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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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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중강경책의 배후인물인 중국계 미국인 위마오춘(余茂春)

[사진 = 폼페이오 정책참모 위마오춘(余茂春)] 


난카이대학(南開大學) 역사학과 1983년 졸업단체사진(卒業團體寫眞)의 마지막 줄 왼쪽에서 첫 번째 자리에 안경을 쓰고 서 있는 남학생은 겉으로 보기에 약간 어색하고 딱딱한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바로 이 졸업사진의 귀퉁이에 서 있든 눈길을 끌지 않던 인물이 지금 미국(美國)의 대중정책(對中政策)의 대전환을 이루는 막후인물(幕後人物)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위마오춘(余茂春)의 현직은 미국해군학원(美國海軍學院)의 교수이다. 국무장관(國務長官) 폼페이오가 가장 의지하는 막료(幕僚)이다. 이 이름 없던 중국계 미국인이 돌연 주목을 받게 되면서 그의 신세내력(身世來歷)도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위마오춘(余茂春)은 1962년 충칭(重慶)에서 태어났다. 1979년 그가 17살때, 용촨중학(永川中學, 중국은 중학교를 초중, 고중으로 나누며 우리나라의 중학교, 고등학교에 해당한다)의 대학입시수석(大學入試首席)의 자격으로 난카이대학(南開大學) 역사학과에 입학한다. 필자의 가까운 친구가 마침 위마오춘과 동창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난카이대학(南開大學)은 중국개혁개방초기에 대학랭킹은 아주 앞서 있었다. 대체로 북경대학(北京大學), 청화대학(清华大学) 바로 다음이었다. 1979년 광둥성(廣東省)에서 5명의 문과생을 뽑았고 쓰촨에서도 겨우 5명을 뽑았는데 위마오춘이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때 충칭은 아직 쓰촨성(四川省)에 속해 있었다.

위마오춘(余茂春)의 당시 학업성적에 대하여 물어보니 학업성적이 아주 두드러지지는 않았고 중상(中上)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는 반 간부를 지냈지만 그 당시 아주 인기 있던 '조직에 선을 대지는' 않았다. 즉 공산당원(共産黨員)은 아니었다. "위마오춘은 호승심(好勝心)이 강한 성격이었다. 동창생이자 이글의 필자인 포발(鮑渤)이 한번은 그의 영어발음이 정확치 않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는 바로 포발에게 광둥사투리가 있다고 반격(反擊)했었다." 1985년 위마오춘은 미국으로 간다.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석사학위(碩士學位)를 받는다. 1994년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에서 박사학위(博士學位)를 받는다. 그 후 직접 미국해군학원으로 가서 교수(敎授)가 된다. 주로 현대중국과 군사사(軍事史)를 가르쳤다.

트럼프가 취임하고 나서 미중관계가 급전직하(急轉直下)한다. 2017년 발표한 ‘국가안전전략보고서(國家安全戰略報告書)’는 중국을 '전략적 경쟁상대국'으로 지정했다. 2018년에 발표된 ‘국가안전략보고서’에서는 다시 한 번 중국이 최대의 위협이라고 언급한다. 특히 2020년에 들어서면서 미중관계는 수교 이래 최저로 내려간다. 그 원인은 복잡하다. 그중 한 가지 견해는 바로 트럼프의 팀 내에 '도룡파(屠龍派, Dragon Slayer)'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넌, 나바로, 볼튼, 폼페이오, 포틴저 등이 그들이다. 다만 어떤 학자는 트럼프의 매파팀의 사상근원에 대하여 시스템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한 결과 백악관의 대중국정책(對中國政策)은 국무원의 중국계학자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 팀'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발전으로 국내외의 학자들은 깜짝 놀란다.

이전에 필자는 단지 '중국통(中國統)'이라는 말만 알았지 '중국반'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양자는 현저히 구분된다. 첫째, 전자는 순수한 '외국인(外國人)'이고, 후자는 '중국계(中國系)'이다. 더욱 확실하게 말하자면 중국 대륙에서 온 중국계로 홍콩(香港)이나 미국에서 뿌리를 내린 학자들이다. 둘째, 중국통은 일찌감치 있었고 수도 많다. 2차 대전 때의 스틸웰 장군, 초기 미국 국무부 관리인 John S Service, John Paton Davies Jr., 하버드대학교수인 John Fairbank, 현재 워싱턴대학의 교수인 David Shambaugh, CSIS의 연구원 Bonnie Glaser, 미국의 전 국무부차관보(國務府次官補) Susan L Shirk 등등이 있다. 이들은 대중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중국반을 보면 최소한 아직은 '진귀동물(珍貴動物)'이다. 미중간의 힘겨루기에서의 영향력이 나중에 커질 것인 것인지 여부는 아직 관찰이 필요하다.

중국반의 반장은 바로 1980년대 중반에 미국유학을 온 후 미국국적을 취득한 위마오춘(余茂春)이다. 듣기로 홍콩에서 오고 명문 고등학교인 황인서원(皇仁書院)에서 수석을 했다는 창몽(蔣濛)도 그 중의 일원이다. 다만 중국반은 신생역량으로 미국정치의 의사결정(意思決定)에 참여하였고 그 추세는 앞으로 주목을 받는다. 미국외교정책이 중국 홍색정권(紅色政權)에서 자란 학자에게 이런 중요한 역할을 맡긴 것이다. 이전에는 그런 선례가 없다. 이는 미국이 공산중국에 대한 억제와 포위가 사상 유례 없는 종심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손자병법에서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战不殆)'라고 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정치와 사회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미국에 귀화(歸化)하여 미국인이 된 중국계들이 이전의 중국통보다 훨씬 독란(黷亂)한 전략을 내놓을 것인가?

자료를 살펴보면 위마오춘(余茂春)이 미국 국무장관 폼페이오의 중요막료(重要幕僚)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일찍 버클리에서 일찌감치 저명한 강좌시리즈인 '중국포럼'을 진행한 바 있다. 거기에서 우홍다(吳宏達),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류빈얜(劉賓雁), 팡리즈(方勵之)등 중국의 반대파인사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해 준 바 있다. 소수파인 미국학자들이 중공정권(中共政權)의 본질을 말하게 하면서 많은 주류학자(主流學者)들로 하여금 중국형세를 새로 분석하고 평가하도록 해주었다. 주로 강연을 했던 거물(巨物)들로는 James Lilley, Orville Schell, Thomas Metzer, Tu Weiming(杜維明), Frederic Wakeman Jr., Bette Bao Lord와 Martin Malia 등이 있다.

미국은 마침내 중공(中共)이 중국인민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대륙(大陸)에서 도망쳐 나온 궈원꾸이(郭文貴), 홍콩의 위안궁이(袁弓夷), 그리고 파룬궁(法轮功)까지 모두 각자의 유튜브에서 자신의 공로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항간의 강호인사(江湖人士)들이다. 허풍의 면이 크다. 진정 살상력(殺傷力)을 지닌 것은 바로 '체제 내'에 진입한 위마오춘교수(余茂春敎授) 같은 사람들이다.

다만 어떤 매체인의 평론에 따르면 중공과 중국인민간을 이간(離間)하고 통치계급과 백성 간에 쐐기를 박는 것은 60년 전에 이미 덜레스 등 미국정치인(美國政治人)들이 했던 방식이라고 한다. 서방은 당시 소련 등 각국 공산당을 상대하면서 그런 술책을 썼다. 그래서 위마오춘(余茂春)의 주장에 무슨 새로운 의미는 없다. 다시 말해서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비아족류, 기심필이(非我族類 其心必異; 나와 같은 족속이 아니면 꿍꿍이가 다르다)" 그것은 중국이나 외국이나 같다. 다만 어떤 사람은 미국이 강대해진 것은 종족과 피부색 및 문화배경(文化背景)을 가리지 않고 널리 전 세계의 엘리트들을 자신들에게 봉사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마오춘(余茂春)은 현재 미국 국무부의 중국정책과 기획수석고문(中國政策科企劃首席顧問)이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사무를 책임지는 국무부차관보 스틸웰의 파트너이다. 위마오춘은 많지 않은 수의 중국정치용어(中國政治用語)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 중국통(中國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중국의 약점을 잘 간파해 낸다. 학술뿐 아니라 정책시행의 각도에서 미국이 대중정책의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 냈다.

중국인이 미국정치를 관찰하는 각도는 다르다. 각자 혜안을 지니고 있고, 각자 맹점도 있다. 위마오춘(余茂春)의 지도하에 미국은 중국이 사용하는 "윈윈" "우호협상(友好協商)" "호리호혜(互利互惠)"등 용어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투적인 말"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폼페이오는 얼마 전 앞으로 베이징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지 않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겠다고 했다. 소위 "관기언(觀其言), 찰기행(察其行)"이다. 이를 보면 위마오춘 교수가 뒤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폼페이오는 그가 내놓은 "원칙적 현실주의"는 아주 높이 평가한다. 스틸웰은 위마오춘을 미국의 '국보(國寶)'라고 말한다. 국가안전 부고문 포틴저는 위마오춘을 미중소관계(美中小關係)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이데올로기의 전략제정(戰略制定)에서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위마오춘(余茂春)은 미국 국무부 7층에 있다. 폼페이오의 사무실(事務室)과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워싱턴텔리그래프는 위마오춘을 "현 시점에 이미 국무장관 폼페이오의 미중관계에서 가장 영향력(影響力)이 있는 고문(has now emerged as one of Secretary of State Mike Pompeo's most influential advisors on U.S-Sino relations)"이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잘 나가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토벌(討伐)의 목소리가 높다. 대륙에서 유행하는 말로는 '당의 밥을 먹고 당의 솥을 깬다'는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필자의 난카이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위마오춘(余茂春)이 미국으로 간 후에 거의 연락이 없었다. 위챗의 단체방에도 들어와 있지 않다. 최근 대학동창들은 아주 신나게 싸우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잊어버리자고 말한다. 위마오춘은 "다여(多餘 남는)'한 사람이고, 중화민족(中華民族)의 위대한 부흥의 대세 앞에서 그는 사마귀만도 못하다고 본다" "위대한 영수 모주석(毛主席)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다. 하늘에서 비를 내리려 하고, 어머니가 개가하려 한다면, 하도록 놔두어라."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며 이렇게 말한다. "학교에서 매국노(賣國奴)를 길렀다. 장백령(張伯苓) 교장이 지하에서 어떤 느낌일까?" 옆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난카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자신이 문제이다." 다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데올로기가 어떻든지를 불문하고 위마오춘은 난카이대학이 낳은 걸출(傑出)한 교우이다. 어쨌든 중국인의 얼굴로 그리고 혼자의 힘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정부의 핵심막료(核心幕僚)중 하나가 되지 않았는가. 몇 사람이나 이룰 수 있는 일인가?

견해가 분분한 것은 난카이만이 아니다. 위마오춘(余茂春)의 고향도 있다. 인터넷의 영상을 보니 충칭 용촨현의 원취(文曲)광장에는 비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비에는 역대 대학입시수석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런데 위마오춘의 이름은 파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 웃긴다. 이름을 파낸다고 수석(首席)이 아니란 말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이런 말이 있다. 정치는 하루도 길다는 말이 있다. 위마오춘(余茂春)이 미국에서 반공정책(反共政策)에 참여하는 것의 효과가 어떨지는 아직 기다려 봐야 한다. 그가 1990년대에 미국해군학원의 교수가 된 후 지금까지 대체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해군학원에는 여러 유명한 졸업생들이 잇다. 거기에는 해군5성정군 니미츠, 해군전략이론가 알프레드 사이어 머헨, 전 대통령 카터, 부시 등 정계요인(政界要人)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미켈슨 등 52명에 달하는 우주비행사(宇宙飛行士)가 있다. 이 학원의 교훈은 "ex scientia tridens"이다. 문구 그대로 번역하면 '삼지창(三枝槍)은 지식에서 온다'이다. 삼지창은 그리스신화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무기이다. 해군과 해군의 역량을 의미한다. 위마오춘의 제자들 중에서 백악관(白堊館), 펜타곤 및 미국정부의 각 부처에 근무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위교수라고 존칭한다. 바꾸어 말해서 위교수가 심은 중국사고와 반공이념(反共理念)은 아마도 미국정부 특히 미군출신들 사이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주목(注目)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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