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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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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양산박 두령 지살성(地煞星) 진삼산(鎭三山) 황신(黃信)

[圖片信息  지살성(地煞星) 진삼산(鎭三山) 황신(黃信)] 


저자 시내암(施耐庵)은 중국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소설가로 수호전(水滸傳)의 저자이며 이름은 자안(子安)이며 자는 내암이다. “고소(姑蘇): 소주(蘇州)” 사람으로 상급 관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소주에 돌아와 문학 창작에 전념(專念)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작가 나관중(羅貫中)과 친분을 쌓기도 하였다. ”수호전“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현재는 대체로 민간전승(民間傳承)을 기초로 그가 예술적으로 각색(脚色)하여 완성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4대 기서(奇書) 중의 하나인 ”수호지(水滸誌)“ 또는 ”수호전(水滸傳)“이라고도 하는 이 소설은 중국의 민중(民衆)이 사랑하고 키워 온 대중문학(大衆文學)의 자랑이다.

황하(黃河)나 양자강(揚子江)이 광활한 대륙을 유구히 굽이쳐 흐르는 동안 수많은 지류를 품안에 모으듯이 남송(南宋) 이래로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이 만들어 온 여러 이야기가 민중들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어 커 나가다가 ”수호지(水滸志)“라는 형식의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이다.

”수호지(水滸志)“에는 탄압받는 백성(百姓)의 절망적인 한숨과 좌절(挫折)이 있고 부패와 부정에 항거(抗拒)하는 열화 같은 분노와 반항(反抗)이 있다. 썩어 빠진 조정에 분연히 반기를 들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통쾌하게 응징(膺懲)하는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의 활약은 백성들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고 그들의 울분(鬱憤)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영웅담 형식(英雄譚形式)을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본질에 흐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힘없고 가련한 백성의 애환(哀歡)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청조(淸朝)에 들어와서는 통치자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금서(禁書)로 묶이는 수난(受難)을 당하기도 했다.

수호전(水滸傳)의 줄거리는 송나라 휘종(徽宗) 때(1119~1125) 송강(宋江)의 무리 36인이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降伏)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다 36인의 인물전이 덧붙여지고 다시 72인의 호걸들이 추가되면서 명나라 초기에 대략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수호지(水滸志)“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지살성(地煞星) 진삼산(鎭三山) 황신(黃信)의 별호는 진삼산(鎭三山)이며 지살성(地煞星)에 상응한다. 본래 청주(靑州)의 병마도감(兵馬都監)으로서 한 자루 상문검(喪門劍)을 잘 썼으며 청주에는 청풍산(淸風山)·이룡산(二龍山)·도화산(桃花山)이 있어 산세가 거칠고 도둑들이 들끓은 바 있어 그가 세 산의 도둑떼를 다 없애겠다고 큰소리치는 터에 진삼산(鎭三山)이란 별호를 얻게 되었다.

청풍채(淸風寨)의 문관지채(文官知寨) 유고(劉高)의 아내가 송강(宋江)을 모함한 화영(花榮)이 송강을 구해 청풍산(淸風山)으로 되돌려 보냈으나 유고가 복병을 숨겨두어 송강을 붙잡고 모용지부(慕容知府)에게 화영이 청풍산의 도적떼와 내통(內通)하였다고 보고하니 모용지부가 확인 차로 그를 내려 보내었다. 유고(劉高)의 달램에 넘어간 그가 화영(花榮)과 유고를 화해(和解)시킨다는 명목으로 화영을 대체로 끌어들여 사로잡고 호송(護送)하다 연순(燕順), 왕영(王英), 정천수수(鄭天壽) 세 두령이 덤비자 싸우다 힘에 부쳐 송강(宋江)과 화영을 놔두고 물러났다. 후에 진명이 와서 화영과 함께 잡아가던 죄수가 송강임을 알려주고 청풍산(淸風山) 패거리에 합류(合流)할 것을 권하자 별 망설임도 없이 응했고 대군이 몰려오자 진명(秦明), 화영(花榮) 등과 함께 양산박에 들어가 몸을 담았다.

108인이 다 모인 뒤 양산박(梁山泊)의 열여섯 마군 소표장(小彪將) 겸 척후두령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방납(方臘)을 토벌한 후에 다시 청주(靑州)로 돌아가 도통제(都統制)로 부임하였다.

진삼산(鎭三山) 황신(黃信)은 본래는 청주(靑州)의 병마도감(兵馬都監) 출신으로 청주의 군관인 진명(秦明)에게서 무술을 배웠다. 별명은 '진삼산(鎭三山)'으로 자신이 이룡산(二龍山), 청풍산(淸風山), 등운산(騰雲山) 등의 세 곳의 산의 산적들을 혼자서 쓸어버릴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린 것에서 나온 별명이다. 하지만 진삼산은 커녕 진일산(鎭一山)도 못할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송강(宋江), 화영(花榮)을 잡아들여 끌고 가는 도중에 청풍산 패거리에게 수적인 열세로 당했다고는 하지만 전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도망간다.

자신의 스승인 진명이 송강(秦明), 화영(花榮), 청풍산(淸風山) 패거리 때문에 관군에게 궁지(窮地)에 몰려 그들에게 합류하자 당연한 듯이 진명의 설득(說得)으로 그들에게 합류하여 그대로 양산박으로 들어갔다.

양산박으로 들어간 이후 비중(比重)은 공기로 전락하였으나 요나라 정벌(征伐) 때 이전과는 다르게 임충(林冲)의 부장으로 활약하여 비중이 올라가는 듯 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요(遼)나라 정벌이 끝나자 다시 공기로 전락한다.

방납(方臘)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옛 임지(任地)였던 청주(靑州)의 도통사(都統使)로 부임한다. 그러다가 수호후전에서는 장경이 황신(黃信)의 모습으로 변장해 관군을 습격(襲擊)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호송이 되었다가 양산박 옛 동료들에게 구출되어 함께 섬라국(暹羅國)으로 향한다. 수호지(水滸志)의 72지살성 목록에서 주무(朱武) 다음인 2번째로 올라와있다. 황신(黃信)은 수호지에서도 황신이었다.

황신(黃信)은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에 등장하는 인물로 108성 중 38위이자 지살성(地煞星)의 지살성(地煞星)에 해당한다. 평소 청풍산(淸風山)·이룡산(二龍山)·도화산(桃花山)의 산적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해 진삼산(鎭三山)이라는 별호로 불리며 상문검(喪門劍)이라는 장검(長劍)의 명수이다.

청주(靑州)의 병마도감(兵馬都監)이다. 어느 날 청풍채(淸風寨)의 장관(長官) 유고(劉高)의 아내가 청풍산(淸風山)의 산적인 왕영(王英)에게 붙잡혀 있다가 송강(宋江)에 의해 풀려난 뒤 유고에게 청풍채의 다른 장관인 화영(花榮)을 만나러 온 송강이 산적(山賊)이라고 해 송강이 유고에게 붙잡혔다. 이후 유고는 송강 편을 들어준 화영(花榮) 또한 황신을 시켜 붙잡으려 했으며 평소 산적을 싫어했던 황신(黃信)은 이에 분노해 병사 50여명을 이끌고 화영을 방심(放心)시킨 뒤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유고(劉高)는 두 사람을 청주로 연행(連行)하려 하였으나 황신이 이끄는 호송대가 청풍산(淸風山)을 지나가게 되자 청풍산의 산적인 연순(燕順), 왕영(王英), 정천수(鄭天壽)가 호송대를 공격(攻擊)했다. 황신은 이에 저항(抵抗)하려 했지만 세 사람의 공격을 한 번에 당해낼 수 없어서 도망쳤고 청풍산 산적들은 송강과 화영을 구출한 뒤 호송대(護送隊)와 같이 있던 유고를 살해했다. 이후 군정장관(軍政長官)인 진명(秦明)이 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지형을 이용해 이를 물리쳤으며 송강(宋江) 일행은 진명(秦明)을 붙잡아 자신들의 동료(同僚)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진명이 군인으로서의 자존심(自尊心)을 갖고 이를 거부하자 풀어주었다. 하지만 청주(靑州)의 태수(太守)인 모용언달(慕容彦達)이 진명의 가족들을 살해하고 진명을 죽이려 하자 진명(秦明)은 다시 청풍산(淸風山)으로 돌아와 산적의 일원이 되었다.

그 뒤 진명(秦明)이 황신에게 청풍산(淸風山) 산적의 일원으로 합류해 달라고 설득했으나 황신(黃信)은 자신이 싫어하는 산적에 합세(合勢)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산적의 두령이 인망(人望)이 높기로 유명한 송강(宋江)이라는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전부 유고(劉高)가 꾸민 계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결국 자신이 산적만도 못한 관리 밑에 있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송강 일행에게 사죄(謝罪)한 뒤 청풍산 산적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송강 일행이 화영(花榮)의 가족들을 구출하고자 청풍채(淸風寨)를 습격하자 황신(黃信)은 요새 내부에서 적군을 혼란에 빠뜨린 뒤 송강 일행을 맞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뒤 동경(東京)에서 토벌대가 올 것을 우려해 송강은 청풍산의 산적들을 이끌고 양산박(梁山泊)으로 향했으며 도중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송강(宋江)이 제외된 채 나머지 일행들은 양산박(梁山泊)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송강(宋江)이 관에 자수해 강주(江州)로 유배된 뒤 처형(處刑)될 위기에 처하자 황신(黃信)은 다른 양산박 산적들과 함께 유배지로 가 송강을 구출했다. 그 뒤 축가장(祝家莊)과의 전투에서 선봉에 나섰으나 적군이 만들어 놓은 미로로 인해 함정(陷穽)에 빠져 적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된 뒤 양산박 동료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고당주(高唐州)에서의 전투 당시에는 요새(要塞)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호연작(呼延灼)과의 싸움에서는 적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해 당분간 치료(治療)에 임했다.

108성 집결 이후에는 기병군(騎兵軍) 소표장(小彪將)의 필두를 맡았으며 손립(孫立)과 함께 임충(林冲)의 부장으로서 활약하였다. 이후 왕경(王慶)와의 전투에서 반충(潘忠)을 죽였으며 방납(方臘)의 난을 진압(鎭壓)하는 과정에서 곽세광(郭世廣)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호각(互角)을 다툰 뒤 흡주(歙州)에서 손립(孫立) 등과 함께 왕인(王寅)을 쓰러뜨리는 전공을 세웠다. 방납(方臘)의 난을 평정한 뒤 양산박 군이 해산(解散)한 이후에는 관직(官職)이 수여되었으며 방납 토벌(方臘討伐) 중 전사란 진명(秦明) 대신 청주의 군정장관(軍政長官)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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