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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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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옥장교 이야기는 한무제(漢武帝)에게서 유래된 축첩(蓄妾)의 대명사

图片信息 : 一代君王汉武帝生在什么朝代 汉武帝什么朝代

금옥장교(金屋藏嬌)의 뜻은 중국에서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금옥장교(金屋藏嬌)의 이야기를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 주로 중국문인들 특히 풍류(風流)를 좋아하는 문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다. 이러한 유(類)의 사랑이야기에 대하여 말하기를 즐겨했고 이를 제목으로 시를 짓고 사를 지었다. 그리하여 평범한 이야기가 화려하게 치장(治粧)하고 기복이 있는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다. 당나라 때의 시인인 이백은 “원정”이라는 시에서 청간진후황금옥, 적적주렴생망사(請看陳后黃金屋, 寂寂珠簾生網絲)라고 하였고, 백거이(白居易)는 “속고시(續古詩)”에서 세모망한궁, 수재황금옥(歲暮望漢宮, 誰在黃金屋)이라고 하였다. 당연히 적지 않은 다른 시인들도 이러한 유의 시(詩)를 썼다.

그렇다면 금옥장교(金屋藏嬌)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가? 왜 천백년이래로 수많은 문인학사(文人學士)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는가? 사실 금옥장교(金屋藏嬌)의 이야기는 한무제(漢武帝)에게서 유래하고 지금으로부터 이미 이천년이 되었다.

금옥장교(金屋藏嬌)의 "교(嬌)"는 원래 한무제 유철의 첫 번째 황후인 진아교(陳阿嬌)를 가리킨다. 아교의 모친은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인데 바로 한문제(漢文帝) 유항의 딸인 유표(劉嫖)이다. 유표는 나중에 당읍 후 진오(陳午)에게 시집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다. 그리고 장상명주(掌狀明珠)이며 총명하고 교만하며 성격이 제 맘대로인 이 딸 진아교(陳阿嬌)를 낳게 된다.

유표와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啓)는 오누이간이다. 유철(劉徹; 한무제)는 한경제 유계의 아홉째 아들이므로 유표는 한무제(漢武帝)의 친고모가 된다. 그러므로 유철과 진아교(陳阿嬌)는 고종사촌관계이다.

어렸을 때 유철(劉徹)은 잘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했다. 유년기의 유철은 자주 고모인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의 집에 가서 놀았다. 사촌누나인 아교(阿嬌)를 좋아했고, 두 사람은 자주 같이 놀았다. 아교는 아주 예뻤다. 유철(劉徹)은 7살이 되기도 전에 교동왕에 봉해지는데 왕에 봉(封)해진 후에는 더 많이 고모집에 가서 사촌인 아교와 어울렸다.

한번은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 유표(劉嫖)가 소년 교동왕 유철을 안고 그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후 유철에게 물었다: "너는 부인을 갖고 싶으냐?" 그러자 유철(劉徹)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부인을 갖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웃으면서 좌우의 시녀 100여명을 유철에게 가리키면서 골라보라고 말하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를 손북처럼 흔들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마음속으로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 100여명의 시녀가 다 필요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기의 딸 아교인 것이다. 관도장공주는 아교를 가리키며 유철에게 물었다: "아교는 어떠냐?" 그러자 유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가 이렇게 마음씀씀이가 깊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아교를 점찍었다니.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흥미를 느끼고 다시 유철에게 물었다: "아교가 좋으냐?" 그러자 유철은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유철은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만일 아교를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으면 나는 반드시 황금으로 집을 지어서 아교를 거기에 살게 할 거예요."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그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웃었다. 기뻐진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바로 유철의 모친 왕부인을 찾았고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달리 총명한 왕부인은 그 자리에서 이 혼사(婚事)를 성사시킨다. 양가는 이렇게 정혼을 하게 된다. 자녀들이 결혼하게 되자 자연히 한집안사람이 된다. 한경제 유계와 관계가 좋았던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는 당연히 미래의 사위인 유철을 위하여 좋은 말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라비인 유계와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바로 유철을 언급하며 총명(聰明)하다고 칭찬했다. 이렇게 하여 유철은 유계의 관심을 끌게 되고 여러 번 관찰(觀察)을 받게 된다. 유계는 이 아홉째 아들이 확실히 용봉(龍鳳)의 자질을 갖추고 있고 키울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한경제는 여러 아들 중 유철을 특히 마음에 둔다. 그리고 유철이 7살 때 태자로 세우게 된다. 유철은 14살 때 태자의 신분으로 14살인 아교를 처로 맞이하니 아교는 태자비(太子妃)가 된다. 유철은 16살에 황제에 등극(登極)하고 아교는 황후가 된다.

그러나 아교는 어려서부터 걱정 없이 자라고 유복(裕福)하게 생활해왔었다.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응석을 부리는 게 습관화 되었다. 무슨 걱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讓步)한다는 것도 몰랐다. 황후가 된 후에 아교는 여전히 한무제(漢武帝) 유철의 총애(寵愛)를 받는다. 아교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애교(愛嬌)가 뛰어났다. 한무제(漢武帝)는 아교에게 푹 빠져 있었는데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두려워했다.

제멋대로 하는 성격의 아교는 인생을 즐겼고, 매일 한무제(漢武帝)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함께 후궁에서 놀았다. 즐거운 생활은 빠르게 흘러갔다. 10년이 흘렀다. 이 10년간 온갖 향락(享樂)은 다 누렸다. 그런데 이 10년간 아교는 임신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도 시간은 많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한무제(漢武帝)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모친(母親)이 잘 말해서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무제 유철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이었다. 금방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싫어했고, 그는 아교는 여전히 좋아했지만 그의 감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는 이전에 그의 마음을 빼앗았던 진아교(陳阿嬌)도 그저 성격이 제멋대로인 귀족여자(貴族女子)에 불과했다. 어떤 때에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하지가 않았고 심지어 어떤 때는 싫증이 나기도 했다. 정력이 왕성(旺盛)했던 한무제는 적막(寂寞)함을 느꼈고 다른 여인을 찾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이 끝난 후 발걸음이 배회(徘徊)하기 시작하고 점차 아교의 침궁(寢宮)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때 침어낙안(浸魚落雁)의 위자부(衛子夫)가 나타난다. 한무제는 마치 음침한 생활에 찬란한 햇살이 비친 것같았다. 유철의 적막한 심리는 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충만했다. 고독한 마음이 마침내 의지할 곳을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유철은 하루하루 아교를 떠나고, 하루하루 위자부(衛子夫)에 가까워졌다. 아교가 이런 변화를 느꼈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버렸다.

아교가 사태의 심각성(深刻性)을 깨달았다, 자신이 임신(妊娠)을 하지 못한 것은 국가사직이 걸린 큰 문제였고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아교는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회임(懷妊)하고자 했다. 의사도 찾고, 약도 먹고, 점도 치고, 신에게 기도도 했다. 모든 방법은 다 써보았지만 그래도 배는 불러오지 않았다. 아교는 절망하기 시작했다. 특히 위자부(衛子夫)는 연속으로 세 번이나 임신을 했다. 그러나 위자부가 아무리 예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가녀(歌女)에 불과했다. 이런 미천한 가녀가 황후의 총애(寵愛)를 빼앗아가다니. 황후인 아교로서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아교의 모친인 관도장공주와 한무제의 모친인 왕태후도 모두 그녀를 위해서 불평을 했고 공동으로 위자부(衛子夫)에 대응했다.

그러나 위자부(衛子夫)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무제도 사랑에 미쳤다. 한무제는 위자부가 절색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그녀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위자부(衛子夫)가 3명의 공주를 낳은 후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 한무제는 더욱 기뻤다. 아들에게 유거(劉據)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오래지 않아 태자로 봉한다.

유철은 위자부(衛子夫)를 사랑하면서 다른 미녀에게 사랑이 옮아가자 다른 미녀에게는 더욱 열정적이며 더욱 아끼고 더욱 신경 쓰고 더욱 사랑했다. 그러나 황후 아교는 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상처받고 더욱 적막했으며, 더욱 씁쓸했다. 아교는 다른 총애를 얻었다가 잃은 여인들보다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한무제(漢武帝)는 그녀가 어려서부터 같이 놀았고 그녀가 계속하여 믿고 신뢰(信賴)하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유철이 그녀를 떠난 것은 그녀의 동년기의 순진함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아름답고 천진난만했던 감정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아교는 유철을 가진 적이 있었고, 다른 여인들이 갖지 못한 즐거움을 누렸었다. 마치 순식간에 십년간 쌓아왔던 오색찬란(五色燦爛)한 황금집이 무너진 것 같았다. 아교의 마음은 칼에 꽂힌 것처럼 소리 없이 핏방울을 흘렸다.

입맛이 없는 아교는 다른 궁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더더욱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마지막이 어느 날이었는지도 기억이 희미(稀微)하게 유철의 모습이 그녀의 궁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다보면서 궁문의 동정을 살폈고 유철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교는 기나긴 밤을 홀로 지내면서 눈을 붉어지고 눈가는 검어졌고 얼굴색은 창백해졌고 용안은 초췌(憔悴)해졌다. 이때, 초복(楚服)이라고 부르는 무당이 황후의 침궁(寢宮)으로 찾아온다. 제정신이 아닌 황후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초복이 가르쳐준 방법을 그대로 시행한다. 작은 포인(布人)을 만들고 작은 포인을 위자부(衛子夫)라 칭하며 매일 바늘로 위자부(衛子夫)를 찔렀다.

한나라궁중에서는 절대로 무고비술(巫蠱秘術)을 금지했다. 황후 아교(阿嬌)의 이러한 행동은 궁녀들에 발각되어 고발당한다. 한무제(漢武帝)는 대노하여 당시의 형률대로라면 참해야 하지만, 한무제(漢武帝)는 옛정을 생각하여, 황후의 인새(印璽)를 거두고 황후를 폐위시킨다. 아교(阿嬌)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장문궁(長門宮)으로 들어간다. 장문궁은 아주 구석진 곳에 있고, 곳곳에 황폐한 풀이 가득했다. 황궁에서 떨어진 장문궁은 색칠도 벗겨지고 낡고 썩은 냄새가 났다. 아교는 이곳으로 들어갔다. 눈물이 흐르는 적막한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교(阿嬌)는 이렇게 유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철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했고, 옛정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녀는 한무제(漢武帝)가 부(賦)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당시의 유명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초청하여 부를 짓게 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눈앞의 이 여인에게 감동(感動)하여 붓을 들어 천고에 유명한 “장문부(長門賦)”를 쓴다.

눈물에 뒤범벅이 된 여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글을 읽고 한무제는 크게 칭찬(稱讚)한다. 그러나 부에 나오는 여인의 감정도 한무제(漢武帝)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한무제(漢武帝)는 여전히 장문궁을 내팽개쳐두었고 아교를 기억해내지 않았고 마음을 되돌리지도 않았다. 아교는 마음이 재처럼 사그라들었다.

장문원부(長門怨婦)의 치정(痴情)은 한무제의 영웅심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이후의 문인들의 마음은 움직였다. 문인들은 붓을 들어 글을 쓰면서 장문사(長門事), 장문읍(長門泣), 장문폐(長門閉)등을 읊었는데 이는 모두 총애를 잃고 사랑을 잃은 것의 대명사(代名詞)였다.

4살짜리 사촌동생이 14살짜리 사촌누나를 처로 취한다. 한무제 유철(劉徹, 원명은 劉彘)이 약 4살 때, 고모인 유표(劉嫖)는 그를 무릎에 안고서 그에게 장난스럽게 묻는다. "너는 처를 취하고 싶으냐?" 유철은 말한다. "예" 유표는 곁에 있는 많은 궁녀들을 가리키며, 그에게 누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본다. 유철은 자그마한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든다. 유표는 자신의 딸인 아교를 가리키며 유철에게 말한다: "아교(阿嬌)를 너에게 시집보내면 어떻겠느냐?" 그는 바로 기뻐하며 자그마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서 말한다. '좋아요. 좋아요. 만일 누나를 처로 삼을 수 있으면, 반드시 금으로 집을 만들어 살게 해줄 겁니다."

이것은 반고(班固)가 쓴 역사이야기이고, 널리 알려져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이야기이다. 후인들은 이를 가지고 '금옥장교'의 고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한무고사’는 어쨌든 이야기일 뿐이므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을 추구할 뿐이고 믿을만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역사적 사실관계는 대체로 맞다: 관도장공주 유표는 야심이 있는 여인이고, 자신의 딸인 진아교(陳阿嬌)가 황후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조정 내에서 장기간 공고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녀는 원래 딸을 황태자 유영(劉榮)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유영의 생모인 율희(栗姬)는 이유도 없이 거절한다. 그리하여 관도장공주는 진노하고, 황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을 품게 된다.

유철의 생모인 왕지는 한경제의 후궁중 비교적 총애를 받는 부인이었고, 왕부인은 총명하면서도 세상일에 밝았다. 기회가 있다고 생각되자 즉시 온갖 방법을 써서 관도장공주에게 잘 보여,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닌 아들이 태자의 지위를 빼앗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한다. 쌍방은 바로 의기투합(意氣投合)하고 정략혼인은 이루어진다.

진아교(陳阿嬌)의 혼인은 왜 행복해지기 어려웠을까. 당시 진아교(陳阿嬌)는 14살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용모가 아주 수려(秀麗)했다고 한다. 다만 4살짜리 어린아이가 무슨 심미능력(審美能力)이 있겠는가. 그 부분은 의문이다. 4살짜리 아이가 14살짜리 마누라를 취하는데, 그 혼인이 행복할 수 있을까? 

여자의 청춘기는 아주 짧다. 민간에는 '여대삼(女大三, 포금전(抱金塼)"이라는 말이 있다. 겨우 3살 많을 때의 일인데, 이 경우는 10살이나 많다. 유철이 스무 살이 되면, 진아교(陳阿嬌)는 이미 서낭반로()이다. 유철이 서른이 되어 한창 나이 때가 되면, 진아교(陳阿嬌)는 마흔으로 이미 잔화패류(殘花貝類)이다. 이 혼인은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다.

유철은 16살에 등극(登極)하는데, 이때 진아교(陳阿嬌)는 26살이다. 몇 년 간은 금슬(琴瑟)이 괜찮았다. 다만 태황태후 두씨(두의방)이 사망한 후, 상황은 바뀐다. 유철은 그때 21살이다. 진아교(陳阿嬌)는 이미 서른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 자식을 낳지 못한다. 부부간에 틈이 점점 발생하고 나중에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된다.

사마상여는 ‘장문부’에서 이렇게 썼다: "부하일가인혜(夫何一佳人兮), 보소요이자우(步逍遙而自虞)". 남편은 있지만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혼자서 장문궁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그렇게 하여 마음속의 우수와 적막(寂寞)을 풀고 있었다. 장문궁에 한거한 후, 한무제(漢武帝)는 다시 그녀를 찾지 않는다. 한번은 우연히 그녀가 생각나서 남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원래는 군무희언(君無戱言)이지만, 그녀가 그곳에 가서 아무리 둘러봐도 한무제(漢武帝)는 보이지 않는다.

진아교(陳阿嬌)가 "황금백근을 주면서"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장문부’를 대신 써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고 했고, 유철은 그 글을 읽고 깊이 감동받는다. 그리하여 진아교(陳阿嬌)는 다시 총애(寵愛)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1년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즉 원광5년, 27살의 유철은 '무고'의 죄명(罪名)으로 조서를 내린다: '황후실서(皇后失序), 혹어무축(惑於巫祝), 불가이승천명(不可以承天命), 기상새수(其上璽綬), 파퇴거장문궁(罷退居長門宮)"

북방가인(北方佳人)이 유철이 가장 그리워하는 여인이 되다. 처음에 황후로 삼을 때, 유철은 그녀에게 약속한 바 있다. 아침에 나가서 국사(國事)를 처리한 후, 저녁에는 반드시 돌아와서 그녀와 함께 하겠다고. 그러나 지금은 그저 새 사람의 웃음소리만 들을 뿐, 옛 사람의 울음은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일찌감치 그녀의 존재(存在)를 잊어버린 것 같다.

"장문사(長門事), 준의가기우오(準擬佳期又誤). 아미증유인투(蛾眉曾有人妬). 천금종매상여부(千金縱買相如賦), 맥맥차정수소(脈脈此情誰訴)"(신기질 ‘摸魚兒’)

기원전 139년 상사절(上巳節), 유철은 평양공주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평양후부의 한 가녀인 위자부(衛子夫)를 만나서 아주 좋아하게 된다. 당시에 바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녀를 궁안으로 데려온다. 위자부(衛子夫)는 이때부터 유철의 후궁이 되고, 부인(황후의 바로 다음 가는 자리임)에 봉해진다. 나중에는 황후에 오른다. 위씨 집안은 이로 인하여 고귀하게 된다. 기원전91년, 간사(奸詐)한 강충, 환관 소문 등이 고의로 무고사건(誣告事件)을 조작하여 태자 유거(劉據)를 모함한다. 유거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거병(擧兵)하여 반항하나 패배하여 자살한다. 위자부(衛子夫)는 태자를 지지해서 한무제(漢武帝)의 진노를 사고, 목을 매어 자살(自殺)로 생을 마감한다.

이앙앙(李央央)의 이야기는 더욱 전설적이다. 그녀의 오빠인 이연년(李延年)은 유철에게 악부를 하나 바치는다: 북방유가인(北方有佳人), 절세이독립(絶世而獨立), 일고경인성(一顧傾人城), 재고경인국(再顧傾人國). 영부지경성여경국(寧不知傾城與傾國), 가인난재득(佳人難再得)" 이앙앙은 '경성경국(京城傾國)'의 '가인'의 대명사가 된다. 이때부터 삼천궁녀(三天宮女)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 아쉽게도 이앙앙(李央央)은 홍안박명(紅顔薄命)의 여인이었다. 젊은 나이로 불치병(不治病)을 얻는다. 유철이 여러 번 그녀를 찾아갔지만 만나기를 거절(拒絶)한다. 사후에도 유언(遺言)을 남겨 유철이 그녀의 죽은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녀의 목적은 실현되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그녀는 영원히 유철의 마음속에 남는다. 그리고 유철이 가장 그리워하는 여인이 된다. 유철은 추풍부에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바 있다.

진아교(陳阿嬌)의 만년은 여지(勵志)했다. 고대의 동양식(童養媳)의 처참한 여러가지 이야기는 모두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가완족(嫁碗族), 비혼녀(比婚女)같은 유형, 노처녀가 급하게 남편감을 찾아서 결혼(結婚)하는 것은 결국 밥솥을 위한 것이다. 밥솥에 밥이 있어야, 밥그릇에도 밥이 담기는 법이다.

그러나 진아교(陳阿嬌)는 달랐다. 그녀는 혁혁한 가문출신으로, 죽은 효문제와 효경제는 각각 그녀의 외할아버지, 외숙부였다. 태황태후 두씨는 그녀의 외할머니이다. 부친은 세습 당읍후인 진오(陳午)이다. 그는 개국공신의 후손이고, 모친은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 유표로 유철은 그녀 모친의 사촌동생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의 총애(寵愛)를 많이 얻었다. 즉, 진아교(陳阿嬌)는 근본적으로 돈이 모자라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설사 혼인을 자신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시집가면 가는 것이고, 폐위되면 폐위(廢位)되는 것이다. 비바람이 지난 후에는 분명 무지개가 뜬다.

여인은 경제적으로 독립(獨立)하면, 남자에 대한 요구조건이 평면적인 심미에서 입체적으로 승격(昇格)된다. 이것은 점진적(漸進的)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느 한 남자를 떠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물질적(物質的)인 여유는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해준다. 그리하여 혼인과 애정에 대한 추구는 조금 약해진다.

진아교(陳阿嬌)와 유철의 혼인은 아마도 애정을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두태후가 사망하기 전의 기간동안 유철은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한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급제즉위(及帝卽位), 입위황후(立爲皇后), 천총교귀(擅寵驕貴)". '천총교귀'의 네 글자는 분명히 말해준다. 그러나 사랑이 다른 여인에게 옮겨간 후에도 유철은 그녀에게 잘 대해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폐위시켰지만, 대우는 예전과 같았고, 장문궁은 상궁과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유철이 그녀를 본체만체 하더라도, 진아교(陳阿嬌)는 그냥 있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의 모친인 유표가 아직 살아 있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진아교(陳阿嬌)의 여생은 여지의 특징이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유철이라는 이 '밥솥'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 같다. 폐위 때 그녀는 개략 37살이다. 이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청춘도 아니고, 무엇을 더 억지로 구하겠는가. 이백(李白)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락불상천(雨落不上天), 수복난재수(水覆難再收)"(비는 한번 내리면 다시 올라갈 수 없고, 물을 한번 쏟아지면 주워 담을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녀는 담담하게 살아간다. 원망하지도 질투(嫉妬)하지도 않고 자기 할 일을 자신이 한다. 어쨌든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고,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혼인 애정(愛情)이라는 것은 있으면 즐기면 되고, 없으면 굳이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딴 참외는 달지 않는 법이다.

진아교(陳阿嬌)가 사망할 때, 개략 57세 내지 60세이다. ‘한서-외척전권67’을 보면, "황후는 20여년만에 사망하고 패릉 낭관정의 동쪽에 묻히다." 그녀는 수종정침(壽終正寢)했다고 할 수 있다.

금옥(禁獄)은 아교 일생의 청춘세월(靑春歲月)을 가두어 두었고, 그녀 일생의 쾌락과 고통을 가두어 두었다. 금옥(禁獄) 안에는 일찌기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애교가 넘쳤지만, 나중에 장문궁 안에는 "등참월암무부반(燈慘月暗無復盼)"으로 고독하게 늙어갔다.

후인들은 잘 잊어버린다. 항상 '금옥'과 '교'에 대하여 무한히 아름다운 상상을 한다. 그러나, "사창일락점황홍(紗窓日落漸黃昏), 금옥무인견루흔(金屋無人見淚痕), 적막공정춘욕만(寂寞空庭春欲晩), 이화만지불개문(梨花滿地不開門)" 금옥장교(金屋藏嬌)는 언뜻 듣기에 아름답지만, 기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의 금옥장교(金屋藏嬌)는 축첩(蓄妾)의 대명사로 뜻이 바뀌었다. 그러나 결말(結末)은 비슷하다. 결말은 모두 비참(悲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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