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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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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를 위해 블로그에 글을 쓰는가? - (2)

합목적성(合目的性)은 고작해야 겨우 문제로 삼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모두가 가설(假設)이며 어떤 목적도 명령의 행패로 나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창조자가 원한 그런 목적은 있지 않습니다. 자연미(自然美)가 나의 자유에 호소하는 일은 없습니다. 숲이나 형태 또는 운동 속에는 어떤 질서(秩序)와 같은 것이 있으며 따라서 호소하는 일은 없습니다. 숲이나 형태 또는 운동 속에는 어떤 질서와 같은 것이 있으며 따라서 호소(呼訴)라고 착각(錯覺)되는 것이 있어서 나의 자유를 유혹하는 듯싶지만 그것은 눈앞에서는 곧 사라져 버립니다.

눈이 경치의 질서를 돌아보기 시작하자마자 호소는 사라지고 나만이 남게 됩니다. 이 색깔을 제2의 색깔과 결합시키느냐 제3의 색깔과 결합(結合)시키느냐 하는 것은 나의 자유이며 나무와 물 혹은 나무와 하늘 나무와 물과 하늘과의 어느 것을 결합시키느냐 하는 것도 나의 자유입니다. 나의 자유는 기분(氣分)에 따라 움직이고 풍경 속에 새로운 관계를 세우는 데 따라서 처음에 나를 유혹한 풍경의 객관성(客觀性)이라는 착각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나는 사물에 의해 막연하게 묘사된 약간의 주제(主題)를 꿈꿉니다. 자연의 현실은 벌써 나의 몽상(夢想)을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한순간 의식된 자연의 질서는 누구의 손에 의하여 나에게 제출(提出)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참된 의미의 질서는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나 자신의 꿈을 고정(固定)시켜 그것을 캔버스나 문장 위에 묘사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연의 풍경 속에 나타난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合目的性)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 나 자신을 삽입(揷入)합니다. 나는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을 타인에게 전하는데 이와 같이 전해짐으로써 그 합목적성은 인간적인 것이 됩니다.

이 경우에 문학이란 선물의 의례이며 선물한 것만이 변모됩니다. 그것은 모권가족(母權家族)의 칭호와 권력의 이양(移讓)과 비슷합니다. 모권가족에서 모친은 이름을 갖지 않지만 숙부(叔父)와 생질(甥姪)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개자(仲介者)입니다. 사라져 가는 이 환영을 내가 파악하고 내가 그것을 타인에게 제출하여 그들을 위해 그것을 해방시켜 재고(再考)하면 그들은 그것을 신뢰하여 바라볼 수 있습니다. 환영은 그리하여 지향성(志向性)을 갖게 됩니다. 나 자신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한계 안에 멈춰 있게 되므로 내가 사람에게 전하는 객관적인 질서를 결코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독자는 확실한 방법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멀리 나아갈수록 나는 독자보다 그만큼 앞질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독자가 책의 다른 부분 사이에 각각의 장(章)이나 말 사이에 맺는 관계가 무엇이건 독자에겐 그런 관계가 분명히 의도(意圖)된 것이라는 보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절대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각 부분 사이에 마치 은밀(隱密)한 질서가 있는 듯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창작이 언제나 독자를 앞지르게 되며 매우 아름다운 무질서(無秩序)는 예술적인 효과의 하나입니다. 즉 그것도 하나의 질서입니다.

독서는 연역(演繹)입니다. 그 움직임의 근저는 과학적인 연역의 근저가 신의 의지 속에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온 것처럼 나의 의지 속에 있습니다. 유연(柔軟)한 힘이 나를 인도하고 나를 최후의 페이지까지 지탱(支撑)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문학가의 의도(意圖)는 추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독서에는 하나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추리는 책 속에 나타나는 미(美)는 결코 우연의 결과는 아니라는 커다란 확신에 의해 지탱되어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나무와 하늘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다만 우연에 의해서입니다. 반대로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어떤 탑(塔)이나 감옥 속에 갇혀 있고 어떤 정원을 산책하는 것은 서로 독립된 인과론적 계열(因果論的 系列)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다 깊은 합목적성(合目的性)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공원은 그것이 어떤 정신 상태와 조화되고 그 정신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혹은 그 정신 상태를 심한 대조에 의해 부각시키기 위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상태(精神狀態) 자체가 풍경과의 관계에서 상상되었습니다.

거기서는 인과 관계(因果關係)가 외형적인 것이며 ‘원인이 없는 인과 관계’라고나 할 성질의 것으로 합목적성 쪽이 보다 깊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독자인 내가 원인의 질서 아래 목적(目的)의 질서가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은 책을 펴면서 거기 있는 대상의 원칙(原則)이 인간적인 자유라는 신념(信念)을 갖기 때문입니다.

문학가가 정념(情念)에 의하여 정념 속에서 썼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그와 같은 나의 신념은 곧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몰론 나도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정념(情念)에 의해 움직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결의는 작가에게 자기의 감동에서 한걸음 후퇴(後退)시키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읽으면서 나의 감동(感動)을 자유롭게 하는 것처럼 작가는 작가의 감동을 자유로운 감동으로 변형(變形)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작가의 태도는 고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서란 작자와 독자 사이에 맺어진 고매한 마음의 조약(條約)입니다.

그 각자가 타자(他者)를 신뢰하고 타자에게 기대하며 상대가 그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상대방에게 요구합니다. 그와 같은 신뢰 자체가 고매한 마음씨입니다. 무엇인가가 작가로 하여금 독자가 자기의 자유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였다고 믿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상대방을 믿는 것은 자유로운 결단(決斷)에 의한 것입니다. 작가와 독자 사이를 내왕하는 변증법(辨證法)은 그때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읽을 때에 나는 요구합니다. 요구가 충족되면 그때 읽고 있는 것은 나로 하여금 작가에게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촉구(促求)합니다. 그것은 작가가 나에게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을 요구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작가의 요구는 내가 나의 요구를 높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리하여 나의 자유는 자기를 나타냄으로써 타자(작가)의 자유를 계시(啓示)하는 것입니다.

미적(美的)인 대상이 “현실적(혹은 현실적이라 부르는)” 문학작품이지만 형식적인 예술작품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예술에 있어서는 자연의 관계가 역전됩니다. 그림 속의 전경(前景)에 있는 나무는 우선 인과론적 연쇄(因果論的連鎖)의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과관계는 착각(錯覺)입니다. 독자가 글을 읽고 있는 한 인과관계의 명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합목적성(合目的性)에 의해 지탱되어 있습니다. 나무가 서 있다면 그것은 화면의 그 밖의 부분이 그 형태와 색깔을 그 전경(前景)에 놓이기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선은 현상적(現象的)인 인과 관계를 통하여 그 대상의 깊은 구조(構造)로서의 합목적성(合目的性)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합목적성을 초월해서 그 원천이며 토대인 인간적인 자유에 도달(到達)합니다. 나의 사실주의는 언뜻 보면 그것이 그림이 아닌가 할 정도로 철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재(素材)의 빛이나 벽돌로 된 작은 벽의 장비 및 광채, 인동(忍冬) 가지의 푸름과 작은 방안의 칠흑 같은 어둠, 성수반(聖水盤)의 돌처럼 갈고 닦은 얼굴의 오렌지빛 살결을 바라보면 나는 자신이 느끼는 쾌감을 통하여 그 합목적성(合目的性)이 형체나 색깔 속보다도 오히려 소재에 의한 상상에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는 실질(實質) 자체와 파편을 주워 모은 것이 뒤섞여 여러 가지 형체의 존재 이유가 되어 있습니다. 이 실재론자는 아마도 나를 절대적 창조에 보다 가까이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만나게 되는 것은 소재(素材)의 수동성(受動性) 자체 속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한계는 묘사된 대상, 혹은 조각된, 또는 이야기한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 세계의 깊은 곳에서 의식되는 것처럼 문장에 의해 표현된 대상도 세계의 깊은 곳에 나타납니다. 나는 들판과 대지(大地)의 존재를 지탱하는 깊은 합목적성(合目的性)을 무한을 향해 세계의 끝까지 확대합니다.

창조적인 행위는 약간의 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혹은 다시 만들어내는 데서 세계의 전체적인 갱신(更新)을 목적 삼습니다. 각각의 문장이나 책은 존재의 전체를 재현(再現)하고 그 전체를 관찰자의 자유에 대하여 대표하는 것입니다. 문학의 구경(究竟)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 보이도록 이 세계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의 근원이 인간의 자유 속에 있는 것처럼 재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창조하는 것은 관찰자(觀察者)의 눈을 통해서만 객관적인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재현이 축복받는 것은 관찰의 특히 독서의 의례(儀禮)에 의한 것입니다. 앞에서 제기된 문제는 여기서 해답(解答)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타인의 자유에 호소하지만 그것은 타인이 상호간에 요구를 받아들여 존재의 전체를 다시 인간에게 속하게 하는 동시에 인간을 우주 속에 포용(包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앞으로 좀 더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다른 모든 문학가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어떤 감동을 줄 것을 목적삼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 감동은 보통 미적 쾌락(美的快樂)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미적 환희(美的歡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작품이 완성(完成)되어 있다는 증거이며 나는 그것을 앞에서 말한 고찰(考察)의 빛에 비추어 검토(檢討)하려고 합니다.

창조자(創造者)인 내가 창조하는 이상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관찰자(우리의 경우에는 독자)의 미의식(美意識)과 일체가 되며 그 구성 요소가 서로 타자를 견제(牽制)하여 분리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수단·목적, 목적·수단이라는 실용성(實用性)을 당분간 보류(保留)하는 초월적·절대적인 목적을 인식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또한 호소 혹은 같은 의미이지만 가치의 인식과 분리(分離)할 수 없습니다.

그 가치에 대하여 내가 갖는 방위적인 의식(方位的意識)에는 필연적으로 나의 자유의 비방위적 의식(非方位的意識)이 수반됩니다. 이것은 자유가 그 자체에 대하여 분명해지는 것은 자기를 초월(超越)하려고 하는 요구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자유 자체에 의한 자유의 인식은 환희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명제적(非命題的)인 의식구조(意識構造)에는 의식의 또 하나의 구조가 수반(隨伴)됩니다.

실제로 독서가 창조인 이상 나의 자유는 단지 순수한 자율성(自律性)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적극성으로도 나타납니다. 또한 따라야 하는 고유한 법칙(法則)을 자기에게 줄 뿐만 아니라 대상을 구성하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본래의 미적(美的)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즉 창조된 대상(對象)이 창조하는 인간에게 대상이 됩니다.

창조자가 창조하는 대상을 향수(享受)하는 것은 그 경우뿐입니다. 향수라는 말은 읽는 작품의 방위적 의식(方位的意識)에 적용되지만 그야말로 우리가 미적 환희의 본질적인 구조(構造)에 접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 방위적(方位的)인 향수(享受)에는 비방위적(非方位的)인 의식이 따르며 대상이 본질적인 동시에 그 비방위적인 의식도 역시 대상에 대하여 본질적입니다. 나는 미적의식(美的意識)의 이와 같은 형태를 정확한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강한 미적 감동에 엄숙한 적막(寂寞)을 주는 그 감정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엄밀(嚴密)한 조화에서 비롯됩니다.

한편 미적 대상은 본래 상상된 것을 통하여 도달해야 할 목표(目標)로 정한 세계이므로 미적인 환희에는 세계가 가치이며 인간의 자유가 수행(遂行)해야 할 과제라는 방위적 의식이 다릅니다. 나는 그 의식을 인간적인 기도(企圖)의 미적 수식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세계는 우리의 상황의 지평선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를 우리자신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무한한 거리가 됩니다. 여건의 종합적(綜合的)인 전체로서 그리고 장해와 도구(道具)의 미분화(未分化)의 집단으로서 나타나지만 결코 나의 자유에 대한 요구(要求)로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미적인 환희는, 본래 비아(非我)인 것을 회복하여 내면화하려고 하는 의식(意識)의 수평선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어진 것을 명령으로 바꾸고 사실을 가치로 바꿉니다. 세계는 나의 일이며 내 자유에 동의하는 본질적(本質的)인 기능은 그 무조건적인 운동 속에 우주라는 유일한 절대적(絶對的)인 대상을 존재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구조는 그 누군가의 자유로운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협정(協定)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한편 독서는 작가의 자유를 신뢰하고 작가의 자유에 요구하는 인식(認識)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미적인 쾌락은 그 자체가 가치로 느껴지며 타자에의 절대적인 요구를 포함(包含)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인 이상 모든 사람들은 같은 작품을 읽고 동일한 쾌락을 느낄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자유 속에는 전 인류(人類)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높은 자유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또 외부의 세계이기도 한 하나의 세계의 존재를 지탱(支撑)하고 있습니다. 미적 즐거움 속에서 방위적 의식은 세계를 그 전체에서 상상(想像)하는 의식입니다. 그 세계는 존재하고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서 완전히 나에게 속하며 동시에 나에게 속하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속(屬)할수록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비 방위적인 의식(意識)은 그것이 일반적인 신뢰(信賴)와 요구와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한 현실에 모든 자유로운 인간의 조화(調和)된 전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은 세계를 발견하는 동시에 그 발견(發見)을 독자들의 고매한 마음이 수행해야 할 과제(課題)로서 제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존재의 전체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인식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의식에 구원(救援)을 청하는 일입니다. 또한 그 본질성(本質性)을 독자와 나 사이에 놓인 인물을 통하여 살아가려고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현실적인 세계는 행위에 있어서만 제시(提示)되며 세계를 변경하기 위해 세계를 초월해야만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소설가가 세계를 초월하기 위한 움직임 중에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소설가의 세계는 깊이를 잃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이야기 속에서 어느 하나의 대상의 존재의 밀도(密度)가 보증되는 것은 그 대상을 위해 바쳐진 묘사(描寫)의 수나 깊이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그 대상과 여러 가지 인물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複雜)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 대상이 자주 취급(取扱)되어 버림을 받을 경우에 인물이 그들 자신의 목적을 향해 그 대상을 초월(超越)하면 그 대상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소설의 세계 즉 사물과 인간 전체에 대해서도 그 세계가 최대의 밀도를 보여 주기 위해서는 독자가 그 세계를 발견하려는 창조(創造)가 상상적인 행위 속에 밀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독자가 그 세계를 변경시키려는 경향(傾向)을 가질수록 그 세계는 생기를 얻게 됩니다. 리얼리즘의 오류는 현실적인 것을 관상(觀想)에 의해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결과 불편부당(不偏不黨)한 화면(畵面)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지각(知覺)자체가 불공평하고 다만 명명(命名)이라는 것만을 두고 보더라도 그것이 이미 대상(對象)의 수식(修飾)이므로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겠는가를 염두(念頭)에 두어야 합니다.

우주에서 자기가 본질적인 존재이기를 바라는 내가 그 우주가 내포하고 있는 부정(不正)에 있어서도 자기가 본질적인 존재이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부정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부정의 창조자가 되기를 인정할 경우에도 부정을 초월하여 부정을 말하려는 운동(運動) 속에서만 부정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읽는 측인 나도 내가 부정의 존재를 창조하여 유지해 나갈 때에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기술은 나를 강요(强要)하며 내가 발견한 것을 창조하게 합니다. 즉 강제적(强制的)으로 나를 공범자(共犯者)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우주는 나와 독자의 두 사람이 자유로이 결합된 노력에 의해 지탱됩니다. 그런데 내가는 그 우주를 나의 중개(仲介)에 의해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試圖)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는 그 자신의 규율(規律)까지 인간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나의 자유에 의해 모든 부분이 침투(浸透)되고 지탱된 것으로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그것이 그 본래의 진정한 모습으로 참으로 목적의 도성(都城)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거기 이르는 단계(段階)여야 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세계는 우리를 억눌러 버리는 파괴적인 덩어리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목적의 도성을 지향(志向)하는 그 자기 초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표상(表象)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작품은 그 묘사하는 사람이 아무리 고약하고 절망적(絶望的)이라고 하더라도 고매한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너그러운 마음은 교훈적(敎訓的)인 강연이나 덕이 있는 인물에 의해 표현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미리 생각해 둔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훌륭한 감정(感情)이 좋은 책을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主張)은 옳습니다.

그러나 고매한 마음은 책의 올(緯)이며 거기서 사람들이나 사물이 재단(裁斷)되는 헝겊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제(主題)가 무엇이건 일종의 본질적인 경쾌성(經快性)이 곳곳에 나타나야 하며 작품이 결코 자연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요구이며 선물(膳物)이라는 것이 상기되어야 합니다. 이 세계가 그 부정(不正)과 함께 나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내가 그 부정의 본성(本性) 즉 금지되기 전의 낭비의 본성을 발견하고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나의 세계가 가장 깊이 나타나는 것은 독자의 검토에 있어서이고 찬탄(讚嘆)에 있어서이며 분노(憤怒)에 있어서입니다. 고매한 사랑은 그 세계를 유지한다는 서약(誓約)이고 고매한 분노는 그것을 변경(變更)시킨다는 서약이며 찬탄(贊嘆)은 그것을 모방한다는 서약입니다.

문학과 윤리는 설사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미적 명령(美的命令)의 밑바닥에는 윤리적인 명령이 깔려 있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자는 글을 쓴다는 고통을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 자체도 독자의 자유를 의식하기 때문이며 독자는 책을 펴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자유를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은 어느 면으로 보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뢰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독자와 작가가 자유를 인식(認識)하는 것은 다만 자유가 표현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므로 작품은 그것이 인간의 자유를 요구하는 한 세계의 상상에 의한 표현이라고 정의(定義)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암흑문학(暗黑文學)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세계가 아무리 어두운 빛깔로 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이 그 세계 앞에서 그들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에 묘사(描寫)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은 오직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뿐입니다. 나쁜 소설이란 독자에게 아첨(阿諂)하여 환심을 사려는 소설이고 좋은 소설이란 독자에의 요구와 신뢰(信賴)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문학가가 자유로운 인간과의 일치(一致)를 구하여 그들의 세계를 보여 줄 때에는 언제나 보다 많은 자유에 의해 침투(浸透)된 모습으로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작가가 불러일으키는 고매는 마음의 해결(解決)이 부정을 눈감아 주는 데 이용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민주화를 찬양(讚揚)하고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것을 규탄(糾彈)하지 않는 작품을 읽음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느낀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가 세계에 널리 퍼지더라도 좋은 소설을 쓸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증오를 통하여 인종차별(人種差別)을 반대하는 것은 인종의 자유이며 그가 나에게 고매한 태도를 취하도록 요구한다면 나 자신의 순수한 자유를 느끼는 한 나는 나를 탄압하는 측의 인종(人種)이라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나 자신에게도 반대하여 모든 자유인에게 유색인종의 해방을 위해 궐기(蹶起)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인종 차별주의(人種差別主義)를 찬미(讚美)한 좋은 소설이 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자유가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고 느낄 때에 그 사람들 중의 몇몇이 민주화(民主化)를 승인하기 위해 나의 자유를 행사할 것을 나에게 아무도 요구할 수 없이 때문입니다. 에세이스트나, 소책자의 필자, 풍자시인(諷刺詩人), 혹은 소설가의 누구이든, 또는 단지 사사로운 정념(精念)을 이야기하건 사회제도를 공격(攻擊)하건 작가는 자유인이며 그에게는 다만 하나의 주제(主題) 즉 자유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나를 가르친 의론(義論)이 무엇이거나 문학은 나와의 싸움 속에 내던지게 마련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유를 원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상 좋든 어쨌든 간에 나는 이미 속박(束縛)되어 있습니다.

무엇에 속박(束縛)되어 있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긴 쉬운 일이다. 문제는 배신을 앞둔 바다의 성직자(聖職者)처럼 관념적(觀念的)인 가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수호(守護)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자유이고 나는 정쟁(政爭)의 한편에 가담(加擔)해야 하는 이 문제는 의견 상의 매우 단순(單純)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와 결부(結付)되어 있습니다. 즉 ‘누구를 위해 블로그에 글을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긴 글을 일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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