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曹仁, 168년 ~ 223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장군(將軍)으로 자는 자효(子孝)이며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영천태수(潁川太守) 조포(曹褒)의 손자이자 장수교위(長水校尉) 조치(曹熾)의 아들이며 조조(曹操)의 사촌동생이다.
일생
궁술, 마술, 수렵을 좋아해서 190년에 조조(曹操)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천 명의 군사를 거느려서 조조의 부하로 들어왔다. 그 이후에 조조 아래에서 행봉교위(厲鋒校尉)로서 대도겸전, 대원술전, 관도전투(官渡戰鬪) 등에서 활약한다.
209년의 남군 공방전(攻防戰)에서는 오의 주유(周瑜)가 인솔하는 6천기의 군대와 싸워서 궁지(窮地)에 빠진 부장 우금(牛金)을 구했다. 이후에도 마초(馬超) 토벌전에 따른다.
조조(曹操)의 종제로 무예백반으로 통하였으며 궁술(弓術)과 말타기에 능했다. 적벽의 싸움 후에는 형주(荊州)를 수비했다. 여러 차례 정벌에서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조비가 제위에 올랐을 때는 대사마(大司馬)를 지냈다. 진후(陳侯)에 책봉되었고 시호는 충(忠)이다. 부하를 다루고 승리로 이끄는 모습은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다'라고 진교가 평한 인물(人物)이다.
조조의 종제요, 수하의 대장이다. 자는 자효(子孝)이며 조조가 처음 동탁(董卓)을 치려고 의병(義兵)을 일으켰을 때 이미 천명 부하를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무용이 절륜(絶倫)하여 적벽 대전 후 남군(南郡)을 지켰을 때는 조조가 남겨 놓은 계교로 주유(周瑜)를 크게 파하고 부상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마초(馬超)의 장안(長安) 침공 때는 신중하게 용병(用兵)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밖에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전공(戰功)을 세우고 대장으로서는 드물게 와석종신(臥席終身)하였다.
조조의 사촌동생으로 젊은 시절부터 궁술과 마술, 수렵(狩獵)을 좋아했다. 조조와 함께 동탁(董卓) 토벌에 나서고 후일 장수와의 전투에서나 원소(袁紹)와 관도 전투에서 대치할 때에도 사자처럼 맹활약(猛活躍)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형주를 공략할 때 행정남장군에 임명되어 강릉에서 오의 주유(周瑜)와 싸웠는데 부하 우금 이하 3백 명의 병사가 수천의 적병에게 포위(包圍)된 것을 보고 직속 정예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보기 좋게 구출(救出)한다. 귀환(歸還)하자 성에 있었던 진교 등이 '장군은 참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분이시다.'고 탄성(歎聲)했다고 한다.
조인은 어린 시절에는 성격(性格)이 거칠었으나 성장 후 무장이 되자 법률(法律)을 엄격히 지키고 남의 모범(模範)이 되었다. 대장군의 지위에 올라서는 임영 합비에 주둔하여 오나라의 침략(侵略)에 대비했다. 나중에 대사마로 승진(昇進)했으나 223년에 사망했다.
218년에 과도(過度)한 군대 일이 원인으로 관우(關羽)와 내통 해서 모반(謀反)을 일으킨 완의 호족(胡族)의 후음·위개 등을 방덕(龐德)과 함께 토벌 해서 남양태수·동리곤과 합류했다. 다음해 219년 정월에 완성을 함락(陷落) 시키고 후음 등을 즉각 처형(處刑)했다.
그 이후에는 번성을 거점(據點)으로 사용하고 관우와의 형주 쟁탈전에서는 유비(劉備)의 원군 도착까지 적군의 맹공(猛攻)을 막는 등 많은 공적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도정후(都亭侯)에서 안평후(安平侯)로 승격했다.
관우가 오의 군대에 의해 사망(死亡)하고 220년 조조가 사망하면서 그 기세를 타서 오에서는 진소가 양양을 빼앗았다. 조인은 조서(詔書)를 받아서 서황(徐晃) 등과 함께 진소를 무찔러서 양양을 탈환(奪還)했다.
젊은 시절에는 꽤 난폭자(亂暴者)였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소외(疏外)당하고 상속권을 아우인 조순(曹純)에게 빼앗기는 등 불운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조조 막하에 들어가서 무장으로서 과거의 행위를 반성(反省)하고 성장한 다음은 엄격하게 법을 준수해서 항상 법과 대조(對照)하고 행동을 행하는 등 위나라의 여러 장군의 견본(見本)이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또한 거기장군(車騎将軍)·도독형(都督荊)·양주(揚州)와 익주제군사(益州諸軍事)를 역임했고 한층 더 올라가 진후(陳侯)에 영봉 되었다.
1. 조인은 어려서부터 말타기, 활쏘기, 사냥에 능했고 그 뒤 호걸(豪傑)들이 봉기(蜂起)하자 조인 역시 천여 명을 모아 회수와 사수 사이에서 활약(活躍)하다 조조 밑으로 들어갔다.
2. 태조(曹操)는 조인의 용략(勇略)을 높이 여겼으므로 의랑(議郞)으로써 기병을 지휘하게 했는데 조조가 원술을 격파(擊破)할 때 앞장서 수많은 적군을 참획(斬獲)했다.
3. 서주 정벌전- 도겸의 장수 여유를 공격(攻擊)해 격파하였다. 팽성에서 도겸군을 대파(大破)하였으며 도겸이 구원군을 보내자 조인이 이를 무찌른다.
4. 여포 정벌전- 조조가 여포를 정벌(征伐)할 때 조인은 구양을 공격해 함락(陷落)하고 여포의 장수 유하를 사로잡았다.
5. 장수 정벌전- 장수에게 추격당할 때 심히 위태(危殆)로운 상황이라 사졸들이 사기를 잃자 조인이 이를 격려하며 분전(奮戰)하여 장수의 추격군을 무찔렀다. 이에 조조가 조인을 장하게 여긴다.
6.원소 정벌전 (관도대치)- 우금과는 별도로 휴고를 공격하여 참수(斬首)하였고 여남의 황건 유벽이 원소(袁紹)와 호응하여 유비와 함께 허도를 공격하게 했을 때 기병을 이끌고 유비(劉備)를 격파하였다. 원소가 장수 한순을 보내자 조인이 계략산에서 한순을 공격해 격파하였고 이로 인해 원소는 군사를 나누어 출진(出陣)하지 못했다.
7. 반란군 참살- 소백, 전은이 모반(謀反)을 일으키자 군을 일으켜 토벌하고 후음이 반란(反亂)을 일으키자 역시 후음을 공격하여 붙잡아 참수(斬首)한다. 조인이 거기장군에 오른 후 정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역시 토벌 후 참수한다.
8. 조조가 적벽전(赤壁戰)에서 패한 뒤 조인, 서황에겐 강릉을 지키게 하고 악진에겐 양양을 지키게 하였는데 유비, 손권(孫權)은 강릉을 포위하고 관우가 북쪽길을 끊으면서 조인은 고립(孤立)되었다.
이때 오의 주유가 우금을 포위하여 우금(于禁)이 위태로워지게 되자 조인이 이를 보고 분노(憤怒)해 출진하려 하였다. 이에 진교가 "적의 군사는 흉성(凶盛)하여 당해낼 수 없고 설령 수백 명을 버린다 한 들 큰 손해(損害)가 아닌데 어찌 장군께서 몸소 가시려 하십니까" 라며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휘하의 정예병 수십기를 이끌고 우금을 구출(救出)하러 나섰다. 해자를 뛰어넘어 적의 군영으로 돌진해 들어가 우금을 구해내었고 남은 군사들이 빠져나오지 못하자 다시 뚫고 들어가 구해내었으며 그 모습에 적군이 추격을 단념(斷念)하였다. 이를 보고 진교는 조인에게 '장군께선 실로 천인(天人)!!' 이라며 감탄해 했다.
9. 관우와 대치하며 수성(守城)하지만 한수가 범람(氾濫)하며 조인과 우금의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고 때를 놓치기 않고 공격해온 관우(關羽)에게 우금이 생포당하고 방덕이 참살(斬殺) 당한다. 불리한 상황(狀況)에서 조인은 성을 버리고 튀려고 했으나 만총의 진언을 받아들여 서황의 구원병이 올 때까지 수성하며 관우의 포위(包圍)를 버텨낸다.
10. 유수전투 때 허보를 흘려 오군을 흩어지게 한 것까진 좋았으나 조인의 방심을 역이용한 오의 장수 주환의 공성계(空城計)에 크게 당하여 패배(敗北)하였다. 그간 세운 굵직한 전공에 너무 자신감이 충만(充滿)해있었던 조인을 우습게 보던 주환에게 크게 한방 먹게 된다.
말년인 조비(文帝) 때의 시대에는 합비(合肥)에서 오군과 대치해서 대장군(大將軍), 그 다음에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다. 222년,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인솔해서 유수에 진군(進軍)했다. 223년 3월, 중주공략의 의도를 숨겨 다른 지점을 공격한다고 선전하는 것으로 오의 유수독(濡須督)이었던 주환(朱桓)을 속여서 오군을 분산(分散)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주환이 자신의 군대를 약하도록 보이게 만들어서 그것에 속아 패배(敗北)했다.
223년(황초 4년) 3월 19일에 55세에 병으로 죽어서 충후(忠侯)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위(魏)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인(曹仁)이 최고의 명장(名將)이라 평가받았고 장료(張遼)가 조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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