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순창군 창덕리 소재 남근석 복제품
성(性)은 가장 고귀한 것이면서도 오랜 기간 유교 전통에 갇혀 그에 대해 관심을 드러내면 천박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 내려온 설화들과 전국 각지에 널려 있는 남근석, 여근석 등 각종 성 관련 민속자료들은 조상들의 성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상징물들이다. 전통 생활과 민속에 뿌리내린 성에 대한 올바른 접근 없이는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세계일보는 민속 가운데 살아 숨쉬는 성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하였다.
‘왜 민속박물관에 남근석을 세웠을까.’
경복궁 내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아가면 우리 민속문화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실내 전시실 내용뿐 아니라 야외에도 우리 문화의 상징적인 모습들을 선정해서 재현해 놓았다. 예컨대 민중 신앙의 상징인 돌탑과 장승, 그리고 돌로 만든 장승인 벅수 등이 그것이다. 그 곳을 박물관에서는 장승동산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이 장승동산 한구석에 세워진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닮은 돌들이다. 남근석 2기와 여근석 1기가 있다. 남근석은 북한 평북 태천 학봉리와 전북 순창 창덕리에 있는 것을 재현한 것이다. 이것을 선정한 이유는 북한과 남한을 대표하는 남근석으로 일종의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남우세스러워 보이는 이 돌들을 왜 세웠느냐는 항의가 있을 법한데, 아직까지 항의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봄가을이면 학생들이 많이 찾는다. 물론 이들의 위치는 장승동산에서도 가장자리에 있다. 문제는 왜 이들 돌을 우리 민속문화의 상징들을 모아놓은 장소에 세워놓은 것일까. 과연 이들 돌이 우리 문화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에 이곳에 세워놓은 것일까.
한국문화 유산 가운데 아직 온전하게 설명되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알리는 작업은 매우 긴요하다. 쉬운 예로 전통적인 성과 관련한 풍속과 이야기가 그러하다.
최근에 와서 이들과 관련한 보고서나 논문,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논의가 과연 우리 문화를 올바르게 읽어낸 것인가 하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들 성 관련 소재를 상품화하거나 흥미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즐기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조상들이 단지 성을 즐기는 대상으로 삼았을까.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온 도자기 하나가 지체 높은 양반과 관리들의 목을 달아나게 만들었다. 그 도자기는 바로 남녀의 성행위가 묘사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바로 이런 도자기를 완상하다가 적발되면 바로 처벌을 받았다. 지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조선시대에 자행된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그와 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그런 즐김의 대상이기보다는 삶과 직결된 신앙적 대상으로 더욱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증거는 청동기시대까지 소급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 시기에 세워진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와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의기(農耕文儀器)는 좋은 예다.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맨 위에 성기가 굳건하게 서 있는 남자가 있다. 그 밑에는 고래와 여러 물고기들이 그려져 있다. 잘 알려진 농경문의기에는 솟대와 따비(풀뿌리를 뽑거나 밭을 가는 농기구)로 밭이랑을 가는 농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 농부의 모습이 매우 가관이다. 성기가 유달리 크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물을 통해서 우리는 성기 문화의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즉 과장되게 큰 성기가 많은 수확을 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생산능력이 강화되어 있다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신체에 달려 있는 과장된 성기가 보다 많은 생산을 초래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런 점에서 원초적인 사고라고 할 만하다.
신체에 달려 있는 성기가 그와 같은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면, 거대한 바위로 나타난 성기 모습은 얼마나 능력이 탁월할 것인가. 이런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우리 조상들은 굳게 믿어 왔다. 그렇기에 이들 바위를 신성하게 모시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성기바위, 즉 남근석은 그렇다면 어느 때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을까. 무엇보다도 청동기시대 이래로의 전통은 풍요로운 수확에 있었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지으면서 추구하였던 가장 큰 지향점은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수확이 요구된다. 농사가 잘되고 못되고의 사연은 물론 자연재해로부터 얼마나 피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 자연재해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남근석에 대한 치성행위다. 즉 많은 결실을 위해 생산력이 강한 남근석에 치성을 드림으로써 보다 많은 씨를 뿌릴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와 함께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탁월하다고 믿었다. 불임여성들이나 딸만 생산한 부녀자들에게는 이 바위 자체가 바로 생산할 수 있는 변강쇠와 같은 남성신이었던 것이다. 우뚝 선 바위는 바로 강력한 힘의 원천이며, 동시에 단단함을 통해 영원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기자(祈子)신앙의 대상으로 남근석을 전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남근석에 대한 숭배와 의례 행위가 오랫동안 우리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왔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기바위에 대한 믿음이나 혹은 숭배가 미개인들이나 하는 행위로 치부되는 경향도 부정하기 어렵다. 실증주의와 서구적 과학주의, 혹은 기독교와 같은 고등종교에서 바라볼 때 남근석에 대한 믿음은 그런 면이 두드러질 수 있다. 그러나 이웃 나라인 일본에는 한 마을에도 성기를 모시는 신사를 여러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다른 문화의 잣대로 자기 문화를 잴 수 없다는 것을 명쾌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근석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그에 대한 믿음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살피기 위해 떠날 시간이 되었다. 다음에는 가까운 서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글 : 김종대 (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발췌 : 세계일보 ▒
全羅北道淳昌郡昌德里材料南根石複製品
性是最珍貴的,但長期被囚禁在儒教傳統中,表現出對他的關心,給人以淺薄的印象。 但是流傳於民間的傳說和遍佈全國各地的南根石、呂根石等各種有關性方面的民俗資料是公開表達祖先對性的關心的象徵物。 如果不正確接近植根於傳統生活和民俗的性,對韓國文化的理解深度也會很淺。 世界日報推出了重新審視民俗中栩栩如生的性文化的企劃系列。
"爲什麼在民俗博物館設立南根石呢?’
來到位於景福宮內的國立民俗博物館,就能一覽韓國民俗文化。 不僅是室內展示室的內容,野外也選定並再現了韓國文化的象徵性面貌。 例如,象徵民衆信仰的石塔和長生柱,以及用石頭製成的長生柱等。 那裏在博物館被稱爲"長勝東山"。
其中,吸引我們視線的是建在長勝東山一角的男性和女性的生殖器相似的石頭。 這裏有2座男根石和1座女根石。 南根石再現了位於朝鮮平安北道泰川鶴峯裏和全北淳昌昌德里的情景。 選擇這個的理由是代表朝鮮和韓國的南根石,具有祈願和解和統一的意圖。
但是,有趣的是,雖然有人抗議說爲什麼建造這些貌似南轅北轍的石頭,但至今沒有受到過抗議。 特別是一到春秋,這裏的學生就特別多。 當然,他們的位置在長勝東山也處於邊緣。 問題是爲什麼要把這些石頭建在聚集韓國民俗文化象徵的場所呢? 究竟這些石頭在韓國文化中具有什麼意義,纔在這裏建起來的呢?
韓國文化遺產中還有很多完整的說明,或者是不爲人知的。 在它們消失之前,正確宣傳的工作是非常緊要的。 簡單的例子就是與傳統成果相關的風俗和故事。
最近,與他們相關的報告書、論文以及以普通人爲對象的書籍正在大量出版。 但是,這些討論是否正確地解讀了韓國文化,這不能不說是個疑問。 即,將這些性相關素材商品化或理解爲興趣對象,其目的更強。 難道我們的祖先只是把性當作享受的對象嗎?
朝鮮時代從中國引進的一件瓷器,讓高腳貴族和官員們逃之夭夭。 那個瓷器就是男女的性行爲描寫出來的。 在朝鮮時代,如果發現這些陶器,就會受到處罰。 現在無法想象的事情在朝鮮時代肆意妄爲。
但是,民衆很難找到欣賞類似作品的機會。 與其說是享受的對象,不如說是與生活息息相關的信仰對象,更加貼近生活。 可以窺見這些事實的證據追溯到青銅器時代,歷史悠久。 在此時期建成的蔚州盤龜臺巖畫和大田槐亭洞出土的農耕文儀器就是很好的例子。
從盤龜臺巖畫來看,最上面有一個生殖器挺立的男子。 下面畫着鯨魚和很多魚。 衆所周知的農耕文義旗上刻着用草杆和稻草(拔草根或耕地的農具)犁田壟的農耕文義旗。 那個農夫的樣子很可觀。 因爲生殖器描寫得特別大。
通過這些文物,我們可以窺見生殖器文化的痕跡。 也就是說,可以推測出,誇張地認爲大性器官對提高收穫有重要作用。 到底是因爲什麼理由認爲可以取得這樣的結果呢?
這正和增強產能的信心有關。 從這一點看,認爲取決於人身體的誇張性器官會帶來更多的生產,可以說是原始的思考方式。
如果說取決於身體的生殖器具有同樣的能力,那麼通過巨石形成的生殖器會有多麼卓越的能力呢? 我們的祖先一直堅信這種不可想象的能力。 正因爲如此,這些岩石才發展成了神聖的民間信仰。
聖基岩,即南根石,那麼什麼時候成爲了信仰的對象呢? 最重要的是青銅器時代以來的傳統在於豐饒的收穫。 我們民族在韓半島定居生活、務農時追求的最大目標就是從飢餓中解放出來。 爲此需要很多收穫。 不僅取決於收成好壞,而且還要取決於能從自然災害中避免多少損失。 但是,自然災害是靠人的力量是無可奈何的。
因此,他想到的是對南根石的治性行爲。 也就是說,他們相信,爲了取得更多的成果,向生產力強的南根石獻上忠誠,可以播下更多的種子。
與此同時,他相信生產子女的能力也非常卓越。 對於不孕女性和只生產女兒的婦女來說,這塊岩石本身就是可以直接生產的邊疆鐵一樣的男性神。 巍峨的岩石就是強大力量的源泉,同時認爲堅硬是具有永恆能力的。 特別是作爲祈願生孩子的記者信仰對象,在全國任何地方都能找到南根石。 這也意味着長期以來,對南根石的崇拜和禮儀行爲一直傳承着我們的傳統。
但是,很難否認這種對聖器岩石的信任或崇拜被當作是未開化者的行爲的傾向。 從實證主義和西方的科學主義,或基督教等高等宗教來看,對南根石的信任可能會凸顯這一點。 但是,在鄰國日本,在很多地方都可以找到供奉聖器的神社,這是出於什麼原因可以解釋的呢? 這正是用其他文化的尺度衡量自己文化的明快體現。
那麼,現在到了南根石以什麼面貌留給我們,對他的信任以什麼面貌傳給我們的時候了。 下次我們從附近的首爾開始看吧。 | 文章:金鐘大(文學博士,國立民俗博物館民俗研究科長) 摘錄:世界日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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