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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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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장흠(蔣欽)

[삼국지 인물사전 - 장흠(蔣欽)] 


장흠(蔣欽,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공혁(公奕)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수춘현(壽春縣) 사람이다.

생애
흥평(興平) 원년(194년),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에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고 흥평 2년(195년),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할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병사를 받았고 손책의 측근이였던 주태(周泰)와 함께 손책을 따라 단양, 오, 회계 3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예장 공격에도 참가했다. 갈양위(葛陽尉)가 된 뒤로 세 현의 장을 역임(歷任)하여 도둑을 잡았고 서부도위로 승진(昇進)했다. 동야에서 여합(呂合)과 진랑(秦狼) 등이 손씨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토벌하여 여합과 진랑을 사로잡고 다섯 현을 평정했다. 토월중랑장(討越中郞長)이 되었고 경구(經句)와 소양(昭陽)을 식읍으로 받았다. 하제가 이(黟)의 반란을 토벌할 때에는 1만 명을 이끌고 도와 함께 평정(平定)했다.

건안(建安) 13년(208년), 주유(周瑜)의 지휘 하에서 적벽 대전(赤壁大戰), 남군 전투(南郡戰鬪)에서 공을 세웠으며 건안 20년(215년)에 손권이 합비(合肥)를 공격하였다가 진북(津北)에서 장료의 기습을 받아 위급에 처하자 분전하여 공을 세우고 손권(孫權)을 지켜내었다.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고 유수독(濡須督)을 겸했다. 이후 서울로 소환(召還)되어 우호군(右護軍)이 되었고 송사 업무를 맡았다.

장흠(蔣欽)은 비록 부귀했으나 절검(節儉)하여 집안의 어머니와 처첩(妻妾)들은 모두 싼 옷을 입었다. 손권(孫權)이 장흠의 집을 찾아가 이를 알고는 장흠을 칭찬하였고 화려한 옷과 장식품(裝飾品)들을 하사하였다.

당초 선성에 주둔(駐屯)하고 있으면서 예장의 반란을 토벌(討伐)하고 있을 무렵에 무호령(蕪湖令) 서성이 장흠이 있는 곳의 관리를 사로잡아 표를 올려 그의 목을 베기를 구했으나 손권은 장흠(蔣欽)이 없으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서성(徐盛)은 이 일 때문에 장흠이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여겼다. 건안 22년(217년), 조조(曹操)가 유수를 공격하자 여몽(呂蒙)과 함께 손권 군의 총 지휘를 맡았으며 서성이 옛 일 때문에 자신에게 해를 입히리라고 여겼으나 오히려 항상 서성이 잘 했다고 칭찬(稱讚)하여 서성에게 마음으로 복종을 받았으며 또 사람들에게 이 일로 칭찬을 받았다. 손권에게 그 이유에 대한 질문(質問)을 받았고 개인적인 원한(怨恨)을 앞세워 천거(薦擧)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답하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

건안 24년(219년), 관우(關羽)를 공격하여 형주(荊州)를 공략한 후 귀환 도중 병사(病死)하였다. 손권은 장흠의 죽음을 슬퍼하고, 무호의 백성 2백 호와 논 2백경을 장흠(蔣欽)의 처자에게 하사(下賜)했다.

여몽(呂蒙)과 함께 손권에게 학문(學問)의 필요성을 듣고 여몽과 함께 면학(勉學)에 힘썼다. 훗날, 손권은 여몽과 장흠(蔣欽)을 칭찬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읽기에 힘써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숭상(崇尙)하여 마땅히 행할 바를 하니 국사(國士)가 되었다고 했다.

삼국지연의 속 장흠
주태(周泰)와 함께 해적(海賊)으로 등장하였다. 195년, 손책(孫策)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하였을 때 주태와 함께 장영(張英)을 물리치고 손책의 부하가 되었다.

208년, 주유(周瑜)의 지휘 하에서 적벽 대전, 남군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219년에는 관우(關羽)를 공격해 승리하였고 관우(關羽)에게 항복을 권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죽음은 이릉 대전(夷陵大戰) 직전에 죽었다고 언급이 되어있다.

주태전(周泰傳)에 따르면 주태는 장흠(蔣欽)과 함께 손책(孫策)을 섬겼다. 현대의 유명세(有名稅)와는 달리 장흠이 동료 주태보다 출세는 빠른 듯하다.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지할 때부터 손책의 측근(側近)이 되었다.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하자 병사가 주어졌고 손책이 3군과 예장을 정벌(征伐)할 때 종군했다.

3현의 현장을 역임하고 도적떼를 토벌(討伐)하고 승진했다. 회계의 도적 여합(呂合)과 진랑(秦狼)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흠(蔣欽)이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여 사로잡았다. 하제가 이현(黟縣)의 도적떼를 토벌하자 장흠도 병사 1만 명을 감독(監督)하여 하제와 협력하여 도적떼를 토벌했다. 이렇게 대부분의 기록이 도적 토벌에 대한 것으로 이로 인해 꾸준히 승진(昇進)했다.

"여몽전(呂蒙傳)"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江表傳)'에 따르면 손권의 권유로 여몽과 함께 학식을 쌓는데 주력(主力)했다. 손권은 학업에 힘쓴 여몽과 장흠을 칭찬했다. 하지만 장흠(蔣欽)은 괄목상대(刮目相對)로 워낙 임팩트가 큰 여몽에게 묻히고 말았다.

2차 합비 공방전(合肥攻防戰)에 종군했는데 위나라의 장수 장료(張遼)가 나룻가 북쪽에서 손권을 습격하자 장흠(蔣欽)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이 공으로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유수독(濡須督)이 되었다. 이후 도읍으로 소환되어 소송의 사무를 담당(擔當)하게 되었다.

어느 날 손권이 장흠의 집에 들렀는데 장흠(蔣欽)의 모친은 장막으로 이불을 하고 처첩들은 베로 치마를 해 입고 있었다. 장흠의 검약(儉約)에 놀란 손권은 장흠의 모친(母親)을 위해 비단으로 이불을 해드리고 장막(帳幕)을 바꾸게 했으며 처첩들의 의복은 모두 다 수를 놓은 비단으로 하게 하였다.

장흠이 선성(宣城)에 주둔하면서 예장의 도적을 토벌(討伐)한 적이 있었다. 장흠의 부재중에 무호(蕪瑚)의 현령인 서성이 장흠(蔣欽)이 주둔한 군의 관리를 붙잡아와 관리의 죄를 물어 참수(斬首)하자고 표를 올렸으나 손권(孫權)은 장흠이 멀리 나가 있다 하여 허락(許諾)하지 않았다. 이 사건 때문에 서성(徐盛)과 장흠은 사이가 나빠졌다.

조조군과 싸우는 유수구 전투에서 장흠(蔣欽)은 여몽과 함께 여러 군대를 가지고서 지휘하였다. 서성(徐盛)은 항상 장흠을 두려워했지만 장흠은 매번 서성의 좋은 점을 칭찬(稱讚)하였다. 서성은 장흠에게 감사(感謝)해했고 사람들도 장흠을 찬양했다. '강표전(江表傳)'에 따르면 손권(孫權)은 장흠에게 그 이유를 듣고 그의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는 태도에 감탄(感歎)했다.

번성 공방전(樊城攻防戰)에서 손권이 관우를 공격할 때 장흠(蔣欽)은 수군을 감독하여 면수로 들어갔다가 귀환(歸還)하는 길에서 병이 나서 죽었다. 손권(孫權)은 소복을 입고 슬퍼했고 장흠의 처자에게 주민과 땅을 주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원래 주태와 장흠(蔣欽)은 수적이었지만 손책이 거병하자 장영의 진채(陣寨)를 습격할 때 불을 지르며 손책군에 합류한다. 처음엔 세트 메뉴의 등장인가 싶었다. 그런데 주태(周泰)가 손권을 구해내어 인지도를 확 높여갈 때 장흠은 진횡을 참한게 다다.

적벽대전(赤壁大戰)에도 참가하였고 남군 공방전에서도 선봉(先鋒)을 섰다가 조인에게 발리자 주유(周瑜)에게 죽을 뻔했다. 유비가 손부인과의 혼례로 동오에 왔을 때 주태와 장흠(蔣欽)은 돌아가는 유비(劉備)와 손부인을 추격(追擊)하고 그들 부부가 따르지 않을 경우 부부를 베어도 좋다고 명령(命令)을 받는다.

후에 번성 공방전에도 참가(參加)하였다가 관우(關羽)에게 순식간에 일기토로 털리고 퇴각한다. 이릉대전 때는 갑자기 장흠(蔣欽)은 이미 죽어있다는 말이 나온다. 세트 메뉴 주태랑 다르게 딱히 존재감(存在感)은 없이 고만고만하게 나오는 수준이다.

관직은 탕구장군(蕩寇將軍)에 올랐다. 주태와 함께 손책(孫策)에게 넘어가 부하가 되었는데 무예가 과인(過人)하고 특히 수군을 잘 다스렸다. 남군진공엔 선봉을 맡아 실패(失敗)하기도 했으나 관우 정벌전에서는 수군을 잘 통솔(統率)해 관우를 포위했다. 후일 수군을 이끌고 면환(沔還)으로 진공하다가 죽는다.

장흠(蔣欽)은 오의 장수이며 자는 공혁(公奕)이고 수춘(壽春) 사람이다. 손책, 손권의 2대를 섬긴 장수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여몽(呂蒙)과 함께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후에 관우(關羽)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손권 막하의 장수(將帥)이고 구강(九江) 수춘 사람으로 자는 공혁이다. 난세(亂世)를 당하여 손책(孫策)이 유요를 칠 때 도와주고 그의 막하(幕下)에 들어 벌부 사마로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웠다. 수군을 통솔(統率)하는 데 뛰어나 벼슬이 탕구 장군에 이르렀으며 유비(劉備)가 손부인을 데리고 가는 행차를 추격하다 실패(失敗)한 일도 있으나 그 뒤 병(病)을 얻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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