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통(淩統, 189년 ~ 237년)은 후한 말, 중국 삼국시대 동오의 장군(將軍)이다. 자는 공적(公績)이다. 능조(淩操)의 아들이며 양주 오군 여항현 사람이다.
일생
아버지 능조(淩操)는 오나라의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2대에 걸쳐 섬겼다. 그런데 203년 능조가 황조(黃祖)를 공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삼국지"에서는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밝히지 않았으나, 위요의 "오서"에는 능조를 죽게 한 것이 감녕(甘寧)이라 했다). 당시 능통(淩統)은 15세였으나 주변 사람들이 능통을 칭찬했고 능조가 국사(國事)를 위해 죽었으므로 손권은 능통을 별부사마에 제수하고 파적도위를 겸임하여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리게 했다.
손권(孫權)이 보둔과 마둔을 공격할 때 따라갔는데 손권은 보둔을 함락(陷落)시키고 마둔에는 병사 1만을 남긴 채 능통(淩統)과 장이에게 포위를 맡기고 돌아갔다. 기한이 되기 전 능통은 대장 진근(陳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진근은 술 마시는 예의를 어겼고 능조를 모욕(侮辱)했다. 사람들이 연회를 떠난 후 진근은 길에서도 능조를 험담(險談)했으므로 능통은 진근을 칼로 찌르니 며칠 가고 죽었다. 마둔을 공격(攻擊)할 기한에 능통은 진근을 죽인 죄를 지고 스스로 화살과 돌을 받아내며 싸워 제 때에 자신이 맡은 부분을 무너트렸다. 여러 장수들은 능통의 활약(活躍)으로 적을 무찔렀다. 돌아올 때에는 스스로 군정에게 가 결박되었다. 손권은 능통을 칭찬하고 그 공적(功績)으로 죄를 면해 주었다.
208년 손권이 다시 황조 토벌을 개시(開始)했을 때 적군 장수 장석(張碩)을 죽인 공을 높게 사서 승열도위(承烈都尉)에 봉해졌다. 적벽 싸움에서는 주유(周瑜)를 따라 오림에서 조조(曹操) 군을 공격했고 이어 강릉성의 조인(曹仁)을 공격하는 데에도 참가했다. 교위로 승진했다. 환현 공격에 참전하여 탕구중랑장이 되고 패국상을 겸했으며 여몽(呂蒙)을 따라 유비(劉備)에게서 장사, 계양, 영릉 3군을 빼앗았다.
그 후에도 합비(合肥)를 공격하는 데 참가하여 우부독이 되었다. 손권(孫權)이 철수 도중 장료(張遼)에게 반격을 당해 적 가운데 고립(孤立)되어 생명이 위독해지자 능통(淩統)은 부하 300기를 이끌어서 적진으로 침투(浸透)했다. 장렬한 사투 끝에 손권의 구출(救出)에 성공했다. 전신에 상처를 입어 빈사 상태(瀕死狀態)인 능통에게 손권은 스스로의 의복을 입히고 극진하게 간호(看護)를 시켰다. 다시 회복한 능통은 자신을 따라 온 부하가 전원 전사했던 것에 낙심(落心)했지만, 손권은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공적이 있다. 그래서 충분하다.'라고 위로했다. 편장군으로 제수(除授)되었다. 이후 산월을 토벌(討伐)하여 정예 1만을 얻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의 서술에 따르면 그 후 유수구 전투에서 이때 장료와 겨루던 도중 조진(曹眞)의 화살에 맞고 낙마하여 악진(樂進)의 표적이 되었다. 악진은 능통(淩統)을 죽이기 위해 창을 휘둘렀는데 그 창을 막은 다른 창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감녕(甘寧)의 창이였다. 이 전투에서 감녕은 낙마한 능통을 구출하여 능통은 감녕과 화해(和解)했다. 원수인 감녕이 궁지에 빠졌을 때 구해준 것을 계기로 아버지의 원한(怨恨)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서 감녕과 단단한 친교(親交)를 묶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삼국지(正史)"에서는 그러한 내용은 없고 군대 임무를 받아 근무하는 곳(임지, 任地)이 감녕과 같이 된 곳은 없었다. 다만 전쟁에서는 몇 번이나 같이 작전 행동을 한 적이 있다. 위요(韋曜)의 "오서(吳書)"에 따르면 동료인 여몽(呂蒙)이 오의 무장들을 모으고 연회를 열었을 때 능통(淩統)은 칼춤을 추면서 아버지의 원수인 감녕(甘寧)을 죽이려고 했지만 여몽이 그 자리를 방해하게 돼서 결국 감녕을 죽이지 못하게 되었다.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삼국지" 오서 능통전에 따르면 49세에 죽었다. 아버지 능조(淩操)가 전사했을 때 15세였다는 기록으로 추론하면 죽은 해는 237년이다. "삼국지" 오서 '낙통전'에서 서술된 점(낙통(駱統)이 죽은 능통의 병사를 받은 것이 낙통이 이릉 싸움(221년)에 참전한 것보다 전에 서술되었으며, 또 낙통은 228년에 죽었다)과 오나라와 관우(關羽)와의 싸움이나 이릉 전투에서 참가하고 있지 않는 것 등에서 능통전(淩統傳)의 ’49세’를 ’29세’의 오기(誤記)로 보고 217년에 사망했다고 주장(主張)하는 설도 있다.
사망 시기 논란
사망 연도에 29세 사망설과 49세 사망설(死亡說)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능통(淩統) 본인의 열전에는 49세에 죽었다고 적혀있는데 이 기록대로라면 능통의 생몰연도는 189~237년에, 다른 오나라의 인물인 낙통(駱統)의 열전을 보면 낙통이 능통(淩統) 사후에 그의 부대를 통솔(統率)하여 222년의 이릉 전투에 참전(參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낙통은 228년에 죽었다. 237년에 죽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222년에 멀쩡히 산 사람의 부대를 이끌었다는 셈이 되는데 낙통전(駱統傳)에는 분명히 '능통이 죽은 후'라고 적혀 있다.
즉 능통전(淩統傳)이 잘못되었거나 낙통전(駱統傳)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인데 능통전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경우 능통전의 나이 四十九를 二十九의 오기로 보는 설이 있다. 만약 낙통전이 맞다면 능통의 생몰년도(生沒年度)는 189년~217년이 된다. 또한 능통이 형주 공방전이나 이릉대전(夷陵大戰), 조비의 몇 차례의 남정 등 이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손권(孫權)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상당히 존재감(存在感 )있는 남자가 217년 이후 237년까지 20년간 숱한 중요한 전투에 참전한 기록이 없다는 점도 217년 사망설을 뒷받침하는 근거(根據)가 된다. 거기다가 건강실록에서는 217년에 죽었다고 못 박아버렸다.
또한 능통(淩統) 사후에 손권이 몇 살 밖에 안 된 능통의 자식들을 궁 안에 거둬 양육(養育)했다고 한다. 능통전 기록대로 49세에 죽은 게 맞다면 당시 49세가 적은 나이는 아닌데도 그때까지 장성(長成)한 아들이 없이 유아에 불과했다는 점도 납득(納得)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합비 공방전 때 부상을 당해 손권이 배에 능통(淩統)을 남겨두고 의복을 갈아입혔으며 약을 써서 죽지 않았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로 볼 때 합비 전투(合肥戰鬪)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後遺症)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217년 중국에 역병(疫病)이 크게 퍼져서 이 해에 건안칠자의 5명이 죽고 사마랑(司馬朗)이나 노숙(魯肅)이 이 해에 죽는데 합비 공방전에서 입은 부상 후유중에다가 역병까지 감염(感染)되어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능통 역시 요절(夭折)한 이가 맞다.
능통(淩統)은 비록 군문(軍門)에 있었지만 현인들을 친히 하고 문사(文士)들을 대접하며 재물을 가벼이 하고 의를 중요시 하니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또한 환(皖)현을 공격하는데 따라가니 탕구(盪寇) 중랑장으로 배수되어 패(沛)국 상(相)을 맡았다. 여몽 등과 함께 서쪽으로 3군을 공취(攻取)하고 익양(益陽)에서 돌아와 합비로 가서 우부독(右部督)이 되었다. 이때 손권이 군사를 철수시키는데 선두부대(先頭部隊)는 이미 출발하자 위의 장수 장료 등이 나룻터 북쪽을 엄습(掩襲)해 왔다. 손권이 선두의 병력의 뒤쫓아가 되돌리려 했으나 병력이 이미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사세가 서로 미치지 못하였는데 능통(淩統)이 친근히 대우하던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를 무너뜨리며 손권을 붙잡고 지켜내며 탈출하였다.
적들이 이미 다리를 무너뜨렸지만 다리에 속한 양쪽 판은 그대로 있으니 손권(孫權)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고 능통(淩統)은 다시 돌아서 싸우니 주위 병사들은 거의 다 죽었고 자신 또한 상처를 입었지만 수십 인을 죽였다. 손권이 이제는 (화를) 면했을 거라 생각하여 이내 돌아왔다. 다리는 무너지고 길은 끊겨 능통은 갑옷을 입은 채로 자맥질하며 왔다. 손권이 이미 배에 올랐는데 그를 보고 놀라 기뻐했다. 능통은 친근히 대우(待遇)하던 병사들 중 돌아온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애통(哀痛)해 하니 그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했다. 손권이 소매를 당겨 눈물을 닦아 주며 말하길 “공적, 죽은 자는 이미 죽었고, 실로 경은 살아주었는데 어찌 사람 없음을 걱정하오?”라 했다. “오서(吳書)”에 이르길 ‘능통의 상처가 심하여 손권이 마침내 배에 능통을 남겨두고 그의 의복(衣服)을 갈아주었다. 상처가 탁씨(卓氏)의 좋은 약에 힘입어 그래서 죽지 않았다’고 한다.
편장군(偏將軍)에 배수하고 본래의 병사보다 배나 많은 병사를 주었다. 이 때 같은 군 출신의 성섬(盛暹)이 손권에 천거(薦擧)되었는데 그의 큰 자질은 능통을 넘는다고 하였다. 손권이 “농통(淩統) 같기만 하면 족하오”라 하였다. 후에 성섬이 불러져 밤에 도착했는데 이때 능통은 이미 자리에 누웠다가 이 말을 듣고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가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였다. 그가 선한 자를 아끼고 해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능통(淩統)이 산중(山中)의 사람들이 아직 굳세고 용맹하니 위엄과 은혜로 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손권이 동쪽을 점령(占領)하고 또한 토벌하는 영을 내리고 그 지역의 성에서는 능통이 요구(要求)하는 바는 모두 먼저 주고 나중에 보고하라고 명령(命令)했다. 능통은 본래 군사들을 아꼈고 군사들 또한 그를 사모(思慕)했다. 정병 1만 명을 얻어 그의 본현(本縣)을 통과하는데 걸어서 관청의 문에 들어가 장리(長吏)들이 3개의 판을 품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공경(恭敬)하게 예를 다하고 친하게 대함이 옛 친구처럼 대하니 은혜로운 뜻이 더욱 융성(隆盛)하였다.
일이 다 마치고 나가던 차에 병에 걸려 죽으니 이 때 나이 49세였다. 손권(孫權)이 이를 듣고 벽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애통해 함을 스스로 능히 그치지 못하고 며칠 동안 찬을 줄이고 말을 하면 눈물을 흘렸다. 장승(張承)을 시켜 그의 애도문(哀悼文)을 지어 새기게 하였다.
두 아들인 능열(淩烈)과 능봉(淩封)은 나이가 각각 몇 살 밖에 되지 않아 손권이 궁 안에서 기르고 친애(親愛)하며 대우함이 여러 아들들과 같으니 빈객(賓客)들이 나아가 알현(謁見)하면 그들을 불러 보여주며 “얘들이 내 호랑이 새끼요”라 했다. 나이가 8,9세가 되자 갈광(葛光)에게 영을 내려 독서(讀書)를 가르쳐 주게 하고 10일에 한번은 말을 타게 하였다.
능통(淩統)의 공을 추록(追錄)하여 열정후(烈亭侯)에 봉하고 그의 옛 병사들을 돌려주었다. 후에 능열(淩烈)은 죄를 지어 면직(免職)되었고 능통이 다시 작위(爵位)를 이어 병사들을 통솔(統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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