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개인적(個人的)인 글을 쓸 일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감상(鑑賞)을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거나 이메일로 전할 때에는 특별한 훈련(訓練)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내용이 아닌 공적인 글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연습(演習)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공적’인 감각(感覺)은 많은 훈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의식적으로 글쓰기 훈련을 거듭하면 공적인 감각을 지닐 수 있으며 내 글을 남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가치 있는 의미를 부여(附與)하여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는 글쓰기 훈련(訓練)은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전하는 못하는 진심은 그 어떤 힘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대충 글을 쓰는 습관(習慣)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사적인 공간이라도 대충 써도 상관(相關)없다는 생각은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看過)하는 자세입니다. 사적인 이메일 쓰는 것을 글 쓰는 계기(契機)로 삼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기본적인 문장력을 함양(涵養)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란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용(內容)을 올바른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공성을 의식하지 않으면 글쓰기는 완전히 사적(私的)인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히 자기만족이나 개인적인 감정의 발산(發散)에 그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에는 사적인 모드와 공적(公的)인 모드를 자유자재를 전환(轉換)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런 능력이 글쓰기의 폭을 넓혀줍니다.
공적인 문서에서 가장 흔한 종류는 공무원(公務員)들의 보고서 같은 것입니다. 이런 보고서에는 ‘나’라는 주어(主語)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글쓴이의 관전(觀戰)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공적인 문서는 주어를 배제(排除)하는 형태로 객관적인 사실만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보고서처럼 객관적(客觀的)인 문장만으로 된 글을 쓸 때도 있고 자기 주관이 강한 글을 쓸 때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공·사적(公·私的) 이 양자를 잘 쓸 수 있어야 주관·객관이 잘 배합(配合)한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잘 배합된 주관·객관을 넘나드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도 주관과 객관을 병행(竝行)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글 쓸 아이디어를 구상(構想)할 때에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경험한 지식이나 잠재지식(潛在知識) 가운데 찾습니다. 책에서는 개인기술이나 경험 속에 숨어 있지만 정작 글을 쓸 때는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을 말합니다.
잠재지식을 얻는 과정을 통해 글 속에는 글쓴이의 주관이 짙게 배어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고 전체적으로 글을 정돈(整頓)해갈 때에는 객관적으로 생각하도록 노력합니다. 특히 이 단계에서 논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일관성(一貫性)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아이디어 즉 주제를 내놓기까지는 주관(主觀)이 많이 작용하지만 그 후의 작업에서는 객관이 주체가 되어야 글을 잘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문장화(文章化)할 때 객관성을 강하게 드러내면 보고서 같은 문장이 됩니다. 보고서처럼 객관성(客觀性)이 요구되는 글은 그 편이 오히려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연구보고서(硏究報告書)를 쓸 때 너무 객관적으로만 쓰면 개성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객관과 주관을 적당히 조절(調節)해야 그 글을 통해 글쓴이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논리가 잘 정립(定立)되어 있으면서도 저자의 주관이 전해지는 글이 균형(均衡) 잡힌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개성과 자존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글은 쓰지 않습니다. 글을 쓸 때는 중상모략(中傷謀略)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최근에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터넷 게시판 등에는 비방 글이 범람(氾濫)하고 있습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험담을 통해 스트레스가 해소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결코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스트레스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가(轉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요즘에는 누구나 간단하게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고 홈페이지도 쉽게 제작(製作)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온라인상에서 글을 쓰고 읽는 것이 수월해졌습니다. 이는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매체가 중상모략(中傷謀略)이 난무하는 곳이 되면 부정적인 영향은 더 커집니다.
컴퓨터로 글을 쓸 때 편리한 점은 종이에 적힌 것이나 인쇄(印刷)된 것과는 달리 화면상에서 바로 지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컴퓨터의 보급(普及)으로 글 쓰는 것이 간편해졌기 때문에 더더욱 인터넷 상에서 비방을 삼가야 합니다.
우리 일상은 방치(放置)하면 ‘정보량 기대치'라는 무질서 상태가 심화되어 점점 더 지루하고 무의미해집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창출해가는 작업입니다. 그런데도 비방하는 글을 써서 일상의 무의미함을 증폭(增幅)시키는 것은 글쓰기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행위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가치를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을 명심(銘心)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는가? 우리는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자기의 주장(主張)을 펴고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합니다. 그 글의 내용이 바로 그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입니다. 새롭게 무언가를 깨닫는다고 해서 반드시 지금까지 아무도 말한 적이 없는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글쓴이 자신이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대해 쓰면 됩니다.
물론 독자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동인지(同人誌) 같은 어느 특정 집단 속에서만 통용(通用)되는 글이나 자기만족적인 글은 엄밀히 말해서 자기주장을 나타내는 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주장이 있는 글이란 그 속에 내재된 의미를 타인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글은 외국어로 번역하기도 쉽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은 말이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에 한국어 속에 내재된 어감(語感)이나 미묘한 표현들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 내포(內包)되어 있는 의미만은 제대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문장의 형태는 갖추었지만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말은 외국어로 번역(飜譯)할 수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글 속에 의미가 제대로 들어 있는지 아닌지가 번역 가능의 여부를 판단(判斷)합니다. 따라서 세계인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어를 얼마만큼 잘 할 수 있느냐 이상으로 번역이 가능한 의미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의미가 확실한 내용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문장이라도 외국어로 번역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글은 항상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글을 씁니다. 그 내용을 제대로 전달(傳達)하기 위해서는 글을 적절히 구성해야 합니다. 논리적이면서도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글은 그것이 개인적인 체험이냐 객관적인 내용이냐 하는 것보다 잘 구성된 글인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잘 구성된 글은 주제를 정확히 전달하기 때문에 독자가 어떤 질문을 제기(提起)해도 답변해줄 수 있습니다.
나는 톨스토이의 “인생독본(人生讀本)”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 그때마다 이 책에 이런 부분이 있었나? 하고 새삼 놀랍니다. 그것은 작가가 이 책을 즉흥적(卽興的)으로 쓴 것이 아니라 그만큼 철저하게 구성(構成)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에는 우연(偶然)이란 없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문장이 술술 떠올라서 마치 서기가 된 것처럼 글을 받아 적지는 않습니다.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사람은 비로소 글을 쓸 수 있으며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가 책 속에 쏟아 넣은 방대한 의미에 압도(壓倒)되어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작가였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글을 쓰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는 행위입니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은 곧 가치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것은 전문작가(專門作家)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평가들 중에는 남의 작품을 헐뜯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남의 작품에 대해 글을 쓸 때 그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방(誹謗)해서 가치를 떨어뜨리는 글만 씁니다. 그런 비평을 읽으면 독자는 그 작품을 읽을 의욕이 사라집니다. 비평가들은 작품을 비판(批判)함으로써 나는 이렇게 작품을 보는 ‘눈’이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작품과 접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만남의 장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평문을 쓰는 참된 의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게 그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시야를 넓히는 계기(契機)를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독자의 뇌와 작가의 뇌가 서로 감응해서 불꽃이 튀는 듯한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비평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주변에서는 이러한 만남을 가져다줄 만한 비평(批評)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의미를 창출하기는커녕 가치 있는 작품을 우습게 보는 비평가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이지만 가치(價値)를 떨어뜨리거나 가치를 잃게 만드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가치를 높인다, 가치 있는 것을 발견(發見)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모차르트는 하이든과 함께 18세기의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고전파(古典派)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작품에 40여 곡의 교향곡(交響曲), 각종 협주곡(協奏曲), 가곡(歌曲), 피아노곡, 실내악(室內樂), 종교곡(宗敎曲)이 있으며,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적’ 따위가 있습니다. 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모차르트가 출현(出現)해서 새롭고 다양한 곡을 만들자 음악 세계는 크게 변했습니다. 그때까지 세상에 없었던 음악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한 곡을 음미(吟味)하고 이야기 하고 분석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더더욱 방대한 양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모차르트가 작곡(作曲)한 곡에 대해 누군가 “이런 음악은 감상할 가치가 없어”라고 비평한 나머지 나쁜 영향과 인식(認識)이 널리 퍼졌다면 이 천재적인 음악가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영영 매장(埋葬)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근거 없는 비방은 모차르트의 가치를 저하(低下)시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차르트의 곡을 들을 기회와 풍요로운 음악의 세계를 맛 볼 기회를 잃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위대한 작품은 그 속에 엄청난 의미를 함축(含蓄)하고 있습니다. 천재적인 작품에는 한 사람이 평생을 들여도 흡수하기 어려울 만큼의 깊은 의미가 내재(內在)되어 있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 혹은 평론 등 대부분의 글 쓰는 일은 많든 적든 반드시 소재(素材)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소재로 글을 쓸 때는 거기에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창조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한 문장 속에 여러 가지 내용을 담아보았습니다. 이미 안목 있는 여러분들도 눈치를 챘겠지만 개인적인 글쓰기, 공적인 글쓰기, 가치 없는 글, 의미 창출(創出)하는 글, 남의 글을 비방 등 몇 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짧은 편폭(篇幅)에 많은 내용을 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한 번 틀을 깨보려고 시도는 하였지만 어쩐지 문장이 안고 있는 주제의 독창성, 내용의 중요성이 능력제한으로 많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유감(遺憾)이 많이 묻어나는 글이라 생각되어 자책감(自責感)이 강하게 안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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