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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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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공알바위와 선돌 마을 농경지에 '우뚝' 풍요의 神으로 숭앙

공알바위 “제천 음지만지 공알”

마을제의 때 쳐놓은 금줄로 둘러싸인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 안쪽에 자갈들이 쌓여 있다.제천은 산골이면서도 산골이 아닌 곳처럼 보인다. 충청북도 내륙 지방은 강원도와 인접하여 깊은 산골이 연상된다. 그러나 제천은 이웃한 단양과 달리 평야 지대가 발달해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신라 진흥왕 때 세운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오래 전부터 이곳이 농사 지대였음을 잘 보여준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론 제때에 파종을 하고 김매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농사력과 함께 적절하게 비가 내려야 한다. 그리고 병충해로부터도 큰 피해가 없어야 한다. 이런 모든 상황이 적절하게 맞춰질 때 풍요로운 수확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른 시기부터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해서 마을 제의(祭儀)를 올렸다.
제의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바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음지만실에 있는 ‘공알 바위’와 입석리의 선돌을 들 수 있다. 공알바위는 여자 성기를, 선돌은 남자 성기를 상징한다. 이런 상징물들이 멀지 않은 이웃 마을에 위치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제천은 물론 의림지로도 유명하지만,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는 그에 못지않게 유명하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알바위’로 약 150×100㎝의 크기의 알과 같은 바위가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앞에는 도로가 오래 전부터 나 있었고 철도가 바로 옆에 위치하여 시끄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만약 신이 살고 있었다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지나 않았을까 걱정될 지경이다. 바위 앞에는 지난 정월 마을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위의 안쪽을 유심히 쳐다보니 자갈들이 쌓여 있었다. 이것은 아들을 낳고 싶은 부녀자들이 넣어 놓은 흔적이다. 즉 개울 건너편에서 자갈 3개를 던져 한 개라도 이 바위 안쪽에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다.
마침 그곳에 도착했을 때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여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가 족히 20m나 떨어져 있어 바위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련이 요구될 만하다. 바위 안쪽으로 들어갈 만한 크기도 20㎝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안쪽에 자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여자들이 찾아와 아들 낳기를 간절히 기원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바위에 대한 제의로 동제가 있다. 음력으로 정월 초이튿날 자정에 포와 삼실과 등의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올린다. 이것은 원래 마을 전체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림 설명) 송학면 입석리의 선돌. 7개의 돌을 3단으로 쌓아 높이가 약4m에 달한다.
그런 점에서 ‘공알바위’는 개인의 치성 대상이면서 동시에 마을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공알바위’는 말 그대로 여성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함부로 건드리면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서 마을이 망한다고 한다. 그런 속설 때문에 바위를 시멘트로 메워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전해진다.
문제는 이 마을에서 이 바위를 용왕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마을 앞에서 만난 박한기(76)씨에 따르면 ‘공알바위’라는 명칭이 상스럽다고 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바위 앞의 안내에는 용암이라고 표기돼 있다. 표지판에는 “왕박산(王朴山)의 남맥인 마을 앞 안산(案山)이 마치 용의 형국을 이루었으므로 이 바위를 용암이라고 하고 일명 독바위라고도 일러왔다”고 적혀 있다. 참 혼란스러울 만큼 여러 명칭이 만들어졌다.
무도리를 떠나 38번 국도를 타고 평야 지대를 따라서 약 6 정도 내려가면 입석리에 도착한다. 여기에는 거대한 선돌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인 선돌의 규모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특히 하나의 돌이 아니라, 7개의 돌을 3단으로 쌓아 전체 높이가 약 4m 정도에 달한다. 둘레만도 세 사람이 팔을 펼칠 정도로 약 250㎝라고 한다.
선돌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원래는 논 복판에 있었는데, 1992년 농지개량을 하면서 50평에 입석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들의 형상을 보면 단순한 돌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을의 명칭이 입석리(立石里)인 것도 바로 이 선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돌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마고할미가 치마에 돌을 담아와 포개 놓았다고 하는 것이다. 왜 마고할미가 바위들을 이처럼 포개놓았는지 전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이들 사이로 천을 넣고 잡아 당겨도 쉽게 끌려 나올 정도로 중간에 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원래 선돌과 관련한 제의가 없었으나, 1974년부터 선돌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 축관과 헌관을 뽑아 음력 10월 초에 택일을 해서 제사를 올린다. 이 외에도 몸이 안 좋은 사람이 선돌에 제물을 차리고 비손을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자식이 없는 사람이 몰래 찾아와 이곳에서 비손하기도 한다. 현재도 선돌제 때 쳐놓은 금줄이 남아 있다.
입석리의 선돌은 그 거대함 때문에 생산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돌이 농경지의 한가운데 위치했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돌이 지닌 생산력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제천 ‘공알바위’와 선돌은 생산을 중시하는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우리 성문화의 상징으로 보여주는 데 매우 유효한 유물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에 대한 믿음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단지 누가 건드려 훼손할까봐 철책을 쳐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글 : 김종대 (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발췌 : 세계일보

堤川孔巖和仙石村農田上的"石墩"被崇仰爲富饒的神

被村祭時搭建的金鍊環繞的松鶴面舞島裏的空子巖。 裏面堆着碎石。堤川雖然是山溝,但看起來不像山溝。 忠清北道內陸地區與江原道相鄰,讓人聯想起深山溝。 但是堤川與鄰近的丹陽不同,平原地帶非常發達。 這種地形特徵充分說明了新羅振興王時期建立的堤川義林地和很久以前這裏就是農作地區。
爲了種地當然要及時播種和鋤草。 但是,隨着這種農業能力,降雨量應該適當地減少。 另外,病蟲害也不應造成大的損失。 只有當所有這些情況都恰到好處時,才能獲得豐饒的收穫。 爲此,我們從很早以前開始,村民們就齊心合力舉行村裏的祭禮。
在提議中,最引人注目的是位於堤川市松鶴面武道里陰地灣室的"孔巖"和立石裏的石子。 球石象徵着女性生殖器,而船身象徵着男性生殖器。 這些象徵物位於不遠的鄰村意味着什麼呢?
堤川和義林地固然有名,但松鶴面舞島上的空洞岩石卻不亞於它。 作爲目前代表韓國的"空殼巖",裏面有約150×100釐米大小的卵石。 但是,在這塊岩石前,道路從很久以前開始就已佈滿,而且鐵路就在旁邊,所以一直流傳着喧鬧聲。 真擔心,如果神在,會不會搬到別的地方去。 岩石前還保留着今年正月村祭時設置的金鍊。
留意岩石的內側,發現堆滿了碎石。 這是想生兒子的婦女們留下的痕跡。 也就是說,如果在小溪對面扔出3塊碎石,哪怕有一塊石頭進入岩石內部,也會生下兒子。
正好到達那裏時,有一個女兒的女人爲了生兒子正在扔石頭。 但這不是一件容易的事情。 由於距離足足有20米遠,要想進入岩石內部,必須進行高度的修煉。 因爲可以進入岩石內側的大小也不大,只有20釐米左右。 岩石內側堆滿了石子,可見很多女性前來祈願生子。
對這塊岩石的提議有洞祭。 正月初二午夜,農曆擺放大炮、麻實果等祭品,進行祭祀。 這本來是祈求全村平安富饒的。
(圖片說明)松鶴面立石裏的船磚。 7塊石頭堆成3層,高約4米。
從這一點看,"空子巖"既是個人治城的對象,同時也是給村民帶來豐饒收穫的神。
"空子巖"顧名思義,象徵着女性氣質。 據說,如果隨意觸碰這塊岩石,婦女們就會因爲出軌而毀掉村莊。 全國各地流傳着因爲這樣的俗語,用水泥填滿了岩石的故事。
問題是這個村子稱這個岩石爲"龍王巖"。 記者在村子前見到了樸漢基(音,76歲),他說"空子巖"這個名字俗氣,所以起了這個名字。 但是岩石前面的嚮導上標明瞭熔岩。 標牌上寫着:"王樸山南脈村前的安山形成了龍的形態,因此此岩石被稱爲龍巖,又名毒巖。" 真是令人困惑,出現了多個名稱。
離開舞島裏,沿着38號國道沿着平原地帶走6分鐘左右就能到達立石裏。 這裏豎着巨大的船磚。 相較於一般的船身規模,船身算是比較大的。 特別是7塊石頭不是一塊石頭,而是三層堆砌而成,整體高度約4米。 據說,周長約250釐米,可以展開三人手臂。
磚頭豎立在村口,與稻田爲界。 原本位於農田腹地,1992年農地改良時,可以在50坪土地上立石。 從他們的形象中可以看出,他們不是單純的石頭,而是信仰的對象。 村莊的名稱是立石裏,這也來源於該磚石。
有關於這塊石頭的傳說。 據說,馬姑奶奶在裙子上裝了石頭,並把它們疊起來。 我完全不知道爲什麼馬姑奶奶會這樣把岩石疊起來。 但是可以確認中間有縫隙,即使將布放入其中拉拽也很容易被拉出來。
據說,該村原本沒有關於船磚的建議,但從1974年開始舉行船磚祭。 以村老人會爲中心,選出畜館和憲館,在陰曆10月初擇日祭祀。 除此之外,還有身體不好的人在炕上準備祭品,進行拌手的情況。 特別是,沒有子女的人會偷偷來到這裏,在這裏進行比孫。 目前,還保留着先突制時期設置的金鍊。
立石裏的船磚因其巨大而生產能力突出。 特別是這塊石頭位於農耕地的正中,從很久以前開始,人們就相信石頭具有的生產力。 因此可以看出,堤川的"空子巖"和重視生產的農耕文化有着密切的關係。 特別是,這些文物是韓國性文化的象徵,是非常有效的遺物。 但是,現在人們對他們的信任正在逐漸衰退。 只是擔心有人觸碰破壞,正在淪爲應該用鐵柵欄保護的對象。 文章:金鐘大(文學博士,國立民俗博物館民俗研究科長) 摘錄:世界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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