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애(鄧艾, ? ~ 264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군(將軍)이며 자는 사재(士載)로 의양군(義陽郡) 극양현(棘陽縣) 사람이다.
생애
생애 전반기 : 등애(鄧艾)는 부모를 일찍 잃고 여남(汝南)에서 송아지를 길렀다. 지형을 살피고 그림을 그리면서 군사작전에 적합(適合)한지를 연구하기를 좋아했으나 말더듬이여서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이후 상계리(上計吏)를 지낼 때 사마의(司馬懿)를 만나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이후 수춘(壽春)을 시찰하던 등애(鄧艾)는 운하를 통해 물을 끌어들일 구상(構想)을 하고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사마의에게 바쳤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운하가 완성된 후 수해(水害)가 줄고 군사들과 식량을 보내기가 편리해졌다.
조모(曹髦)가 등극한 후 방성정후(方城亭侯)에 봉해졌다. 251년에는 조정에 글을 올려 남흉노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255년 관구검(毌丘倹)이 문흠(文欽)과 함께 반 사마씨 봉기를 일으키자 당시 연주자사였던 등애(鄧艾)는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낙가성(樂嘉城)을 점거하여 문흠을 유인했다.
문흠은 자신의 군사가 더 많다고 여기고 낙가성으로 쳐들어왔으나 이미 사마사(司馬師)의 대군이 당도해 있었기에 끝내 패주(敗走)했다. 등애(鄧艾)는 문흠을 끝까지 추격하여 오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반 사마씨 봉기가 진압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안서장군(安西將軍)을 대행하고 방성향후(方城鄕侯)가 되었다.
북벌 방어
249년 강유(姜維)가 국산(麴山)에 성을 쌍고 구안(句安)과 이흠(李歆)에게 지키게 하자 등애(鄧艾)는 곽회(郭淮)의 지시대로 성 부근의 물줄기를 끊어 성 안의 촉군이 항복(降伏)하게 만들었다.
강유는 요화(廖化)를 보내 등애(鄧艾)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조성(洮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등애가 먼저 조성에 도착해 강유(姜維)가 이끈 촉군을 무찔렀다. 이 공으로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임명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255년 강유(姜維)가 왕경(王經)을 대패시키고 적도(狄道)를 포위하자 재빨리 적도로 이동하여 포위가 풀어지게 한 공으로 안서장군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다시 쳐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등애(鄧艾)는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가 얼마 후 쳐들어온 강유를 상대로 단곡(段谷)에서 승리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등애를 등후(鄧侯)로 봉하고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를 겸하게 했다.
이후 강유(姜維)는 257년과 262년에도 쳐들어왔으나 등애(鄧艾)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촉나라 정벌
263년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이었던 등애는 사마소(司馬昭)가 촉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찬성(贊成)하지 않았으나 정벌이 확정된 후 결국 참전하게 되었다. 등애(鄧艾)는 천수태수 왕기, 농서태수 견홍, 금성태수 양흔 등을 거느리고 정면에서 강유를 공격하고 제갈서(諸葛緖)는 강유의 퇴로를 끊었다. 등애는 강유를 격파(擊破)했으나 제갈서가 강유의 계책에 속아 강유가 검각(劍閣)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편 주력 10만을 이끌고 있는 종회가 검각에서 강유의 강력한 저항(抵抗)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자 등애는 촉나라의 후방을 위협하여 강유 군을 물리고 종회의 진군 통로를 열어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갈서(諸葛緖)와 함께 음평(陰平) 길을 통해 성도를 직접 위협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갈서가 응하지 않고 종회에게로 가 등애(鄧艾)는 홀로 음평 길로 나아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험준한 지역 7백여 리를 거쳐 강유(江由)에 도착했다.
강유를 지키던 촉나라의 장수 마막(馬邈)은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위군이 나타나자 즉각 항복하였다. 제갈첨(諸葛瞻)이 면죽관(綿竹關)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등애(鄧艾)는 장수들을 독려(督勵)하여 면죽관을 점령하고 제갈첨 부자와 장준(張遵) 등을 죽였다.
등애가 성도로 진군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유선(劉禪)은 초주(譙周)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몸을 묶고 등애(鄧艾)의 진영으로 찾아가 항복했다. 이로써 촉나라는 멸망(滅亡)했으며 조정에서는 등애를 태위(太尉)로 삼고 식읍 2만 호를 내렸다.
등애(鄧艾)는 장사들을 조사하여 약탈(掠奪)하는 것이 없게 하고 항복하는 자를 받아들이고 구업(九業)을 회복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아울러 사마소(司馬昭)에게 글을 올려 유선을 우대하고 오나라를 정벌(征伐)할 방안을 건의했다.
사마소가 선뜻 받아들이지 않자 재차 글을 올려 오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力說)했다. 그러나 등애(鄧艾)는 자신의 전공을 뽐내고 촉한(蜀漢)의 사대부들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자못 자랑하였으며 자신을 강유의 위에 두었으므로 식견(識見)있는 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죽음
종회는 부하장수 위관(衛瓘), 호열(胡烈) 등과 함께 등애(鄧艾)를 모함하고 등애의 글을 가로채 불손한 내용으로 바꿔 보냈다. 결국 등애를 의심(疑心)하게 된 사마소는 264년 1월 등애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종회는 위관을 보내 등애를 잡아들이게 했다. 등애는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아들 등충(鄧忠)과 함께 위관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함거(檻車)에 갇혔다.
종회가 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다 죽자 등애(鄧艾)의 부하들은 함거를 부수고 등애를 구출(救出)했다. 위관은 정촉의 공을 독차지하려 했고 자신이 종회와 함께 등애를 모함(謀陷)한 것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호군 전속(田續)을 보내 등애 부자를 죽였다.
원래 전속은 강유(江由)에 왔을 때 진격하라는 명령(命令)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에 등애(鄧艾)가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 위관은 전속에게 옛 일을 설욕(雪辱)할 수 있다고 부추겨 끝내 등애를 죽게 한 것이다.
273년 의랑(議郞) 단작(段灼)과 옛 촉나라의 신하였던 번건(樊建)이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에게 등애의 억울(抑鬱)함을 호소하여 등애의 맏손자 등랑(鄧郞)이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
평가
사마의(司馬懿)의 눈에 들어 외정, 내정 통틀어 후반기 최고의 공업(功業)을 쌓은 인물이지만 자기관리의 부족으로 숙청(肅淸)되고 말았던 인물이다.
사후, 단곡 전투의 공마저도 사마소(司馬昭)가 가로채 진왕에 올라갈 때 써먹었다. 그것도 '단곡(段谷)의 싸움에서 기회를 타서 크게 이겼으니 장수(將帥)를 참하고 깃발을 뽑아 죽인 적군의 숫자를 만 단위로 헤아렸다.' 새빨간 거짓말을 해가면서 뻥튀기 시킨 것이다. 물론 그 공을 세운 게 진짜 누구인지는 당연히 전혀 언급(言及)되지 않는다. 등애(鄧艾)는 거의 준역적 취급되었다. 원래 만 명 타령은 고귀향공(高貴鄕公)의 조서에서 촉군을 죽이거나 사로잡힌 게 만 명이라면서 '이 좋은 날 술을 내리니 내 맘이라고 생각하고 풍악을 울려라!' 라는 식으로 조모가 신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부풀린 조서(詔書)를 내린 거였는데 정작 가장 큰 공로자인 등애 본인의 본전에서는 조환이 직접 등애 개인에게 내린 조서에 '촉장 10명에 천여 급의 목을 참수(斬首)했으니 상을 받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마염(司馬炎) 시대인 265년, 사마염은 등애(鄧艾)의 죄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잡으러 가자 부하들을 물리고 순순히 잡혀 준 것으로 보아 다른 놈들보다 나은 구석이 있다며 죄를 묻고 추방(追放)시킨 등애의 일족들을 사면해주었다. 그리고 2년 뒤 267년 단작이 사마염에게 등애를 신원(伸冤)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후 여러 해 후에 사마염은 "나도 걔네 일족들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었음.." 하며 받아들이긴 하는데 삼국지 위지 등애전에서는 저 사이에 시간차가 좀 있다. 또 번건이 사마염에게 상소(上訴)를 올려 등애의 무죄를 주장하고 반역죄(反逆罪)로 처벌된 것을 풀어달라고 요청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반역죄로 처벌(處罰)된 죄인을 무죄로 돌리는 일은 위정자(爲政者)의 실수를 시인하는 것으로 상소를 올리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애초에 반역죄를 면죄하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마염은 등애(鄧艾)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그의 장손 등랑(鄧郞)을 낭중에 봉했다. 번건은 등애에 의해 멸망한 촉한의 관료(官僚)였는데도 그런 건의를 했다는 점이 이채(異彩)롭다. 하지만 똑같이 촉한 출신인 진수는 등애의 열전을 진짜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들과 묶어서 기록(記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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