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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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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삼황오제와 십팔사략에 나오는 농업의 신 염제신농씨

[사진= 무협자료실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로 세 명의 황(皇)과 다섯 명의 제(帝)를 말한다. 이들 여덟 명의 제왕은 중국 문명의 시조로 추앙(推仰)되며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 추앙되었다. 현대의 역사학계에서는 삼황오제 신화(神話)가 후대에 창조되고 부풀려진 신화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판단(判斷)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에 입각(立脚)하여 국가 차원의 개입을 통해 삼황오제를 실존 인물로 격상(格上)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학계의 우려(憂慮)를 낳고 있다.

삼황오제 신화의 기본 틀이 되는 상고대(上古代) 시조 설화(說話)의 원형은 상나라 무렵부터 이어져 왔다. 그리고 춘추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가 각종 사상을 주창하고 제후들에게 유세하면서 삼황오제 신화가 창조되어 틀을 갖추어 나갔다. 오제 신화의 경우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유행한 이후에 5명의 제왕이 신화로서 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후대에 재창조된 신화이기 때문에 삼황과 오제의 구성원은 제자백가의 주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서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삼황오제 신화는 계속 재창조되었다.

삼황오제는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역사적 사실로 오랜 기간 추앙되었다. 특히 황제와 요(堯), 순(舜)은 중국의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 강유위(康有爲), 고힐강(顧頡剛) 등이 주도한 의고학파(疑古學派)의 연구를 통해 삼황오제 기록의 역사성이 부정되고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임이 판명(判明)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강화(强化)되면서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중국 역사의 기원을 상향조정(上向調整)하고 신화 속 제왕들의 연대를 비정하는 등 삼황오제를 비롯한 신화 속의 인물들을 실존인물(實存人物)이라 주장하는 각종 공정을 진행하고 있어 학계의 우려를 사고 있다.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
아래는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온 삼황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에서의 삼황은 태호 복희(伏羲), 염제 신농(神農), 황제 헌원(軒轅)을 말한다.

삼황은 맨 처음 세 명의 왕도 아니고 연속적(連續的)인 세 명의 왕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인류 문명에 필요한 획기적(劃期的)인 발명을 통해 후세에 큰 모범이 되었기에 “삼황”(三皇)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삼황의 첫 째인 복희는 태호(太昊 : 큰 하늘)라 불렸으며,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복희의 뒤를 이어 몇 명의 왕이 자리를 잇다가, 두 번째 삼황인 신농의 시대가 왔다. 염제(炎帝 : 불꽃 임금)라고도 불린 신농은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 그는 태양신이자 농업신(農業神)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염제 신농의 자리를 이은 것이 바로 황제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發明)했다. 글자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導入)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醫療術)을 시작한 것도 황제였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자 황제는 태산(泰山)에 행차하여 천지 사방의 신을 모두 불러 모았다. 황제는 큰 코끼리가 끄는 보물로 된 수레를 탔으며 황제의 위세(威勢)를 본 신들은 그의 위력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천지 사방의 신 중, 황제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치우(蚩尤)를 따라 반란을 꾀했다. 치우는 눈이 넷, 손이 여섯이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자신의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매우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제는 치우(蚩尤)의 모반(謀反)을 알자마자 군사를 모아 판천(阪泉)과 탁록(涿鹿)에서 치우를 격파하였다. 치우(蚩尤)는 부하인 풍백(風伯), 우사(雨師)와 함께 저항(抵抗)했으나 결국 황제에게 항복했다.

치우의 난을 평정(平定)한 황제는 이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백 살 되던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가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懇請)했다. 많은 사람이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기원(祈願)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昇天)하였고 이후 황제의 다섯 자손(“五帝”)이 세상을 다스렸다.

오제(五帝)
오제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설이 없으며 주로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 “황왕대기(皇王大紀)”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 “세본(世本)”, “대대례(大戴禮)”, “사기” ‘오제본기’
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신농),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顓頊) : “예기(禮記)” ‘월령(月令)’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嚳), 제지(帝摯), 제요(帝堯) : “도장(道藏)” ‘동신부(同紳部)·보록류(譜錄類)·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武帝)의 말
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帝王世紀)”, “십팔사략(十八史略)”

십팔사략에 나온 오제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少昊) 금천(金天), 전욱(顓頊) 고양(高陽), 제곡(帝嚳) 고신(高辛), 제요(帝堯) 도당(陶唐), 제순(帝舜) 유우(有虞)의 다섯 명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떼어 '성군(聖君)'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호 금천(少昊 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왕위(王位)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봉황(鳳凰)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

소호의 뒤를 이은 것은 전욱 고양(顓頊 高陽)으로, 전욱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다. 아직 반고의 천지 창조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엄격(嚴格)하지 않았다. 전욱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區別)을 확실히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主從關係),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

전욱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호의 아들인 제곡 고신(帝嚳高辛)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音樂)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

삼황오제의 동이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신화 속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이들을 동이(東夷)나 한민족으로 간주하는 주장(主張)이 있다. 삼황오제가 동이였다는 중국의 사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동이(東夷)라는 존재를 모두 한민족으로 보는 역사관(歷史觀)이 존재한다. 또한 20세기 이후에 쓰여진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같은 일부 서적에는 삼황오제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를 동이나 한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한민족이 속해 있는 동이는 한나라 이후의 동이(東夷)이기 때문에 진나라 이전의 동이에 해당하는 삼황오제의 동이 여부와 한민족(韓民族)은 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같은 서적은 위서로 판별(判別)되어 역사적 가치가 없어 삼황오제 동이설(東夷說)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한 일부 기록에서 신라(新羅) 및 가야(伽倻)의 왕족이 소호 금천씨를 선조로 기록한 것이 나타나며 고구려(高句麗) 왕족 역시 제곡 고신씨 또는 전욱 고양씨를 조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술은 왕족의 혈통을 신성시(神聖視)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일부 유사성(類似性)을 근거로 하여 시조(始祖)로 삼는 것으로 해석되므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

신농(神農)은 중국 고대 삼황(三皇)중의 한사람으로 흔히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라고 불린다. 본명은 강석년(姜石年)이며 별칭으로는 열산씨(烈山氏), 염제주양씨(炎帝朱襄氏)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농씨는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을 세웠고 나라는 그의 자손들로 이어져 8대 520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다. 

신농씨는 황제 헌원(軒轅) 이전에 한족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백초(百草)의 풀을 직접 맛보아 해독(解毒)을 하였으며 오늘날 한의학의 창시자(創始者)로 불린다. 한의학의 최초의 저서로 유명한 '신농본초경'을 저술하였다. 염제신농씨는 5300년 전 중국 섬서성 기산현을 흐르는 강, 강수(姜水)지역에서 자라 지명을 따서 강씨(姜氏)를 득성(得成)하게 되었다고 한다. 치우(蚩尤)천왕과 춘추시대 제나라의 왕인 강태공(姜太公)도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염제신농씨는 세계 강씨(姜氏)의 시조이다.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는 황제 헌원과 더불어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숭배(崇拜)되고 있으며 베트남 민족의 시조이기도 하다. 강씨웅왕 왕조가 베트남을 2,000년간 통치하였다.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손으로는 중국의 천수강씨(天水姜氏), 한국의 진주강씨(晋州姜氏), 중국 한족(漢族) 고씨(高), 한국 및 중국 범양노씨(盧), 여(呂), 오(吳), 중국 한족(漢族) 허씨(許), 평해구씨(丘,邱), 강(强), 온양 방씨(方), 중국 제양당 정씨(丁), 주(朱), 장(章), 사(謝), 제(齊), 습(習), 악(岳), 시(柴), 하(賀), 경(景), 신(申), 향(向), 가(柯), 뢰(賴), 상(尙), 중국 돈황 홍씨(洪; 남양홍씨 당홍계),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 등 통합 247여개 성씨가 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 이후로 농신(農神)으로서의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에 대한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선농단을 세워 매년 임금이 직접 밭을 간 후 제사(祭祀)를 지내기도 하였다.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베트남, 대만 등에서 지금도 신농(神農)의 은덕을 기리며 제향(祭享)하고 있다.

5000여 년 전에 신농씨(神农氏)는 강(姜)씨 성을 가진 부락의 한 수령이었다. 신농씨가 생활하던 년대에는 두령도 보통 씨족성원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 했다. 신농씨(神農氏)는 중국 최초의 농기구인 뇌사(耒耜)를 발명(發明)해 농업의 발전을 크게 추진했다. 그가 농업에 대해 큰 기여를 하였기에 사람들은 신농씨라고 존칭(尊稱)해 불렀다.

신농씨가 처한 시대는 부계씨족공사(父系氏族公社)초기여서 착취와 압박이 없고 사람들이 평등하게 우애(友愛)를 나누며 살았다. 사기의 기재에 의하면 신농씨(神農氏)가 즉위한 시기에 남자들은 밭일을 하고 여자들은 집에서 천을 짰으며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감옥(監獄)과 형벌이 필요 되지 않았고 천하를 호령(號令)하는 왕도 군대도 경찰도 필요 없었다.

신농씨는 중국 최조의 의학전문가(醫學專門家)이다. 전한데 의하면 신농씨는 백성들이 병마(病魔)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불안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오곡(五穀)이 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안후 100가지 풀의 열매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할 수 없겠는가고 생각했다. 신농씨는 산속을 헤매면서 여러 가지 초약을 채집(採集)했는데 초약의 특성을 알기 위해 신농씨는 직접 초약(草藥)을 먹어보았다. 신농씨는 경상적으로 중독(中毒) 되였는데 지어 하루에 70여 번이나 중독된 적도 있었다. 전한데 의하면 신농씨는 “신농본초경(神农本草经)”을 편찬했는데 여기엔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처방전(處方箋)이 기재되어 있다.

신농씨는 또한 천문력산(天文历算)분야에서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복희씨(伏羲氏)가 발명한 팔괘(八卦)에 기초해 64괘를 내놓았는데 이름을 “귀장(归藏)”이라고 달았다. 64괘로 사건을 기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점을 칠 수도 있었다. 이밖에도 신농씨(神農氏)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 되는 물건을 만들 줄 모르는 반면에 필요 되지 않은 물건들이 많이 생산된다. 생활에 불편(不便)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고 사람들더러 한곳에 모여 물건(物件)을 팔고 사게 했다. 하여 중국에서 최초의 장마당이 생겨났다.

사람들에게 노동(勞動) 후의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신농씨는 5현금(五弦琴)을 만들었다. 오현금은 새소리와 같은 미묘(美妙)한 음을 낼 수 있었다. 후에 그는 아들에게 “종(钟)”이라 이름을 지은 악기(樂器)를 만들어주었고 많은 가곡을 창작(創作)했다. 신농씨가 만들어낸 악기는 후세에 전해져 내려왔다.

신농씨(神農氏)는 강수(지금의 보계경내)에서 태여 나서 죽은 후 “다향지미(茶乡之尾)에 묻혔다. 다향지미는 지금의 호남성 주주시 염릉현 록원진(湖南省株洲市炎陵县鹿原镇)이다. 그는 염제(炎帝)라고 불리었는데 존호(尊號)는 신농이다. 후세사람들이 그를 중국농업(中國農業)의 신이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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