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초 마을 주민들이 백시루와 돼지머리 등의 제물로 제의를 올렸던 미륵바위.
충남 천안은 현재 개발 속도가 엄청나다. 과거의 천안을 생각하고 찾아갔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이 말은 과거의 자리에 있던 유적이나 유물들의 흔적이 현재는 찾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아파트 등 택지나 건축지가 개발되면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유물들이 훼손된다. 문제는 그 유물들이 어디로 갔는가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해줄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천안에도 아름다운 남근석이 존재한다. 이들 남근석이 어디로 갔는가 문의하기 위해서 천안시청과 천안문화원에 전화를 했다. 한 곳은 정확히 말해주었지만, 나머지 한 유물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천안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왔던 신탁근 선생에게 전화를 드렸다. 신탁근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민속박물관인 온양민속박물관의 산 증인으로서 충청도 지역의 민속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매우 깊다.
신 선생과 새벽 약속을 하고 그곳을 찾아 나섰다. 왜 새벽에 만나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필자의 경우 새벽잠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침 일찍 나서야 노인 분을 만날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현익(69)씨를 만나 겨우 봉명동 미륵바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미랏골은 미륵이 있다고 해서 예전에는 미륵골이라 불렸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몰라도 미랏골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미륵바위는 봉서중학교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미랏골은 조선 말기만 해도 군수가 찾아오기 어려울 만큼 오지였다. 그러나 이 지역이 아파트로 개발되면서 미륵바위는 사라질 지경에 처했다. 그런데 이곳 땅주인의 부인이 미륵바위를 모시길 원해서 현재의 봉서산 기슭에 옮겨 치성을 드렸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이곳에는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미륵바위는 땅 위로 솟아오른 부분만 약 140㎝에 불과하나, 땅 밑에 묻혀 있는 부분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원래의 미륵바위는 임진왜란 때 왜인들이 이곳까지 쳐들어와 머리를 잘라내 냉천에 넣었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의 바위는 그 이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미륵바위는 원래 기와지붕으로 비각을 세워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1988년 구획정리를 하면서 지붕을 없애고 시멘트로 제단 주위를 정리해 놓았다. 미륵바위 제의 날짜는 정월 초로 택했다. 백시루와 돼지머리, 메 등이 중요한 제물이며, 이 미륵제를 위해서 제관과 제주를 선정한다. 이 외에도 개인이 찾아와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또다른 남근석 2기가 봉서산 쌍용공원 내에 위치한다. 큰 남근석은 약 178㎝의 크기이며, 위에서부터 귀두부를 경계 짓는 곳까지 35㎝로 매우 늠름한 모습이다. 형체도 우람할 뿐만 아니라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귀두부의 경계까지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에 비해서 작은 남근석은 120㎝로 작다. 마치 치마를 두른 듯이 다소곳한 모습이다.
사실 이들 바위도 원래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 미륵바위와 마찬가지로 큰 남근석은 봉명동 북쪽 개목 마을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작은 것은 여근석으로 천안의 에덴조경사에서 보관하던 것을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들 두 바위의 귀두 부분이 깨져 있는데, 일부러 훼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남근석이 개목 마을 입구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바위가 마을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서낭제나 미륵제처럼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져 왔던 것이다. 특히 이 마을의 뒤쪽에 있던 봉서산 중턱에서 선사유적지가 발견된 바 있었다.
유적지에서 무문토기나 반월형 돌칼 등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청동기시대까지 소급이 가능하다.
출토된 반월형 돌칼의 쓰임새로 보아 이곳은 농경지대임이 분명하다. 특히 돌칼은 이삭을 자를 때 사용되는 농경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근석도 그 당시에 세워진 것일 경우 그것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표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이 바위가 선사시대 이래로 최근까지도 개목 마을사람들에 의해서 신으로 모셔져 왔을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녔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남근석의 경우 아들을 낳는 데 매우 영험한 신통력이 있다고 한다. 그런 신통력을 믿어서 일까. 일제 때 이 바위를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하늘의 조화로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등산객들에게도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남근석을 조사하는 동안 옆쪽 공터에서 운동하던 한 사람이 기웃거리며 다가왔다. 그 사람에게 이 바위가 무엇 같으냐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이곳에 이런 바위가 다 있었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비켜 지나갔다.
토박이가 떠나간 마을에는 아파트촌이 들어서고 남근석에 대한 기억도 점차 사라져 간다. 바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나 눈길을 한번 받을 뿐이다. 매일 이곳을 찾아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바위가 되었다. 길목을 꾸며주는 조경석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 글 : 김종대 (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발췌 : 세계일보
忠清北道天安鳳瑞山彌勒巖和南根石彌勒谷爲何富足?
圖爲正月初,村民們作爲白蒸籠和豬頭等祭品提議的彌勒巖。
忠南天安目前的開發速度非常快。 想着過去的天安去尋找的話,很容易迷失方向。 這句話相當於現在很難找到過去遺址或文物的痕跡。 如果開發公寓等宅地或建築用地,本應留在原地的文物就會遭到破壞。 問題是,當被問及這些遺物去了哪裏時,能正確回答的人並不多。
天安也有美麗的南根石。 爲了詢問這些南根石去了哪裏,記者給天安市政府和天安文化院打了電話。 有一處正確地告訴了他,但沒有得到關於其餘一件文物的信息. 沒辦法,只好給在天安居住了很久的申卓根先生打了電話。 申卓根先生作爲我國最早的私立民俗博物館溫陽民俗博物館的見證人,對忠清道地區的民俗文化有着深厚的感情和關心。
和申先生約定凌晨到那裏去找他。 我開始懷疑爲什麼要在凌晨見面。 因爲筆者經常凌晨睡覺。 但是早上一早出來才能見到老人,通過他們才能得到信息。 就這樣,記者見到了李賢益(音,69歲),好不容易找到了鳳鳴洞彌勒巖。
因爲木乃伊谷有彌勒,所以以前被稱爲彌勒谷。 但是不知從什麼時候開始,變成了木乃伊骨。 這個村是全州李氏集成村。 據說,彌勒巖矗立在鳳瑞中學前。 在朝鮮末期,米拉特谷還是一個偏僻的地方,郡守很難光顧。 但隨着該地區被開發成公寓,彌勒巖面臨消失的境地。 但是,這裏的地主的妻子希望供奉彌勒岩石,因此移到現在的鳳瑞山腳下,爲他們獻上了治城之道。 也許是因爲這個原因,據說這裏有很多富翁。
據說,彌勒巖聳立在地上的部分只有約140釐米,但埋在地下的部分也不容小覷。 有傳說稱,壬辰倭亂時,倭人闖入此處,將原來的彌勒岩石剪掉後放入冷泉。 據說現在的岩石是從那以後重新修建的。
據說,彌勒巖原來是用瓦屋頂建造碑閣供奉的。 但是1988年進行區劃整理時,拆除了屋頂,用水泥整理了祭壇周圍。 彌勒巖祭的日期定在正月初。 白蒸籠、豬頭、梅等是重要的祭品,爲彌勒祭選定祭冠和濟州。 除此之外,據說還有個人前來獻禮。
有趣的是,另外兩座南根石位於鳳棲山雙龍公園內。 大塊的南根石長約178釐米,從上到下到上至下界建有邊界的35釐米,非常威風凜凜。 不僅形體魁梧,而且充滿自信。 連耳朵豆腐的界限也清晰可見。 與此相比,小的南根石只有120釐米。 宛若披着裙子,一副溫順的樣子。
事實上,這些岩石原本也不在這裏。 和彌勒巖一樣大的南根石是從鳳鳴洞北側開木村搬到這裏來的。 小的是呂根石,據說是捐贈了天安的伊甸園造景寺保管的。 但是,雖然不知道是什麼原因,但這兩塊岩石的耳頭部分已經碎裂,不知道是不是故意破壞的。
南根石在開木村入口處的事實表明,這塊岩石曾是村子信仰的對象。即像西囊祭和彌勒祭一樣,一直供奉着村子守護神。 特別是在位於該村後面的鳳棲山腰上發現了史前遺址。
從遺址出土無紋陶器或半月形石刀這一點來看,至少可以追溯到青銅器時代。
從出土的半月形石刀的用途來看,這裏分明是農田。 特別是石刀是切穗時使用的農耕工具。 因此,如果南根石也是當時建起來的,那麼它很有可能是祈願豐饒和多產的標誌。 那意味着這塊岩石自史前時代以來,直到最近一直被開木村人奉爲神,具有悠久的傳統。
特別是南根石在生兒子方面具有非常靈驗的神通力。 難道是因爲相信這種神奇的能力嗎? 據說,日本帝國主義時期曾試圖將這塊岩石帶回日本,但由於天空的和諧而失敗。
但是,目前登山者也不太關心。 筆者調查南根石的過程中,旁邊空地上運動的一位人探頭探腦地走過來。 問那個人這塊石頭像什麼。 那個人這裏都有這樣的岩石,但一個人喃喃自語地閃過。
土生土長的村莊裏建起了公寓村,對南根石的記憶也逐漸消失。 只是聽到關於岩石的傳聞後來到現場的人或受到一次關注而已。 這塊岩石對每天來這裏的人來說毫無意義。 他似乎認爲這只不過是裝飾路口的造景石而已。 | 文章:金鐘大(文學博士·國立民俗博物館民俗研究科長) 摘錄:世界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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