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짓고 식품 모으는 사람부터 화성 이주 준비하는 머스크까지 종말론 저변 깔린 사고방식 해부
식민주의·인종차별 등 억압 통해 잃어버린 남성성 돌려받길 원해
우울한 시절이다. 세상엔 말세의 징후가 선연하다. 기후 재앙으로 날씨는 갈수록 변덕스럽고 이상해진다.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다수의 살림은 나날이 팍팍해진다. 공동 번영의 꿈이 소실되고, 증오와 적대를 선동하고 분열과 혼란을 부추기는 자들이 여기저기 날뛴다. 곳곳에서 파시스트들이 책동을 벌여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앞날에 암울한 어둠만 엿보이는 종말의 시대다. 주변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종말에 감염된 사람들, 위기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넘쳐난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에서 아일랜드 에세이 작가 마크 오코널은 이 시대의 종말을 “기존 세계가 작동하는 체계가 서서히 망가지다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으로 정의한다. 사실, 자기 시대를 종말의 징후로 상상하는 사고방식은 인류 문명 자체만큼 오래되었다. 북구 신화의 라그나뢰크, 성서의 계시록에서 보듯, 종말의 시나리오를 떠올리고 최악에 대비하는 건 “급속한 변화와 불확실성의 시대에 으레 나오는 반응”이다.
불안의 시대이기에, 오늘날 종말론은 세상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무척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터넷은 종말론이 생겨나고 퍼져나가는 온상이다. 시베리아에 내리는 검은 눈, 항생제 내성을 갖춘 슈퍼 박테리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빙하, 물에 잠겨가는 해안가 도시 등 숱한 사람들이 온갖 이유로 종말의 전조를 예감하고 다양한 징후를 수시로 경고한다. 들여다보고 있자면, 세상은 이미 지속가능성을 잃은 듯하다. 종말의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유다. 저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저자는 묻는다. “우리 앞에 놓인 날들을 생각할 때, 아이를 낳은 일은 지독한 윤리적 실수가 아닐까.”
우리 시대에 만연한 공포, 신경증, 기이한 열병, 그러니까 종말의 강박에서 놓여나기 위해서 저자는 전 세계를 떠돌면서 “불안한 에너지가 유달리 충만해 보이는 장소들”을 찾아간다. 종말의 예언을 믿고 그날을 대비해서 벙커를 파고 식품을 챙기는 이들의 생각이 궁금해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뉴스나 소셜미디어 속의 추상적인 종말론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작동 중인 종말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오코널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 있는 ‘생존 대피소 공동체’다. 오래전 군수품 보관소로 사용되던 장소로, 자신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이들이 벙커를 건설하고 식료품을 모아들이면서 종말에 대비하는 중이다. 이어서 그의 발걸음은 피터 틸 같은 부자들이 최악을 대비해 피신처를 만들어 둔 뉴질랜드로, 다시 일론 머스크 같은 이들이 모여 화성 이주와 정착을 논의하는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기후 재앙을 걱정하는 이들에서 미국의 영광을 부르짖는 우파 음모론자들까지 무척 다양하다. 이들은 통조림을 사들이고 생존 장비를 준비하며, 깨끗한 물과 식량을 얻을 방법을 고민한다. 종말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본래 ‘드러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말을 말한다는 것은 곧 자기 현재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냉소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저자는 종말에 대비하는 이들의 말과 행동을 해부해 그 안에 깔린 사고를 밝혀낸다.
저자에 따르면, 현실 종말론자들은 ‘미래를 향한 향수’라는 역설적 감정에 빠져 있다. 은신처 마련에 힘쓰는 프레퍼가 실제 바라는 것은 종말을 빌미로 낡은 가부장제 남성성을 돌려받는 일이다. 화성을 개척하려는 이들은 서부 개척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 미국의 힘을 되찾으려 애쓴다. 이는 종말론이 식민주의, 인종차별, 성차별, 물신숭배 등 미국 백인 남성의 환상에 포획당해 있음을 보여준다. 종말 서사는 과거의 잃어버린 영광, 약자와 소수자의 피를 빨던 그 옛 추억을 동력 삼아 작동한다.
틸이나 머스크뿐 아니라 링크드인 창업자 리드 호프먼, 오픈AI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 등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탈출 욕망은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바탕 생각을 보여준다. 이들은 은거 별장을 마련하고 도피 계획을 준비하는 등 예언자인 듯 행동한다. 그러나 신화 속 영웅들과 달리, 이들은 힘을 합쳐 종말을 막아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들의 꿈은 홀로 방주에 올라타기, “다른 사람을 향한 의무와 얽힘을 해체하는 일”뿐이다. 나라를 버리고 지구를 떠나고 싶다는 욕망은 자기 종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즉 인간이란 존재를 버리고 싶다는 욕망과 이어진다. 저자의 생각에, 이는 결국 “삶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종말 이후 풍경이 현실화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을 여행한다. 파괴된 문명의 흔적, 그 공포에 찬 재앙을 체감하면서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여행에서 의외로 그는 구원의 풍경을 마주한다. 인적이 끊긴 곳에서 자연이 스스로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광경엔 핏빛으로 물든 물결이 전혀 없었다. 조용한 회복이 있을 뿐이었다.” 종말은 없다. 망가진 건 고쳐지고, 무너진 건 일어서며, 죽은 건 되살아난다. 이것이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간다. 종말을 부추기는 힘에 맞서 희망을 품고 새로운 행동을 조직할 때다. 336쪽,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