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Sumer)는 메소포타미아(美索不达迷亚)의 가장 남쪽 지방으로 오늘날 이라크(伊拉克)의 남부 지역이다. 수메르 문명(苏美尔文明)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수메르인은 대략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부터 수메르 지방(苏美尔地方)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수메르 문명이 가장 융성(隆盛)했던 때는 기원전 제3천년기로 역사학자들은 통상적(通常的)으로 이 1000년의 기간을 크게 초기 왕조 시대(2900?~2350? BC), 아카드 왕조 시대(2350?~2150? BC), 우르 제3왕조 시대(2150?~2000? BC)의 세 시대로 구분한다.
그 후 기원전 2000년쯤에 유프라테스 강(幼发拉底斯河)의 서쪽 즉 아라비아(亚拉伯)에서 온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亚摩利人)이 수메르 지방을 점령하고 고대 바빌로니아(巴比伦尼亚)를 세움으로써 수메르 문명(苏美尔文明)은 국가 형태로서는 완전히 사멸(死滅)되었으나 수메르 종교와 문화의 흔적이 바빌로니아인(巴比伦尼亚人)·아시리아인(亚述人)을 비롯한 다른 민족 및 문화 집단들의 신화와 종교 그리고 문화 속에 남아 있다.
세계 4대 문명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가장 빠른 기원전 4000년경 그 다음이 기원전 3300년경의 인더스 문명(印度斯文明)이 발생했으며 마지막으로 황허 문명(黄河文明)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에 여러 주장이 나오긴 했지만 이 학설(學說)이 대세였다. 그런데 기원전 3000년경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언어인 수메르어(苏美尔語)의 해독(解毒)에 힘입어, 메소포타미아 문명(美索不达迷亚文明) 이전에 이미 강 하류에 수메르 문명이 기원전 5300년경에 탄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세계 최초의 문명 시기가 약 1.300년 가까이 앞당겨졌다.
그 무렵 만들어진 수메르의 채색토기(彩色土器)와 농사법이 동쪽으로 전파되어 인도(印度)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스웨덴(瑞典) 역사학자 안데르손은 보았다. 하지만 이는 방사선탄소연대측정법(放射線炭素年代測定法)이 개발된 이후 오히려 동양의 토기가 서쪽으로 전파(傳播)된 것으로 학설이 뒤집히고 있다.
게다가 동북아 요하지역(遼河地域)에서 기원전 7000년경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 문명(红山文明)이 발견되자 중국뿐 아니라 세계 역사학계는 놀라고 있다. 물론 오리엔트 지역(地中海地域)에도 사해 인근의 예리고 성이나 터키 지역의 차탈휘이크(Chathal-flower; 查脱惠克) 등 신석기 시대의 마을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홍산 문명은 시대적 연속성을 갖고 있는 대규모 집단주거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필자는 이러한 홍산 문명(紅山文明)조차 그 이전에 탄생한 발해만 연안 문명의 연장선상에서 그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곧 홍산 문명 이전에 발해연안(渤海沿岸) 문명이 먼저 탄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가설(假說)의 논리를 살펴보자.
초기인류가 떠돌이 수렵채취(狩獵採取)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몰려 살려면 일단 먹거리가 해결(解決)될 수 있는 장소이어야 했다. 그 최적의 장소가 갯벌이 있는 해안가이다. 왜냐하면 갯벌에 구멍 난 곳을 헤집으면 낙지나 조개 등 연체동물(軟體動物)을 손쉽게 잡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체에 꼭 필요한 소금 구하기도 쉬웠다. 갯벌에는 함초(咸草) 등 염생식물(盐生植物)도 많아 이들로부터 귀한 염분(鹽分)을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갯벌에서는 소금 생산이 가능했다. 염전(鹽田)을 한글로 풀면 바닷가의 소금밭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갯벌이 소금밭이었다. 서해 갯벌 웅덩이나 바위틈에서 소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
그 뒤 지금과 같은 다단계 염전에 의한 완전한 천일염(天日鹽)은 만들지 못해도 갯벌에서 가래질 등으로 증발(蒸發)시킨 바닷물을 토기에 넣고 끊여 소금을 생산했다. 반면 중국은 바닷물을 처음부터 토기에 담아 이를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중국 연안가와 강가의 나무숲이 황폐해져 홍수 때마다 토사가 흘러내려와 바다를 덮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것이 적은 땔감으로도 만들 수 있었던 우리 고유의 자염(煮鹽)이다. 그래서 우리는 땔감이 비교적 많고 갯벌이 좋은 곳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주로 강 하류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그런 곳이 많았다. 요하 하류 연안에 제염소(製鹽所)가 많았다.
강 하류에는 민물과 바다가 만나 어족이 풍부하고 비가 오면 상류의 기름진 흙들이 쓸려 내려와 쌓여 퇴적층(堆積層)을 이루어 농사짓기에 좋았다. 대부분의 고대 문명(古代文明)이 강 하류에서 발달한 이유이다.
인간만 강 하류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철새 도래지(渡來地)가 대부분 강 하류에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조간대 지역은 백여 종에 이르는 수백만 마리 새들의 생존을 돕는 서식지(棲息地)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거북이 산란하는 해변이자 아시아물개가 번식하는 장소이다. 또 경제성이 높은 어류의 산란장(産卵場)이자 수천 종에 이르는 무척추 동물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서해 갯벌은 생명체(生命體)들의 보고였다. 세계 5대 갯벌 가운데서 생물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서해 갯벌이 단연 돋보인다. 예를 들어 새만금(新萬金)에는 어류가 약 1백55종, 저서생물이 1백41종, 규조류가 1㎠당 20만 개체가 서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서해 갯벌 해산물(海産物)로 먹거리의 상당량을 획득할 수 있었다.
더구나 갯벌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 어족이 풍부했다. 초기 인류가 갯벌 채취 뿐 아니라 어로 생활을 하며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초기 인류는 이렇게 갯벌 연체동물 채취(軟體動物採取)와 연근해 어로 활동과 더불어 육지에서는 농사를 지으며 터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여기에 소금 획득도 가능하니 갯벌 근처에 자리 잡으면 일석사조(一石四鳥)인 셈이다. 우리의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新石器遺跡)이 대부분 바닷가와 강가에 분포(分布)되어 있는 이유이다. 또한 이러한 갯벌 생활과 강가의 모래밭 근처에 장착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 토기는 갯벌에 박아 놓고 쓰기 쉽도록 밑이 뾰족했다. 우리의 빗살무늬 토기의 밑바닥이 뾰족한 이유이다.
서해안은 빙하기 이후에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수심이 얕은 바다다. 평균 수심이 44미터에 불과하다. 특히 발해연안 발해만(渤海灣)의 평균 수심은 22미터 남짓이다. 세계에서 가장 얕은 바다의 하나다. 바다가 경사가 완만한 대륙붕(大陸棚) 위에 만들어져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가 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수 간만의 작용으로 아시아 유일의 대형 갯벌이 만들어진 것이다.
완만한 해변은 어족(魚族)이 많을 뿐 아니라 거친 파도를 잠재워 마을과 어촌(漁村)이 안전하게 들어서게 한다. 황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황토로 인해 황하 하류의 탁류(濁流)보다는 요하 쪽의 물이 깨끗하고 갯벌도 좋았다. 그래서 요동반도 쪽에 제염소(製鹽所)가 많았다. 게다가 어족이 풍부하다 보니 고기잡이가 발달하게 된다. 덕분에 고기잡이배가 많이 만들어져 일찍이 해양 활동이 왕성했다. 갯벌이다 보니 배 밑이 편평한 평저선(平底船)이 만들어져 고기잡이에 쓰였다. 배 밑바닥이 뾰족하면 썰물 때 갯벌에 쓰러지기 때문이다. 우리 고대 선박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저선인 이유이다. 고대로부터 발해만(渤海灣)은 양자강 하구(揚子江河口)와 더불어 동양 제일의 어장(漁場)이었다.
중국 연안과 서해 갯벌의 차이점
넓은 갯벌이 형성되려면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가 커야하고, 해안가의 경사가 낮아야 한다. 서해의 독특한 지형적 특성(地形的特性)은 바로 이 두 조건을 만족시켜준다. 그런데 같은 서해지만 우리 갯벌과 중국 갯벌은 특성이 다르다. 갯벌은 퇴적물의 종류에 따라 펄갯벌, 모래갯벌, 펄과 모래의 혼합갯벌로 나뉜다. 다양한 생물이 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갯벌이 혼재되어야 한다. 환경이 다양한 만큼 서식하는 생물종(生物種)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갯벌은 모래갯벌, 혼합갯벌, 펄갯벌이 함께 발달한데 비해 중국 측 갯벌은 펄갯벌이 대다수다. 황하(黃河)나 양자강(揚子江)과 같은 큰 강으로부터 다량의 펄이 연안으로 이동해 와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퇴적물(堆積物)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삼각주 형태(三角洲形態)의 갯벌이 많다. 이런 경우는 다양한 생물(生物)이 살기가 힘들다. 서해에 우리 측 갯벌이 중국 연안보다 발달한 이유이다.
소금생산과 어로활동 그리고 농사로 고대문명 탄생
발해만 연안(渤海灣沿岸)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어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이 바닷가와 강 하류 하천가에 정착(定着)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로써 고대문명이 가장 먼저 자리 잡게 된다. 이를 발해연안문명이라 한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에 바닷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해 육지(陸地)가 바다로 바뀌어갔다. 사람들이 점점 강 상류 쪽으로 밀려 올라가야 했다. 특히 물고기가 많은 요하유역(遼河流域)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살면서 강 상류에도 고대문명(古代文明)이 발생했다. 그것이 소하서(小河西)에서 시작된 홍산 문명이다.
더구나 발해만은 얕은 바다라 예전에는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산동 반도(山東半島)는 섬들로 연결되다시피 했다. 더구나 발해만(渤海灣)에는 풍랑이 적어 작은 배들도 항해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이로써 요동반도와 산동 반도를 포함한 발해만 일대가 사실상 모두 한 생활권(生活圈)이었다. 발해만 연안이 동아족의 근거지가 된 이유이다. 기원전 7000년 이전에 발해만 연안에서 발흥(勃興)한 문명은 그 뒤 내륙으로 퍼져 소하서(小河西)를 시작으로 내몽골 사해(査海)와 흥륭와(興隆窪)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다.
'발해연안 고대문화의 연구'로 박사학위(博士學位)를 취득한 선문대 대학원장 이형구 교수에 따르면 홍산 문화(紅山文化)나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层文化)에서 발원한 동이족(東夷族)의 문명은 그 본토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중원 지역(中原地域)으로 들어가서는 하나라를 정복하고 상(商)왕조를 이룩했다고 한다.
중국문명의 다기원론 시작
우리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黃河文明)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양자강 하류(揚子江下流)에서 하모도 문화라고 명명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 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황하문명의 앙소문화(仰韶文化)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長江文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양자강의 문명이란 뜻이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中華文明)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單一紀元論)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 원론(原論)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모도문화권(河姆渡文化圈)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보면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유적(遺跡)이 대규모로 나왔다. 그것이 기원전(紀元前)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다.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에 따르면 고조선(古朝鮮) 이전에 한민족이 세운 환국(桓國)은 12연방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수밀이국(須密爾國)이 바로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수메르국(須密爾國)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자료의 주목할 만한 곳은 단연 수메르 문명
속된 말로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주변에 비해 두드러지게 발달된 문명을 선보이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수메르 문명 이전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달 단계(發展段階)에서 그리 가치가 없으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4,200년경에, 이집트 문명을 건설한 시리우스인들과는 별개의 시리우스인들이 내려와 구축(構築한 문명이다.
명백한 연대의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는 한 1~2천 년의 오차(誤差)는 현대 과학기술로는 상당히 근접하게 추정한 것으로 간주해도 될 것이다. BC 4,200년경 연대 추정(推定)에 오차가 10배 가까이 차이 난 이집트 문명보다는 상당히 양호(良好)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집트 문명 이후
실질적인 문명의 주체인 시리우스인들을 보면 첫 만남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BC 6,000년경으로 이집트보다 앞섰다고 한 것은 기존 역사(旣存歷史)의 관점으로 말한 것이다. 이집트 문명(埃及文明)이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있으며 수메르 문명은 이집트-시리우스 문명(西里乌斯文明, 시리우스가 관여한 이집트 문명)의 마무리 무렵에 성립되었다.
수메르 문명은 영국학자 크래머 등의 발굴에 의하여 ‘머리가 검은 동아시아인(东亚人)들’이 문명을 가지고 들어와 세웠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수메르 언어가 교착어(‘~가’, ‘~를’ 등 조사를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점이나 단어의 유사점(類似點)에서 고대 환국(古代桓國)의 수밀이국(須密爾國)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고고학이 인류의 역사를 정립(定立)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나 많은 부분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으로 짜 맞출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과학기술(科學技術)이 그러한 과거를 밝혀내는 데 있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편향성(偏向性)이란 한 번 그렇다고 믿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가져다 맞추기 마련이다. 말씀하신 정도의 공통점(共通點)이라면 전혀 다른 문명과 공통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메르 문명을 가지고 왔다는 ‘검은 머리’의 인종은 어떻게 출현하였는가? 그 이전에 이집트 문명(埃及文明)과의 연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집트-시리우스 문명은 시리우스인(西里乌斯人)들의 지구인 육체를 통한 진화에 그다지 기여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3명의 소규모 그룹이 처음에 구축을 했다고는 하나 지속적으로 이집트 문명을 통해 환생하는 시리우스인들이 있어 시리우스에서도 상당 부분 그 정보가 공유되었다. 그래서 이집트-시리우스 문명의 전개 과정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검토가 중앙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대안으로서 다른 문명을 구축해보고자 한 것이 수메르 문명이었다.
그 대안이란 유전 인자가 좀 더 우수한 몸을 사용하되 이집트-시리우스 문명에서의 실패 전철을 반복하지 않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성장 과정을 통해 진화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 우수한 유전 인자의 선별이 동이족에서 일부 이루어졌으므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이다.
- 동이족을 통한 수메르 문명은 의도했던 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며 발전했나?
상당 부분 효과를 거두었다. 동이족(東夷族)의 유전인자는 영성(靈性) 개발에 적합하여 많은 수의 수메르인들이 나름 결실을 보았다. 여기서 나름이라고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수메르 문명은 그 자체가 편안하고 고난이 없었다. 워낙 발달된 기술력과 문화를 꽃피우고 향유하였지만 인간의 진화는 번뇌에 있는 것이지 그냥 몸을 타고 나온다고 해서 저절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편안하고 편리한 문명 속에서는 영성을 진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지엽적인 결실만을 거두고 수메르 문명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동이족이 현대의 한국사에 있어서 상당한 고난을 겪은 부분과 관련 있기도 하다.
동이족이 한국사에서 고난을 겪은 이유가 이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동이족(東夷族)은 매우 우수한 형질(形質)을 지니고 있다. 이 우수한 영성 인자(靈性因子)를 극대치로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역사에 걸친 고난을 극복(克服)하여 넘기는 과정을 통해 DNA에 많은 자료를 축적(蓄積)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한 프로그램이 수난의 한국역사라 볼 수 있다.
한국의 역사에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나? 수메르 문명이 이집트 문명에 비해 차별화된 것이 있었다. 시리우스인(西里乌斯人)은 지구인보다 진화된 인종인데 ‘고난을 통해 진화(進化)한다’는 지혜를 전수해 줄 영적인 지도자 같은 분들은 없었나? 그토록 어렵게 문명을 구축하고, 건물을 짓고 유전 실험(遺傳實驗) 등등을 해서 결국 ‘편한 팔자는 진화하기 어렵다’는 한 문장의 결론을 얻었다는 사실이 이해(理解)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쉽게 지구인들이 하는 행동과 비교해 보도록 하자. 지구인(地球人)들도 지식으로는 잘 알고 있다. ‘사랑으로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 ‘건물을 지을 때는 혼(魂)을 불어 넣어야 오래 유지가 된다’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 있어 단번에 그렇게 하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알고 있는 사실을 적용하는 데에서 실패를 거듭하며 체득(體得)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리우스 역시 지구 문명 구축(文明構築) 실패기를 통해 그러한 진리를 습득(習得)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수메르 문명이 태동(胎動)되었다. 수메르 문명은 현 서양문명의 뿌리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美索不达迷亚文明)으로 계승되었다. 130년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考古學的發掘)을 통해 문자, 법률, 학교, 의회제도 등 수메르 문명을 창조한 고대 수메르 민족은 메소포타미아의 원주민(原住民)이 아닌 동방에서 온 이주민(移住民)이었으며 우리 한민족(韓民族)과 혈통이나 언어, 문화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수메르인(苏美尔人)들의 창세신화(創世神話)를 보면 자신들을 머리 뒷부분이 평평한 검은머리의 인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수메르어는 우리말 '은, 는, 이, 가"처럼 토씨를 사용하는 교착어(膠着語)이며 모음조화현상(母音調和現象)과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어순 등 동일한 문법체계(文法體系)를 가졌다.
수메르인(苏美尔人)이 남긴 점토판(粘土板)의 설형문자(쐐기문자)는 서양의 최초문자로 알려져 있다. 고든C.H. Gordon 박사는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고유한 문자인 설형문자(楔形文字)를 가지고 왔다."고 했으며 일본 학자 우에노 등은 수메르가 사용했던 설형문자는 복희씨(伏羲氏)가 창제했다는 팔괘부호(八卦符號)와 습사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수메르인(苏美尔人)들은 60진법, 중국과 우리나라의 60갑자 역시 60진법과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했으며 결혼 전에 함을 지는 풍습까지도 우리와 비슷하다. '수메르인들이 동방에서 왔다'는 크래머(Samuel N. Kramer)의 주장과 중앙아시아에서 왔다고 한 번즈(E.M. Burns)의 주장은 수메르의 원 고향인 환국(桓國)이 천산(天山)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세계 최초의 홍산 문명이 발견
장강문명(長江文明)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 학계의 혼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野蠻人)의 세계로 보았다. 그래서 오랑캐라 불렀다. 실제로 만주 일대(滿洲一帶)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黃河文明地域)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의외로 대규모 신석기 유적(新石器遺蹟)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요하문명(遼河文明)’이었다. 세계 최초의 문명이 발견된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기원전 7000~6500년)가 가장 이른 시기다. 이 일대에서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 뒤 발해연안 문명(渤海沿岸文明)은 내륙으로 퍼져 기원전 4500년경에는 홍산 문명(紅山文明)이 무르익어 초기형태(初期形態)의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모태 국가(母胎國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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