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어라는 정서적(情緖的)인 대화 속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대화는 종종 진실(眞實)과 어긋나거나 심지어 정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현실과 진실을 반영(反映)하는 것 못지않게 거짓과 허세(虛勢)와 현실부정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이 세상과 인간 사이의 얇은 막처럼 빛과 진실을 일부만 통과(通過)시키는 개별적인 존재물(存在物)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기서 진실은 말하는 사람의 진심을 읽고 감동(感動)한 사람이 그 감동을 다시 진실로 표현하고자 하는 데서 비로소 근원(根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감동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진실이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 진실에 반응(反應)하는 사람 자신의 내면상태도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감정을 총괄(總括)하여 진실이라 할 때 그것은 일단 언어 행위의 결과인 감정보다 기분(氣分)이 뒤에 놓이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실이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형태의 감정표현이나 언어적 전달의 무의식적 표출(表出)이라는 수준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의식적 동기를 포함(包含)하게 되면서부터는 감정적 색채가 기분활동 자체에 관여하며 감각생성의 의식적 인소(因素)가 됩니다. 그러한 뜻에서 진실이 있는 곳에 성실에 대한 의식, 곧 감정이 있다는 일반화(一般化)가 가능합니다.
다만 언어의 초기단계의 진실은 감정표현(感情表現)의 부족으로 인하여 자세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대화를 통해서나마 진실에 관한 인식(認識)의 일부를 미루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소통(疏通)을 한 이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나마 진실한 교제(交際)가 적어서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남의 말은 쉽게 믿지 않는 특성(特性)을 간추려낼 만한 마음씀씀이가 넉넉하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성실한 주인공이라고 자처(自處)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과감하게 그것을 조정하고 복구하고 개혁(改革)하고 선언하지 못할망정 결국 돈에 팔고 힘 있는 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의지할 지팡이로 삼고 있습니다. 또 일시적 필요를 위해 제한된 사회적 요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런 의도(意圖)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대리품 도구로 남용(濫用)되더라도 매번 성(聖)스런 내면의 전부를 선뜻 나눠주면서 그 근본을 상실(喪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진실의 세계 전체를 이해(理解)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감히 진실을 정의(定義)했다고 장담하겠습니까? 또 어느 누가 진실의 방향 전체를 열거(列擧)했다고 떳떳이 외치겠습니까? 어쩌면 이미 이해했고 또 명명(命名)했는지는 모르나 우리가 잠시 동안만 거기에 머물러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잠시 귀 기울이다가 무시(無視)해버렸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가장 좋은 것도 새로운 것으로 서둘러 바꿔버리면서 거기에서 물러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면 언제 존재(存在)했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격렬(激烈)하고 열렬하고 고상하게 진실은 어떠해야만 하고 진실성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해 논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실에 대한 의무(義務)를 영원히 기억하고 성실이 이행해야만 하느냐에 대해 주장(主張)이 없지는 않았지만 논쟁은 지속적(持續的)으로 계속 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논쟁(論爭)의 여지도 없고 또 다시 여러 논거(論據)들을 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눈부신 설명 중의 하나는 진실성을 위한 설파(說破)이고 그 결론에 나도 두 손을 들어 찬동(贊同)합니다.
진실성은 수천 년 동안 줄곧 선의적(善意的)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지나치게 태평(太平)하게 빈들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도 힘이 닿는 데로 이런 진실을 유지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친선적인 교제는 각자마다 조신(操身)한 행동에 각별히 주의를 돌려야만 사람들에게 친근(親近)히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진실이 공공연한 거짓의 무자비한 습격(襲擊)에 대항할 수 있는가라고 우리에게 물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홀로 존재(存在)하지 않으며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례한 폭언은 거짓과 필연적으로 연결(連結)되어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가장 밀접(密接)하고 가장 자연적이고 깊숙한 연관(聯關)이 있습니다. 폭언(暴言)은 거짓 이외에는 숨을 곳이 없고 거짓은 허위밖에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한 번 폭언을 수단으로 선언(宣言)한 사람은 거짓을 자신의 원칙으로 선택(選擇)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이 탄생되어 공공연하게 자행(自行)되고 심지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폭언이 강해지고 확고(確固)해지자마자 자신 주위 공기가 희박(稀薄)해진 것을 감지하게 되고 거짓의 연막(煙幕) 속에서 그것의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은폐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폭언은 영원히 그리고 반드시 직접적으로 목을 조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종속(從屬)된 사람들에게 거짓 맹서(盟誓)와 거짓에의 동참(同參)만을 더 자주 요구합니다. 그래서 평범하고 용감한 사람의 간단한 행보는 거짓에 참여(參與)하지 않고 거짓된 행위들을 지지(支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이 세상에 도래하고 세상에 만연(蔓延)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거짓을 통해서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거짓을 이기는 것입니다. 거짓과의 투쟁에서 진실은 항상 승리하였고 항상 승리(勝利)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훤히 보이기 때문에 반박(反駁)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에 대항(對抗)해 거짓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에 대항해서만은 아닙니다. 거짓이 흩어지면 폭언의 알몸도 혐오(嫌惡)을 드러나게 되고 힘을 잃은 폭언(暴言)은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달구어온 진실이 세상을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理由)입니다. 진실성을 거부(拒否)하거나 거짓된 삶에 몸을 맡기지 말고 성실하게 살아야합니다. 진실에 대한 속담(俗談), 격언(格言)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속담들은 힘겨운 우리의 체험을 확고(確固)하게 표현해주고 있으며 때로 진정성(眞正性)이 담긴 감동적인 말을 해줍니다.
진실의 말 한 마디가 만인(萬人)을 끌어당깁니다. 이 세상에 진실한 말이 있어 심금(心琴)을 울려주고 위안(慰安)을 주며 생명에 찬란한 빛을 줍니다. 또한 진실은 인생의 교과서(敎科書)이며 정신의 옹호자(擁護者)이며 인생의 등불이며 영지(英智)의 참된 사화(詞華)입니다.
후덕(厚德)한 사람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실(眞實)한 말을 듣는 것 자체에서 행복과 기쁨을 찾도록 하여야 합니다. 정직한 사람의 언행(言行)을 접할 때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진리(眞理)의 근원이 널리 퍼진 것을 알아도 진심(眞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의 진실이 더해짐을 알았을 때 역시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진실은 훌륭합니다. 진실과 성실은 생명을 보존(保存)하고 인간이 서로 소통하고 대화하는 교제의 법칙(法則)입니다. 이런 진실적이고 성실적(誠實的)인 진리에 대한 나 개인의 대화(對話)도 한몫되어 사람들에게 강렬한 호소(呼訴)로 튼튼한 기초를 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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