎文化)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는 ‘인자함’(仁)과 ‘의로움’(義)이라고 하면 보편적인 도덕 가치로 승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인들 가운데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이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고 강변(强辯)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비자는 왜 ‘인의’를 배격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는 왜 ‘인의’는 ‘법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한비자는 왜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이 ‘법치’의 시행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보았던 것일까? 과연 ‘인의’는 법치의 확립(確立)을 위해 배격되어야만 할 가치인가? 이러한 의문에 답하는 일은 유가와 법가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지만, 나아가서는 유교적 가치관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한국 사회의 규범 문화를 반성적(反省的)으로 성찰해보기 위해서도 중요한 시사점(時事點)을 제공해주리라 생각한다.
3.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는 여덟 가지 이유
(1) 신하에 의한 ‘인의’의 시행은 군주의 통치권을 침해한다
‘인의’를 배격하고자 하는 한비자(韓非子)의 견해를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우리가 방법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한비자가 배격하고자 하는 ‘인의’는 과연 누구의 ‘인의’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한비자는 군주에 의한 ‘인의의 정치’(德治)를 배격하고자 했는가? 아니면 신하에 의해 행해지는 ‘인의’를 배격하고자 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백성까지 포함(包含)한 모든 사람의 ‘인의’를 통틀어 배격(排擊)하고 있는가?
“한비자(韓非子)” 전편을 통해서 볼 때, 그가 가장 시급하게 배격하고자 하는 ‘인의’는 신하에 의해 시행되는 ‘인의’이다. 신하에 의해 ‘인의’가 시행될 경우, 군주의 통치권(統治權)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判斷)했기 때문이다.
“대저 오늘에 이르러 작위나 봉록을 경시하고 나라를 쉽게 버리고 떠나 마음에 드는 군주를 골라서 벼슬하려는 자를 저는 ‘곧은 사람’(廉)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거짓 주장을 내세워 법을 어겨가면서 군주에게 대들며 강력하게 간언(諫言)하는 자를 저는 ‘충성스런 사람’(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아랫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익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명성(名聲)을 얻으려는 자를 저는 ‘인자한 사람’(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덕목들은 난세에나 통하는 이론으로, 선왕(先王)의 법으로 물리쳐야 할 것들입니다. 선왕의 법에 이르기를 “신하가 위엄을 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이익을 꾀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저 왕의 지시대로 따를 뿐이다. 호감(好感)을 표시해서도 안 되고 반감을 표해서도 안 된다. 그저 왕의 길을 따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세상이 잘 다스려졌을 때의 사람들은 공법(公法)을 받들고 사적인 술수(私術)를 버리고서 마음과 행동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군주의 명령(命令)만을 기다렸습니다.“
고대 동양 사회에서 염치(廉) · 충성(忠) · 인자함(仁) 등의 덕목은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권장(勸獎)되어온 덕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비자(韓非子)는 이러한 덕목들을 일거에 배격하고 있다. 그가 이러한 덕목들을 부정(否定)하는 이유는, 이러한 덕목들이 신하에 의해 실행될 경우 오히려 군주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공법(公法)의 시행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하가 곧음(廉)을 지킨다는 이유로 군주를 버리고 떠나가거나, 충간(忠諫)의 명목을 내세우며 군주의 의지에 거스르는 언행을 한다면, 이는 군주의 권위를 훼손(毁損)하고 통치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 것이다. 또한 신하 된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명성을 얻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 세력(勢力)을 늘려나가게 되면 군주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損傷)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비자는 신하가 베푸는 ‘인의’는 공법(公法)에 위배되는 ‘사사로운 술수’(私術)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한비자(韓非子)는 신하가 ‘인’을 베풀게 되면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게 된다는 예로, 춘추 시대 제(齊) 간공(簡公)의 신하였던 전상(田常)을 예로 든다. 전상은 간공에게 청하여 신하들에게 작위와 봉록을 나누어주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도량형(度量衡)의 크기를 표준치보다 늘려서 곡식을 넉넉히 나누어주게 하였다. 전상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세력을 확대하여, 마침내 제 간공 4년(B.C. 481년) 서주(舒州) 땅에서 간공을 시해(弑害)하고 권력을 찬탈하였다. 한비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 기반(基盤)하여, 개인적으로 덕을 베푸는 신하를 ‘여덟 가지 간악한 신하’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신하 된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세력을 확대(擴大)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는 간악(奸惡)한 행위라고 파악한 것이다. 신하 된 자가 공공의 재화(財貨)를 흩뿌려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자그마한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따르게 하며, 조정이나 민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칭송(稱頌)하도록 하여, 군주를 가로막고 자기의 야욕을 이루는 자를 민맹(民萌)이라 한다.
여기서 한비자(韓非子)는, 신하 된 자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은 곧 ‘공공의 재화’를 유용하는 일이며, 이는 백성들의 환심(歡心)을 얻어 자기 야욕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은혜를 베풀거나(褒賞權) 형벌을 내리는 일(刑罰權)은 전적으로 군주의 고유 권한이다. 따라서 “덕을 베푼다고 국가의 재물을 방출(放出)하거나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일은 반드시 군주의 명을 거쳐야 하며, 신하가 사사로이 덕을 베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主張)한다. 신하는 개인적인 도덕 판단에 의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법에 규정된 한계(限界) 내에서만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한비자는 ‘주도(主道)’ 편에서 군주의 권위를 해치는 다섯 가지 장애 요인을 거론하면서, 그중 하나로 “신하가 ‘의’(義)를 행하는 일”을 들고 있다. 여기서 ‘의를 행한다’는 말은 신하가 개인의 도덕적 판단에 입각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형벌을 시행(施行)하는 일을 말한다. 한비자는 신하가 자신의 도덕 판단에 의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행위를 ‘사의’(私義)라고 부른다. ‘사의’란 ‘사사로운 도덕 판단’ 혹은 ‘자의적인 도덕 판단’이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한비자는 신하의 ‘자의적인 도덕 판단’은 결국 군주의 고유 권한인 상벌권(賞罰權)을 침해하게 되고, 이는 결국 군주의 권위와 통제력을 상실(喪失)하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신하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도덕 판단(道德判斷)을 멈추게 하고 오로지 규정된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직무를 수행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현명(賢明)한 군주는 신하들로 하여금 제멋대로 법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고, 또 사사로운 은혜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여서 베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행동(行動)이 법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2) 공이 없는 자에게 인애(仁愛)를 베푸는 일은 사회적 신뢰를 훼손한다
한비자(韓非子)가 ‘인의’를 배격하는 주된 이유는 신하가 개인적(個人的)으로 ‘인’을 베풀게 되면 군주의 권위에 손상을 가져온다는 점 때문이었지만, 그는 나아가서 군주가 백성들에게 ‘인애’를 베푸는 일에도 반대한다. 군주가 ‘인’을 쉽게 베푼다면, 공이 없는 자가 상을 받게 되고 죄지은 자가 사면 받게 되어 사회적 신뢰(社會的信賴)를 훼손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비자가 공자의 ‘인정’(仁政) 이념을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예로, 공자는 섭공(葉公) 자고(子高)가 정치의 비결을 물어오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정치의 비결은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을 다가오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한비자에 의하면 공자의 이러한 대답은 나라를 망치기에 딱 좋은 말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하면 공이 없는 자가 상을 받게 되고 죄지은 자가 사면 받게 되어서, 장차 법이 무너지는 원인(原因)이 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자기 당시에 유가 학파(儒家學派)에 의해 주장되던 인정(仁政)의 이념을 이렇게 비판한다.
세상의 학자들은 군주에게 자기 의견을 말할 때, “권력의 위세를 사용하여 간사한 신하를 혼내주라”고 말하지 많고, 모두가 인의(仁義)라든지 은혜(惠)나 사랑(愛)을 강조하곤 한다. 또한 세상의 군주들은 ‘인의’라는 명분(名分)에 이끌려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심하면 나라를 망치고 자신도 죽게 되며, 그만 못할 경우에는 영토(領土)가 깎이고 군주의 권위가 낮아진다. 빈곤한 자에게 물질적 혜택을 베풀어주는 일이 세상에서 말하는 ‘인의’이고, 백성을 가엽게 여겨 차마 처벌(處罰)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은혜와 사랑이다. 그런데 막상 빈곤한 자에게 베풀어주게 되면 공이 없는 자가 상을 받는 셈이 되고, (측은한 마음 때문에) 차마 처벌을 하지 못하게 되면 난폭(亂暴)한 일이 끊이지 않게 된다. 나라에 공이 없이 상 받는 자가 있게 되면 백성은 적과 맞서 목을 베려고 힘쓰지 않게 되며, 안으로는 농사짓는 일도 부지런히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한비자(韓非子)에 의하면, 군주가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때는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공적이 있어야 한다. 상응하는 공적이 없는데도 은혜를 베푸는 일은 결국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사회적 신뢰의 훼손을 가져오게 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군주가 ‘인’을 쉽게 베풀면 사회적 신뢰가 훼손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위(魏) 혜왕(惠王)과 그의 신하인 복피(卜皮)의 대화를 예로 든다. 위 혜왕이 복피에게 “자네가 들은 나의 평판(評判)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복피가 대답하기를 “제가 듣기로는 왕께서 인자롭고 은혜롭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장차 성과가 어느 정도(程度)에 이르겠는가?” 대답하기를 “왕의 성과는 망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인자하고 은혜로운 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선을 행하여 망한다 함은 무슨 까닭인가?” 복피가 대답하기를 “대저 인자하다는 것은 동정하는 마음씨이며, 은혜(恩惠)라는 것은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는 마음씨입니다. 그러나 동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측은히 여기게 되어 잘못이 있어도 처벌하지 않게 되고,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면 공이 없어도 상을 주게 됩니다. 잘못이 있는데도 죄를 받지 않고, 공이 없는데도 상을 받는다면 망한다 하여도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한비자가 군주의 ‘인’이나 ‘덕’에 반대했던 이유는 ‘신상필벌’의 원칙(原則)에 의하여 사회적 신뢰를 엄격하게 확립(確立)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3) 인애(仁愛)는 이득을 얻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불과하다
유학에서 ‘인’이나 ‘애’는 공리적 조건을 전제(前提)로 하지 않는 본래적 가치에 해당한다. 이러한 가치는 맹자의 ‘유자입정’(孺子入井)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물질적 보상(補償)이나 세속적 명예를 전제로 하지 않는 순수한 도덕 의지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비자(韓非子)의 ‘인애’에 대한 인식은 이와 다르다. 한비자는 ‘인’을 공을 이룬 사람에게 제공하는 상(賞)의 의미로 파악하고, ‘애’를 조건부적 보답으로 해석(解釋)한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인’이나 ‘애’는 그 자체로 추구(追究)할만한 본래적 가치가 아니라 단지 ‘공적에 대한 대가’ 또는 ‘이득(利得)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한비자(韓非子)는 ‘인’과 ‘애’가 물질적 대가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근거(根據)로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한다. 춘추 시대에 말을 잘 다루던 왕량(王良) 이 말을 아끼고 사랑했던 이유는 말을 빨리 달리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월(越) 왕 구천(勾踐)이 백성을 사랑했던 이유도 결국은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의원이 다른 사람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나쁜 피를 빨아내는 것도 환자를 아끼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물질적 이득(物質的利得)을 얻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가마를 만드는 사람은 가마를 만들면서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짜는 사람은 관을 짜면서 사람들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도, 가마를 만드는 사람이 어질고 관 짜는 사람이 잔혹(殘酷)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존귀해지지 않으면 가마가 팔리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한비자(韓非子)가 파악하는 ‘인애’는 인간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순수한 도덕 감정이 아니다. 한비자의 ‘인’과 ‘애’는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얼룩진 ‘이익사회(利益社會)’에서 통용되는 ‘물질적 대가’ 혹은 ‘조건부적 보답’에 지나지 않는다. 유학에서는 정치를 가족 윤리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백성 돌보기를 아기 돌보듯 하라”(若保赤子)거나,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 하라”(視民如傷)라는 식의 도덕적 권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소유욕의 확산으로 제후국 사이에 겸병전(兼倂田)이 일상화되어 있던 전국 말기의 상황에서 유가적 도덕 정치의 이념(理念)은 너무도 이상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 인식에 바탕하여, 한비자는 유가의 인정(仁政) 이념을 이렇게 비판한다.
유가와 묵가는 모두 말하기를 “선왕은 천하를 두루 사랑했으므로 백성 보기를 부모가 자식 보듯 하였다”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證明)하는가? 그들은 말하기를 “법관이 형을 집행하면 군주가 (그를 측은히 여겨) 음악을 연주(演奏)하지 못하게 하고, 사형 집행 보고를 들으면 군주가 눈물을 흘렸다”라고 한다. 도대체 법을 가지고 형을 집행(執行)하면서 군주가 그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이로써 나라를 다스렸다고는 할 수 없다. 대저 눈물을 흘리며 형벌(刑罰)을 원치 않는 것은 ‘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處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법’이다. 선왕이 법을 앞세우고 눈물에 따르지 않았으니, 인을 정치의 수단(手段)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은 또한 분명한 일이다. 한비자가 인한 정치를 거부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理由)는, ‘인’은 가족과 같은 관계에서나 통용(通用)될 수 있는 사적 규범이지, 군-신과 같은 이익 관계에서는 적용(適用)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이념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 부자지간(父子之間)과 같은 정은 없다. 그런데 의(義)와 같은 도덕규범을 가지고 신하를 다스리려 한다면 그 관계에 반드시 틈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아들을 낳으면 서로 축하(祝賀)하지만 딸을 낳으면 죽여 버린다. 이들이 다 같이 부모의 품 안에서 나왔지만 아들은 축하받고 딸은 죽여 버리는 것은, 노후(老後)의 편의를 생각하여 먼 훗날의 이득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오히려 계산하는 마음으로 상대하는데 하물며 부자지간의 정도 없는 군신(君臣)관계에 있어서이랴.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한비자(韓非子)는 군-신 관계는 부-자 관계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자식과 같은 혈연관계에서도 노후의 편의를 생각하여 이득을 계산하는데, 하물며 군주-신하의 관계에서는 정(情)이나 인(仁)과 같은 도덕규범이 적용될 리 만무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비자의 현실 인식은 생산력(生産力)의 발달과 소유권의 분쟁으로 ‘계약적 관계’가 확산되어가던 전국 말기의 시대적 분위기(雰圍氣)를 반영한다. 한비자의 ‘법’은 종법 관계에 기초한 ‘예’가 종지부를 찍고, 이익과 계약으로 이행하는 역사 변천(歷史變遷)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강조될 수밖에 없는 사회 규범인 것이다. 그는 이익 분쟁으로 얼룩진 당시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 대신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공리적 기준에 의거하여 법치사상(法治思想)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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