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태(周泰, ? ~ 229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유평(幼平)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하채현(下蔡縣) 사람이다. 손권(孫權)이 나중에 주태의 공을 치하하며 한 말에 따르면 출신이 한미(寒微)했다.
생애
처음에 장흠(蔣欽)과 함께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다. 손책이 회계태수 왕랑을 무찌르고 회계군을 점유(占有)하면서 별부사마가 되어 병사를 받았다. 손권(孫權)과 주태가 처음 조우했는데 손권이 주태(周泰)의 풍채를 마음에 들어하여 형에게 주태를 달라고 요청(要請)했다. 손책이 육현(六縣)의 반란을 토벌하러 간 차에 주태는 손권과 함께 천 명이 되지 않는 병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을 지키다가 방어 태세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월 수천 명의 갑작스런 공격(攻擊)을 받았다. 손권은 목숨의 위험(危險)을 받았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였으나 오로지 주태만이 용감(勇敢)하게 손권을 지켜냈고 손권의 측근들도 주태로 말미암아 함께 싸워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주태는 이 싸움에서 열두 군데나 상처를 입었다. 손책에게 사례로 춘곡장(春穀長)에 임명되었다.
장흠(蔣欽)과 함께 손책의 측근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196년(건안 원년) 손책이 회계태수 왕랑을 무찌르고 회계군(會稽郡)을 점유하면서 별부사마가 되어 병사를 받았다. 이는 회계를 치기 전에 별부사마가 된 장흠보다는 약간 늦은 것이다. 손권은 주태(周泰)가 마음에 들어서 형에게 주태를 붙여달라고 청했다. 198년 조랑, 태사자 등이 항거(抗拒)하고 있던 단양 6개현을 손책이 정복할 동안 손권은 선성(宣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병사가 채 천 명이 안 되는데도 경계를 소홀(疏忽)히 하다가 산월 수천 명의 습격을 받았다. 손권(孫權)은 비로소 말에 올라탔으나 이미 창칼이 오고 가고 안장을 찍기도 하였다. 모두가 당황하는 속에서 오로지 주태(周泰)만이 용감무쌍하게 몸을 던져 손권을 지키니 좌우도 주태로 말미암아 함께 싸워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주태는 열두 군데나 상처를 입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되살아났다. 주태 덕분에 손권이 살았으므로 손책(孫策)은 매우 고마워하며 단양군 춘곡현장(春穀―, 지금의 안후이성 판창 현)으로 보임시켰다. 199년 손책을 따라 여강태수 유훈의 본거지 환현(皖縣, 지금의 안후이성 첸산 현)을 점령했고 유훈을 도운 강하태수(江夏太守) 황조까지 쳐부수었다. 돌아오는 길에 예장군 의춘현장(宜春―, 지금의 장시성 위안저우구)에 임명(任命)되었다.
건안 4년(199년), 손책(孫策)을 따라 여강태수 유훈의 본거 환성(皖城)을 쳤고 또 유훈을 구원한 강하태수 황조를 치는 데에도 종군(從軍)했다. 손책 군이 귀환 중에 예장에 들르면서 의춘장(宜春長)에 임명되었다.
손권의 신임
208년 손권(孫權)을 따라 황조 토벌에 공을 세웠다. 적벽 전투(赤壁戰鬪)에서는 주유, 정보 휘하에서 조조군을 막아냈고 이어서 남군의 조인을 공격하는 데에도 참전(參戰)했다. 이후 잠(岑)에 주둔했다. 217년 유수(濡須)로 쳐들어온 조조를 격퇴하는 데 기여하고 유수독 겸 평로장군(平虜將軍)에 올랐다. 주연, 서성 등의 장수들이 주태(周泰)에게 복종하지 않자 손권이 특별히 유수오로 와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술을 돌리다 주태에 이르자 옷을 벗게 하고 흉터를 일일이 가리키며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물었다. 주태가 하나하나 옛 전투에 대해 답하니 손권이 그 팔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유평, 경은 나의 형제를 위해 호랑이처럼 싸우면서도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소. 살갗에는 그림을 새긴 양 수십 개의 흉터가 생겨버렸소. 내 어찌 형제의 은혜(恩惠)로써 대하지 않으며 중임을 맡기지 않을 수가 있겠소? 경은 오나라의 공신(功臣)이오. 영화와 치욕, 기쁨과 걱정을 마땅히 나와 함께할 것이오. 유평, 한미한 가문이라고 스스로 물러나지 마시오.” 다음날 푸른 비단 덮개[靑縑蓋]를 하사받았다. 이에 서성 등도 순종(順從)하였다. 손권이 관우를 파한 후 촉도 도모(圖謀)하고자 주태를 한중태수 겸 분위장군(奮威―)에 임명하고 능양후(陵陽侯)에 봉했다. 황무 연간(222년 ~ 229년)에 세상을 떠났다.
손책(孫策)이 죽고 손권이 강동을 물려받은 후 손권을 따라 황조 토벌(討伐)에 공을 세웠으며 적벽 전투(赤壁戰鬪)에서 주유, 정보를 따라 조조 군을 막아냈고, 이어지는 남군의 조인 공격에도 참전(參戰)했다. 형주 평정 후에는 잠(岑)에 주둔했다. 217년 조조가 유수(濡須)를 침공하자 주태(周泰)는 유수로 와서 조조를 막아냈고, 조조가 물러난 뒤에도 남아 유수독이 되었으며 평로장군(平虜將軍)이 되었다. 이 즈음 같이 주둔한 서성(徐盛), 주연(朱然) 등의 장수들이 주태에게 복종하지 않자 손권은 잔치 자리에서 주태의 옷을 벗게 하고 상처 자국을 일일이 가리키면서 옛 일을 회상하고 공적(功績)을 기려 자신이 쓰던 푸른 덮개를 쓰도록 하여 문제를 해결(解決)했다. 손권이 형주를 차지한 후 나아가 촉을 침공하려고 하면서 주태는 한중태수(漢中太守) · 분위장군(奮威將軍)에 임명되고 능양후(陵陽侯)에 봉해졌다. 황무(黃武) 연간(222년 ~ 22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주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장흠과 함께 장강(長江)에서 사람들의 재물을 털었던 수적 출신(水賊出身)으로 설정했다. 손책에게 임관한 후 유요의 수하 장영의 진영을 급습(急襲)해 불을 지르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선성에서 산월로부터 손권을 구출(救出)하고 중상을 입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우번이 소개한 화타(華佗)의 치료로 한 달 만에 회복한다.
적벽(赤壁)에서 초촉과 장남이 순찰선 20척으로 전투를 걸어오자 한당과 같이 출진하여 장남을 직접 베고 문빙까지 물리친다. 조조군이 화공(火攻)에 분쇄된 후 이어진 남군 전투에서도 선봉에 서서 이릉을 점거(占居)한 감녕에게 닿는다. 유비가 손부인과 혼인하고 함께 동오(東吳)에서 탈출할 때 장흠과 같이 추격한다.
유수구 전투(작중 215년)에서 장료, 서황, 허저의 군사들에 포위당한 손권을 또 온몸에 부상을 당해가며 구한다. 이전의 군사 속에 갇힌 서성마저 돌입(突入)하여 구한다. 전후 손권이 흉터를 일일이 가리키며 치하하는 일화(逸話)가 이어진다. 상처 하나에 술 한 잔씩을 마시게 해 주태(周泰)가 크게 취한다는 묘사를 더하였다. 조조(曹操)와의 화의 후 장흠과 더불어 유수구를 지킨다. 형주 공방전에도 참여한다. 이릉 전투에서 가공의 동생 주평이 관흥에게 죽는다. 육손 밑에서 활약(活躍)하며 만왕 사마가와 20여 합을 겨룬 끝에 거꾸러트린다. 이후로는 등장(登場)하지 않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흠과 함께 장강 일대에서 양민(良民)들의 재물을 터는 도적 출신으로 나온다. 손책이 강동을 차지하기 위해 유요(劉繇)를 공격할 때 장영(張英)의 진영을 급습하고 손책(孫策)의 부하가 되었다. 손권과 함께 선성을 지키다가 많은 상처를 입었을 때 화타(華陀)의 치료를 받고 한 달도 되지 않아 회복했다.
조조(曹操)가 형주를 점령한 후 손권을 공격하려 하자 한당(韓當)과 함께 출진하여 장남(張南)을 죽였다. 적벽 전투에서 조조를 물리친 후 남군(南軍)을 공격할 때에도 용맹스럽게 싸워 공을 세웠다.
손권이 군사를 일으켜 환성(晥城)을 점령하고 합비(合肥)를 공격했으나 도리어 장료에게 대패(大敗)하여 위기에 처했다. 주태(周泰)는 단기로 적군 속에 뛰어들어 손권을 구해낸 다음 포위당한 서성까지 구해냈다. 손권은 잔치를 열고 이 싸움에서 부상을 많이 입은 주태의 상처(傷處)를 가리키면서 전공을 기렸다. 조조와 화의가 이루어진 후 장흠과 함께 유수구를 지켰다. 이후 여몽이 형주(荊州)를 점령하고 이릉에서 촉군을 격파할 때에도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관직은 한중태수(漢中太守), 능양후(能陽侯). 동료 해적 장흠과 함께 손책(孫策)에게 귀순한 후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손책의 사후 선성을 산적(山賊)들에게 공격당할 땐 중상을 입으면서까지 손권(孫權)을 구출하였다. 이릉 전투에선 남만장수(南蠻將帥) 사마가를 죽였으며 후일 조조(曹操)와의 합비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고, 유비(劉備)와의 싸움에서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주태(周泰)는 손권 막하의 장수이며 구강 하채(九江下蔡) 사람으로 난세를 당하여 손책이 유요(劉繇)를 칠 때 도와주고 그의 막하(幕下)에 들었다. 선성(宣城)을 지켰을 때는 밤에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 손권(孫權)을 보호해 싸우노라 몸에 십여 군대 상처를 입어 거의 죽을 지경이었으나 명의(名醫) 화타(華陀)의 치료를 받아 완쾌하였다. 유수(濡須) 사움에서는 한당(韓當)과 함께 거의 조조를 잡을 뻔했고 나중 다시 조조의 침입(侵入)을 받았을 때는 단신(單身)으로 세 번이나 손권(孫權)을 포위 속에서 구해냈다. 연회석상에서 웃옷을 벗기고 보니 전신 거의 빈틈없을 정도의 상처투성이라 손권은 그에게 청일산(靑日傘) 받을 것을 허락하여 공을 찬양(讚揚)하였다. 벼슬이 한중(漢中) 태수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손책(孫策)이 원술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을 무렵 장흠과 함께 손책의 부하로 들어가 그 측근(側近)이 된다. 손책이 이민족 토벌에 나설 때 방심하고 있던 손권이 몇 배가 넘는 적병에게 포위(包圍)되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때 주태(周泰)가 육탄으로 손권을 수비(守備)해 활약한 덕분에 적을 패주(敗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몸에 열두 군데나 부상을 입고 잠시 의식불명(意識不明) 상태에 빠진다.
그후 황조 토벌과 적벽 전투(赤壁戰鬪), 남군 등 각지를 전전하는데 주태(周泰)의 지휘 하에 들어온 주연과 서성은 그의 명령(命令)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손권은 연회 석상(宴會席上)에서 주태에게 윗도리를 벗게 하고 몸에 난 상처의 유래에 대해 말하게 한 뒤 군주(君主)가 쓰는 우산을 하사한다. 그 뒤로는 모두 주태를 따르게 된다. 마침내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분위장군에 임명되고 황무 연간(222~229년)에 사망한다.
오나라의 믿음직한 1급 무장이며 본디 장강(長江:양자강)의 수적(水賊)이었으나 손책(孫策)이 양주자사 유요(劉繇)를 공격할 때 장흠(張欽)과 함께 수하 3백을 이끌고 손책군에 투항(投降)하여 처음 공을 쌓았다. 유요가 평정된 후 주태(周泰)는 손권(孫權)의 청에 의해 그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에 주둔(駐屯)했다. 그는 이 신성에서 평생을 좌우할 명성(名聲)이 되는 전투를 치루게 된다.
손책이 엄백호(嚴白虎)를 토벌하기 위해 강동으로 떠나자 선성 주위(周圍)에 있던 도적들이 약탈(掠奪)을 감행한 것이었다. 당시 선성에는 병사가 얼마 없었으므로 주태(周泰)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혼란(昏亂)한 와중에서 손권(孫權)을 말에 태우고 칼 한 자루에 의지하여 직접 도적(盜賊)들을 베며 싸우기를 계속하여 마침내 도적(盜賊)들이 크게 패하고 물러났을 때에는 주태의 몸이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 있었다. 무려 12군데나 창살에 찔리고 베인 상처(傷處)가 나 있었던 것이다.
손책(孫策)은 중국 역사상 최강의 명의 화타(華타)을 수소문해 주태(周泰)를 치료하였으며 이 일로 인해 손씨 가문의 주태에 대한 신뢰(信賴)는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로도 많은 전공(戰功)을 쌓아 한중태수(漢中太守) 분위장군의 직위까지 올랐으며 능양후(陵陽侯)에 봉해진 후에 오나라 황무 연간(222년-228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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