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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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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진 = 百度圖片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唯上知與 下愚不移(출중하게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고 못난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

공자(孔子)는 자로의 곧고 불같은 성정(性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내심 있는 가르침을 통해 자로를 변화(變化)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천하(天下)의 공자가 일개 제자를 개변시키지 못한 이 일화(逸話)는 통속적으로 한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여실히 반영(反映)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이란 인식을 통해서 감성이 열려지는 것이며 마음은 언제 어디에나 열려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의 착오(錯誤)는 인생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데 있는 것이라 인정(認定)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목적은 영원한 생명(生命)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원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重要)한가를 깨닫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존재(存在)하고 있는 온갖 사물은 이 세상에 자기의 위치(位置)를 남에게 보여주는 기능(機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이 기능은 이성(理性)입니다. 만일 이성이 나에게 이 세상에 있어서의 나의 위치와 사명(使命)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성 그것과 그 이성에게 준 나의 그릇된 가르침의 죄(罪)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말이나 글에서 가르친다는 자세로 남에게 접근(接近)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변화나 설득(說得) 자체에는 목적이 없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급급해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의 말에 따라 쉽게 설복(說服) 당하고, 개변된다고 믿을 만큼 순진(純眞)하지는 않습니다. 그 자체의 가능성을 닫아두고서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은 의미(意味)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이나 글을 통해 상대의 말문을 닫게 만든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설복(說服)당하고, 변화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때로는 말 자체가 내용을 흐리고 그릇된 방향으로 잘못 이끌거나 변질(變質)시키는 것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따라서 말이나 글에서 이긴다는 자세로 출발하는 사람은 출발점(出發點) 자체가 그릇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제 아무리 화려(華麗)하고 그럴 듯 해보여도 결국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일수록 아무리 조목조목 따져 잘못된 점을 일러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말에서 밀렸다고 생각할 뿐 자신의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출중하게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고 못난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뚜렷한 견해(見解)나 주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담지자(膽智者)라고 합니다. 흔히 담지자란 '담력과 지혜를 동시에 갖춘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중하게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잘못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담력(膽力)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못난 자는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정할 지혜(智慧)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상술한 두 가지 조건(條件)을 갖추지 못해서인지 아직도 추풍(秋風)에 낙엽이 지고 그 서슬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落葉)을 보며 왜 그렇게 슬퍼해하는지 그 마음을 이해(理解)할 수 없습니다. 또 아름다운 미인이 지나가면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리는 이유(理由)를 잘 모릅니다. 따라서 검푸른 바다의 망망한 표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야 알지만 왜서 가슴이 탁 트이는지 그 원인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의 나는 내가 도통(都統) 아는 것이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분주하고 혼잡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랍니다. 가령 나는 하늘이 푸른 까닭이 과학적으로야 빛의 산란(散亂)에 의한 반사(反射)가 되어 푸른빛이 파장에 가깝게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리고 또 가을 하늘이 그토록 높고 푸르게 빛남은 천고마비 계절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일 뿐 그것이 정녕 푸르게 빛나야 할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네온등이 명멸(明滅)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說明)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보면서 사람들이 오만가지 생각과 상징(象徵)을 댈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자신의 평생 반려(伴侶)로 삼고자 노력하는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犧牲)할 수 있는 이유(理由)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에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등 지장(支障)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는 글의 효용성(效用性)을 되묻는 이들에게 나는 글을 이렇게 정의(定義)해 대답하리라 마음먹은 적이 있습니다. 글이란 것은 죽음 혹은 내가 타인을 위해 나의 이익과 욕망(慾望)을 희생하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인간의 정신이 창조해낸 부산물(副産物)입니다. 이런 멋대가리 없는 이유밖에 만들어낼 수 없는 내 생각의 한계가 몹시 부끄럽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낙엽 지는 가을 창가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간혹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갈 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인생의 깊은 의미는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自覺)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아는 걸 안다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의 순리(順理)에 맡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세상은 나 없이도 어제처럼 내일도 그렇게 흘러갈 겁니다. 누구나 그 이유를 다 알고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마음으로나마 나의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통체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적어도 한 사람의 인격을 경멸(輕蔑)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그 사람이 가장 천(賤)하고 불쌍하며 비웃음 받는 사람일지라도 깔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개개인의 인격(人格) 속에 존재하는 온갖 것을 알며 또한 영원의 높은 법칙(法則)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어떤 불멸(不滅)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적대시(敵對視)할 것 같으면 우리의 그런 행위는 비행(飛行)이며 이런 비도덕적인 행동은 삶이 아니라 죽음의 쟁투(爭鬪)에 도전케 하는 결과를 만듭니다. 누구라도 그 인격, 능력, 기질, 용모, 개성 등을 쉽사리 개조(改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비난(非難)을 받는 인격이란 것은 즉 그 인격으로 인해 어떤 적을 대할 때처럼 우리들이 쓸데없이 다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인격이 존재(存在)할 수 있는 경우 혹은 권리(權利)를 우리는 인정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 본질(本質)이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질 수 없다는 조건(條件)일 때만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사람들 틈에 끼여 살아 갈 수 있으려면 모든 인격 속에 제각기 존재하는 개성(個性)에 견딜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힘이란 본질이 본질(本質)로서 존재해 있는 점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며 그저 잠자코 견디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마디로 총괄(總括)한다면 사람은 온화하고 친절해야 합니다. 그 온화함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 친절함이 모든 갈등(葛藤)을 해결해줍니다. 얽힌 일을 풀어주고 곤란(困難)한 일을 수월하게 하고 슬픈 것을 즐거움으로 바꿔줍니다. 설사 출중하게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개변시키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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