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육면체 모습을 한 지팡이 바위
충남 서산에 위치한 많은 선돌을 보면서 보령 땅을 향해 남으로 내려갔다. 이번에 찾아가는 동오리 마을은 주산면 소재지 북쪽에 위치한 보령댐 바로 밑에 있다. 동쪽의 명덕산과 서쪽의 배창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논농사가 주업이다. 원래는 이곳까지도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배창산이란 명칭도 배를 매놓은 곳이어서 붙여진 것이다.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 방앗간 옆 밭에 서 있는 커다란 선돌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선돌 때문에 마을 이름도 선돌 마을이라 부른다. 현재 밖으로 나와 있는 길이만도 약 2.3m 정도인데, 마을 사람은 밑에 묻힌 것이 더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바위가 왜 깊이 묻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데, 마침 버스가 들어와 동네 사람들이 내렸다. 그 중에서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바위의 내력을 물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찾아온 이유를 듣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이 동네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화산리라는 마을에서 이 선돌을 보면 바람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산리 사람들이 마을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돌을 눕혔다고 한다. 그러나 안병숙씨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이 마을로 시집온 이래로 이 바위가 눕혔던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현재 66세인데 21세에 시집을 왔으니 1959년 이전에 바위를 쓰러뜨렸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여하튼 화산리 사람들에 의한 선돌 훼손 사건이 난 후에 이 마을 사람들이 다시 바위를 세웠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남근석이나 무슨 무슨 바위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팡이바위라고 한다. 형체가 지팡이처럼 생기지도 않았는데, 지팡이바위라고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것을 남근석으로 부르면 안 된다고 하는 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땅 위로 솟아 있는 길이만도 약 230㎝나 된다. 그리고 사람 팔로 두 아름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둘레도 약 2m는 됨 직하다. 이 바위는 마치 직육면체처럼 솟아 있다. 그런데 윗부분은 훼손을 당했는지, 아니면 오랜 세월의 풍화 때문인지 완만한 경사가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밑부분에는 마치 성혈과 마찬가지로 홈이 파여 있어 주목할 만한 바위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사는 김승평(67)씨는 그것이 한국전쟁 때에 표적으로 삼고 총을 쏜 흔적이라고 말해 주었다. 왜 바위에 총을 쏘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탄흔보다 더 크게 파여 있다는 점과 주로 밑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를 끌 만했다.
문제는 지팡이바위의 전설에 있다. 이 바위와 관련한 전설은 두 가지가 전한다. 먼저 ‘보령군지’에 실려 있는 ‘선돌과 여장사’의 내용을 간략히 하면 다음과 같다.
한 부부가 아들딸과 함께 성주산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관군을 피해 부인은 자식들을 데리고 산속 깊이 들어가 살았다. 처음에는 곡식이 없어 자식들에게 칡뿌리를 먹였더니 장사로 성장했다. 하루는 아들이 호랑이를 잡아왔는데, 밤중에 암호랑이가 와서 슬피 우는 것을 딸이 때려잡을 정도였다. 그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힘을 아무데나 쓰는 오누이를 탓하며, 앞으로 전쟁이 날 것이니 주암산 근처로 자리를 옮길 것을 명했다.
그들은 전쟁에 대비해서 돌을 모아 주암산에 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누이동생이 돌을 머리에 이고, 앞치마에 싸고, 한 돌은 지팡이 삼아 지금의 동오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의 다급한 소리에 돌들을 버리고 산에 올랐더니, 오빠 혼자서 오랑캐와 싸우는 중이었다. 누이와 힘을 합쳐 싸웠지만 너무나 많은 오랑캐가 쳐들어왔기에 죽고 말았다.
이들이 죽은 것은 산신령이 자신의 사자인 호랑이를 죽여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누이가 돌을 갖고 오다가 떨군 것이 바로 동오리의 지팡이바위와 마당바위, 그리고 고깔바위라는 것이다.
이와 달리 지명 유래에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즉 ‘옛날 여장부가 고깔바위를 쓰고 마당바위를 치마에 싸 안고 지팡이바위를 짚고 가다가 치마 폭이 터져서 마당바위가 떨어지는 바람에 세 바위가 함께 우뚝 서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선돌과 여장사’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만이 전설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도 모두 이와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특히 여장부를 ‘옹녀각시’라고 하며, 바위로 만든 신발도 있었는데 땅에 묻혔다고 한다. 그리고 치마폭이 터진 것이 아니라, 옹녀각시가 명덕산에서 배창산으로 건너뛰다가 방귀 소리에 놀라서 마당바위를 놓쳤다고 하기도 한다. 전설이 점점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여하튼 마당바위는 높이가 160㎝ 정도에 위는 약 7∼8평 정도 넓적한 형태를 보여준다. 예전에는 젊은 남자들 10명 정도가 올라가서 잠을 잘 정도로 컸다고 한다. 이러한 바위를 치마에 싸서 산 사이를 건너뛸 정도로 옹녀각시가 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전설과 달리 지팡이바위는 남근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위 밑부분에 남겨진 흔적들은 바로 남근석의 뿌리에 해당되는 것으로 성혈임이 분명하다. 표적으로 총을 마구 쏘았다고 하더라도 성혈 자국처럼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화산리의 여자들이 이 바위를 보면 바람이 난다고 하는 속설 때문에 두 마을 간의 갈등이나 알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런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동오리 여자들은 바람이 나지 않고 왜 화산리 여자들만 바람이 날까. 그것은 마당바위의 형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마당바위는 마치 여자의 엉덩이처럼 탐스럽다. 그렇기에 마당바위는 여근석에 해당된다. 즉 동오리에는 남근석과 여근석이 같이 자리 잡고 있기에 그런 부정한 행위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화산리에는 짝을 이루는 남·여근석이 없고 미륵바위만 있기 때문에 그런 속설이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지팡이바위가 갖고 있던 원래 신앙적 속성이 탈락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신에 옹녀각시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라는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전승시킨 것임을 알게 한다. | 글 : 김종대 (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발췌 : 세계일보
長方塊狀的柺杖
看着位於忠清南道瑞山的衆多石灰,朝着保寧土地南下。 此次前往的東五里村位於舟山面北側的保寧水庫下面。 這裏是被東邊的明德山和西邊的培昌山環繞的盆地,以種植水田爲主業。 原來這裏也有海水進來。 "裴倉山"這個名稱也是因繫好船的地方而得名。
走進村子入口,隨處可見磨坊旁田間的大塊石子。 因爲這塊石子,村名也叫石子村。 據說,現在僅從外面出來就長約2.3米,而村民們埋在下面的就更好了。 但是,筆者不禁懷疑這塊岩石爲什麼會深埋。
在進村子的路口,正好有公交車進來,村裏人下車了。 抓住其中一位看上去心地善良的大嬸,詢問岩石的來歷。 剛開始是警戒的表情,但聽到馬上找來的理由,用手捂着臉笑了。
據說,從這個村子到位於西北側的華山裏,看到這個石子就會起風。 所以華山裏的人們爲了保護村裏的女人,把石子放倒在地。 但據安秉淑說,自嫁到這個村子以來,從未見過這塊石頭倒下。 據說,他現在66歲,21歲就嫁給了他,說不定在1959年以前就打倒了岩石。
總之,在華山裏人毀壞船石事件後,這個村民們又建起了岩石。 但在這個村莊,這岩石並不被稱爲南根石或什麼岩石。 叫做柺杖巖。 形體長得不像柺杖,不知道爲什麼叫柺杖巖。 這很可能是出於不能將其稱爲"南根石"的禁忌。
現在僅在地上聳立的長度就高達230釐米。 而且從人的胳膊兩圍來看,周長約2米。 這塊岩石聳立得像直六面體。 但上面部分是受到了破壞,還是因爲歲月的風化,形成了緩慢的傾斜。
而且底部就像成血一樣,挖出了槽,被認爲是值得關注的岩石。 但是住在這個村莊的金承平(音,67歲)說那是朝鮮戰爭時期作爲目標開槍的痕跡。 也就是說,不清楚爲什麼向岩石開槍。 但是,其痕跡比彈痕還要大,主要集中在底部,這一點也頗爲有趣。
問題在於柺杖岩石的傳說。 關於這塊岩石的傳說有兩種。 首先簡略一下《保寧君志》中記載的《先驅與女壯士》的內容如下。
一對夫婦和兒女住在聖住山附近。 丈夫被誣陷爲逆賊後,爲躲避官軍,妻子帶着子女深入山中生活。 起初因爲沒有糧食,給孩子們餵了葛根,後來成長爲生意。 一天,兒子抓了老虎回來,黑夜來了,傷心得女兒都打他了。 那天晚上,夢見山神出現,責怪到處用力的兄妹,並命令他們今後會爆發戰爭,所以把位置移到注巖山附近。
他們開始收集石頭,在周巖山築起山城。 妹妹頂着石頭,圍着圍裙,一石當柺杖走過現在的東吳裏。 但是聽到哥哥的急促聲,他扔下石頭爬上山,發現哥哥一個人正在和小丑打架。 雖然和姐姐同心協力戰鬥,但因爲有太多的小丑闖進來而死。
據說,他們死是因爲山神沒有殺死自己的獅子老虎來幫助他們。 另外,姐姐拿石頭過來時掉下來的就是山鴨的柺杖岩石和院子岩石,還有尖頂巖。
與此不同,地名由來描述得非常簡略。 也就是說,以前女將高帽岩石裹在裙子上,拄着柺杖岩石走路時,因爲裙子爆裂,院子岩石掉落,三塊岩石一起聳立起來。 可見《旋風與女壯士》最後部分的內容才成爲了傳說。
問村民們時,都給出了這樣的回答。 特別是女將簿被稱爲"翁女新娘",據說還有用岩石做的鞋子,被埋在了地上。 據說,並不是裙帶爆裂,而是翁女新娘從明德山跳到仰昌山時,被放屁聲嚇到而錯過了院子岩石。 可以說,這是展示傳說逐漸擴大的好例子。
不管怎麼說,院子岩石的高度爲160釐米左右,上方約爲7~8坪。 據說,以前有10名左右的年輕男性上牀睡覺。 用裙子包裹岩石,穿過了山間,可見翁女新娘是巨人。
但與這樣的傳說不同,柺杖岩石很好地展現了南根石的形象。 岩石底部留下的痕跡就相當於南根石的根部,很明顯是成血。 因爲,即使瞄準目標胡亂開槍,也很難像血跡一樣集中出現。 另外,由於華山裏的女人看到這塊岩石就會起風,所以兩個村之間存在矛盾和矛盾的事實也充分說明了這一點。
但是,爲什麼東吳裏女性沒有風,只有華山裏女性有風呢? 它似乎與院子岩石的形狀息息相關. 院子裏的岩石像女人的屁股一樣誘人。 因此,院子裏的岩石相當於呂根石。 也就是說,在東五里,南根石和呂根石坐在一起,可以防止這種不正當行爲。 但是,也許是因爲華山裏沒有男、女根石,只有彌勒巖,所以纔有了這樣的俗語。
這說明柺杖岩石原本具有的信仰屬性已經被淘汰了。 但從中可以看出,這是翁女新娘創作的"拄着柺杖"的另一個故事,並傳承下來的。 | 文章:金鐘大(文學博士·國立民俗博物館民俗研究科長) 摘錄:世界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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