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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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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하후연(夏侯淵)

[삼국지 인물사전 - 하후연(夏侯淵)] 


하후연(夏侯淵,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묘재(妙才)이며, 패국 초현 사람이다. 무예(武藝)가 뛰어나 전장에서 위용을 떨쳐 조조(曹操)의 총애를 받았으며 하후연의 아내는 조조(曹操)의 고종사촌 누이동생이라고 한다.

생애
초기 행적 : 조조의 가신 하후돈(夏侯惇)의 동고조(同高祖) 팔촌 동생이다. 조조가 고향에 있을 무렵 현령(縣令)을 어긴 사건을 일으키는데 하후연(夏侯淵)이 대신해 벌을 받고 나중에 조조에게 구출(救出)된다. 그리고 세력을 키워 자신을 벌주었던 그 현령을 죽인다. 

조조를 따라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장안(長安)으로 천도하는 동탁(董卓)을 추격해 이각(李傕)의 군사와 싸우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만다. 그리고 패주하는 조조와 조홍(曹洪)을 습격하려는 서영(徐榮)의 군대를 맞아 함께 막아낸다.

그 후 조조가 거병(擧兵)하자 하후연은 별부사마(別部司馬)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관도 전투에서 원소(袁紹)를 격파한 후 연주, 예주, 서주의 군량미(軍糧米)를 관리하며 식량이 부족(不足)했던 조조군에게 차질 없이 양곡을 수송(輸送)하여 조조군의 세력을 회복(恢復)시켰다.

창희(昌豨)의 모반과 황건적(黃巾賊) 서화, 사마구(司馬倶)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공을 세워 209년(건안 14년) 행령군(行領軍)으로 승진했다. 기습공격이 장기였던 하후연은 언제나 적이 예상치 못했을 때 공격했기 때문에 ‘하후연(夏侯淵)은 사흘에 5백 리, 엿새에 1천 리를 간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손권(孫權) 정벌에서 돌아온 후, 조조는 하후연(夏侯淵)에게 여러 장수를 지휘하도록 했다. 태원군의 도적(盜賊)을 토벌할 때는 서황(徐晃)을 지휘해 두목 상요를 죽였다.

서북 전역
건안 16년(211년), 위남에서 한수(韓遂)과 싸웠으며 주령(朱靈)을 이끌고 유미, 견저를 평정하고, 양추(楊秋)의 항복을 받았다(동관 전투). 212년 장안에 주둔해 남산의 도적을 토벌(討伐)할 때에는 주령과 노초 등을 지휘하여 적을 항복시켰다. 또한 한수와 마초(馬超)의 잔당 양흥(梁興)을 토벌해 박창정후에 봉해진다.

후일 봉기한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러 갔지만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마초(馬超)에게 패했기 때문에 퇴각하고 만다. 214년 조구와 윤봉 등이 마초를 살해하려고 모의(謀議)하고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呼應)했고 조구 등은 마초를 속여 강서 공격에 나서게 만든 후, 마초의 처자를 살해하고 그를 한중(漢中)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마초는 다시 세력(勢力)을 회복하여 기산을 포위하고 하후연(夏侯淵)은 강서 등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때 여러 장수가 조조(曹操)의 지시를 기다리려고 했지만 하후연은 조조의 재가를 받았을 때는 이미 늦는다며 출진하여 마초를 격파(擊破)한다. 그 기세로 많은 강족(羌族)을 토벌하고 수많은 전리품(戰利品)을 확보했다. 

현친현에 주둔한 한수가 싸움을 피해 달아나자 의논이 한수를 공격하거나 흥국성의 저족(氐族)을 공격하는 쪽으로 갈렸다. 하후연(夏侯淵)은 양쪽 다 직접 맞서 싸워서는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한수 휘하의 강족들의 가족이 있는 장리를 공격하여 한수를 불러들이고 격파했다. 그 기세(氣勢)를 몰아 흥국성을 공격하여 왕 천만은 도주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항복(降伏)을 받았다. 

고평에서는 흉노의 일종 도각을 공격해 그 군자를 거두었다. 이러한 공로로 가절(假節)을 받았다. 조조의 명령을 받아 포한현에서 하수평한왕을 자칭하던 송건을 1달 만에 격파하고 송건과 그의 관원들을 참수(斬首)했다. 216년에 영읍이 합계 8백 호에 이르게 된다. 장안으로 귀환한 후 하후연(夏侯淵)이 하변에 있던 무도군의 강족을 공격해 곡물 10만 석을 몰수(沒收)하자 조조는 이후 강족을 만날 때는 언제나 하후연을 위협 수단(手段)으로 삼게 된다.

한중 전투 중 전사
장로(張魯)가 항복하고 한중이 평정되자 도호장군을 겸하여 파군을 평정(平定)하고 조조가 돌아가자 한중의 수비를 맡고 정서장군으로 임명(任命)되었다. 218년 유비(劉備)가 양평관에 포진(布陣)하자 여러 장수를 이끌고 이를 저지(沮止)하며 서로 대치(對峙)하였다. 

다음해 정월 유비(劉備)가 면수를 건너 정군산에 진을 치자 그 땅을 다투었다. 유비가 하후연(夏侯淵)의 진지를 밤에 습격해 불을 지르자 동쪽 수비를 장합(張郃)에게 맡기고, 자신은 남쪽 수비에 나섰는데 장합(張郃)이 유비와 싸워 불리했으므로 자기 병사를 반으로 나누어 그를 구원하러 보냈다. 비록 하후연 휘하의 병사는 정예(精銳)였으나 유비가 보낸 황충(黃忠)의 공격을 받아 유비군에 의해 전사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몇몇 판본에서는 하후돈(夏侯惇)의 동생이라고 나오는데 정사에서 하후연(夏侯淵)은 그냥 하후돈의 집안 동생일 뿐 친동생은 아니었다. 모종강본(毛宗崗本)에서는 집안 동생이라고 나온다.

하후돈(夏侯惇)과 더불어 위나라의 더블 펀치로 묘사된다. 그에 따라서 여남의 유비 공격에서는 유비를 아군으로 한 황건적의 잔당(殘黨)인 공도를 토벌하기도 하는 추가 장면이 생겼다. 하지만 하후돈에게 임팩트를 몰아줌에 따라 2인자 포스가 물씬나는 악역 중간보스 정도의 인상(印象) 밖에 없다.

동작대 완공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조휴, 문빙, 조홍이 차례로 과녁에 화살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러자 장합(張郃)이 일명 파르티안 궁법이라고 불리는 번신배사를 구사해서 또 과녁에 명중시켰다. 네 발의 화살이 가지런히 홍심에 모여 있었는데 하후연이 나선다. 하후연(夏侯淵)도 번신배사를 구사하여 활을 쏘아 과녁에 꽂힌 4개의 화살 한가운데를 꿰뚫는 솜씨를 선보였다. 

연의에서 하후연(夏侯淵)이 활 쏘는 장면은 이것뿐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으로 인해 하후연은 2차 창작물(創作物)에서 활에 능하다는 설정이 붙게 된다. 덕분에 나중에 황충과는 궁대 궁 대결(對決)이 되었다. 참고로 정사에서 하후연의 궁술에 대한 언급(言及)은 전혀 없다.

연의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조조(曹操)가 관로의 점괘(占卦)를 듣는 장면이 있는데 관로는 '삼팔종횡(三八縱橫) 황저우호(黃猪遇虎) 정군지남(定軍之南) 상절일고(傷切一股)'라는 정체불명의 시를 한 수 써 준다. 이는 그냥 해석하면 '3과 8이 종횡하면 누른 돼지(夏侯淵)가 호랑이(黃忠)를 만나 정군산 남쪽에서 다리 하나가 부러진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3과 8을 곱하면 24, 즉 건안 24년이 되고 누른 돼지는 돼지해인 기해년, 호랑이는 범의 달인 정월을 의미하니 하후연이 죽는 시기까지 암시(暗示)하고 있다.

또 연의에서 추가된 전공이 있다. 장로를 정벌할 때 하후연(夏侯淵)과 장합이 선봉으로 가던 중 양앙과 양임의 기습(奇襲)에 패한다. 다시 안개 속에서 습격하여 양평관 점령(占領)에 공을 세우고 창기와 양임을 벤다. 이때까지는 동작대 이벤트를 제외하면 하후돈에게 다소 묻혀있던 하후연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한 묘사(描寫)다. 

마치 스토리상 곧 죽게 될 하후연(夏侯淵)에게 주는 보상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서 하후연을 어느 정도 띄워줘야 곧 전개될 한중공방전(漢中攻防戰)이 좀 더 흥미진진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슷하게 장합도 전사하기 직전에 제갈량(諸葛亮)이 띄워주는 대목이 있다.

한중 공방전 와중에는 난폭(亂暴)하며 지모가 모자란 장수로 묘사되어 상당히 안습(眼濕)한 행보를 보여준다.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가 '하후연(夏侯淵)은 성급하니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라는 누군가의 참소(讒訴)를 듣고 글을 써서 하후연에게 보내었다. 

글에는 "경의 '기묘한 재주'를 보고자 하니 신중(愼重)하게 전투하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저 기묘(奇妙)한 재주를 한자로 쓰면 묘재(妙才), 즉 하후연의 자다. 오히려 이 글이 기폭제가 되어 하후연(夏侯淵)이 더 날뛰었다. 다만 몇몇 판본에선 이 글을 보고 나름대로 느낀 게 있었는지 계략을 짜서 황충(黃忠)의 부하 장수인 진식을 사로잡기도 한다.

황충(黃忠)과의 일기토에선 접전을 이루면서 황충을 물리게 하는 등 촉의 명장들과의 일기토를 했을 때 꿀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앞서 장합이 장비한테 내리 깨지고 온 것 때문에 장합(張郃)의 충고를 무시하고 패기 있게 기마병 몇 기와 진군했지만 황충(黃忠)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 그리고 조조(曹操)는 하후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위를 잃었을 때만큼 슬퍼하면서 직접 넋을 달래기 위해 정군산으로 출전(出戰)하게 된다.

평가
조조 휘하의 친족라인 장수들 가운데 하후연(夏侯淵)만큼 평가가 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그를 비판(批判)하는 이들은 '무공만 앞세운 백지장군'이라는 평가를 내세운다. 반면 그를 옹호(擁護)하는 이들은 '하후연은 조인과 함께 충분히 조조 휘하 친족 장수 라인의 투톱을 차지할만하다'고 평한다. 본 문서도 이런 관점에서 긍정론(肯定論)과 부정론이 혼합되어 있고 간간히 수정전쟁이 발생하고 있다.

일단 양측의 의견을 종합(綜合)해 결론을 내자면 분명히 역량은 뛰어났으며 경험도 충분한 장수였으나 용맹에 의존하고 너무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선봉에 서는 일이 많았기에 전사당한 비운의 장수이다. 변방의 도적이나 지방군벌, 반란군을 제압하는 것에 많은 성과를 낸 용장(勇將)이라는 점이다. 

특히 강적 마초(馬超)가 있는 관중 일대를 깔끔히 평정한 것은 지대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차남인 하후패(夏侯霸)도 아버지처럼 직접 전선에 나와서 싸우는 방식을 선호(選好)했다. 아버지가 직접 전선에 나섰다가 결국 화를 자초(自招)했다는 점을 보면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이런 식으로 장수 교육을 받았거나 부자가 선천적(先天的)으로 이런 식의 싸움이 맞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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