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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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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재미와 시의 운률

图片信息 抛砖引玉

글: 장춘식
최근의 한 학회에서 필자는 소설의 취미성 약화와 시의 난해성이 소설독자와 시독자의 리탈을 야기한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바 있다. 이름하여 “문학위축의 장본인은 누구?” 포전인옥(抛塼引玉) 즉 문제를 던져 론의를 이끌어내려는 의도였는데 론의보다는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더 많은것 같아 이를 좀더 전개하여 포전인옥을 재시도해보고자 한다.

1. 문학위축의 장본인은 누구?
문학의 위축은 이제 주지하는 현실이 되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상황을 야기한 장본인은 누구인가?
그 장본인은 물론 한둘이 아닐것이다. 가령 도시화에 따른 집거지역 조선족인구의 류출이 중요한 원인이 될수가 있다. 대도시에 진출하여 아직 안정된 삶을 영위하지 못한 상황에서, 즉 먹고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문학은 사치가 되기때문이다. 여기에는 문화네트워크가 형성되지 못한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용화된 사회의 분위기 또한 문학의 위상을 떨어뜨리는데 한몫 단단히 한다 하겠다. “돈이 아즈바이요”라는 인식은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에서 향락하는 동물로 타락시키고있고 이런 인식은 독자층의 리탈뿐만아니라 문학저변을 축소시키기도 한다. 문학전공 대학생들이 창작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과 “글 쓰는 사람만 글을 읽는다”는 사회적 현상도 이를 확인시켜준다.
사람 사는 목적이 향락을 위해서가 아닌가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정확히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해야 하겠는데 향락도 행복의 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향락이 곧 행복인건 결코 아니다. 향락이 곧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것이 하나도 없다. 이점은 원숭이들을 보면 금방 알수 있다. 배불리 먹으면 서로 이를 잡아주고 털을 빗어주는것이 원숭이들의 향락이라 할수 있겠는데 사람이 아무리 맛있는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 타고 좋은 곳에서 여가를 즐기고…그래봤자 그건 원숭이들의 향락에서 별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하는것, 의식적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것 그것이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아닐까? 문학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상기의 문학위축의 원인들은 문학외적인것들이다. 그렇다면 문학자체에는 문제가 없는가? 우리 사회의 산업화, 도사회라고 하는 격변기의 상황때문에 우리는 흔히 문학외적인 원인을 확대해석하지만 사실 문학내적인 원인도 결코 간과할수 없다. 영화나 텔레비전드라마에 열중하는 오늘의 우리 삶을 보면 실용적인 사회라고 해도 사람은 여전히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다. 영상의 매력이 영화나 드라마의 인기에 큰 역할을 하는게 사실이지만 거기에도 문학적인 요소는 많이 있다. 다만 오늘의 인간은 지나치게 무거운것,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문학을 싫어할뿐이다. 수필이 상대적으로 잘 읽히고 수필작가가 많은것도 이를 방증하는 례가 될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소설의 취미성 결여와 시의 난해성을 문학위기의 내적인 원인으로 꼽는것이다.

2. 소설의 취미성과 의미부여
원래 소설은 취미성이 핵심적인 요소였다. 소설의 최초의 모태가 된 신화가 그렇고 설화가 그러하며 중국 고대의 《서상기》가 그렇고 그후의 《전등신화》, 《료재지이》가 그러하며 중세조선의 《금오신화》류 또한 그러하다. 유럽 최초의 소설집이라고 하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나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 등 중국의 고전명작들은 대체로 무협이나 사랑을 기본 모티프로 하며 서사적으로는 이야기의 긴박감을 유발하는 서스펜스 활용 등의 취미성을 소설구성의 핵심적인 요소로 삼고있다. 취미성속에 의미를 부여한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취미성은 점차 약해진 반면에 의미부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모더니즘소설에 와서는 취미성이 거의 사라지다싶이하고 의미부여에만 주목하였다. 심지어 “반소설”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소설이 쇠락하기 시작한것은 모더니즘에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물론 근대소설 즉 서구의 19세기말 20세기초의 소설이 20세기초반 동방에 전해지면서 소설의 전성기를 이루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이때까지는 여전히 취미성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던것이다.
조금 지난 얘기기는 하지만 필자는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였습니다》라는 소설을 3일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다 읽고도 이야기가 더 전개되지 않은것을 아쉽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설근의 《홍루몽》은 일주일간인가 10일간인가 읽었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한달 넘게 읽어야 했다. 요즘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도 조금 길면 읽기가 두려워진다. 평론가를 흔히 특수한 독자, “고급독자”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명색이 평론가라는 사람이 이러할진대 일반독자야 더 말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소설의 취미성 회복을 통해 독자층을 다시 불러와야 할 리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통속소설이 잘 읽히니 이제 본격소설을 포기하고 통속소설의 길을 가자는 말이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고싶다. 본격소설은 통속소설이 할수 없는 여러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기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이 되게 하는 소설의 역할은 통속소설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본격소설의 몫이다.
서사적으로 통속소설과 본격소설의 차이를 우연적구조와 사실적구조의 차이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말은 절반만 맞다. 기본적으로 신문련재 통속소설은 이런 구조를 가지고있다. 쉽게 말하면 텔레비전드라마형 통속소설은 기본적으로 이런 구조로 되여있다. 그러나 일부 정교한 구조를 가진 추리소설류는 통속소설이 분명하지만 우연적구조로만 해석하면 일부 해석이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본격소설과 추리소설류의 소설들은 무엇이 다른가? 필자는 력사성과 전형성의 결여라고 본다. 아무리 구조적으로 흠잡을데 없는 정교한 추리소설이라 해도 거기에는 력사성과 전형성이 빠져있다. 이야기의 긴장성과 속도감을 위해서는 력사성과 전형성을 희생할수밖에 없는것이다. 특히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였습니다》 등과 과거 우리 문예지들에서 많이 련재한바 있는 김성종의 추리소설들이 전형적이다. 이들 소설에서는 어쩌면 본격소설보다도 더 정교한 구조를 발견할수도 있다. 김진명의 소설에서는 심지어 일부 력사적인 배경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력사성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소설의 플롯 전개를 위한 얄팍한 배경설정 혹은 이야기전개의 한 요소가 될뿐이다. 그리고 전형성은 물론 빠져있다.
문제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 소설의 력사성과 전형성은 소설을 읽고 깊이 생각하게 하는, 혹은 우리 삶의 가치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상징이나 구조적인 장치들은 이러한 력사성이나 전형성내지는 삶의 핵심적인 가치들을 좀더 깊이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또다른 요소가 된다. 요는 통속소설의 핵심적인 요소인 취미성과 본격소설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문제성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통일시키느냐에 있을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광복이전 룡정출신으로 서울에서 많이 활동했던 소설가 박계주의 소설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박계주는 저 유명한 《순애보》와 같이 전형적인 통속소설을 쓰기도 하였지만 《유방》, 《사형수》, 《육표》, 《처녀지》, 《향토》와 같은 본격소설도 많이 창작했다. 박계주의 본격소설이 조금 특별한것은 이들 소설들에 흔히 통속소설에 많이 사용되는 요소들이 활용되였다는 점이다. 서스펜스에 해당되는 극한적상황 설정과 특이한 소재 선택이 대표적이다. 좀더 진일보의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가 한다.

3. 시와 노래 그리고 운률
시의 경우에도 전반적인 쇠락은 모더니즘 특히 초현실주의에서부터 시작되였다고 보여진다.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변화는 음악성의 상실이다.
시는 원래 음악과 공생해온 문학장르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라고 할수 있는 《구지가》가 그렇고 《공후인》이 그러하며 중국의 유명한 《시경》의 작품들도 사실은 민요였다. 한시는 음악이 없이 문인이 창작한것이지만 한시의 운률은 여전히 음악적인 흔적을 남겨놓고있다.
서구시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단계에서부터 정형시에 존재하였던 음악성과 운률이 약화되고있지만 이른바 “내재률”이라고 하는 운률이 남아있었고 그것이 의미부여와 더불어 이미지화함으로써 아직은 시의 본래 면모를 보존하고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에서는 그것이 파괴되고있고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오면 아예 시의 형식미를 해체하고 시본연의 기능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대신 모더니즘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오면서 시는 갈수록 난해해지고있다. 흔히 난해성을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시의 특징으로 보는것도 무리는 아니라 하겠다.
이렇게 보면 결국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이르러 시는 그 장르 본연의 과제를 외면하고 장르적인 개념자체를 파괴한셈이 된다. 한 문학장르가 형성되기까지는 반드시 그 나름대로의 존재리유를 가지고있을것이다. 수천년간 존재해온 그 원리를 깨버렸으니 이제 독자에게 외면되는것은 시간문제일뿐이 아닐까? 한국에서 김소월과 윤동주, 한용운이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꼽히는데는 리유가 있는것이다.

4. 대안은 없는가?
그렇다면 소설은 통속소설 혹은 대중소설을 따라가고 시는 정형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일부만 맞다. 즉 통속소설과 정형시에서 일부 배울부분이 있다는 말이 되겠다. 가령 통속소설에서 흔히 볼수 있는 감정조직과 서스펜스 등의 서사전략들을, 정형시에서는 음악성과 운률을 배워 본격소설이나 현대시에 리용할수 있다면 상당부분 리탈했던 독자들을 다시 불러올수 있을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작가 모두가, 혹은 작품 모두가 그래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늘의 독자는 과거에 비해 많이 변화되였다. 지식수준도 크게 향상되였고 개인적인 기호도 다양해졌으며 새로운 미디어들 특히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할수가 있다. 따라서 이들 다원화된 독자층이 요구하는 작품의 형테도 물론 다양하고 다원적이다. 따라서 작품도 고차원적인것, 저차원적인것, 그 중간 수준의것 등 다차원적인 형태로 만들어져야 다양한 독자층의 요구에 만족을 줄수 있는것이다.
또한 소설의 통속성이나 시의 음악성, 대중성 또한 옛날로 그냥 되돌아가는 형태로는 오늘날 독자의 수요에 만족을 줄수 없을것이다. 한차원 고급화된 통속성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 한다. 이것을 력사성, 전형성 등 의미부여를 포함하는 통속화의 전략이라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필요한것은 작품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얻을수 있기때문이다. 물론 그 즐거움의 형태는 여러 차원이겠지만 작품 읽는 즐거움이라는 요인은 문학이 존재할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리유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실험이나 추구도 가치가 있는것이다. 우리 문학작품이 좀더 많은 독자에게 즐거움을 줄수 있을 때 문학은 위기에서 탈출할수 있지 않을까 한다.


小说的趣味和诗的韵律


文章:张春植
在最近的一次学会中,笔者曾提出"小说的趣味性弱化和诗歌的难解性是否导致了小说读者和诗读者的脱离?" 其名曰"谁是文学萎缩的罪魁祸首",其意图是抛出"莆田银玉"即"问题引出论议",但比起论议,反而更有可能引发误会,因此想进一步展开这一过程,重新尝试莆田银玉。

1.谁是文学萎缩的罪魁祸首?
文学的萎缩已经成为众所周知的现实。 那么造成今天状况的罪魁祸首是谁?
其罪魁祸首当然不止一两个。 例如,随着城市化,居住地朝鲜族人口的流出成为重要原因。 因为进入大城市后,在还没有过上安定的生活的情况下,即在连生计都困难的情况下,文学就会成为奢侈。 这里没有形成文化网络也是一个重要原因。 实用化的社会氛围也会对降低文学的地位起到很大的作用。 "金钱就是阿兹拜约"的认识正在从思考人类的动物堕落为享乐的动物,这种认识不仅削弱了读者的脱离,也缩小了文学底层。 文学专业大学生对创作不感兴趣的事实和"只有写作的人才能读书"的社会现象也证明了这一点。
也许有人会问,人的生活目的不是为了享乐。 但事实并非如此。 应该说是为了幸福而生活,虽然享乐也是幸福的一面,但享受并不意味着幸福。 如果说享乐就是生活的终极目的,那么人类和动物没有什么不同。 这一点一看猴子就知道了。 如果吃饱了,互相抓住牙缝、梳毛,可以说是猴子的享乐,人吃再好吃的东西、穿好衣服、住好房子、坐好车,在好地方享受闲暇时光…即便如此,它也摆脱不了猴子的快乐。 思考,有意识地赋予生活意义,这不就是人与动物的差异吗? 文学的价值就在这里。
当然,上述文学萎缩的原因除了文学以外。 那么文学本身就没有问题吗? 由于我国社会的产业化、道社会等剧变期的情况,我们经常扩大解释文学外因,但实际上文学内因也绝对不能忽视。 从热衷于电影或电视剧的韩国今天的人生来看,即使是一个实用型社会,人们依然是思考的动物。 虽然影像的魅力对电影或电视剧的人气起着很大的作用,但是其中也有很多文学要素。 只是今天的人类不喜欢过于沉重、令人疲惫的文学。 随笔相对较好读、随笔作家较多也是很好的佐证。 因此,笔者认为,小说缺乏兴趣和诗歌的难解性是文学危机的内在原因。

2. 赋予小说的兴趣和意义
原来,小说的兴趣是核心要素。 小说最初的原型神话也是如此,传说也是如此,中国古代的《西厢记》也是如此,之后的《电灯神话》、《廖在志异》也是如此,中世纪朝鲜的《金乌神话》也是如此。 被称为欧洲最早的小说集的博卡齐奥的《戴卡梅隆》、《三国演义》、《水浒传》、《西游记》、《红楼梦》等中国古典名著大多以武侠或爱情为基本主题,在叙事上运用引发故事紧迫感的悬念等趣味性是小说构成的核心要素。 下一个问题就是赋予兴趣爱好的意义。 进入近代后,兴趣逐渐减弱,但赋予意义占据重要位置,来到现代主义小说后兴趣几乎消失,只关注赋予意义。 甚至还出现了"反小说"的概念。 小说最终开始衰落,这不正是从现代主义开始的吗? 当然,近代小说即西欧19世纪末20世纪初的小说在20世纪初传到东方,确实形成了小说的全盛期,但到目前为止,兴趣仍然是小说的重要因素。
虽然有些过时了,但笔者认为金镇明的《无穷花开了。可惜这部小说读完不到3天的时间,故事就没继续展开。 曹雪芹的《红楼梦》读了一周还是十天,托尔斯泰的《战争与和平》读了一个多月。 最近,不是长篇小说,而是短篇小说,稍微长一点就怕读。 通常用特殊的读者和"高级读者"来形容评论家,但名义上是评论家的人却如此,普通读者岂不是更没有说的余地吗? 通过恢复小说的兴趣,重新吸引读者的理由就在这里。
那么,如果问我"通俗小说读得好,现在放弃正式小说,走通俗小说之路"的话,我想回答说:"不是那样。" 因为正式小说起到了通俗小说无法完成的各种重要作用。 小说成为人们心目中的动物,虽然其作用与通俗小说不无关系,但基本上还是要由正式小说来扮演。
在叙事上,把通俗小说和正式小说的差异定义为偶然结构和现实结构的差异的情况很多。 但是这句话只有一半是对的。 基本上,新文联材通俗小说具有这样的结构。 简单来说,电视剧型通俗小说基本上就是这样的结构。 但是,具有部分精巧结构的推理小说类虽然通俗小说很明确,但如果只将其解释为偶然结构,则存在部分解释不正确的情况。 那么正式小说和推理小说类的小说有什么不同呢? 笔者认为,这是缺乏历史性和典型性的。 即使是从结构上无可挑剔的精巧推理小说,其缺乏历史性和典型性。 为了故事的紧张性和速度感,只能牺牲历史性和典型性。 特别是金镇明的《无穷花开了》等过去在韩国文艺杂志上连载过的金成宗的推理小说非常典型。 在这些小说中,也许能发现比正式小说更精巧的结构。 金镇明的小说中甚至可以感受到部分历史背景。 但这不是为了历史性,只是为了小说情节的展开而设定肤浅的背景或展开故事的一个要素而已。 而且不具有典型性。
用"问题性"来形容小说的历史性和典型性,是让人阅读小说、深思、思考我们人生价值的核心要素。 象征或结构性装置成为更深刻地感受和思考这些具有历史性和典型性的人生核心价值的又一要素。 "要"将通俗小说的核心要素趣味性和成为正式小说核心要素的问题性有机地统一起来。
从这一点来看,光复前龙井出身、曾在首尔活动过很多的小说家朴启柱的小说具有很大的启示意义。 朴启柱曾写过著名的《纯情谱》等典型的通俗小说,但也创作过《刘邦》、《四嫂》、《六杓》、《处女地》、《乡土》等正式小说。 朴启柱的正规小说比较特别的是,这些小说中经常使用在通俗小说中的要素。 具有代表性的是,相当于悬疑的极限状况设定和特殊的素材选择。 也许还需要进一步的研究。

3. 诗歌还有韵律
从城市的情况来看,整体的衰落是从现代主义特别是超现实主义开始的。 现代主义的核心变化是音乐性的丧失。
诗歌本来是和音乐共生的文学体裁。 堪称我国文学史上历史最悠久的诗的《求知歌》如此,《公侯人》如此,中国著名的《诗经》的作品其实也是民谣。 汉诗没有音乐,是文人创作的,但汉诗的韵律仍然留有音乐痕迹。
从西方诗的影响形成的自由诗阶段开始,定型诗中存在的音乐性和韵律逐渐弱化,但保留了所谓的"内在率"的韵律,赋予了它的意义和形象,至今保留了诗的本来的面貌。 但在超现实主义中,它正在遭到破坏,到了后现代主义时代,干脆破坏诗的形式美,破坏诗本演的功能。 但是,随着现代主义特别是后现代主义时代的到来,诗歌变得越来越难懂。 通常把难解性视为现代主义或后现代主义的特征也不是没有道理的。
如此看来,最终到了现代主义或后现代主义时代,诗歌忽视了其体裁本身的课题,破坏了体裁概念本身。 在形成汉文学体裁之前,一定有其自身的存在理由。 既然打破了存在数千年的原理,那么现在被读者冷落只是时间问题。 在韩国,金素月、尹东柱、韩龙云被选为最受欢迎的诗人有李有。

4. 没有对策吗?
那么,也许有人会问:"难道小说要跟着通俗小说或大众小说走,诗要回到定型诗吗? 这话说得一小撮合不拢嘴。 也就是说,在通俗小说和定型诗中,有部分值得学习的地方。 例如,如果可以学习通俗小说中常见的情感组织和悬念等叙事战略,在定型诗中学习音乐成果和韵律,在正式小说或现代诗中加以利用,那么可以重新唤起在很大程度上被掠夺的读者。
当然,这并不是说所有作家或作品都应该如此。 今天的读者比过去变化很大。 知识水平大幅提高,个人喜好也多种多样,尤其可以通过电视或网络接触到各种信息。 因此,这些多元化的读者群体所要求的作品的类型当然也多种多样、多元。 因此,作品也要以高层次、低层次的、中间水平的等多维形态制作,才能满足读者群的需求。
另外,小说的通俗性、诗歌的音乐性、大众性,如果只是单纯地回到过去的形态,就无法满足当今读者的需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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