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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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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 없는 문장의 진실내용은 사물가치나 진위를 감정 식별해야 (2)

(이어서 계속) 요컨대 삶은 생으로서의 이름에 ‘충실성(忠實性)’으로 응답함으로써 생존의 법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이때 삶은 ‘생’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균열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 균열에 투신(投身)하여 스스로 봉합합니다. 여기서 숭고한 삶은 생의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작가는 한 삶의 공고(鞏固)한 상징에 인간적인 고뇌와 감각의 세부를 불어넣습니다. 역사적 인물을 통해 시대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업은 거대 담론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하는 불온성(不穩性)을 갖습니다. 이때 과거의 역사는 부정한 내면을 드러내고 거짓의 ‘장계(長計)’는 거짓의 역사를 질타(叱咤)하는 힘을 갖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헛것’으로 남는 희생이 더 큰 역사 안으로 포섭(包攝)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의미한 희생이 진정한 희생이 되듯이 언어화된 세계란 이러한 ‘무의미’들이야말로 ‘의미’가 되는 역설의 세계이기 때문에 여기서 세상에 대한 적의가 뚜렷해질수록 연동적(連動的)으로 ‘나’의 순결함이 부각되는 숭고의 심리과정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인물의 무고함이 강조되면서 또 다른 ‘진실체계(眞實體系)’가 재생산될 여지가 있습니다. 소설 속의 역사는 ‘삶’을 내세운 ‘일인칭’에 의해 재평가된 역사이며 인물의 결백을 더욱 공고히 하는 이본(異本)의 역사를 호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서 생은 죽음과 대립합니다. 순결한 개인과 타락한 사회의 대립은 추방(追放)당한 무고한 인물의 스토리에 따라 ‘삶의 법’만 사라지면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환상을 만듭니다. 충실한 서술자가 복원시킨 ‘생’의 모습은, ‘정의로운 역사’라는 환상의 은유적으로 작용하면서 타자화(他者化)된 고통을 침묵하게 하고 엄격한 삶을 닮아가게 됩니다. 때문에 여기서 생의 개별성은 완전한 개별성으로 개인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특정한 개별성으로 환원(還元)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물의 언어를 통해 표상한 그 풍경은 이제 역사의 이면이 각인(刻印)된 삶의 ‘순전한’ 몸을 통해 ‘불멸의’ 육체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때 역사는 달라 보이는 그러나 다르지 않은 알레고리로 남게 됩니다.

삶은 암세포로 진화합니다. ‘삶은 천천히 죽어가는 말기 암과 같았’다는 생의 암유(暗喩)가 암시하듯이 삶의 생활을 물들이던 인물은 죽은 아내의 몸을 ‘염(殮)’하는 나에게로 진화합니다. 나의 시대에서 지금의 여기로 전환(轉換)하자면 시차에 적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동안 거대한 자연은 이미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성스러운 종교적 대상이었던 거대한 산봉우리가 ‘고도(高度)’로 파악되면서 이제 그것은 한낱 등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즉 그것은 성현의 말처럼 이전까지 ‘한정되지 않은’ 세계가 막을 내리고 ‘무한화’로서 표상되는 시대로의 진입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원근법(遠近法)을 고안해 냄으로써 관조의 ‘주체’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또 한 번의 소외를 경험합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여기 세계가 인간의 죽음조차 수치화하는 가차 없는 물신(物神)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삶이 생을 통해서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은 일상을 압도하는 현대 ‘물신’의 악력(握力)과 그 효과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이 맞닥뜨린 압도적(壓倒的)인 대상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차원에서 일상에 개입하면서 어떠한 ‘인간적’ 의미도 허용하지 않는 혹은 인간에게 무관심한 탈성화(脫聖化)된 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유할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상에 스며드는 죽음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삶의 생은 인간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심전도 계기판의 1 혹은 0으로 수치화됩니다. 오랜 힘겨운 투병생활(鬪病生活)을 생각하면 삶보다 죽음이 도리어 일상적이고 사소합니다. 일차적으로 여기서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과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노련함이고 죽음을 처리하는 담담함입니다. 또 어떠한 개별적인 죽음도 없이 1/0으로 환원되는 획일화된 죽음의 ‘하찮은’ 마지막 장면인 것입니다. 질기고 치욕적인 생존과 단순하고 명료한 죽음의 사이의 거래는 자본으로 개시된 ‘시장성’의 시대가 아닌가. 이 장면이 만드는 생의 아이러니는 죽어가는 인물이 ‘개밥’을 챙겨주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부각됩니다. ‘나’가 바라보는 일상의 세부는 ‘죽어가기’와 ‘개밥 주기’를 동일한 위상에 올려놓습니다. 이때 인간의 죽음이 가진 사소한 존재감은 아이러니한 대비효과를 자아내면서 무차별적으로 익명화되고 획일화(劃一化)되는 ‘삶’의 일면을 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가는 수치로 ‘처분되는’ 인간의 삶을, 일상에서 인물이 견뎌야 하는 존재적 왜소함을 통해 상기시킵니다. 그럼에도 생의 노래에서 보인 서정적 자의식이나 감정의 노출(露出)은 철저하게 삼가고 있습니다.

우선 작가의 소설에서 인물의 삶이 타인의 죽음과 긴밀하게 맞닿아있다는 점은 인간의 생존이 극단적인 소멸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실감 된다는 근본적인 허약함을 반증(反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성찰적 태도는 죽음의 순간을 ‘리얼’하게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때문에 이때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물질(수치)로 환원할 수 없고 관념으로 개념화(槪念化)할 수 없는 죽음의 ‘구체성’입니다. 그것은 ‘헛것’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하는 순간이며 때문에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에게 노출된 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죽음이 도래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탕진(蕩盡)해야 하는 비극의 서사를 닮아있습니다. 여기서 치명적으로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하는 능력을 인간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 한 대가의 견해(見解)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자발적 죽음이 이데올로기적 상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경계한 충고를 감안(勘案)할 때 작가의 소설에서 ‘죽음을 포함한 삶’을 견디는 주인공들은 기만적인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윤리적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은 무의미한 생을 그저 무력하게 견뎌야 할 터입니다.

관계의 (무)의미에 대한 문제와 타인에게 닿을 수 없는 개별적인 언어, 그리고 존재의 단독성의 문제는 작가의 소설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의 핵심(核心)입니다. 인물들은 타자의 존재를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단절적 상황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언어와 사적 언어 사이의 양도논법(兩刀論法) 즉 언어로 소통하고는 있으나 언어의 결핍을 인식하고 있는 인물들의 지적 자의식을 통해 자주 언급됩니다. 언어에 대한 예민(銳敏)한 자의식은 존재의 개별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항로표지’에서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빈말’이 반증하는 것은 근본적인 언어의 불가능성일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문제 삼는 것은 ‘빈말’이 사회에서 소용되는 ‘실체’적 충만함의 측면에 대해서입니다. 삶이 발견한 언어의 특징은 관념의 폭력성(暴力性)을 가시화하는 매체로서, 언어의 ‘수행성’입니다. 그와 달리 여행을 떠나는 행락객이 언어를 통해 인식한 측면은 ‘시적 언어’의 메타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소’라는 소리가 소가 아님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를 살아있게 하는’ 시적 언어의 매혹입니다. 그것은 ‘이름을 부르며 대답하는 아이들이 살아서 뛰어놀고 있을’ 언어적 ‘상상력의 미학’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착할 수 없는 것, 잡을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대상으로의 노출이 갖는 매혹적이고 기만적(欺瞞的)인 이면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표리관계는 죽음을 포기한 채로 삶을 살 수 없는 언어를 포기한 채로 노래할 수 없는 예술적 인간을 탄생시킵니다.

요컨대 작가는 무의미한 현실을 진지하게 사유하고 고통을 내면화하는 성찰(省察)적 인물들의 지난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작가의 문제의식은 양자 사이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사이’, 타자와 나 ‘사이’의 결락 지점을 조명하는 데에서 부각됩니다. 때문에 작가는 삶과 죽음이 ‘접 붙은’ 시간대 그 순간의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로 매개된 세상과 나 사이를 잇는 팽팽한 긴장감에서 기인합니다. 또 작가의 문제의식이 지금 여기를 벗어나 선사의 과거 즉 인간의 기원으로 확장(擴張)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그리하여 작가의 주인공들은 ‘오줌버캐 낀’ 태고의 기억을 상상하면서 기원적 순간에 ‘이미’ 시작된 근본적인 결락의 지점과 조우하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소(그것)’를 ‘소’라고 발음하기 시작하던 ‘교통(交通)’의 시대에서 출발해, ‘빈말’이 왕의 옷을 입는 ‘명령’의 시대를 거쳐 이미지를 ‘실체’로 전환하는 ‘명명’의 시대를 관통(貫通)하는 일종의 탯줄이라 할 만합니다. 이런 점에서 국어교사, 광고업계 종사자, 고고학 연구가 등의 인물군의 행태는 세태 소설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이는 인간과 사회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좌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펴본 바 있듯이 작가가 찾아간 기원에는 존재들이 접붙은 ‘가랑이 틈새’의 공백(空白)밖에 없습니다.

그 ‘불행한’ 순간에, 인물들은 죽음이 비켜간 ‘생(生)’의 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제야 ‘무의미한’ 삶을 잇대는 희미한 ‘섬광’을 볼 수 있으며 죽음을 지연시키는 짧은 울혈(鬱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은 자동화되는 일상을 중지시키는 정전(停電)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망함을 끌어안아야 하는 인간의 ‘몸’은 생의 ‘무의미’를 노출하는 무력함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무력한 몸은 주체 자신의 존재증명의 장소라는 점에서 자기 구원의 위치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성전(聖殿)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작가가 인물들을 도피시키는 초월적 공간성에 있습니다. 인물들의 연민 어린 시선은 점차 세계를 초월하고 적의(敵意)를 지배합니다. 그들은 이미 삶과 죽음의 아수라와는 무관한 공(空)의 세계에 한 줌 재로 돌아갈 화장(火葬)의 세계에 들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한 생 속에서 죽음으로 투신하지 않은 인물들은 이제 자신이 버린 세계에서 스스로 사제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인물들이 보이는 초월적인 제스처나 초연한 냉소의 태도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작가가 포착한 세계의 중요한 지점과 깊게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이해하자면 논의를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현대화된 죽음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고 있는데 그것은 차별성이나 개별성이 무화되는 죽음의 ‘일상성’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때 죽음은 주로 일상적인 사건의 차원에서 명시될 뿐입니다. 그것은 점차 죽음을 대하는 세속적 태도 일반을 넘어서는 일종의 ‘합리성’의 수혜를 받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즉 작가는 죽음을 처리하는 일상화된 절차와 인간의 몸을 ‘관리’하는 사회의 태도를 통해 보여주는데 인간 존재가 ‘무의미’해 보이도록 ‘처리’되는 차원을 넘어 그것이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과정이라는 식의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時事)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물신화된 사회의 세속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사회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왜곡된 형태로밖에 드러날 수 없다는 반성적인 또는 회의적인 ‘이성’의 논리에 기반(基盤)한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때 합리성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지지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라 할 만합니다. 작가가 펴낸 인물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평범함으로 위장된 차별의 세계, 합리로 무장한 부조리의 세계로 몸을 던집니다. 초연(超然)의 세계,  열반(涅槃)의 세계를 경유(經由)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지적이 통렬(痛烈)하게 비판하는 냉소적 지성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회의 결핍을 정확히 인식한 체제 안의 ‘지식인’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가장 안전한 지대를 점유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본의 물신적 측면을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뼈’에서 ‘헛것을 헛되이 지껄일 때 그 묘사력(描寫力)이 구체적인 사실성을 획득’한다고 느끼는 고고학자의 불편함은 물증주의(物證主義)의 공허함이 주는 지식인적 양심의 발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문수와 같은 위인과 같은 영역에서 동등한 취급을 받는다는 일종의 수치심(羞恥心)이 아닌가.

여기서 작가는 이중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물신화(物神化)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유력한 ‘적수’들이지만, 동시에 체제에 동조(同調)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력한 ‘지원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과정에서 윤리적 행위를 전유하는 특정한 사회적 계급을 ‘범주화(範疇化)’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들의 발생과 발견 그것의 해결의 가능성까지도 진정한 ‘개별성(個別性)’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는 ‘중산층의 계급’의 고정된 ‘젠더의 영역’에서 성을 사유하는 역할극(役割劇)이라는 측면에서 논의된 바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성적 위계질서를 전제한 소설의 방식적인 문제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확장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범주화된 개체로 환원된 인물들은 스스로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특정한 집단이나 연대 혹은 계층이나 성별이 배타적(排他的)으로 독점되고 전유하는 것은 사회의 불가능성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가능성의 조건입니다.

정리하면 그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에 대한 ‘믿음’이, 삶의 (무)의미를 전유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알고 있기 때문에’ 도피할 수 있는 말하자면 ‘앎’ 자체가 갖는 ‘함정(陷穽)’으로의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역설적인 해방의 때는 ‘장인의 기율’을 가진 도공이, ‘부처의 풍모’를 부여받은 구도자가, 혹은 비유적 표현으로 삶을 전유(專有)하는 작가의 상상조차 초월하는 ‘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전면화(全面化)하고 있는 것은 ‘견자’의 풍경이지만, 작가가 인물의 눈을 통해 ‘사유’함으로써 남겨두는 것은 온전하고 정갈한 ‘세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규정(糾正)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수치스러우나 아름다운 세계로 참담하나 ‘정갈한’ 세계로 규정된 채 남아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제 일상적 인물을 숙성한 견자(見者)로 승격시킨 작가의 의도는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을 ‘풍경’으로 옮겨놓은 주체는 자신이 만든 이미지가 정말 ‘사실적(寫實的)’인 것으로 보이기를 욕망합니다. 자기 내부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체의 ‘접신(接神) 욕망’이라고 부른다면 그러한 열정에는 완고한 배타성이 전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숱한 소멸하는 것들의 목소리를 ‘대언(代言)’하는 숭고한 작가의 목소리‘만’ 복원(復元)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때문에 이때 작가의 목소리가 ‘자연스러운’ 혹은 ‘리얼’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어떤 침묵이 은폐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허용된 개별성, 허용된 이름의 ‘해방’은 의도하지 않은 희생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화의 시대에, 대문자 역사가 소문자 역사로 치환(置換)되는 과정에서 관념의 또 다른 이름으로 드러납니다. 또 그것은 물신의 시대에 근본적인 결핍이 초월적인 차원이나 상징적인 차원의 문제로 전이(轉移)되면서 관리되는 양상을 통해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때 작가가 보여주는 숭고한 글쓰기는 사회라는 체제에 저항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이고 타인에게 보수적이기보다는 가학적(加虐的)이라고 말해야 온당하지 않을까?

냉소적인 글쓰기가 예비하는 가장 위험한 단계는 자신의 상황 자체를 망각(妄覺)하는 것입니다. 연암(燕巖)이 언급한 ‘물속의 물고기’ 비유는 지식의 허망함과 망각의 위험성을 가르쳐주는 유용한 참조점(參照點)이 됩니다. 요컨대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오히려 물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 물속에 있음으로 해서 역설적으로 물의 존재를 잊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물을 잊은 물고기는 ‘물러남’ 즉 자신 안에 긴장을 발생시키는 틈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스스로에게서 반성적(反省的)인 물러섬을 포함하고 있을 때 자신이 있는 공간을 인식(認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의 허망함과 허망한 말의 위험함을 정확히 인식한 작가는 관념의 자본화(資本化)된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해 냈습니다. 그럼에도 때로 작가의 펜은 세상에 흠집을 내는 칼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여 작가는 언어화된 세계의 ‘적의(敵意)’를 베고자 한 적의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면 순결한 주체의 숭고(崇高)한 글쓰기는 ‘빈말’에 옷을 입혀 세상을 ‘형상(形象)’합니다. ‘삶의 세상’에서 ‘생의 세상’으로 그리고 ‘집필자(執筆者)의 세상’으로 말입니다.

작가는 자기사상을 모든 사람에게 전(傳)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상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 세상 어느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갑니다. 만약 그의 사상이 확고(確固)한 뜻이 담겨져 있다면 말입니다. 작가의 사상은 작가의 정신적(精神的)인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여러 곳에서 그 사상(思想)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허무(虛無)한 사상은 일정한 시간에 또한 일정한 곳에서만 발견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작가는 항상 이 점을 명심(銘心)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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