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개(黃蓋)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공복(公覆)이며 영릉군 천릉현 사람이다.
생애
처음에는 영릉군의 군리로 있었다. 이후 자신을 초빙(招聘)하려는 지방관에게 찾아가려고 했으나 난을 일으킨 도적패들에게 막혀서 못가고 있었다. 그 난을 일으킨 무리를 손견(孫堅)이 격파하자 그 때 손견을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이후 손견이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이를 따라갔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따랐다.
당시 산월이 복종하지 않고 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현이 있었으므로 황개(黃蓋)는 그 곳의 수장이 되었다. 석성현에 현리 둘을 임명했는데 부정부패가 심하였으므로 둘을 주살(誅殺)했고 춘곡현장, 심양현령으로 전임되었다. 모두 아홉 현을 지켰는데 가는 곳마다 안정(安定)되었으며 강한 자와 부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와 청렴(淸廉)한 자를 도왔으므로 산월 사람들은 황개에게 회부했다. 이후 일남태수(日南太守) 직도 역임했는데 일남(日南)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베트남이며 당시에는 최고의 오지(奧地),였다.
적벽 전투에서 주유(周瑜에게 화공을 제안하였고 이것이 채택되었다. 며칠 뒤 주유, 감택과 함께 짠 각본대로 일부러 소동(騷動)을 일으켜 스스로를 해치는 고육지계(苦肉之計)를 행하여 조조를 속였고 동남풍이 부는 날 조조(曹操)에게 거짓 투항하여 군량선으로 위장(僞裝)한 날랜 배를 타고 조조 군대에 접근하여 배에 불을 질렀다. 화공(火攻)은 성공하여 조조의 군대가 입은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이 컸다. 이것은 손권·유비 연합군이 적벽 대전(赤壁大戰)에서 이기는 요인이 되었다.
무릉만이(곧 오계만)이 반란을 일으켜 군[어느 군인지는 황개전(黃蓋傳)에 명시되지 않았고 무릉만이 곧 오계만이 무릉군에 있는 만(蠻)족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라 이것만으로는 확언(確言)하기 어렵다]의 성을 쳐 점령(占領)했다. 손권은 곧 황개로 이곳의 태수를 겸임하게 했다.
당시 군의 병사가 5백 명이라 황개(黃蓋)는 능히 대적할 수 없다고 보고 성문을 열어 두었다가 적이 반쯤 들어왔을 때 이를 쳤다. 적 수백을 참수(斬首)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점령당한 성읍을 되찾았다. 그 우두머리를 주살(誅殺)하고 그에 붙좇은 사람들은 사면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일어난 반란을 모두 평정했고 파, 예, 유, 탄의 읍장과 군후들은 절개(節槪)를 바꾸어 예절을 받들어 황개를 뵙기를 청했으므로 군의 경내는 안정되었다. 후에 장사군 익양현이 산월의 공격을 받자 이것을 평정(平定)하였다.
편장군이 더해졌고 재임 중 병이 들어 죽었다. 손권은 황개(黃蓋)의 아들 황병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손가 3대에 걸친 공신
황개(黃蓋)는 어렸을 때부터 고아가 되어 어린 나이 때부터 흉난(凶難)을 만나고 일찍이 갖은 고생을 겪었으나 굳센 의지(意志)가 있어 비록 빈천한 삶을 살아도 범용(凡庸)한 보통 사람들과 스스로 같지 않아 항상 땔나무를 지는 틈에도 책을 공부하고 병법를 강독(講讀)했다는 것이 오서에 있는 그의 옛 생활의 설명이다.
처음에는 군의 관리가 되었는데 효렴으로 천거(薦擧)되어 공부에 불려간다. 그 후 손견을 따라 남의 도적들을 격파하고 북에서는 동탁(董卓)을 격파하는 등 공을 세우니 별부사마로 배수된다.
손견이 죽은 후 황개(黃蓋)는 손책을 수행하며 태사자와 만날 때도 수행하였으며 무봉 교위로 있을 때는 황조를 공격(攻擊)하는데 참가한다. 후에 손책이 죽고 손권이 뒤를 이은 다음에는 손권을 수행하면서 몸에 갑옷을 입고 전진하였으며 위험한 지역까지 가서 성을 공략(攻略)했다.
적벽대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는 주유의 부장으로 참전하는데 오나라 수군이 조조의 군대를 상대로 한차례 승리를 거둔 뒤 황개(黃蓋)는 주유에게 화계를 사용할 것을 건의한다. 즉 사실 화계는 황개가 낸 계책(計策)이었던 것이다. 이런 황개의 말에 따라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우고 편지를 써서 조조(曹操)에게 거짓으로 항복(降伏)한다고 알린다.
조조는 황개(黃蓋)의 사자를 만나 자세히 묻고, "너희들이 속이는 것이 아닌가 두렵다. 황개가 만일 진실(眞實)하다면 당연히 전례를 뛰어넘는 작위(爵位)와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보기 좋게 걸려드니 황개는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전진했다. 조조군(曹操軍)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投降)한다고 말했으나 도착한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溺死)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렇게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으나 이 와중에 안습한 기록이 있다. 황개(黃蓋)는 전투 중에 유시에 맞아 차가운 물속에 추락(墜落)해 오나라 병사들이 일단 구해주기는 했는데 구한 사람이 황개인지 몰라 그냥 평상 옆에 둔다. 황개는 죽기 전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한당을 부른다. 운 좋게도 한당(韓當)이 이를 듣고 "이는 공복의 소리다."라고 하며 그에게 향해 가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옷을 풀어 바꿔 입으니 겨우겨우 살아나게 된다.
삼국지연의
젊은 시절 손견이 큰 뜻을 이루고자 몸을 일으켰을 때부터 따라 다닌 4명의 공신 중 한 사람이다. 이후 손책, 손권까지 3대를 받든 오의 원로(元老)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손견을 모시기 시작한 정보(程普), 한당(韓當), 조무(祖茂)와 함께 손견의 사천왕(四天王)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적벽대전에서 존재감(存在感)이 급상승하는데 우선 항전을 주장하는 주전파(主戰派)의 일원이기도 하고 동오의 문관들이 제갈량(諸葛亮)을 힐난하며 설전을 벌이자 그들을 꾸짖는 것으로 개념(槪念)인 인증을 한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라면 역시 고육지계(苦肉之計)이다. 압도적인 대군으로 조조가 쇄도(殺到)해 오자 조조를 속이기 위해 주유와 짜고 조조의 첩자(諜者)가 보는 앞에서 뼈와 살이 분리되도록 주유에게 매질을 당한다. 물론 나이가 나이인 만큼 주유가 "그 조조(曹操)를 속이기 위해서는 고육계가 따라야 하는데 장군께서는 연로하셔서 아니 됩니다." 라며 말리나 황개(黃蓋)가 "나는 3대에 걸쳐 손씨 가문에 은혜를 입은 바 손씨 가문(家門)을 위한 일이라면 뼈가 으스러진다 해도 원망치 않으리다!" 라며 기어코 자신이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걸 노장파(老壯派)와 소장파 세력의 다툼으로 오인(誤認)하여 신뢰한 조조의 뒤통수를 치고 추격하다 장료의 활을 맞고 물에 떨어졌다는데 한당(韓當)이 구해준 일화를 반영한 듯 여기서도 구출(救出)되어 죽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 딱히 등장하는 대목이라고는 손부인 에피소드 밖에 없으며 이마저도 그냥 한마디 언급에만 그쳤다.
물론 적벽대전(赤壁大戰)의 과정 중 상당수가 나관중의 창작인 만큼 황개의 고육지계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창작이긴 하지만 적어도 황개가 사항계(거짓 투항)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정사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나관중(羅貫中)이 콤비를 좋아해서인지 한당(韓當)과 짝을 이뤄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평가
정사 삼국지에서 황개(黃蓋)는 용모는 엄숙하고 굳세며 병사를 기르기를 잘하니 매번 정토할 때마다 사졸들이 모두 다투어 선두(先頭)에 나섰을 정도였으며 관직에 임하여서는 결단력(決斷力)이 있어 일이 지체되는 게 없었느니 국인들이 그를 사모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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