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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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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를 방문한 진귀한 견문을 기록한 대작 “열하일기”

[사진 = xinchaovietnam]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조 1780년(정조 4)에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外交使節團)에 참가, 중국을 다녀오면서 북경에서 230km 떨어진 만리장성(萬里長城) 너머 ‘열하(熱河)’에서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目擊)하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여행기(旅行記)입니다.

박지원(朴趾源)을 포함한 일행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외교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하에서 보고 들은 진귀한 견문(見聞)을 자신의 여행기에 집중적으로 서술(敍述)했을 뿐 아니라 그 제목까지도 특별히 '열하일기(熱河日記)'라 지었습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이 44세 때인 1780년(정조 4년)에 삼종형(8촌 형)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사절로 연경에 갈 때 따라가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입니다.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이 소장하여 오다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및 서화가(書畵家)들이 남긴 서적 서화골동품(書畫骨董品) 등 문화재급 유품 3만여 점을 1986년 12월 22일 기증한 자료 중에 하나인데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 친필본(親筆本)이 소장(所藏)되어 있습니다.

열하(熱河)는 중국 청나라의 지금의 청더(承德)이며 최종 목적지는 열하행궁(熱河行宮) 또는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불리는 건륭제(乾隆帝)의 여름 별궁이었는데 박지원(朴趾源)이 조선 정조 때에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입니다.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본(正本)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金澤榮)이 처음 간행하였는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친필본이 단국대학교 ‘연민문고(淵民文庫)“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조선이 빈곤(貧困)한 주요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수단(流通手段)의 미흡함, 도로망 건설의 소홀(疎忽)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指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연암은 조선의 수레가 바퀴가 거의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은 궤도(軌道)에 들지도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 비판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신랄(辛辣)하게 비판합니다. 또한 연암은 당시 조선에서 수입(收入)하는 청의 털모자 수입에 대해서 조선의 은을 낭비(浪費)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고전소설 ’호질(虎叱; 호랑이가 꾸짖다)‘을 써서 지배계급인 양반들의 위선(僞善)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비판하는 풍자(諷刺)를 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열하일기‘의 필사본은 아홉 종(種)입니다. 당시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土俗的)인 속담을 섞어 쓰거나 청나라 여행에 나선 사절들을 돕는 하인들이 한 농담(弄談)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습니다.

당대에 '점잖은 글'이라고 일상에서 상투적(常套的)으로 쓰던 판에 박힌 것 같은 글과는 전혀 다른 문체(文體)입니다.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의 문체를 쓰기도 하고 거기다 특유의 해학(諧謔)과 풍자를 가미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誘發)시켰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苦悶)이 ’열하일기‘에는 절실히 녹아 있었던 점이 지식인들에게 어필(appeal)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당시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뿐 아니라 문체나 그 내용의 파격성(破格性)으로 ’열하일기‘는 당대에 비난(非難)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조가 패관잡기, 즉 패관은 패관문학(稗官文學)이라고 하여 길거리 이야기를 소재로 한 글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문학의 갈래로 존중(尊重)받지만 조선시대 지배계급(支配階級) 지식인들은 그들이 보기에 허황된 이야기인 소설을 길거리, 저잣거리 이야기, 잡스러운 이야기라고 비판한 것을 불온시(不穩視)하며 부드럽고 올바르게 고친 글로 돌아갈 것을 촉구(促求)하는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서곡을 올린 중심에도 ’열하일기‘가 있었습니다. 정조(正祖)는 직접 하교까지 내려서 박지원의 문장을 저속(低俗)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조는 문체가 나빠진 까닭이 박지원의 ’열하일기‘탓이라며 박지원에게 반성문(反省文)을 쓰게 하였습니다.

”요즘 문풍(文風)이 이따위로 된 것은 박 아무개의 죄가 아닌 것이 없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과인도 벌써 익숙하게 읽어봤는데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것인가?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하더니 문체가 이 따위로 변했다. 마땅히 사고를 친 자가 해결(解決)해야 할 것이다. 속히 한 가지 순정(純正)한 글을 지어 곧바로 올려 보내어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한다면 비록 남행(南行)의 글이라 한들 어찌 아까울 것이 있으랴?“

정조의 이 같은 호령에 박지원은 변명(辨明)이라고 격식을 잔뜩 갖춘 속죄문(贖罪文)을 써서 정조에게 바쳤는데 이 글이 또 보기 드문 명문(名文)이라서 정조가 또 웃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세상을 떠난 지 약 80년이 지난 뒤인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다시 주목(注目)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열하일기‘는 학술서적(學術書籍)으로서뿐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특히 이 여행기는 조선왕조(朝鮮王朝) 일대를 통하여 수많은 ‘연행문학(북경 사신 및 그 일행이 사신행을 하면서 지은 문학)’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점하는 책입니다. 실학의 대표학자로 박지원(朴趾源)은 중국의 문물을 유심히 관찰하며 앞선 기술을 배우고 선진 제도를 본받으려 하였습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정조 4년(1780) 연암 박지원이 건륭제(乾隆帝)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입니다. 사실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公式的)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습니다. 그럼에도 박지원이 사절단(使節團)으로 갈 수 있던 것은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 군관(子弟軍官; 일종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절단에 합류(合流)할 수 있었습니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습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습니다. 실제로 가보면 상당히 크고 아름답습니다.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이 웅장하다면 피서 산장 역시 중국 스케일이기 때문에 크긴 한데 나름 정원과 나무에 아기자기한 면이 있고 궁전(宮殿)보다는 이화원(頥和園)의 느낌에 가깝습니다. 현대에도 현지 중국인들이 여름에 많이 와서 노닐고 있습니다. 하북성(河北省) 북부의 지급시인 청더(承德)에 남아있는 그 이궁과 티베트 불교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조선 사절단(使節團)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具色)만 맞추다 돌아가려 했지만 결국 열하까지 가야 했고 일정이 촉박(促迫)해 상당히 하드코어한 여행을 하게 됩니다. 이때의 고생은 박지원의 산문(散文)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생생하게 실려 있습니다.

박지원이 직접 집필한 초고본(草稿本)은 행계잡록(杏溪雜錄)을 비롯한 문집으로 되어 있으며 이 초고본은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필사본(筆寫本)과 근대 이후의 인쇄본 등이 전국에 흩어져 있습니다. ‘열하일기’는 생전에 출간(出刊)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1932년에야 연암집으로 활자화 되었습니다. 초고본부터 문체반정(文體反正)과 같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로 너무 적나라한 표현 등은 삭제(削除)되거나 표현을 달리하였고 지동설(地動說)이나 천주교(天主敎)에 관한 언급은 문단 째 삭제되었다가 나중에 나온 필사본에는 다시 복원(復元)되기도 하고 필사가(筆寫家)에 따라 원문에 없는 명에 대한 극존칭을 더하거나 문체를 제각각으로 바꾸는 등 정본(正本)이 없어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현대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해학적(諧謔的)이고 재미있는 묘사가 많습니다. 야간에 숙소에서 나가는 게 금지(禁止)된 상황에서 하인에게 "나 찾으면 뒷간 갔다고 말해라!!"고 시킨 뒤에 밤새도록 놀다 새벽에야 돌아오는 장면(場面; 성경잡지 7월 11일), 비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벌어진 도박판을 싹 쓸어버린 일 타짜(老千; 도강록 7월 2일), 사절단(使節團)이 아래에 언급할 판첸 라마의 접견문제(接見問題)로 고심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일이 꼬이면 유배(流配)가겠는데... 잘 됐다, 귀양 가면 중국 여기저기 구경하겠네!' 같은 생각을 하는 등(태학유관록 8월 10일), 여러모로 웃기는 구절이 많습니다.

길을 가다가 본 가게들의 간판문구(看板文句)가 마음에 들어서 친분(親分)을 쌓은 다른 상인들의 휘호(徽號)에 그 문구를 써줬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박지원이 본 문구는 기상새설(欺霜賽雪, 직역하면 '서리와도 같고 눈보다 더 희다')로, 박지원은 이를 보고 '마음이 깨끗하여 서리 같고 눈보다 더 희다'라고 해석(解釋)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구의 진짜 뜻은 '눈처럼 하얀 국수'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온 문인(文人)이 그럴듯한 글을 하나 써준다기에 기대(期待)를 했는데 정작 써준 글이라는 게 국수집 간판이었으니 청나라 상인(商人)들이 이상하게 여긴 것도 당연합니다.

또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졸다 깨고는 그 사이 하인이 낙타(駱駝)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음번에 신기(神奇)한 게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나를 깨우라"고 채근 징징대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성경잡지 7월 12일), 심지어는 박지원이 어느 주점(酒店)에 들어갔다가, 현대로 치면 조폭(組暴)들이 자주 드나드는 엄한 곳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 채고, 처음 나온 작은 술잔을 치워 버리곤 큰 그릇에 담긴 독주(毒酒)를 그대로 원샷하는 호기(豪氣)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주점에 있던 사내들이 "어이쿠 어르신!!" 하며 술을 대접하고 설설 기는 장면도 있다.(태학유관록 8월 11일) 원문에서는 "술집에 몽골인과 회회인(위구르계로 추정) 패거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오랑캐들의 모습이 더럽고 사나워 주점에 올라온 것을 후회(後悔)했으나, 이미 술을 시킨 뒤라 그냥 앉았다"라고 나온다. 중원판 이태원동 박지원 항목에 나와 있는 초상화(肖像畵)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박지원은 거구에 부리부리한 눈 등으로 딱 봐도 비범(非凡)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들이 일삼던 험한 음주풍토(飮酒風土)가 북방 유목민족들에게는 사내의 호방(豪放)함과 건강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으니까 설설 기는 게 이해될 법합니다. 게다가 하필 당시 조선의 임금부터 맥주 특성에 증류식 소주(蒸溜式燒酒)를 가득 붓고 원샷하라고 강요해댄 걸로 악명 높은 정조(正祖)였으니. 물론 박지원도 속으론 꽤 겁을 냈다고 솔직하게 토로합니다. 중국술에 대한 체험담(體驗談)도 있습니다. 독한 것 같지만 마시고 일어서면 모두 깬다고..

박지원의 실학사상(實學思想)이 잘 드러나 있는 명작이기도 합니다. 당시 조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벌레가 우글거릴 수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청나라의 경우 일반 백성도 벽돌로 2층 집을 지어 튼튼해서 문만 닫으면 금고(金庫)가 되어 도둑도 방지한다는 감탄(感歎)이 있습니다. 당시 박지원이 받았을 충격(衝擊)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청나라의 좋은 점을 들면서 아직도 상공업적(商工業的)으로 낙후된 조선의 모습을 비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고대의 우수한 기술도 이어받지 못하여 결함투성이로 전락(轉落)한 조선 후기 온돌의 현실을 지적하고, 이로 인한 낭비와 비합리성(非合理性)을 대차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실용적 학문과 기술의 연구에 소홀(疏忽)했던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직도 자신들을 명나라의 후계로 자처하며 실학을 멸시(蔑視)하고 북벌론(北伐論)이라는 허상에 빠져 있는 당시 조선 사대부를 비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내정사나 이제묘기(夷齊廟記) 등에서 이러한 비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선뿐만 아니라 한족여성(漢族女性)들의 전족(纏足) 같은 불합리한 풍습과, 청나라에 대한 아부로 점철(點綴)된 한족 지식인들의 현실 역시 풍자적(諷刺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호질(虎叱)’에서 범과 그에 아첨하는 선비 북곽(北郭)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조선의 소중화(小中華)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화주의(中華主義)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의미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오랑캐이며 되려 중화에 비판적(批判的)인 내용인 것입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한족보다 만주족(滿洲族)에 호의적인 시선이 깔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기(詐欺)나 뒤통수를 치는 건 대부분 한족이라든가, 그 외에 청나라인들 조차도 되놈이란 단어를 알고 있었다는 장면도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이 스스로를 "'도이노음'이요(擣伊鹵音爾么)"라고 소개하는데, 이건 "되놈"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한족 관료들과 만주족 정부 인물들에 대한 알력(軋轢)도 다루고 있는데 한족 대신들이 만주족 관료(滿洲族官僚)들을 욕하는 모습도 상세히 그려놓았습니다.

박지원의 코끼리 구경이나 마술 관람 등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데이빗 커퍼필드 귀싸대기를 날릴 마술들 20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티베트의 법황(판첸 라마)을 만난 이야기까지 실려 있습니다. 당시 건륭제(乾隆帝)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조선 사절단(朝鮮使節團)을 기쁘게 맞이한 건륭제는 조선 사절단에게 법황(法皇)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법황은 달라이 라마 바로 아래 지위인 판첸 라마로 만주어로는 판천 어르더니(班禪 額爾德尼, pancen erdeni)라고 하였습니다. 작중에서는 주로 '활불(活佛, 살아있는 부처)'이라고 표현됩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활불(活佛)은 조선 사절단을 만나보고 불상(佛像) 등 여러 선물을 주었는데, 사신(문관)들은 더럽다고 역관(譯官)에게 줍니다. 그러나 역관들도 역시 이것을 쓸 수 없다며, 팔아서 은 70냥을 만들어 마부(馬夫)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불상 개불쌍. 그러나 마부들조차도 '이것으론 술 한 잔 사 마실 수 없다'면서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조선의 오래된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이 어떤 식으로 고착화(固着化)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처음엔 활불과의 면담(面談) 자체도 어떻게 천한 중놈과 만날 수 있냐며 고집을 피우다가 "그러다가 황상께서 열 받으시면 큰일 난다"는 판단에 형식적(形式的)으로 만난 것입니다. 또한 황제(皇帝) 및 법황에게 절을 해야 할 순서가 오자, 조선 사절단은 숭유억불(崇儒抑佛)에 대해 말하면서 법황에게 절을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여기에 노발대발한 건륭제는 수도(首都)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조선 사절단(朝鮮使節團)에게 아무런 혜택(惠澤)도 주지 않았습니다. 눈치껏 좀 행동하지 말입니다.

박지원조차도 여기엔 "우리나라에선 원래 선비로서 불교(佛敎)와 한번 인연이 있고 보면 평생 비웃음을 사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이 장하긴 하지." 그런데 너 활불(活佛)이 황제한테 이르면 어쩔래? 라고 했습니다. 조선의 숭유억불사상(崇儒抑佛思想)은 이 정도로 심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막연(漠然)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하자면, 여기서 판첸 라마에게 절을 했다는 것이 조선에 알려지면 유생들 사이에서 '얼레리꼴레리~ 아무개는~ 중놈에게~ 절했대요~!' 라는 소문이 나면서 탄핵(彈劾)당해 벼슬길이 끊어지고 심하면 파직(罷職)당하고 유생 사회에서 조롱(嘲弄)거리가 되어 매장(埋葬)당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치가 없어서 건륭제(乾隆帝) 비위를 거스른 것이 아니라 조선 내에서의 입장(立場)과 건륭제에 대한 입장이 충돌(衝突)하는 상황에서 양쪽 모두 거스르지 않기 위해, 즉 건륭제가 노골적(露骨的)으로 화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교와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눈치를 본 것입니다.

법황이 선물(膳物)한 불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은데, 조선에 그대로 가져가면 유생(儒生)들에게 비난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청나라 황제가 존대(尊待)하는 자가 준 선물을 함부로 다루면 황제가 어떻게 화를 낼지 모르니 사절단이 알아서 몰래 처리한 모양입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직접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 전통적(傳統的)으로 쓰던 방법은, 조선 땅도 아니요 청나라 땅도 아닌 국경 압록강(鴨綠江)에다가 몰래몰래 띄워서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성록(日省錄)에는 정조와 박명원(朴明源)이 사행길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황제가 줬다는 불상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정조가 불상의 처분(處分)에 대해 묻자, 박명원은 "평안북도 영변의 모 절에 봉안(奉安)했다"고 답합니다. 이 불상이 판첸 라마가 선물로 준 그 불상인지, 아니면 판첸 라마의 것과는 별도로 건륭제가 따로 하사한 불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박지원은 여기서 중국 인사들과 만나 며칠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필담(筆談)으로 음악, 예절, 역사, 문헌고증, 시문,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필담을 교환(交換)합니다. 자세한 필담의 내용은 북한 학자 리상호(李商鎬)가 번역(飜譯)한 열하일기나, 김형조 선생께서 번역한 돌베개 판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참고(參考)할 것입니다.

박지원의 작품 중 호질이나 허생전은 원래 열하일기에 실려 있는 작품입니다. 각각 관내정사(關內程史)와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습니다. 박지원은 필화(그러니까 검열)를 피하기 위해 호질의 경우는 '이거 내가 쓴 거 아니고 중국 여관 벽에 있던 거 퍼옴 베껴옴'이라고 둘러대고, 허생전(許生傳) 같은 경우는 윤영이라는 가상의 이야기꾼이 해주었던 변승업(卞承業) 이야기의 딸림 이야기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박지원의 창작물(創作物)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정설(正說)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현대와 많이 다른 가치관(價値觀)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지나가던 몽골 사신단 하인을 조선 마부가 갑자기 급습(急襲)해서 가격(加擊)을 하고 흙을 먹인다거나. 이유는 '심심해서'입니다. 그래 놓고 조선 측이나 몽골 측이나 서로 웃으며 하인이야 개 취급만도 못했으니 잘만 제 갈 길 갑니다. 우리나라 대외관계(對外關係)가 의외로 개방적인 면이 있었던 듯합니다. 중국인들이 길거리에 잔뜩 늘어서서 '조선에서 왔다구요? 청심환(淸心丸) 하나만 주셈'이라고 하도 졸라대서 조선 사절단은 가짜 청심환을 잔뜩 준비해 갔다는 장면이 있습니다. 진짜는 높으신 분들 용 뇌물(賂物)입니다.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박지원은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골동품(骨董品)에 관해 필담을 하면서 나중에 덧붙인 말에 의하면, '대개 중국 골동품은 그 연대(年代)와 시기를 아주 교묘(巧妙)하게 속이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물론이고 좀 안다 하는 사람도 사기(詐欺)를 당해 비싼 값을 주고 사기 십상이다'라고 하며 리스트를 적어주었습니다. 물론 이 리스트도 열하일기(熱河日記)에 그대로 수록(蒐錄)되어 있습니다. 과연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위용은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번화가인 연경의 유리창(琉璃廠)에 대한 묘사도 나옵니다. 유리창은 단순한 번화가가 아니라 세계 각지의 서적과 그림, 골동품들이 돌아다니는 문화의 거리여서 청나라를 방문하는 사절단이 반드시 방문(訪問)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현대에도 이 유리창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배청 사상(排淸思想)이 강했던 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연호 대신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로 날짜를 표기한 것입니다. 명(明)나라에 매달려있던 많은 유생들이 박지원을 비판(批判)하였으나 박지원은 이미 망한 지가 100년도 넘은 명나라 연호에 집착(執着)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極致)라며 이들의 비판을 쿨하게 씹었습니다.

단 박지원의 말처럼 조선은 수레도 못 끌고 바퀴도 못 만들었다는 국가로 오해(誤解)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조선은 엄연히 수레를 굴렸고 함경도(咸鏡道)에는 수레이용이 활발했습니다. 당장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만 뒤져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실학자(實學者)들이 조선의 문제점을 비판할 적에 과장해서 말하곤 합니다.

한편 박지원과 친분을 쌓고 열하일기 안에서도 필담이 상세하게 기록된 인물 중 가장 거물급 인사는, 70세의 전 대리시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이란 인물이었습니다. 짧은 기간임에도 박지원과 매우 두터운 교분(交分)을 나눠 열하일기 곳곳에 박지원을 아끼고 후하게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작별(作別)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박지원에 따르면 북경에 돌아와 당대 중국 명사들에게 묻자 이 사람을 백거이(白居易)에 비하고 있다더라고 전할 정도로 거물급 명사 중의 명사(名士)였습니다.

박지원이 열하에서 돌아온 바로 이듬해인 1781년에 건륭제의 문자옥(文字狱)에 걸려들어 교수형(絞首刑)을 당했습니다. 사실 열하일기 속에 기록된 윤가전(尹嘉銓)은 박식하면서도 다정하고 소탈한 위인(偉人)이긴 한데, 어딘가 주책 스럽고 공명심(功名心)을 내세우는 면모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일까, 이듬해에 지나치게 오버한 나머지 건륭제(乾隆帝)의 분노를 샀으니, 자기 아버지에게 시호를 내리고 문묘(文廟)에 올려달라고 상소한 것입니다. 특히 건륭이 이 문제로 극대노한 까닭은 청조가 들어선지 150년 동안 만주 - 한족 이중 정치 체제 속에서 문묘에 오른 자가 전무(全無)했는데 자식이 직접 자기 아버지를 문묘에 추증(追贈)해 달라 요구한 것이 매우 건방지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윤가전(尹嘉銓)의 상소문(上疏文)에서 윤가전이 자기 자신을 고희(古稀; 칠십 세)로 지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황제 본인이 고희를 맞아 "내가 고희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윤가전(尹嘉銓) 또한 건방지게 황제와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 X끼가 어디서 친구 먹으려 들어 하고 괘씸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윤가전(尹嘉銓)은 건륭과 동갑의 나이로 무탈하게 고희(古稀)에 이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인지 황제가 본인을 아낀다거나 동갑내기 친구로 생각한다고 이방인(異邦人)인 조선인 박지원에게까지 자랑을 내비추기도 했고 박지원에게 적어준 시의 말미에 '윤가전 70세'라고 서명(署名)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꼬투리 잡힐 줄은 몰랐을 테니 윤가전(尹嘉銓)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습니다. 그래도 딴에는 한때 아꼈던 사람이라고 건륭이 막판에 형을 낮춰 그 가족은 방면해주고 처벌 수위는 능지형(陵遲刑)에서 교형으로 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종래의 연행록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겠습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쓴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책은 연암 박지원의 글이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문장 자체에 대한 분석을 담았습니다. 연암의 글쓰기 정신과 전략을 탐구하는 것은 물론 연암 사상과 그 문학 근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다산 정약용(丁若鏞)과 더불어 우리 옛 문인들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거론되는 인물입니다. 북학사상가(北學思想家)이자 문화이론에 대한 훌륭한 학자로서 학계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 문장가(文章家)로서의 연암에 대해서는 충분(充分)히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20세기에 실학이 강조(强調)되면서 연암의 실학가로서의 면모만 부각(浮刻)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연암의 글쓰기는 숨김의 미학(美學)을 지향합니다. ‘호질’ 같이 주제를 직설적(直說的)으로 드러내는 작품도 있지만 연암의 산문에는 대개 뭔가가 감춰져 있습니다. 문학 속에 철학(哲學)과 미학을 담아 논의(論議)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는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의를 깨닫는 순간 글이 굉장히 매력적(魅力的)으로 다가옵니다. 또 독자에게 위로나 공감(共感)이 아니라 자각과 각성을 주어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준다는 것도 큰 매력입니다.

비판 받는 방식을 취한 게 아니라 비판(批判) 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 기존의 관습을 유지하려는 세력(勢力)과 새롭게 나아가려는 세력은 늘 있습니다. 당시에도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사대부(士大夫)들과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취하려는 지식인 간의 대립(對立)이 있었습니다. 물론 세력은 전자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연암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은 기존 사대부들에게는 위험하고 배척(排斥)되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정조가 문체반정 때 ‘열하일기’를 지목하면서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張本人)이며 도둑 중의 우두머리라고 할 정도(程度)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만큼 ‘열하일기’의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試圖)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연암은 지도자(指導者)였고 환희와 찬탄의 대상이었습니다. 또 보수적인 학자들 중에도 간혹 연암의 문장을 열린 시선으로 보고 인정(認定)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워서 대체로 무시(無視)하긴 했습니다.

보통 '생태'라는 말을 자연과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자연과 생태(生態)는 많이 다릅니다. 생태 글쓰기란 단순히 자연을 이야기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세계관 아래 상생과 공존(共存)의 생각을 보여주는 글쓰기입니다. 그 생각의 바탕에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고 교감하면서 얻은 통찰력(洞察力)이 자리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삶이 많이 편리(便利)해지고 물질적으로 풍족(豐足)해졌지만 과연 행복한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남과의 비교(比較)를 통해 행복감이나 만족감을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빈부차이(貧富差異)가 워낙 크고,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교를 하는 순간 상대적 박탈감(剝奪感)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면서 황폐(荒廢)해진 우리 마음이 오늘날의 글쓰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봐집니다. 폭력적인 글쓰기, 건전한 비판이 아닌 감정적인 비방(誹謗)만 하는 글쓰기, 흑백논리에 빠진 글쓰기, 진실은 없고 무조건 이길 때까지 상대방을 물어뜯는 글쓰기가 횡행(橫行)합니다. 저는 생태 글쓰기는 이런 폐단을 치유할 좋은 대안(對案)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태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나를 둘러싼 생명들을 꼼꼼히 관찰(觀察)하고 교감하는 태도입니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自然)은 자세히 관찰하면 배울 것이 많습니다. 연암의 생각을 빌려 말하자면 ‘자연은 창조(創造)와 변화의 공간이자 생의(生意)의 장’입니다. 생의는 각자 살아가는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연암은 쓸모없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의미 있고 가치(價値) 있을 수 있다고 주장(主張)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물이나 자연에서 얻은 깨달음이 인간을 변화(變化)시킨다고 했습니다.

물론 자연에 국한(局限)할 필요는 없습니다. 연암이 살던 시대 연암을 둘러싼 존재는 대부분 자연 사물(事物)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문명의 도구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나를 둘러싼 제반 환경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관찰(觀察)해서 의미를 찾고 또 그것과 교감(交感)해서 얻은 깨달음을 우리 삶을 고치고 발전(發展)하는 데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생태(生態) 글쓰기입니다.

과거와 지금 환경(環境)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훌륭한 인문학자들이 연암을 독보적인 문장가, 최고의 문장가로 꼽기를 주저(躊躇)하지 않습니다. 연암이 글의 대상이나 주제를 ‘지금 여기’에서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암은 특정한 모범(模範)이나 기준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밟고 있는 시공간(視空間)에서 삶과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그 정신이 오늘날에도 그의 주장을 유효(有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진실성입니다. 연암은 자기 생각을 솔직(率直)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자고 주장(主張)했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문인들이 꼭 진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진실(質實)함에 대해 자각하지도 못했고 진실한 글쓰기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과거의 훌륭한 고전들을 모방(模倣)하고 따라가자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연암은 고전(古典)이라고 불리는 작품 역시 쓰여진 당시의 삶과 생각을 다루고 있고 현재의 삶과 현실(現實)을 진실하게 드러내면 그게 훗날에 고전(古典)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연암정신(燕巖精神)이 그의 글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글쓰기의 본질(本質)은 진실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글의 기교가 뛰어나도 진실함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연암은 학자 이전에 진정한 문장가(文章家)였습니다. 옛 문인들은 지금의 기준(基準)으로 보면 대부분 순수 문장가라기보다는 학자(學者)에 가까웠습니다. 반면 연암은 순수한 문장가로서 글쓰기 자체를 전략적(戰略的)으로 인식했고 그 전략 하나하나가 오늘날의 글쓰기에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생각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글의 형식(形式)은 몇 주면 배울 수 있지만 글의 깊이나 수준은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습니다. 남들과 똑같은 것만 경험(經驗)하고 똑같은 생각만 쓰면 아무리 형식이 좋은들 진부(陳腐)한 글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다양한 경험(經驗)을 해야 열립니다. 가장 좋은 건 여행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게 어렵다면 독서(讀書)를 많이 해야 합니다. 독서는 직접 가보지 못한 세계를 간접적(間接的)으로 보여주는 좋은 경험이 됩니다.


그리고 같은 경험(經驗)을 하더라도 다르게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르게 본다는 건 대상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교감(交感)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몇 년 동안 같은 글만 쓰라고 했을 때 그냥 알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쓸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관심을 갖고 교감(交感)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쓸 말이 많습니다. 결국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내 주변의 흔하고 사소한 것들을 꼼꼼하게 관찰(觀察)하고 교감에 이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을 읽고 글쓰기 방법에 대해 관심(關心)을 갖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으로 연암(燕巖)을 통해 글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글의 책임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계기(契機)를 얻으셨으면 합니다. 단순히 연암은 어떤 문장가였는가 하는 지식의 발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연암이 했던 고민(苦悶)을 지금 여기에서 나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암(燕巖)은 위대한 문장가 사마천(司馬遷)을 본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과거를 본받는 것 보다 지금 현실을 고민하고 개선(改善)하려는 노력의 뜻이라고 보아집니다.

글쓰기는 굉장히 즐겁고도 괴로운 작업입니다.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안의 문제의식(問題意識)이 한없이 가벼워서는 곤란합니다. 우리 삶에는 공감과 치유(治癒)를 주는 글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자각과 각성(覺醒)을 주는 글도 꼭 필요합니다. 읽을 때 낯설 수도 있고 거북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글들이 나를 성장하게 하고 남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듭니다. 연암의 글은 그런 자각과 각성(覺醒)을 주는 글입니다. 글 쓰는 분들이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의 글 짓는 법을 다시 학습하고 좀 더 멋진 글을 쓰길 바랍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유용한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 전략(戰略)은 수완 있는 기교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탁월(卓越)한 문장과 번득이는 재치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을 수 있겠지만 그의 문장 자체에 대한 분석은 내놓기 힘듭니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글 짓는 법’은 연암의 글쓰기에 대한 책으로 글쓰기 정신과 전략을 탐구(探究)함으로써 연암사상과 문학의 근원(根源)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연암의 글쓰기는 지금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의미 있으며 글쓰기 작법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연암의 자연사물에 대한 접근태도(接近態度)는 오늘날 생태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連結)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연암의 글 짓는 법은 오늘날 도구적이고 폭력적(暴力的)으로 변해가는 글쓰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전문학(古典文學)을 통틀어 그 작품에 대해 가장 많은 논문 편수를 보여주는 이를 꼽으라면 단연 연암입니다. 연암(燕巖)에게는 중세와 근대, 탈근대의 모습이 다양하게 섞여 있습니다. 연암은 ‘근대(近代)’의 구조 속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구조를 성찰(省察)하고 구조의 너머를 바라봅니다. 그는 모든 인간들이 ‘근대관습(近代慣習)’을 향해 갈 때 ‘현대사물(現代事物)’을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지금 이곳이 과연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불합리한 세계와 치열하게 대결(對決)합니다. 그와 같은 고심과 인문 정신은 지금 현실에서도 여전히 쓸모 있습니다. 그가 남긴 멋진 자산들을 지금 이곳에서 실제로 활용(活用)하기 위한 진지한 성찰(省察)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만물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 사랑해야 한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관은 연암의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調和)를 이루었을 때 자연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인간의 삶은 더욱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통하여 읽게 된 ’박지원(朴趾源)의 글 짓는 법‘은 문장가 연암의 글 짓는 법을 깊이 있는 시도(試圖)로 파헤쳐본 여행기입니다. 조선시대의 상황, 역사, 생활, 환경 등에서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연암(燕巖)의 ’열하일기‘를 깊이 있게 알고 공부하고 싶은 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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