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호가스(1697∼1764)가 그린 ‘탕아의 편력(A Rake’s Progress-Tavern Scen)’ 연작. 상류 사회 사람들과 그 시대의 병폐를 꼬집는 데 정평이 난 호가스의 작품은 인기가 높았고, 그만큼 표절작도 많았다. 북트리거 제공
■ 코번트가든의 여자들 핼리 루벤홀드 지음│정지영 옮김│북트리거
매춘부 이름·성격 빼곡한 리스트 18세기 英뒷골목서 40년간 히트
문제의 책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저작 가담한 3명 인물 파헤치고 밑바닥 여성의 치열한 분투 담아 대다수가 강간·성착취 피해자들
18세기 유럽에선 후대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저술이 많이 나왔다. 루소의 ‘에밀’, 볼테르의 ‘캉디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그러나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따로 있으니, 40년간 꾸준히 개정판을 내며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킨 ‘해리스의 코번트가든 여자 리스트’(이하 해리스 리스트)이다. ‘여자’ 리스트라니. 불쾌한 기분이 든다면 안심하라. 지극히 상식적인 ‘21세기 현대인’이라는 증거니까. 이것은 당시 최고의 환락가였던 코번트가든에서 일하던 매춘부의 목록이다. 이름, 출신, 외모, 성격 등 ‘상세 정보’가 담긴 일종의 ‘매춘 가이드’다. 애독자는 놀랍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18세기 영국 런던의 번듯한 신사들이다.
책은 바로 그 ‘해리스 리스트’에 관한 모든 것. 19세기 영국 살인마 잭 더 리퍼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의 이야기 ‘더 파이브’로 주목받은 저자의 앞선 저작(그리고 데뷔작이다)으로, 18세기 런던 신사들의 은밀한 사생활과 위태로운 뒷골목 여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풀어놓았다. 리스트를 만든 자들은 누구이고, 리스트엔 어떤 여자들이 있나. 또 “가장 수치스럽고도 성공적”인 이 출판물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나. 이를 좇는 ‘재미’에 돌입하기 전, 하나 더. 오늘날 읽기 불편하고 민감한 옛 문헌(해리스 리스트)이, 촘촘한 연구와 유려한 문장을 만나 “매력적이고 독창적인”(인디펜던트) 이야기로 재구성됐다. 그게 이 책의 가장 크고 적절한 미덕이다.
‘해리스 리스트’의 1773년 판본의 표지. 북트리거 제공
책의 중심인물은 셋이다. 가난하지만 허영심 많은 시인 새뮤얼 데릭, 술집에서 태어나 ‘유능한’ 포주가 된 존 해리슨(일명 잭 해리스), 마담의 딸로 태어나 엄마의 전철을 밟는 매춘부 샬롯 헤이즈. 18세기 런던 하류사회의 상징인 이들은 저마다의 미래를 꿈꾸며 코번트가든에서 뒤얽힌다. 코번트가든의 여성들을 목록화하자는 아이디어는 데릭에게서 나온다. 부유한 남자의 정부(情婦)들에게 기생해 생활하던 그는 빚을 지고 감옥에 갇히고, 돈 벌 궁리를 하다가 ‘해리스 리스트’의 출간을 떠올린다. 열쇠는 해리슨(해리스)이 쥐고 있었다. 당시 포주들은 각자 매춘부 명단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방대한 목록과 정보를 지닌 인물이 바로 해리스였던 것. 또 한때 데릭의 연인이자 ‘고급’ 매춘부였던 헤이즈는 정보원이었고, 저작권자로도 이름을 올린다.
해리스의 정보력과 데릭의 기술(글재주)이 만나니 ‘리스트’는 기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적인 오락물’, ‘음탕한 출판물’로 ‘발전’한다. “말랐지만 면도칼처럼 날카롭지는 않다” “가슴이 너무 평평하다”와 같은 외모 평, “제멋대로인 데다가 음란한 성격 때문에, 같은 부류의 여성들조차 ‘작은 악녀’라고 불렀다” “유쾌한 상대지만, 정열이 없고, 모든 남자를 얼간이로 여긴다” 등 성격 분석, “기묘한 방식으로 몸부림을 친다” “뺨을 깨물어 자국을 남긴다” 등 침대 위 내밀한 모습까지 묘사했던 것이다. 데릭은 리스트가 지속적인 독자를 확보하고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려면 매년 최신 버전을 내야 한다는 걸 꿰뚫었고, 그 결과 리스트는 그의 사후에도 꾸준히 개정·출간될 수 있었다.
데릭, 해리스, 헤이즈 세 사람의 사업 수완이나 신사들의 이중성 같은 건 사실 부차적인 얘기다. 중요한 건, 저자가 리스트 제작 과정과 그 자극적인 내용의 이면을 파고들어 ‘지워진 여자들’의 목소리를 길어 올렸다는 것이다. 즉 철저히 남성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남성에 의해 소비된 이 리스트는 기존 역사서들은 닿지 못하는 후미진 구석까지 이르게 해준다. 저자는 여성들이 어쩌다 그 일을 하게 됐는지, 어떤 심정으로 손님들을 받았는지 추적하다가 대다수가 강간이나 아동 성 착취의 피해자였음을 지적하고, 조금만 삐끗해도 밑바닥으로 떨어졌던 당시 여성들의 취약성과 사회상까지 이 리스트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책은 매춘부 목록을 히트시켜 신분 상승을 꿈꾼 문제적 인물들은 물론, 매춘에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여성들의 치열한 분투를, 18세기 런던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거만한 설교 없이 매춘의 위험성과 그것이 제공한 가능성을 보여주며 긴장감과 드라마로 가득 찬 이야기”(가디언)를 말이다. 미시사·여성사 연구의 매력과 효용, 그리고 그것을 ‘읽는’ 매력과 효용까지 이렇게 충실하게 알려주는 책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456쪽,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