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대자연(大自然)은 아름답다! 잎사귀 돋고 꽃피고, 흩날리는 나비 벌에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우러져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지 않은가.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켜는 봄, 봄이 우리 곁에 온 것이다.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봄맞이 오라고 요염한 손짓을 한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서 우리의 어머니,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더불어 듣고 보며 봄을 즐겨볼 것이다. 그 매섭게 아린 칼 같은 겨울이 있었기에 봄이 이렇게 따스하고 아름다운 것이리라.
젊어 고생을 해보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을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제나 여름인 적도 지방의 벌은 꿀을 모으지 않는다. 안정된 환경에 사는 생물에게는 절대로 변화(진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까다로운 환경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바뀜이 생긴다. 성공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어려운 가정환경을 이겨낸 이들이 아니던가. 추운 겨울이 없는 곳에 살면 먹을 것이 지천으로 있는데 왜 벌이 꿀을 따 모으겠는가. 그래서 그곳의 사람들도 매한가지로 게으르고 느려터졌다. 아무튼 환경에 따라 생물의 행동과 습성이 달라지니 어느 하나 환경의 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흐드러지게 맵시를 뽐내고 있는 꽃으로 걸음을 옮겨보자. 꽃은 무엇이며, 왜, 어째서 저렇게 철따라 피어나는 것일까.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울긋불긋, 형형색색으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정녕 아니다. 벌이나 나비 또 다른 곤충들을 불러들여서 수술의 꽃가루(花粉)를 암술에 달라붙게 하여 씨를 맺자고 저러고 있다. 꽃을 아주 좋아했던 식물학자로, 학명 쓰기를 창안해낸 유명한 분류학자 스웨덴의 린네(Linnaeus)는 꽃을 보면서 “가운데 자리에 한 여자(암술)가 드러누워 있고 둘레에 여러 남자(수술)가 둘러앉아서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갈파하였다. 맞는 말이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다. 동물은 생식기를 몸 아래쪽에 달고 있는데, 식물은 몸(줄기)의 위 끝자락에 수줍음 하나도 없이 덩그러니 매달아 곤충들을 꼬드기고 있다. 사람들은 그 꽃을 혐오스럽게 생각지 않고, 코를 들이대고 음액(陰液)의 냄새까지 맡고 있으니…. 곤충이 옮겨준 꽃가루를 받아 자식(씨앗)을 만드는 생식기가 꽃이다. 그런데 꽃에 따라서는 꽃가루를 바람에 태워 날리는 것(풍매화)도 있고, 곤충을 통해 옮기는 것(충매화)도 있다. 사막에서는 꽃가루를 벌새나 박쥐가 배달하기도 한다. 꽃은 이런 동물들을 끌어들이려고 오만가지 향기에다 더없이 달콤한 꿀을 만들어 놓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벌레들이 꿀을 얻어 먹는 대가로 꽃가루를 옮겨주니 하는 말이다.
한 꽃송이에 암술과 수술이 다 있는 꽃을 양성화라 한다. 그런데 제 꽃 수술의 꽃가루를 안에 있는 암술머리에 묻혀주면 열매가 잘 맺힐까. 과수원에서도 배나무나 복숭아, 자두나무를 가능한 여러 그루를 모아 심는다. 저 멀리 홀로 서 있는 자두나무에는 열매가 잘 맺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른 그루의 꽃가루를 그리고 가능한 한 다른 꽃의 꽃가루를 받아야 씨가 잘 맺힌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즉 같은 꽃의 꽃가루와 가루받이(受粉)를 하지 않으려 든다는 것이다.
제 꽃송이의 꽃가루를 받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 성질을 자가불임(自家不稔)이라 한다. 묘하지 않은가. 식물도 유전자가 비슷한, 가까운 사이에는 종자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 같은 꽃에서도 암술을 아주 길게 늘어뜨려서 자가수분(通情)을 피하는가 하면 암술과 수술의 성숙 시기를 달리하여 제꽃가루받이를 피한다. 영리하기 짝이 없다.
지렁이나 달팽이는 제 몸에 정자를 만드는 정소와 난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자웅동체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다른 개체와 교미를 하여서 딴 정자를 받는 타가수정도 한다. 자가수정은 사람에 비유한다면 근친 결혼인 셈이다. 근친 결혼을 하면 좋지 못한 유전자끼리 만나서 나쁜 형질의 자손을 낳기 쉽다하여 굳이 피한다. 동성동본끼리 결혼을 삼가는 것이 그런 것이다. 우생학(優生學)은 우리보다 동식물이 더 먼저 알고 있다. | (권오길 강원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大自然真是美麗! 在葉子長出、花開、飄散的蝴蝶蜂中,鳥鳴聲彙集在一起,演奏着雄壯的交響曲。 三羅萬象伸懶腰的春天,春天來到了我們身邊。
琪花瑤草做出了迎接春天的妖豔的手勢。 睜大眼睛,敞開耳朵,靠近我們的母親、大自然,和他們一起聽聽,享受春天。 正是因爲有了那刺骨的冬天,春天才會如此溫暖美麗。
不經歷年輕的痛苦,就等於不知道真正的幸福。 無論何時都是夏天的赤道地方的蜜蜂都不攢蜂蜜。 生活在穩定環境的生物絕對不會發生變化(進化)。 在努力克服苛刻的環境條件的過程中,會發生改變。 幾乎所有成功的人不都是戰勝困難家庭環境的人嗎? 生活在寒冷的冬天沒有的地方,食物就太稀奇了,爲什麼蜜蜂會採蜜呢? 所以那裏的人也懶惰地慢了下來。 總之,生物的行爲和習性因環境而異,沒有一個不是環境的產物。
讓我們把步子移到風姿翩翩的花兒上吧。 花兒是什麼,爲什麼,爲什麼會那麼隨季節地盛開呢? 爲了讓我們開心而五顏六色地展現姿態,這真不是真的。 他們把蜜蜂、蝴蝶和其他昆蟲叫來,讓手術的花粉粘在雌蕊上結下種子。 作爲非常喜歡花的植物學家,創立學名寫作的著名分類學者瑞典的林奈(Linnaeus)看着花說:"中間位置躺着一個女人(雌蕊),周圍圍着多個男人(手術)互相相愛。" 說得有理。
花是植物的生殖器。 動物在身體下方掛着生殖器,植物在身體(莖)的上端一點都不害羞地孤零零地吊着昆蟲。 人們並不討厭那朵花,還用鼻子聞到陰液的味道……用昆蟲轉移的花粉製作子女(種子)的生殖器就是花。 但是根據花的不同,有將花粉隨風焚燒(風梅花),也有通過昆蟲傳播(蟲梅花粉被風吹飛(風梅花)。 在沙漠裏,蜂鳥或蝙蝠還會送花粉。 花爲了吸引這些動物,在五花八門的香氣中製作出無比甜蜜的蜂蜜。 世上哪有免費的。 蟲子們以獲得蜂蜜爲代價,把花粉搬過來。
一朵兒雌蕊雙全的花叫做良性花。 但是,如果把我的花蕊的花粉埋在裏面的雌蕊頭上,果子會好起來嗎? 在果園裏也會盡可能多地栽種梨樹、桃樹、李子樹。 因爲獨自站在遠處的李子樹上不容易結出果實。 他們知道,無論如何都要畫出其他樹的花粉,儘可能地畫出其他花的花粉,才能結好種子。 也就是說,他們不想使用同一朵花的花粉和粉末。
如果收到自己花朵的花粉,就不會結出果實,這種性質被稱爲"自家不孕" 不妙嗎。 植物也不會在基因相似的、相近之間結種子。 在同一朵花中,雌蕊也拉長,避免自體水分,而且雌蕊和手術的成熟時期不同,避免接受自己的花粉。 精明絕倫
蚯蚓和蝸牛是在自己身上同時擁有製作精子的精牛和卵巢的雌雄同體。 但同時必須與其他個體進行交尾,接受其他精子的其他歌手。 如果把自我修改比喻成人,就等於近親結婚。 如果近親結婚,很容易遇到不好的基因,產生不良的子孫,所以一定要避免。 同姓同母之間不要結婚就是這樣。 優生學比我們更早了解動植物。 | (江原大學生命科學系教授權五吉)
돌담 아래 풀밭으로 들어서자 붕붕거리는 벌소리. 토끼풀꽃, 부추꽃, 종지나물꽃에도 벌들이 들고나느라 여념이 없고, 주먹만큼 송이가 큰 붉은 모란꽃에도 벌들이 날아들며 붕붕거린다. 벌들은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며 꿀을 채집하느라 분주하지만, 나는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풀밭 위를 날아다니며 벌들이 꿀 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한가롭게 앉아 있자니, 오전 내내 허물어진 사랑채 벽을 수리하느라 힘들었던 몸의 피로도 싹 가시는 느낌. 꽃과 나무, 나비나 벌 같은 무심한 존재들과 어울리는 순간들이야말로 내 영혼의 꿀을 채집하는 시간이며, 내 영혼의 근육을 키우는 소중한 시간. 풀밭에 저절로 자라는 풀들도 양식으로 삼지만, 풀밭의 향기와 색과 소리가 주는 기운 또한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양식이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삐거덕∼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이를 보니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벗. 꽃을 따라 이동하며 사는 양봉가 시인이다. 남녘땅 진주 사람인데, 아카시아가 꽃 필 무렵이면 벌통들을 싣고 ‘야반도주하듯’ 내가 사는 강원도 산골까지 온다. “어이, 친구. 아카시아 꽃비 맞으러 왔구만!” 나는 반갑게 친구의 손을 맞잡았다. “글쎄, 하늘이 꽃비를 내려줄지 흙비를 내려줄지 모르겠네.” 이렇게 대꾸하는 친구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아니, 흙비라니?”
아열대로의 심각한 기후변화가 나타나며 꽃이 피어도 꽃에서 꿀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 가장 많은 꿀을 제공했던 아카시아나무에서도 왕년처럼 꿀을 채취할 수가 없다는 것. “올핸 어떨지 모르겠으나 꿀이 나지 않으면 앞으로 고 시인 얼굴 잘 볼 수 없을지도 몰라.” 본래 꿀은 야생에서 얻는 것이 진짜. 정직하게 야생에서 얻는 꿀을 떠서 살아가는 양봉가 시인의 말을 들으며 내 마음도 잠시 울가망해졌다. 아, 야생에서 꿀을 얻을 수 없다면 이제 좋은 꿀을 먹기는 글렀구나. 설탕 꿀이 더 기승을 부릴 테니까. 무늬만 꿀이지 진짜 꿀은 영영 사라질 테니까. 그러면 꽃에 기대어 살아가던 내 친구도 양봉을 접을 수밖에 없을 것.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환경 위기가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을 때 이런 위기를 예견했었지. 벌이 없어지면 수분(꽃가루받이) 작용도 없어져 식물이 사라지고, 뒤이어 동물도 사라지고, 끝내 인간도 사라질 거라고. 이제 그런 예견이 눈앞의 현실이 된 것. “내가 염려하는 건, 이런 사태가 지속되면, 가장 아름다운 공생의 원리도 사라진다는 거야.” 양봉가 시인이 진지하게 하는 말을 나는 금방 이해했다. 그렇다. 벌들은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을 해치지 않고 식물이 생명을 영위할 수 있도록 수분 작용을 해주지 않던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생의 모범인가.
여러 해 전 내가 번역한 스와미 웨다의 ‘1분의 명상’에서, 저자는 꽃과 벌의 비유로 수행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파한 적이 있다. “벌들은 꽃의 꿀을 따는 것이 목표인데, 그런 자기의 목표를 이루면서도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다. 공부가 깊어진 숙련된 수행자는 바로 꽃의 꿀을 따는 벌과도 같다.” 그 무렵 나는 요가 수행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말한 꽃과 벌의 비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친구 시인은 차 한 잔을 마신 후 선물이라며 꿀 한 병을 전해주고 돌아갔다. “꿀 한 병에 지구를 몇 바퀴 돈 길이만큼의 길고 긴 벌의 길이 들어 있다!”는 그 귀한 꿀을. 나는 친구가 선물로 준 꿀을 이전처럼 헤프게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산책길의 아카시아나무 군락지를 지나면서도 바람결에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비를 두 팔을 활짝 벌려 맞으며 흔감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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