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녕(甘寧)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흥패(興覇)이며 익주(益州) 파군(巴郡) 임강현(臨江縣) 사람이다. 임강현은 오늘날 충칭시(重慶市) 중 현 지역이다.
생애
익주의 토호 : 선조는 원래 남양군 사람인데 파군(巴郡)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계연, 군승을 지냈으나 곧 관직(官職)을 버렸다. 젊은 시절부터 호협하여 동네 무뢰한(無賴漢)들을 이끌고 지역 자경단(自警團)과 같은 행동을 해 범죄사건 등이 일어나면 범인 체포(犯人逮捕)와 처벌을 행했다. 또한 조정의 관리라도 자신들을 존중(尊重)하고 후하게 대접하는 자와는 함께 즐기고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부하들을 시켜 혼내주는 등 방약무인(傍若無人)으로 날뛰었다. 이런 행위를 20여 년간 지속했다.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손에는 활 등을 들고 허리에는 방울을 달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방울 소리만 듣고도 그들이 찾아온 것을 알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격이 포악(暴惡)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다.
감녕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감녕(甘寧)의 주방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일찍이 허물이 있자 여몽(呂蒙)에게로 달려가 투항했다. 여몽은 감녕이 그 아이를 죽일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즉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후에 감녕이 예물(禮物)을 갖고 여몽의 모친을 배알(拜謁)하고 직접 모친과 당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주방의 어린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그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응답(應答)했다. 잠시 후 배로 돌아오자 그 아이를 뽕나무에 묶어놓고 직접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일을 마친 후 뱃사람들에게 명하여 배의 닻줄을 내리도록 하고 옷을 벗고 배 안에 누웠다. 여몽은 매우 노여워하며 북을 쳐서 병사(兵士)들을 모아 배로 가서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다. 감녕은 이 소식(消息)을 들었지만 고의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안 여몽의 모친이 '주군(孫權)에게서 중대사를 떠맡은 네가 주군의 신하인 감녕(甘寧)을 너의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에 죽게 한다면 설령 주군께서 힐문(詰問)하지 않더라도 그 행동이 신하된 자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라며 여몽을 만류(挽留)하였고 여몽은 본디 지극한 효자(孝子)였으므로 모친의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을 풀고는 감녕(甘寧)의 배로 가서 웃으며 감녕에게 '흥패(감녕의 자), 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招待)하셨으니 어서 올라오시오!'라며 화해(和解)를 청하였고 감녕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며 여몽에게 사과(謝過)하고는 여몽과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온종일 즐겁게 지냈다는 뒷이야기가 전한다.
이렇게 보면 훈훈해 보이지만 아이를 내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자기들끼리 하하, 호호 즐겁게 노는 것이 훈훈해? 오의 군사 체계가 얼마나 독립적(獨立的)이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주방 소속의 어린이였다지만 소속을 따지며 스스로 탈출(脫出)해 투항한다던지 대놓고 상관인 여몽의 말을 무시한다던지 군사대 군사로 맞붙으려 한다 던지 손권 휘하로 전적으로 연결(連結)된 세력이 아닌 각 군사 세력의 연합(聯合)과도 같은 오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정사의 감녕전(甘寧傳)에서 '감녕은 사납고 살생(殺生)을 좋아했지만 호방하고 맑은 성정과 계략(計略)이 있었다'고 설명하는데 확실히 대범(大凡)하지만 잔인한 면이 있긴 있었던 것 같다.
익주를 떠나다
이후 익주를 떠나 형주목 유표(劉表)를 따른다. 삼국지의 본전(本傳)에서는 ‘공격하여 탈취하기를 그만두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읽었으며 유표에게 가 의탁했다.’라고 익주를 떠나 유표에게 간 경위를 서술(敍述)했다. 그러나 "영웅기"에서는 감녕이 형주로 간 원인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처음에 감녕은 익주목 유언이 죽은 후 익주의 토호 출신(土豪出身) 조위가 옹립하여 유언을 대신해 자사가 된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을 섬겼다. 그러나 조정에서 호모를 유장 대신 자사로 삼아 내려보내자 동료 심미(沈彌)·누발(婁發) 및 형주별가(荊州別駕) 유합(劉闔) 등과 함께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유장을 공격했고 패하여 형주(荊州)로 달아났다. 남양에 주둔하다가 유표에게 중용(重用)되지 않아 황조에게로 갔다.
"오서"에서는 유표가 유학자(儒學者)라 군사에 익숙하지 못해 감녕(甘寧)이 이를 보고 주변의 영향으로 갑자기 무너질 것이라 염려하여 유표(劉表)를 떠났고 원래 오나라로 오려 했으나 황조가 하구를 막고 있어서 황조(黃祖)를 섬겼다고 한다. 그런데 황조도 감녕을 예우해주지 않았다. 손권(孫權)이 공격해오고 황조의 군사가 패주할 때 감녕이 손권의 부하 능조(凌操)를 사살해 황조를 사로잡힐 위기(危機)에서 구해냈음에도 황조의 대우는 바뀌지 않았다. 황조의 부하 소비(蘇飛)는 자주 황조에게 감녕을 중용하도록 진언(進言)했지만 황조는 오히려 감녕이 거느린 객들을 유인(誘引)해 흩어지게 했다. 감녕은 소비(蘇飛)에게 불우한 처지를 한탄(恨歎)했고 소비는 황조에게 말해 감녕을 주(邾)의 현장으로 삼아 원하거든 다른 곳으로 가도록 했다.
오나라에 등용
감녕(甘寧)은 소비가 제공한 기회를 이용하여 손권(孫權)의 밑으로 들어갔고 주유(周瑜)와 여몽(呂蒙)의 추천으로 손권의 기존 신하들과 같은 대우(待遇)를 받았다. 감녕은 손권에게 먼저 노쇠(老衰)한 황조를 치고 더 나아가서 유표의 후사가 될 아들들의 유약(柔弱)함을 틈타 형주를 아우르며 나아가 익주(翼州)까지 엿보자고 진언했다. 손권은 이 말을 받아들였고 장소가 반대하자 반박(反駁)했다. 마침내 손권이 황조를 토벌하여 원수(怨讎)를 갚음과 함께 강하 지역을 손아귀에 넣자 감녕에게 병사를 주어 당구에 주둔(駐屯)하게 했다. 그런데 소비가 체포되어 처형(處刑)당할 위기에 처하자 감녕이 손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루에 머리를 쳐서 피를 흘리며 소비(蘇飛)의 구명(救命)을 호소해 옛 은덕에 보답(報答)했다.
그 후로도 감녕(甘寧)은 담력과 기지를 이용해 뛰어난 군사 능력(軍事能力)을 발휘하였다. 적벽 전투(赤壁戰鬪)가 끝나고 주유가 남군의 조인(曹仁)과 싸웠지만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감녕은 이릉성을 탈취(奪取)하지만 곧바로 조인이 보낸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包圍)당하게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감녕만은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있으면서 주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주유(周瑜)가 와 포위를 풀었다.
훗날, 손권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탈취한 일로 노숙(魯肅)이 관우(關羽)와 익양에서 대치(對峙)하게 되었을 때 이를 수행했다. 당시 관우가 호왈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그중 정예 5천을 가려내어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겠다고 했다. 감녕(甘寧)은 당시 병사 3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병사 5백을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對抗)하겠다고 말해 노숙이 가려 뽑은 병사 1천을 받아 그 날 밤 가니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감녕은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며 건너면 반드시 사로잡는다고 자신했는데 과연 관우는 함부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땔나무로 진영(陣營)을 만들었으니 그 이름이 관우뢰(關羽瀨)라고 한다.
유수에서 조조의 40만 대군과 대치할 때에는 부하 가운데 용감(勇敢)한 병사 100명 정도를 선발해 조조군에 기습을 가해 혼란(混亂)을 일으킨 후 크게 승리하는데 전투 전에 병사들을 격려(激勵)하고 일일이 술잔을 따라 돌렸다. 이처럼 그는 유능(有能)한 인물을 존중하고 병사들을 아꼈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위해 기꺼이 싸웠다고 한다. 손권(孫權)은 “조조에게는 장료(張遼)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다”고 그를 칭찬(稱讚)하였다.
감녕은 동료인 능통(凌統)과 자주 불화를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능통의 아버지인 능조를 감녕이 전사시켰기 때문이었다. 감녕(甘寧)에 대한 능통의 증오심(憎惡心) 때문에 두 사람은 전장에서 공로(功勞) 다툼을 벌였고 손권이 이를 중재해 화해시키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하지만 합비 전투(合肥戰鬪)에서 능통이 손권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악진(樂進)을 만나 고전하여 죽게 될 위기(危機)에 몰리자 감녕이 악진(樂進)을 물리치고 능통(淩統)을 구출해주어 능통은 감녕과 화해한다.
"삼국지연의" 속 감녕
감녕(甘寧)은 머리에 촉한의 사마가(沙摩柯)가 쏜 화살에 맞고 부지구의 큰 나무 밑에서 죽고 이때 나무에 있던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그의 시신(屍身)을 에워싸고 지켜주었다는 내용(內容)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각색(脚色)일 뿐 정사에는 사마가가 감녕을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 그 뒤 감녕(甘寧)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고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祈願)하며 고깃덩어리를 던지면 까마귀가 공중에서 받아먹는다는 전설(傳說)이 생겨났다.
소비(蘇飛) 덕분에 스스로 변방으로 밀려나 동오(東吳)에 투항하는 것까진 같은데 황조(黃祖)와 싸울 때 정보에게 쫓겨나는 황조를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살려달라고 애원(哀願)하는 황조를 무시하고 죽인다. 이는 자신이 오나라의 신하(臣下)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덧붙여 자신의 투항을 도와준 소비를 살려달라는 부탁(付託)을 하면서 동오에 평생 충성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선 황개의 고육지계(苦肉之計)를 말리느라 주유에게 간청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 때문에 몇몇 삼국지 게임에선 감녕(甘寧)이 오나라 진영에 없는 경우 적벽대전 이벤트가 활성화(活性化)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고육지계를 말리는 것도 그렇고 어째 연의계열 창작물(創作物)에선 감녕의 성격이 정사보다 온화(溫和)하게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얼떨결에 황개와 함께 주유에게 얻어맞고 나서 감택이 채중과 채화를 속이려는 걸 눈치 채고 감택의 연기(演技)에 맞춰 같이 주유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연기를 하는 등 눈치 빠르고 유들유들한 성향(性向)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황조 휘하에 있을 때 능조(淩操)를 죽인 것 때문에 그 아들인 능통과의 사이가 한동안 껄끄러웠다. 거기다가 감녕(甘寧)이 계속 전공을 세우면서 손권의 칭찬을 받으니 능통이 더더욱 심기(心氣)가 불편했다. 결국 감녕이 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조조의 영채를 기습하는 전공(戰功)을 세우자 거기에 자극받은 능통이 이튿날 악진(樂進)과 싸울 것을 요청하였고 둘이 싸우던 중에 조휴(曹休)가 능통의 말을 활로 쏴 넘어뜨려 위기에 처하지만 이때 감녕이 화살을 날려 악진을 낙마시켰기 때문에 위기를 모면(謀免)할 수 있었다. 능통이 영채에 돌아와 자신을 구한 사람이 감녕인 것을 알고는 감격(感激)하여 과거의 원한은 잊어버리고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다.
이릉대전에서는 노환(老患) 중에서 출전했다가 사마가의 화살을 뒤통수 머리에 맞아 도망가다가 나무 밑에서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이는 연의의 창작이지 정사에선 그냥 노환으로 자연사(自然死)한 것으로 보인다. ‘촉과 오가 싸우면 이득을 보는 건 위나라뿐이다. 많은 장수들이 죽을 텐데......'라고 유언(遺言)을 남긴 뒤 사망(死亡)한 것으로 묘사한다. 어쨌든 연의에서는 동오의 명장(名將)들 중 하나임을 감안(勘案)했는지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감녕의 시신을 둘러싸고 울었다고 나온다. 그래서 감녕을 해당 지방의 수호신격(守護神格)으로 모시고 까마귀를 그의 심부름꾼으로 여겨 그 지방에서는 안전(安全)한 항해를 기원하며 까마귀들에게 먹이를 제물(祭物)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대중들에겐 잘 부각(浮刻)되지 않는 사실이기는 한데 화살로 적장을 물리친 경우가 많다. 상술한 능통의 아버지 능조(淩操)부터 황조, 채모의 동생 채훈, 악진까지... 이쯤 되면 황충(黃忠) 저리가라다. 문제는 2차 창작물에서 감녕(甘寧)의 활 실력에 대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 궁술이 동작대 궁술대회(弓術大會)에서만 묘사되는 하후연(夏侯淵)조차 양궁선수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어째서! 비인기팀 선수의 서러움이었는데 삼국지 13에서 그의 궁병 적성을 S로 주면서 드디어 연의 고증(演義考證)에 성공했다.
여담으로 관우(關羽)처럼 후대에 신으로 떠받들렸다. 송나라 때 바람이 없어서 조운선이 출발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감녕(甘寧)이 때마침 바람을 불러왔다며 오왕신으로 봉작(封爵)되기도 했고 청나라 때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聊齋志異)이에도 오왕신으로 등장한다. 다만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관우 같은 전국구 신은 못 되고 지역신(地域神)에 머물렀다. 감녕묘(甘寧廟)에 '오왕묘'라고 소동파가 현판도 썼다.
연의에서 까마귀가 그의 시신(屍身)을 덮어줬다는 것 때문에 까마귀를 다스린다는 이미지가 있다. 까마귀로 변하게 한다 던지 까마귀 부하(部下)들이 고기를 한 번에 낚아채서 먹는다던지 그외 중매(仲媒)를 서주거나 풍랑을 안정시켜주는 신으로도 섬겨졌다.
각종 매체에서 감녕(甘寧)을 방울과 깃털장식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옛날에 수적질을 할 때 방울과 깃털장식을 했다는 말이 있고 연의에는 유수구(濡須口)에서 깃털을 단 다음 조조군에 기습(奇襲)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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